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00화 (100/201)

〈 100화 〉 마법 (3)

* * *

#5

염동력은, 생각으로 물체를 움직이는 힘이다.

“으으으으……”

그건 사용처에 따라 굉장히 편리한 능력이 될 수도, 혹은 아주 무시무시한 능력이 될 수도 있다.

멀리서 직접적으로 손을 대지 않고 물체에 특정 작용을 야기한다니. 달리 말해 염동력을 이용해 고개 한번 가볍게 까닥이거나, 손짓 한번 하는 것으로 상대방의 목을 단숨에 꺾어버린다거나­ 그런 끔찍한 살상 따위 유리에겐 벌일 생각이 추호도 없긴 했지만. 일단 어마무시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능력이다.

“끄으으응……”

마법처럼 마력을 쓰는 게 아닌 생각으로만 물체를 움직이는 힘이니만큼, 생각이 잘 따라주지 않으면 능력 발현도 힘들다.

간단한 띄우기, 던지기, 이런 쉬운 조작 같은 건 이제 숙달된 덕분에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아직 정교하고 세밀한 조작 같은 건 어렵다.

애초에 유리의 고향인 아르티나 왕국에선 유리의 특별한 능력에 대해 뭔가를 전수해줄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물론 유리가 염력을 각성했을 때부터 아르티나 국왕이 외부인의 접근을 일체 차단했던 까닭도 있긴 하겠으나, 대륙 내부에 염력을 발현할 수 있는 사람 수부터가 지극히 적었다.

그나마 남아 있던 과거의 기록도 인공 염력을 창조하려 한 어느 마법사에 의해 탈취당했던가.

하여 지금 알티마 대륙에 남아 있는 염동력자는 지금까지 알려진바, 유리 폰 아르티나만이 유일한 셈이었다.

—우지지직.

“아오, 왜 이렇게 안 돼!”

한참 진땀을 흘리던 유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기숙사 방 침대에 걸터앉아 테이블 위를 노려보다시피 응시하던 유리는,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음을 직감하곤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풀썩­.

너무 집중한 탓인지 숨까지 몰아쉬면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덜컹대는 심장 박동이 투명하게 손바닥으로 전해진다. 이마에 팔목을 얹고, 눈만 물끄러미 내려서 테이블 위를 다시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수통 하나가 있었다.

겉면이 잔뜩 찌그러진.

유리의 목적은 저 수통을 찌그러뜨리지 않고 뚜껑을 염력으로만 돌려 따는 것이었다. 유리가 발현하는 염력의 세기는 기본적으로 성인 남성의 손아귀 힘만큼이나 강하기 때문에, 아주 조금만 더 힘을 주거나 하면 저 수통쯤은 가볍게 우그러뜨릴 수 있다.

물론 그러자고 수통을 세워놓은 건 아니었다. 최대한 다른 물체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저 작고 작은 뚜껑만 염력으로 살살 건드려 두어 바퀴 회전시킨 다음, 수통의 뚜껑을 따는 것…… 정말 하찮은 일이지만 이것도 훈련의 일환이다.

유리는 지금까지 큼지막한 물건들만 대상으로 삼아 왔기에, 저런 작은 물건을 다루는 것에는 굉장히 취약했다. 정확히는 아주 단순한 조작들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던지거나,

높이 들거나,

들어서 어딘가로 옮기거나.

다만 능력의 발전을 위해선 더욱 세밀한 조작이 필요했다. 힘의 세기 조절, 염력이 뻗어 나가는 방향 조절, 간섭 범위 조절 등…… 재능 충만한 초보 초능력자 유리에겐 넘어야 할 산이 아직도 많고 많았다.

염력은 마법이 아니다.

누구한테 도움을 받을 수도 없다.

이미 세상에 그 존재가 정립되어 있는 마법과 달리, 염력과 같은 초감각을 이용하는 초능력들은 아직 정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다. 현실을 초월한 힘이다. 분석이 쉬울 리가 없었다.

초능력에 대해 그나마 알려진 것이라곤, 대표적으로 딱 하나 있었다.

발현 조건.

적잖은 초능력자들의 각성 데이터를 한데 모아 규합한 결과, 연구원들은 초능력의 발현 조건을 한 가지 짚어낼 수 있었다.

——어느 인간의 정신이 궁지에 몰리면, 아주 적은 확률로 초능력을 각성한다.

그 이유가 생명의 존속 위기이든,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든, 몰락밖에 남지 않은 삶에 대한 두려움이든.

알고 보면 굉장히 나약한 인간의 정신력이 한계에 달해, 툭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이 간당간당하게 위태한 모양을 유지하던 때, 마침내 격발된 의지 속에서 초능력은 비로소 인간의 정신에 깃든다.

“……”

유리는 자신의 염력을 그렇게 달가워하는 편이 아니었다. 이거 때문에 아르티나 국왕이 유리를 더욱 폐쇄적으로 보호하게 되었기도 하고, 하물며 염력을 각성한 계기가 뭐였는지 떠올릴 때마다 자연스레 그 생각을 하게 되니까.

하지만 정작 쓰다 보면 편리해서 이젠 아예 없는 것처럼 살기도 어렵다. 누워서 손짓만으로 불을 끈다거나. 뭐 그런 거. 초능력의 수준에 비해 정말 하찮은 일이지만 나름 유용하게 써먹고 있었다.

“……하아아아.”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다. 이미 수통을 다섯 개쯤 우그러뜨린 유리가 침대 위에서 뒤척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두 손을 가슴 위에 모은 채로 천장을 올려다본다. 그러다 묶은 머리가 불편해 슬며시 상체를 일으켜 리본을 풀었다. 빗질을 몇 번 하고 나니, 묶은 자국도 없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던 유리의 황금색 머리칼이 이불 위에 부채처럼 흐드러졌다.

이제 시녀나 하인 없이도 머릿결 관리는 혼자서 잘 한다. 자기들 없으면 밥은 어떻게 먹고 몸은 어떻게 씻고 잘 때 불은 누가 꺼줄지 걱정하던 궁정 시녀들의 수심 깊은 얼굴이 떠오른다. 이거 봐, 너희들 없어도 잘만 하거든? 자신이 여기서 얼마나 잘 지내는지 수정구로 녹화해서 보여주고 싶을 따름이었다.

“……”

그래.

유리는 잘 지냈다.

……혼자서도.

유리의 머리를 묶었던 검은 리본. 그것을 제 손에 들어 멍하니 천장에 대고 올려다본다. 유리는 리본을 가만 응시했다. 디자인이 참 예쁘기도 한데, 귀엽다는 인상이 좀 더 강했다.

유리는 지금에 이르러 귀엽다거나 어린애 같다거나 하는 말을 듣는 걸 무지 싫어했다.

때문에 매번 남들이 자길 무시하지 않았으면 하지만, 정작 자기는 아직 어린애에 불과하다는 걸 매번 깨닫는 중이다.

제 생각과 마음을 이성적으로 통제하는 게 매우 어렵다는 것부터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반쯤 어른이다.

루비아나 스텔라 같은 친구들과 있을 땐 나름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 되려고 노력하긴 하지만…… 여기 와서 그 녀석 때문에 내고 싶지 않았던 화도 막 내고 그랬던 것 같았다.

결국 그 녀석이 만악의 근원인 게 아니었을까? 이젠 얼굴만 봐도 이유 모를 짜증 같은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잿빛 머리칼의 소년을 생각한다.

……뭐어.

닮기만 했을 뿐이니까.

결국 유리의 오빠는 아니었다.

그 사실을, 유리도 알고 있었다.

그 녀석을 오빠의 대체로 생각해선 안 된다는 것도, 아주 확실하게 깨닫고 있었기에­.

여기서 에지오 크라닐과 더 친해져 버리면, 무슨 일이 생길지 자신도 몰라서. 자기도 모르게 에지오를 기피하고 더 적대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이라 보는 편이 옳았다. 유리 본인은 단순히 짜증만 유발하는 녀석이라 생각하곤 있긴 하지만……

잠시간 유리는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아무튼 귀여운 리본이다. 착용자를 더 귀엽게 만들어 줄 아이템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귀여움 받는 걸 싫어하는 유리가 매번 이 리본으로 머리를 묶고 다니는 이유. 유리의 오빠가 자신의 여동생에게 선물로 주었던 소중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오빠는 싫어한다.

그러나 선물을 준 오빠는 좋아한다.

어린 시절의 유리는 귀여움 받는 걸 그리 싫어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선물을 받았을 때도 굉장히 기뻐했었다. 무척 좋아하는 오빠가 준 선물이고, 자기가 보기에도 귀엽고 예뻤으니까. 유리와 잘 어울리기도 했고.

자신에게 이 리본이 담긴 선물상자를 건네곤 나긋하게 웃어주던 오빠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꾸욱­. 가만히 누워 리본을 만지작거리던 유리의 손길에 힘이 다소 들어갔다.

유리는 곧 성년이 된다. 유리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 어린애처럼 보이는 건 싫으니, 어른의 사고를 해야 했다. 그럼 이제 어느 정도 확실하게 해야 할 것도 있었다. 입술을 질근 깨문다. 유리의 오빠는 여동생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게 아니라, 그러지 못한 것이란 사실을——.

“……”

유리는 한 가지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전쟁.

그 전쟁이 일어난 이유.

……알 수 없는 증오심은, 아주 오래전부터 유리의 마음 한켠에 차곡히 쌓여가는 중이었다.

#6

“어, 루비아.”

“……아, 유리구나.”

로비로 나온 유리는 출입문을 통해 들어오는 루비아를 발견하곤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뭐 하고 들어오는 길이야?”

“아, 그게……”

그리 물으며.

유리는 루비아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면 얘기해 달라 했었는데, 언제 어디서 해소한 걸까. 파리하던 안색은 복숭앗빛 혈기가 돌았다. 항상 그늘이 드리우던 눈가도 이젠 총명한 빛을 띠고 있고. 앙상한 팔목 등은 아직 그대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 차츰 나아질 거다.

원래도 예뻤는데, 슬슬정상 컨디션으로 돌아오니까 더 예뻐졌다.완벽에 가까운 육체미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매력이 한층 상승한 것 같았다.

그러다가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있는 루비아의 특정 부위에 시선이 옮겨갔다.……설마 저기도 더 커진 건가? 그럴 리 없겠지만 느낌상 그랬다. 뭐지. 분명 루비아는 나랑 같은 나이일 텐데. 왜지? 문장으로 치환되지 못한 의문들이 조각난 단어째로 유리의 머릿속을 둥실 떠다니던 때.

“저… 유리?”

“아, 응?”

“그렇게 바라보면, 부끄러운데……”

“아, 아앗… 미안.”

루비아가 볼을 긁적이며 애매하게 웃자, 유리는 곧바로 사과를 건넸다.

하지만 유리는 속으로 생각한다.

매우 순수한 호기심이 들었다.

……한 번만 만져보고 싶다.

어차피 여자끼린데 뭐 어때­.

그런 유리의 위험한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맹한 얼굴의 루비아는 아까 질문했던 유리의 말에 느지막이 대답했다.

“수업 다 끝나고 잠깐 알아볼 게 있어서. 학생회관에 갔다 왔어.”

“…학생회관?”

“으응. 아침에도 갔었는데, 너무 일찍 가서 그런지 안 계시더라구. 그래서 아까 갔다 왔어.”

“거기서 뭐 했는데?”

“활동 중인 서클 목록 같은 거 알아보려고 했지. 유리 너도 들었겠지만 서클 가입해야 하잖아.”

“…그치.”

강의실에서 녹빛 머리의 경박한 남학생이 여학생과의 만남을 위해 여행을 부르짖던 모습. 유리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다음 순간 유리가 말했다.

“…근데 루비아 넌 정해진 거 아니었어?”

마학 서클이라든가. 혹은 여행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라든가. 아무래도 전자 쪽이 더 가까워 보였긴 한데.

에지오와 같은 질문을 하는 유리였으나, 루비아의 대답은 달랐다.

“그게… 잘 모르겠네.”

“……응?”

루비아는 자리에 우뚝 서서, 슬슬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하는 유리창 너머의 공터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젠 어디 가야 할지 모르겠어.”

“……”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루비아의 분위기가 워낙 침울한 듯해서, 유리는 딱히 해줄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루비아는 곧 언제 우울해했냐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너는 정했어?”

“나?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 조금 더 생각해 봐. 혹시 필요하면 이거 복사해서 줄게.……아, 아니면 나랑 같이 뭐할지 이따 방에서 고민해 볼래?”

루비아가 슬쩍 그런 권유를 해오자, 유리는 화색이 돌아 고개를 끄덕였다.

“어? 나야 좋지! 간식도 가져갈까?”

그러라는 듯 루비아가 머리를 주억였다.

재밌는 시간이 되겠다며 싱글벙글하던 유리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저녁 시간이니까, 스텔라랑 아이리스 불러서 밥 먹자.”

“응. 좋아.”

그렇게 답하는 루비아를 보고선 친구들을 부르기 위해 복도로 걸어가려던 유리가, 별안간 시선을 어딘가에 고정시켰다.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있는 루비아. 눈처럼 하얗고 고운 손. 잠깐 침묵하던 유리가 조심스레 입술을 달싹였다.

“루비아, 근데……”

“응?”

“그거, 다 나았어?”

“……어느 거?”

유리의 물음에 루비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유리를 따라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거기엔 자신의 손이 있었다.

“……아.”

말은 안 했지만 다들 걱정하고 있었구나.

으응.그럴 만했지.

어떻게 한 것인진 몰라도, 원상태로 돌아온 루비아의 손톱을 바라보며 그리 물어온 것이었다.

“이제 괜찮은 거야?”

“……응, 보는 그대로야. 괜찮아.”

“그럼 다행인데……”

유리는 걱정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런 유리를 지긋이 응시하던 루비아가, 다시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괜찮아. 나쁜 버릇은 고쳐야지.”

“……”

맞는 말이다.

그렇긴 한데……

잠시 뒤, 유리는 스텔라의 방문을 노크하곤 거기서 나온 스텔라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루비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어쩐지 루비아의 손가락이 무언가를 갈구하듯 불안하게 꼼지락거리는 모습을, 유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고쳐진 걸까?

유리는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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