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변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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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많고 많은 학생들 중에, 왜 하필 뮤인가.
물론 신입생은 고작 열다섯 명밖에 없긴 하다. 절대 많다고 볼 순 없다.
그럼에도 사샤가 그중에 뮤를 콕 찝어 친해지려 한 이유가 어딘가엔 있을 것이었다.
거기다가, 뮤 스스로도 생각하는 바 자신은 그닥 친밀감 있어 보이는 사람이 아닐진대…… 도대체 왜?
입학 당시부터 뮤라는 신입생에 대한 관심은 에픽 클래스 내부에 일파만파 퍼져 나갔으나, 막상 접근해오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렇게 예쁘단 소문을 듣고 찾아가 보면, 정말 예쁘긴 한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뮤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의도적으로 함부로 다가오지 말라고 그런 것이기도 했다. 뮤는 딱히 친구를 사귄다거나 충만한 학교생활을 즐기러 프론티어까지 온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검을 배우러 왔을 뿐이야.’
일찍이 굉장한 검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곤 아벨 라이오너가 수정구 너머로 뮤의 모습을 보았을 때, 거침없이 뮤를 에픽 클래스 입학에 추진시켰던 것이 처음의 계기였다.
뮤 역시 자신을 프론티어에 데려온 사람이 아벨이라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검술 강의에서 아벨의 이름을 듣자마자 그의 어린 외견에 구애받거나 의심하지 않고 정체를 확신한 것이었다.
아무튼 따지자면 교수라는 직책에 묶인 아벨이 개인적으로 뮤를 가르치고 싶어 입학을 추진시킨 것에 가깝지만. 어찌 되었든 뮤가 그 제안을 승낙한 건 변함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지금, 뮤의 검술은 좀 더 정교해지고 부쩍 날카로워졌다.
물론 뮤의 재능이라면 혼자 수련한다고 해도 언젠가 벽을 뚫을 날이 오겠으나, 아벨의 가르침으로 그 시기를 더욱 빠르게 앞당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나날을 보낼 생각이었다.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에지오가 나타나고, 사샤가 뮤의 곁을 쫄랑거리며 뭐든지 방해하기 전까지는.
“음, 으음, 으으으음.”
사샤는 쿠키를 우물거리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가 어른 흉내를 내는 것처럼 어울리지 않는 얼굴.
다만 사샤의 외견은 평범한 초등부 학생과 그다지 별다를 바도 없었기에 딱히 틀린 생각도 아닌 듯했다.
“…이유가 꼭 필요해?”
생각하고 생각해서 나온 대답이 그거였다.
그냥 친해지고 싶으면 친해지고 싶은 거지, 별 이유가 필요하냔 물음에 뮤는 잠시 사샤를 응시했다.
프론티어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뮤의 성격은 그날 기분 따라 행동하는 제멋대로파나, 말괄량이 아가씨에 가까웠다.
어떤 행동을 하는 데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만 없을 수도 있다.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다. 뭔가를 꼭 이루고 싶다면 그렇게 한다. 왜냐면,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갖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뮤는 어릴 적 죽음의 고배를 넘긴 뒤 그러한 성격의 범위 밖으로 벗어난 적이 잘 없었으나, 이제는 조금 자제할 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그 제멋대로인 성격 탓에 아주 크게 쓴맛을 보아서,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는 편이 더 옳았다.
“…꼭 필요하진 않지.”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샤를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 넓은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있는데. 게다가 여긴 별난 녀석들만 모이는 곳이었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딱 그 정도 생각.
사샤가 준 쿠키. 적당히 먹을 만했다. 뮤가 큐키를 대충 베어 물며 그리 툭 말을 던지자, 사샤가 화색이 돌아 해맑게 웃었다.
“그치? 사샤는 그냥 널 보자마자 친해지고 싶었다구. …근데 네 말 들어 보니까 사샤도 궁금하긴 하다. 겉보기와는 달리 일단 친해지면 재밌을 것 같아서 그랬나? 아닌가? 언니랑 엄청 닮아서? 으음 사샤도 잘 모르겠네……”
“……언니?”
사샤가 입술을 매만지며 깊이 고민하던 새, 뮤는 사샤가 은연중에 언급한 단어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까 한 말도 그렇고. 뭔가 은근 신경 쓰이는 말을 계속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민감한 주제일 수도 있었으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언니의 존재를 언급하면서도 사샤의 기색은 여전히 활기차고 밝았던 까닭이다.
“응, 아르샤 언니!”
사샤는 어느샌가 다 먹은 쿠키를 재충전했다. 봉투에서 꺼낸 새로운 쿠키를 입에 물곤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사샤보다 네 살 많았고, 항상 사샤를 잘 챙겨주고, 되게 착하고, 막, 막 먹을 것도 많이 사주고. 과자도 만들어주고. 아빠 죽고 나선 사샤한테 책도 읽어주고. 정말 진짜진짜 좋은 언니였어.”
…역시 죽은 게 맞았구나. 경우에 따라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말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샤를 보면서, 뮤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정반대잖아. 나랑 뭐가 닮았다고 그래.”
“얼굴! 얼굴이 닮았어. 머리카락 색은 다르지만.”
사샤의 언니란 사람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으니 정말 닮았는지 어쨌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뮤는 자기 손바닥만한 쿠키를 냠냠거리며 먹고 있던 사샤를 돌아보며,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을 환기시키듯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내가 너보다 한 살 아래인 거.”
“……어? 어… 맞네? 그랬네? 잊고 있었어!”
정말로 놀랐다는 듯 입을 떡 벌리며 쿠키를 놓아버리길래, 뮤가 재빠르게 그것을 낚아챘다. 굉장한 반응속도. 사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감사의 표시를 하며 웃었고, 뮤는 왠지 애 보는 느낌이 됐다며 고개를 속으로 내저었다. 언니는 무슨. 영락없는 초등부 어린애 같았다.
“그럼 사샤가 너보다 언니인 거네? 이히히, 완전 적응 안 돼. 사샤가 언니라니, 그런 거 진짜 어색하다……”
“나이만 언니지, 너 하는 짓은 완전 어린애인 거 알지? 내 앞에서 언니 행세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에 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사실인 걸 어떡해. 불만이면 좀 더 크고 오든가. 일단 눈에 보이는 것부터가 한참 어린애인데 언니 취급을 해줄 수 있겠어?”
“너무해! 사샤도 많이 먹고 일찍 자는걸!”
“근데 왜 안 커.”
“그건……!”
젖살도 아직 빠지지 않은 듯한 앳된 얼굴. 에픽 클래스 신입생 최단신을 자랑하는 미니멀한 신장. 양갈래로 묶은 머리. 비음 섞인 앵앵거리는 목소리 하며 어린애 특유의 지치지 않는 활기까지. 누가 보면 월반에 월반을 해서 프론티어에 입학한 천재 초등생인 줄 알겠다.
“사샤도 더 크고 싶은걸. 근데 못 큰단 말야.”
사샤는 침울해져선 쿠키를 우물거렸다.
“여기 사샤를 데려온 사람이 말했어. 사샤 몸의 시간은 10살에 멈춰 있다고. 그 이상으론 절대 크지 않는대. 아마 죽을 때까지 사샤는 이 모습으로 살아야 할 거라고 했어. 사샤도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 했더니, 그건 불가능하대.”
썩 신기한 이야기였다. 거짓말 같진 않아 보였다. 그 말처럼 사샤의 시간이 10살에 머물러 있다고 하면, 지금 이 모습도 납득은 간다.
하지만 납득하고 자시고 이전의 문제는.
……그런 게 가능한가?
일정 경지에 도달한 초인들은 가끔 노화를 늦추고 젊음을 오래도록 유지한단 말을 듣긴 했지만, 사샤는 초인이 아니잖는가.
게다가 초인들도 늙긴 한다. 노화의 속도가 일반인에 비해 아주 천천히 흘러갈 뿐이지.
다만 사샤는 아예 시간이 멈춰 있다고 했다. 죽을 때까지 이 모습이라니. 백 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초등생의 모습인 사샤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자 뮤는 왠지 모를 께름칙한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크고 싶어도 못 큰단 얘긴가?”
“맞아. 사샤는 저주받았댔어.”
저주는 또 뭐야.
“아직 아무도 풀 수 없는 저주래. 근데 여기 오면 풀 수 있을지도 모른대. 그래서 사샤는 여기 온 거야. 오기 싫었는데, 억지로 왔어. 그런데 와서 너를 발견한 거야. 보자마자 언니랑 엄청 닮은 사람이다! 싶었거든? 진짜 반가웠던 거 있지. 그래서.”
“아니, 저주는 무슨 얘기인데?”
“……응? 아, 그거.”
사샤가 와삭, 하고 남은 쿠키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우물우물.
……꿀꺽.
뭔가 말하려는 것 같더니, 결국 쿠키를 다 씹고 삼킬 때까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붕붕 젓는다.
사샤의 물빛 양갈래 머리가 회전하고 휘날려 뮤의 옆구리를 가볍게 스쳤다.
“이 얘기 싫어! 안 할래. 그만할 거야.”
빼액거리며 그리 말하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기 싫다는데 뭐 어쩌겠어. 궁금하긴 했지만 죽을 정도로 궁금하진 않았다. 말인즉 들어도 안 들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뮤는 여전히 사샤와 그닥 가깝게 친해질 생각이 없었으니까.
별안간 사샤가 은근히 뮤를 흘기며 중얼거렸다.
“…저주가 뭔지 궁금하지 않아?”
“얘기 안 한다며?”
“그치마안. 신경 안 쓰여?”
“안 쓰여.”
“뭐야, 그럼 왜 물어봤어!”
“그냥.”
정말 그냥이다.
저주란 건 흔한 게 아니잖는가.
무심히 앞만 바라보던 뮤에게 빼액 소리지르던 사샤가, 금세 태도가 바뀌어선 조곤히 입을 열었다.
“……사샤, 너랑 제대로 얘기해 보는 건 처음이야. 근데 진짜 재밌다. 언니랑 닮아서 그런지 막 안심도 돼. 우리 이제 친구인 거지?”
“아니?”
“어, 왜! 이 정도면 친구잖아!”
“그런 적 없어. 난 친구 사귀러 온 거 아니거든. 누구랑 친해질 생각도 없고, 너도 마찬가지야. 도서관에서 말했잖아, 난 너랑 친해질 생각 없다고.”
“내, 냉정해……”
“불만 있으면 떨어져. 난 네 언니가 아냐.”
“그, 그건 그렇지만……”
움찔거리던 사샤가 이윽고 말을 잇는다.
“…그래도 좋아. 이히히. 어떻게든 친해질래.”
“……하아.”
헤실헤실 웃던 사샤가 비비적거리며 뮤의 곁에 바짝 붙으려 한다. 뮤는 얌전히 사샤의 관자놀이를 손으로 밀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밀어내고 밀어내도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모습이 여간 귀찮기 짝이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얘기를 받아주지 말 걸 그랬나. 사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은 듯했다.
것보다 사샤를 보니.
예전 에지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그를 귀찮게 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뮤는 문득 에지오의 심정을 의도치 않게 공감하고 말았다.
‘……미안했어요, 선배.’
결국 받아주긴 했지만.
그간 얼마나 귀찮아했을지……
습관적으로 과거 회상에 들어가던 상념에서 깨어나, 뮤는 벤치에 앉은 채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
에지오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그와 얘기를 나눌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약하게 떨려온다.
예전에는 불편하고 영 껄끄러운 느낌이 강했다면, 에지오와의 관계가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느끼는 지금은.
에지오와 마주치는 순간이 기대되는 한편, 에지오와 동급생으로서 같이 할 수 있는 행동과 이벤트들에 신경이 기울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뮤는 안다.
그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정말 찰나의 순간, 행복에 불과하겠지만. 에지오가 기억을 되찾을 수도 있는 방법을 찾게 된 이상, 뮤는 제 입으로 진실을 실토할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때문에, 언젠가 반드시 깨질지 모르는 평화가 지속되길 바라면서도, 뮤는 늦은 밤 침대 위에서 잠들기 전마다 고민하곤 한다.
이게 맞는 걸까.
진실을 알았을 때, 에지오는 과연 뮤의 얼굴을 어떤 표정으로 보게 될까. 뮤가 말하려던 게 뭔지. 그것을 자기 입으로 실토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그런 것들을 전부 이해하고서, 그리고 뮤가 제 잘못을 뉘우치고 있음을 확실히 깨닫고서. 뮤를 용서하게 될까.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는.
그렇기에, 뮤는 지금의 행복을 영위할 뿐이다.
언젠가 넘어야 할 난관이 존재함을 생각 한켠에 늘 담아두고 있으면서, 이미 떠나간 남자친구에게 쉽사리 정을 떼지 못하고, 바보처럼 사랑을 갈구하는 그런 어리석은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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