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96화 (96/201)

〈 96화 〉 변화 (10)

* * *

#19

“너, 이거 왜 이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루비아의 눈길은 애꿎은 허공만 쓸고 있었다. 갈 곳 잃은 시선이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이윽고 축 늘어진다.

치부를 들켰다는 듯 불그스름해진 루비아의 얼굴.

얕게 떨리던 루비아의 연분홍빛 입술은 변명 아닌 변명을 급조해서 토해내기에 이른다.

“버, 버릇 들었나봐. 나도 모르게 그만……”

“너 이런 버릇 없었잖아.”

“……”

어려서부터 루비아가 손톱 깨무는 걸 멈출 수 없었다면, 지금 상황도 아예 납득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잖는가.

처음 프론티어에서 루비아를 보았을 땐 그럭저럭 관리가 잘 되어 있던 손톱이다. 말끔하게 정리된 예쁜 손톱.

그런데 어느새부턴가 조금씩 형태가 뭉개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피딱지나 살갗이 약간 보일 정도로 울퉁불퉁한 모양새가 되었다.

“나도 그냥 넘어가려고 했어. 네 말대로 그냥 버릇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해지면 큰 문제가 생기지. 이건 상처잖아. 왜 이런 걸 계속 놔두고 있는 거야.”

“……”

날이 갈수록 하나씩 늘어났다. 엄지, 검지, 중지, 약지…… 물어뜯고 물어뜯어서, 결국 더 이상 뜯을 손톱도 남지 않게 되면 다음 손톱으로 넘어가는 식이다. 일종의 강박에 가까웠다.

자신의 손톱을 피날 때까지 물어뜯는 루비아의 모습을 찬찬히 떠올려본다.

그건 자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좋지 못한 버릇을 가지고 있던 애도 아니었거니와, 최근 루비아의 모습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면—— 내게 말하지 못한 다른 고민이 있을 거라고, 분명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고, 고쳐볼게. 진짜 버릇인가봐. 걱정해줘서 고마워. 고마운데……”

“고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내가 죽을 듯 신경이 쓰이는 건 대체 왜 이런 버릇이 들었는가, 야.”

“……”

“아무 이유 없이 이 정도로 물어뜯진 않았을 거 아냐. 어쩌다 이런 거야? 최근 가장 심해지고 있는 것 같은데.”

“……”

루비아는 내게 잡힌 손목을 빼려고 힘을 주다가, 결국 안 된다는 걸 알았는지 내 눈만 계속해서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루비아는 감정이 겉으로 티가 잘 나는 편이다. 이렇게 날 피하려 한다는 건 찔리는 구석이 있단 얘기고. 그건 아마도 루비아에게 있어 상당히 민감한 문제일 가능성이 다분했다.

억지로 얘기를 듣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루비아는 남을 걱정시키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웬만해선 스스로 입을 열려 들지 않는다. 정말 힘들고 힘들어서 죽을 것 같을 때 비로소 한마디를 꺼내는 사람이다.

지금은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닌 듯했으나, 분명 내가 모르는 곳에서 큰일이 벌어지고 있음은 틀림없었다.

“벼, 별거 아냐. 심한 것도 아니고……”

“안 심하긴.”

나는 내가 붙들고 선 루비아의 손목을 유심히 내려다보다가, 그 끝의 중지 손가락을 살짝 건드려 보았다.

“아얏­.”

“아프잖아. 거봐.”

루비아의 인상이 팍 찡그려졌다. 살짝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반응이 올 정도면 심각한 거 아닌가. 루비아는 할 말이 없는지 고개를 푹 숙였고, 내 얼굴은 자연스레 수심이 깊어졌다.

오두막에서의 대화 뒤로 조금은 나아졌나 싶었더니. 이건 또 다른 문제인 것 같았다.

다른 친구였다면 내가 심각성을 잘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누구도 아닌 루비아였다. 루비아는, 내가 잘 안다. 얘는 이러는 게 전혀 평범하지 않은 녀석이었다. 거기엔 남한테 함부로 말 못 할 이유가 있을 거다.

뮤에겐 트라우마가 있다. 뮤도 내게 감추려는 것을 결국 말하지 못했다. 억지로 말하게 하니까, 고장 난 것처럼 무너져 버렸다.

그렇다면 루비아는 뭘까.

무엇이기에……

‘……그건 아닐 거야.’

잠깐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고 있던 내가, 밝은 햇살 아래 드러난 루비아의 손을 바라보면서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널 혼내려는 게 아냐. 걱정하고 있는 거지.”

손톱을 깨문다는 건, 불안함 혹은 긴장을 줄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되는 행동이다. 루비아는 애초부터 그런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루비아도 사람인 만큼 가끔 긴장하거나 불안에 떨기도 하지만, 이 정도로 손톱을 깨물진 않았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을 뿐이지.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친구잖아. 고민이 있다면 말해줘.”

“……”

내 말에 루비아가 홀린 듯 머리를 위로 올린다.

녹빛 눈동자와 시선이 교차했다.

작게 벌려진 입술에선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고, 눈동자는 비에 젖은 어린아이처럼 몸을 얕게 떨다가 결국 제자리로 돌아갔다. 애꿎은 땅바닥만 내려다보면서 루비아가 별안간 작은 미소를 그린다.

“말하면.”

“……?”

“말하면, 뭐가 바뀔까……?”

역시, 고민이 있는 게 맞았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잠시.

지금은 그걸 루비아한테 물어봤자 별 소용이 없을 거란 생각도 했다.오히려 상황이 악화될 뿐일지도 모르겠다.

왠지, 억지로 고민을 내게 털어놨다간 루비아가 스스로 무너질 것 같았다. 일종의 직감이었다.

“…말하기 전까진 모르지.”

난 모른다. 루비아가 왜 이러는지. 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것인지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모르고 살 터였다.

이것도 혹시……

내 잃어버린 기억에 관련되어 있는 건가?

그거라면 오두막에서 루비아가 내게 말한 내용으로 충분했을 텐데.

내가 루비아를 구했고, 그래서.

——날 사랑하는 것 같다고 해서.

“……”

나는 루비아의 대답을 기다리는 척 입을 다물었다.

찰나의 정적.

아침 새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까마득한 침묵의 시간이 영원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그게 아닐 텐데.

절대로 아닐 텐데.

만일 관련이 있다면 그것밖에 없는 듯해서,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을 부정하듯 속으로 고개를 내젓길 반복하고 있었다.

서로 없었던 일로 하기로 했고, 난 루비아가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루비아가 그래 버리면, 우린 더 이상 친구가 아니게 될 테니까. 그건 내가 결코 바라지 않는 미래였다.

붙잡은 건 나인데, 이만 놓고 싶어졌다.

힘이 조금 풀렸다는 걸 느꼈는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는 내 말에, 루비아는.

“……그럼,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

아쉬운 듯, 허망한 듯, 씁쓸한 듯, 기쁜 듯, 슬픈 듯……. 감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얼굴을 하고선, 결국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느 대답도 부언도 하지 못했다.

루비아의 얼굴에 비친 감정은 전혀 알 수 없었고, 내 자신의 얼굴은 아마 추측 가능한 형태로 변질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둔한 루비아도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날 미워해도 돼. 에지오.”

어느새 루비아의 손목은 자유로워져 있었다.

“그래도, 나는 너를 미워하지 못할 테니까.”

자기 손으로 내 손을 조심히 감싸고 있더니, 되었다는 듯 사르르 손을 놓고선 다시금 뒷짐을 진 채 한 발자국 옆으로 옮긴다.

……타박, 타박.

승강기 앞으로 쭉 이어진 길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나를 지나쳐, 루비아는 볼일이 있을 학생회관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중에 보자, 에지오.”

운동, 열심히 해.

퍼뜩 등을 돌려 뒤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걸음을 옮기진 못했기에. 자리에 멈춘 나와 루비아 사이의 거리는 갈수록 멀어져만 갔다.

#20

수요일의 공강 시간.

뮤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팔락, 팔락.

에지오가 곁에 없는 관계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진 않았지만, 분명 신이 나 있었다. 누가 봐도 즐거운 상태라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을 만큼. 입학 초기 뮤의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놀라 까무러칠 게 당연할지 모르는 변화였다.

……물론 아예 미래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당장 에지오와 몇 마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던 게 정말 컸다.

아예 나락까지 치달았을 만큼 밑바닥에 처박혀 있던 상황이었으니, 아주 조금의 변화에도 뮤는 더없이 크게 반응하고 만다.

오랜만에 옛 추억을 들먹이며 에지오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뿐이랴. 에지오 쪽에서 먼저 앞으로도 많이 얘기하자고 했다.

온통 즐거운 마음뿐이었다. 이런 풍족한 감정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가능하면 즐길 수 있을 만큼 즐기고 싶었다.

나중에는,

그러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 뒤로 쳐다보기 힘들었던 책도 이렇게 읽고 있다. 조용한 도서관에서 읽지 않고 굳이 가지고 나와 햇볕을 맞으며 페이지를 넘긴다.

운치 있고, 분위기 좋고. 뮤는 원래 이런 감성을 좀 좋아했다. 그 때문에 로르센 아카데미에서도 뒤뜰 계단을 그들만의 장소로 삼지 않았는가.

지나가던 에픽 클래스 학생들 몇몇이 벤치에서 책을 읽는 뮤를 힐긋거렸지만, 정작 다가오지는 않았다. 원체 딱딱하고 냉정하며 낯선 사람에겐 얄짤없단 인식이 여기저기에 퍼져 있었던 까닭이다.

그건 뮤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혼자만의 시간. 아주 좋았다. 에픽 클래스 부지의 경관은 매우 잘 조성되어 있는 편이라, 유명 휴양지에도 비견될 정도였다.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어보면 봐도봐도 아름다운 풍경에 자연히 감탄하게 된다. 아무튼 이런 시간이 좋았다.

“저기, 안녕!”

“……”

방해자만 없다면, 말이다.

뮤는 책을 덮고 자리를 뜨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왜 자리를 피해야 하지? 이 녀석을 쫓아내면 되는 거 아닌가?

“…하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짧게 내쉬었을 때.

“뭐 하고 있었…… 책 읽고 있었구나!”

뮤가 한숨을 내쉬든 말든.

싱글벙글한 표정의 사샤 엘네가 허락도 없이 폴짝, 하면서 뮤의 옆에 엉덩이를 깔고 착석했다.

“무슨 책이야? 사샤는 책 많이 안 읽어서 몰라. 사실 글자도 모르는 거 많아! 어릴 땐 사샤가 안 읽고 아빠가 읽어줬거든. 근데 커서는 아빠가 없게 됐으니까, 사샤한테 책 읽어줄 사람이 없었다? 졸업하고 책 읽을 필요도 없어서 그냥 안 읽었어. 그래서 사샤는……”

방금 뭔가 굉장한 얘기가 지나간 것 같은데.

……이, 뭐라고 할지. 몹쓸 거리감. 아무런 거리낌 없는 접근. 다른 사람한테는 전혀 안 그러면서, 하필 자신한테만 이러는 게 참 어이가 없었다. 친구를 만들고 싶은 거라고 듣긴 했지만 그게 왜 자신이었을까.

접근을 밀어낸 횟수만 해도 수십 번은 가볍게 넘을 텐데. 사샤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부딪혀 왔다.

왜, 이런 곳에 쓸데없이 필사적인 거야……

뮤는 에지오의 경우가 있던 만큼 그런 면을 나쁘게 보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건 좀 얘기가 달랐다. 자기를 귀찮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자기가 원해서 선택한 게 아니라면, 더욱.

“너 내가 저번에 말하지 않았……”

“아, 맞다!”

“……?”

부스럭, 부스럭.

“과자 먹을래?”

냠, 하고 자기 입에 쿠키를 입에 물었다.

사샤가 고개를 갸웃하며 손을 내민다. 정말 어린아이 같이 작고 뽀얀 손. 거기에 쿠키가 걸려 있었다. 고소한 냄새와 한껏 바삭해 보이는 쿠키의 겉면이 뮤의 침샘을 자극한다.

……먹을 걸로 낚으려 들다니. 맛있는 쿠키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긴 했는데, 아니, 좋아하는 쪽에 가깝겠지만. 주는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니고 사샤였다. 뮤는 조용히 사샤가 내민 쿠키를 바라보았다.

사실 사샤도 기대하진 않았다.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쿠키가 부족한 거다. 앞으로 더 많은 쿠키를 뮤에게 건네줄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

공짜인데 뭐……

됐나.

뮤가 입으로 쿠키를 낚아챘다.

“!”

정말로 받아먹을 줄은 몰랐던 건지, 사샤의 물빛 눈동자가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뭐.”

“……아냐! 이히히.”

줘놓고 왜 그딴 표정을 짓느냐는 듯 뮤가 눈을 가늘게 흘기자, 사샤는 잠깐 강아지처럼 깨갱하며 몸을 움츠리더니 이윽고 해맑게 웃었다.

그 바보 같은 웃음을 바라보던 뮤가,

이내 한숨과 함께 말을 토해냈다.

“…왜 나랑 친해지고 싶은 건데, 넌?”

“…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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