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98화 (98/201)

〈 98화 〉 마법 (1)

* * *

#1

내가 어릴 때.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카데미 초등부를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에, 나와 루비아는 아직 친구가 아니었다.

다만 서로의 부모님끼리 만나기도 하고, 그들이 한자리에 모일 땐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이끌려 루비아와 독대하기도 했으나, 나는 루비아를 편하게 대할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왠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에지오, 에지오. 넌 어디서 살다 왔어?

—……

어린 시절의 루비아는 머리가 그렇게 길지 않은 모양이라, 지금의 모습과는 꽤 차이가 있었다.

어깨 끝에서 잘린 연분홍빛 중단발. 젖살 빠지지 않은 땡글땡글한 얼굴에 영롱히 빛나는 녹색 눈동자.

마을의 어른들은 귀엽고 어여쁜 여자아이의 표본인 루비아를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분명 장래에는 굉장한 미인이 될 거라나 뭐라나……

난 잘 몰랐었다. 내 눈에는 그때도 이미 굉장한 미인이었으니까.

루비아가 들으면 낯부끄러울 소리라 할지 몰라도, 루비아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런 생각을 마음 한켠에 품고 있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루비아를 좋아했었겠지.

정말,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루비아한테 첫눈에 반했던 것이었다.

당연히 어렸으니까.

좋아한다는 감정이 뭔지 정확하게는 잘 몰랐다.

그냥 다른 친구들보다 루비아와 더 얘기하고 싶었고, 어린 시절의 남자애들이 다 그렇듯 괜히 좋아하는 걸 표현하기가 썩 어려워 일부러 틱틱거리기도 하는 등 했으나, 그런 내 앞에서 루비아는 언제나 에헤헤, 하며 즐거운 듯 바보처럼 웃을 뿐이었다.

—가끔 생각하면 넌 진짜 멍청해 보여.

—머, 멍청……?

어느 기점을 계기로 루비아와 대화의 물꼬를 트었던 시기, 오늘은 딱히 특별한 일이 있지도 않았는데 같이 하교하며 헤실헤실 웃는 루비아를 보면서 그런 말을 툭 내뱉었다.

깊은 반성이 필요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던 과거의 나. 모든 일에 근심 없고, 걱정 없고, 항상 해맑은 웃음과 함께 했던 루비아를 나는 아마 이해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바보 같은 루비아. 그런 녀석이 나와 부쩍 가까워져선 나까지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려 했다. 나도 루비아 같은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그런 말을 했던 걸까.

알고 보면 루비아는 세기에 둘도 없을 천재였고, 나는 세기에 둘도 없을 둔재이자 멍청이였건만.

—아무 때나 잘 웃잖아. 웃음이 헤프다고.

웃음이 헤프다. 맞다. 루비아는 늘 웃는 상이었다. 웃기거나 재미난 일이 있으면 눈물이 찔끔 나올 때까지 아하하, 거리며 웃고, 그도 아니라면 평상시엔 늘 생글생글한 미소가 가득한 채다.이렇게 퍼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웃음이 많았다.

물론 나는 루비아의 미소를 좋아했다. 예쁜 사람이 예쁜 미소를 그리면, 보는 입장에선 싫어할 수 없는 게 당연한 일이다.그게 나를 향하는 것이라면, 더욱.

아무튼 루비아는 잘 웃었다.

—흐에에엥……

—……어, 어?

그만큼 잘 울기도 했다.

멍청해 보인다는 말 하나에 충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기 시작한 루비아와, 그 옆에서 내가 루비아를 울렸다는 사실에 어쩔 줄 몰라 했던 나. 에지오가, 에지오가 멍청하다구 했어…… 이리 중얼거리며 쪼그려 앉아 정말 서럽게 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입장에선 적잖은 죄책감이 스멀스멀 피부를 타고 기어오르는 걸 막을 도리가 없었다. 내가 루비아를 울렸다.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걸 어쩌나 싶었다. 오죽 미안했으면 가끔 병사 아저씨들이 하던 대가리 박기를 그대로 실천에 옮기려 했었겠는가.

우거진 나무 아래 오솔길 한가운데서 울음에 둑이 터진 루비아를 겨우 어르고 달래고, 나로 인해 벌어진 상황을 수습하느라 한참 진땀을 빼야 했다.

루비아는 워낙 감정의 조절이 어려운 부류였는지라, 한번 울기 시작하면 울음을 잘 멈추지 못했다. 이대로 계속 울다간 눈이 땡땡하게 부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그만 울게 해야 했는데, 거듭된 사과의 말로는 변하는 게 없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보고 들은 걸 바탕으로 루비아를 달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어린 내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을 때, 나의 부모님께선 자상하게 나를 품에 끌어안고 토닥여 주셨다.

—후으……?

그래서 그냥 루비아를 끌어안고 사과의 말과 함께 등을 토닥여 주니, 이게 대체 뭔가 싶으면서도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었다.

많이 어렸던 만큼 크게 부끄러움을 느끼진 않았지만.뭐랄까.말 그대로 이상한 기분.

아무튼 빳빳이 굳어서 그러고 있는데, 뭔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던 루비아의 울음이 거짓말처럼 점차 잦아들더니.

—에헤헤… 에지오 따뜻해.

언제 울었냐는 듯, 바보처럼 마주 엉겨오는 루비아를 보고선 역시 멍청하단 생각을 지울 순 없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루비아에 대해 차츰 알아갔다. 본래 친구란 건 쌍방의 합의하에 진전되는 관계였다.

내가 루비아를 처음 봤을 때부터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듯이, 루비아도 나를 마음에 들어 했다.

루비아는 그 인형처럼 예쁜 외모나 부드러운 성정상 많은 어른들, 또래 친구들에게 적잖은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여 있었으나, 그 곁에는 유감스럽게도 내가 있었다.

일단 나와 먼저 놀기로 약속했으면, 다른 친구들의 부름은 거절했다. 가끔 애들도 끼어서 같이 놀긴 했지만, 한 명이 술래가 되어 나머지를 잡으러 뛰다니는 놀이를 하기라도 하면, 걸음이 느린 루비아를 잡을 듯 말 듯 하며 일부러 놓쳤다. 대체로 내가 그랬다. 하더라도 다른 애들 다 잡고 맨 마지막에 루비아를 추격했다.

루비아는 내가 봐주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정말 필사적으로 총총거리며 뛰었다. 그런데, 루비아를 오래간 지켜보다 보면 가끔 충동적인 직감이 들 때가 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할 거다.

당연하게도 그리 웃으며 뛰어가다 넘어진다.

그럼 곧 있어 흐에엥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런 루비아를 내가 또 달래고. 어디 상처가 났다 싶으면 업어서 집까지 데려가고. 그러다 어린애 힘으론 무거워서 휘청거리다 언덕 위에서 엎어지고. 아픈데 왠지 어이가 없어서 웃기고. 웃기니까 웃고. 문득 시야에 담긴 저녁 하늘은 늘 반짝이며 아름다웠던 내 어린 시절의 추억들.

우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나는 그 시간들이 영원할 줄만 알았고, 만일 꿈이라면 절대 깨고 싶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 있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었음이라 자부했다.

다만 현실의 벽은 높다.

이제 와선 그게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원이었다는 걸, 나는 안다. 어쩌면 그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럴 수가…… 이 아이는 천재예요. 아버님, 어머님.

아이들에게 신기한 경험, 혹은 혹시 모를 재능을 찾게 해주겠단 취지에서 정말 간만에 초청된 외부 강사의 수업 시간.

루비아는 마법을 썼다.

호기심 많았던 루비아는 이렇게 하는 건가 싶어 그렇게 했을 뿐이고, 그건 고작 그 정도의 간단한 순서로 실현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지능의 발달이 덜 된 초등생의 수준으론 절대 불가능한 연산력과 선천적으로 굉장한 마력량, 그리고 내가 웃음이 헤픈 루비아를 보면서 항상 하던 생각인 멍청하다­ 란 표현과는 절대 맞지 않을 비범한 천재성이 요구되는 일이었다.

—정말 잠깐이긴 하지만 3위계급의 마법을 소화해냈어요. 일평생 마법을 배운 적도 없는 아이가… 어찌 이런 일이……

루비아는 천재였다.

그걸로 모든 해답에 결론이 났다.

이해는 했지만 정작 따라할 엄두도 못 냈던 내 옆자리에서, 분명히 강렬한 스파크가 터지는 걸 내 눈으로 목도했다.

루비아라면 깜짝 놀랐을 만한데, 자리에 굳어 꼼짝도 않은 채 방금의 순간을 기억하듯 멍하니 있는 것을 봤다. 일순간 총기가 어렸던 루비아의 눈은 환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던 마법이라는 기적을 처음 깨닫고, 체내의 마력 회로가 단 한 번의 격발로 인해 천천히 기동하기 시작한 그 감각을, 루비아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루비아가 날 보며 환하게 웃는 것이었다. 자기가 마법을 썼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좋아했다. 나 역시 마법을 쓴다는 게 마냥 신기했었으니까, 루비아의 웃음에 마주 웃었다. 더군다나 마법을 쓴다면 더 많은 놀거리를 찾을 수 있게 될 테니까. 참 어리고 어린 생각들 뿐이었다.

사정을 아는 마을의 어른들은 루비아의 천재성을 깨닫곤 루비아의 거처를 어찌 정할지 논의하고 토론하길 반복했지만, 결국 마을에 남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다만 루비아의 재능을 그대로 썩힐 수도 없는 노릇. 가끔 루비아를 위해 외부 강사가 초청되는 식의 특별 교육이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루비아와 놀 시간이 기록적으로 줄어든 것은 아니었으나, 가끔 마법을 배우느라 루비아를 만날 수 없을 때가 종종 생겼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집앞 마당에 나와 루비아가 했던 것을 똑같이 따라해 보았고, 손바닥 위에 아주 작은 스파크마저도 터지지 않는 것을 보며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우리 사이의 격차는 그날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이 벌어져만 갔다는 걸, 지금의 나는 알고 있었다.

#2

“일취월장입니다. 에지오 군.”

마법 전공 교수, 제펠린이 내게 한 말이다.

수요일의 전공 강의가 끝나고, 뒤의 일정이 없음을 확인한 뒤 개인적으로 나를 부른 제펠린은 교수 연구실 의자에 앉았다.

편히 있으라며 날 접대용 소파에 앉히곤 홍차와 쿠키를 가져다주기까지. 뭔데 이렇게 날 공손히 대접해주는 것인가 싶었다.

제펠린이 준비해준 차를 홀짝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듣기론 프론티어 졸업 이후에도 특정 교수 아래로 들어가 프론티어 생활을 지속하는 선배들이 꽤 있다고 들었다.

레이린 선배의 친구분 중 누군가 이르길, 그곳이 지옥길인 걸 알면서도 스스로 들어가길 자처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을 뭐라고 지칭한다 하더라.

아니다.

사실 정식 명칭 같은 건 어찌 되든 좋은 듯했다.

그냥 노예라고 부른단다.

인간의 권리를 모조리 탈취당한 인권 없는 노예…… 그것이 교수의 간택을 받은 뛰어난 학생의 말로라고 했다.

‘……아니겠지. 어. 아닐 거야.’

난 아직 1학년인데다가, 제펠린 교수가 따로 관심을 보일 만큼 엄청난 능력을 과시한 것도 아니었다.

근데 저 입가에 자리한 미소가 왜 이렇게 불안해 보일까. 나만 그렇게 생각하나.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게 된다.

……절 좋게 봐주시는 건 정말 감사한데, 진짜 부담스럽거든요. 게다가 나디엘리 때의 일도 어렴풋이 생각나고.

제펠린 교수와 사적으로 독대하는 이 시간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았다……

“학자로서 에지오 군의 능력에 관심이 생긴다 했지요? 기억하고 있습니까?”

“…네, 교수님.”

“그 기이한 능력만으로도 정말 많은 호기심이 생기는데, 에지오 군은 정말 알면 알수록 신기한 학생이군요. 여태 마학 지식에 대한 이해도는 높은데 그걸 실력이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그런가요…….”

제펠린은 진중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예.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고작 며칠 지켜봤을 뿐인데, 에지오 군의 실력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어요. 마치 그동안 모종의 이유로 꽉 막혀 있던 둑이 터진 것 같다고 해야 하나요? 이번 수업 시간에 진행된 테스트 결과를 보고 모든 판단을 마쳤습니다. 이대로라면 에지오 군이 이번 학기 내에 4위계 이상을 달성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지 모른다고요.”

“4위계……”

4위계라, 4위계……

……그게 정말 될까?

“제가 본 에지오 군이라면 가능합니다. 한편으론 교육자의 입장에서 살짝 의문도 드는군요. 이런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면 일찍이 교육받는 것으로 이미 4위계는 달성하고도 남았을 텐데…… 혹, 로르센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하셨나요?”

“그렇습니다, 교수님.”

“제가 듣기론 그 아카데미 마법부가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명문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루비아 학생이 마법부 수석 졸업생인데, 솔직히 말하면 루비아 학생보다 뛰어난 재능을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에지오 군은 그런 로르센 아카데미의 통합학부 졸업생… 아니, 자퇴생이더군요.”

“……”

“자세한 사유를 묻진 않겠습니다. 그저 순수하게 의문이 들었을 뿐입니다. 에픽 클래스의 교육 수준이 뛰어난 건 자명한 사실이나, 에지오 군의 무서운 성장 속도는 조금 의심이 들 정도라서요. 물론 이것 또한 에지오 군의 개인적 사정이 얽혀 있을 수도 있겠지요.”

“……”

에픽 클래스 교수 정도라면 잘난 체 해도 되긴 하지. 별로 그렇게 밉상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말입니다, 에지오 군.”

“네, 교수님.”

이제야 본론이 나올 것 같단 예감이 든다.

계속 내게 관심을 보이는 게 굉장히 신경 쓰이지만,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일단 묵묵히 말을 들었다.

다음 순간, 제펠린이 날 보며 입을 연다.

“이건 루비아 학생한테도 이미 한번 언질을 주었던 것인데… 제가 담당하는 서클에 가입할 생각이 있습니까?”

“……예?”

“루비아 학생과 친분이 있어 보이더군요. 아마 루비아 학생과 에지오 군은 합이 잘 맞을 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식의 권유가 들어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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