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01화 (101/201)

〈 101화 〉 마법 (4)

* * *

#7

“…이상입니다. 음, 질문은 여기서 받도록 하고……”

이쯤 하면 됐겠지.

직접 작성한 대본을 손에 든 채 소리 내어 읽어내리던 내가, 기숙사 방을 서성거리던 것을 멈추곤 자리에 우뚝 섰다.

대본을 쓰긴 했는데, 어차피 발표할 땐 못 본다. 사전 리허설 개념으로 논문을 들고 교수님이 앞에 계신다 상상하며 가상 발표를 해봤다.

진행 흐름에 막힘은 없고.

말끝이 떨리지도 않는다.

남 앞에 나서는 걸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발표 자체는 좋아한다. 내가 열심히 준비한 내용. 그걸 설파하는 건 자신이 있다.

‘…내가 잘못해서 망치면 안 돼.’

조원들의 수고를 한데 모아 마무리 짓는 사람이 나였다. 발표 이후 질의응답 시간이 주어질진 모르겠으나, 대비도 해야 하고. 따라서 발표 내용에 관해선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는 채여야만 했다.

다만 단순 암기도 내 특기 중 하나다. 지금은 편의상 대본을 들고 있지만 당장 내려놓고 처음부터 해봐라 시켜도 한 글자 틀리지 않고 똑바로 읊을 자신이 있다.

빽빽한 글자로 가득한 대본에서 눈을 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얼마나 집중하고 있던 거지. 일과를 모두 마친 뒤부터 계속 발표만 준비하고 있었다.

테라스 너머의 하늘은 새까맣게 물든 채다. 캄캄한 배경 속에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별이라……’

요즘 별만 보면 스텔라가 생각난다.

최근 환상적인 경험을 해서 그런가. 스텔라가 보여준 별하늘의 풍경이 뇌리에 선하다. 나도 원체 별을 좋아하는 편이긴 했지만, 이런저런 일들이 있던 탓에 자주 올려다보지 못했건만. 스텔라는 꾸준히 밖에 나와서 별을 감상하는 것 같았다.

바로 지금처럼.

테라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찬공기에 팔을 쓰다듬는 것도 잠시­ 은하수같이 반짝이는 중단발의 머리칼이 보였다.

스텔라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곧 저번에 나와 함께 갔던 계단 쪽으로 걸어간다.

스텔라의 뒷모습은 계단 위로 사라졌다.

내 눈은 자연스레 그 위를 향했다.

유독 별이 밝게 빛나는 하늘. 동산 위에 올라간 스텔라. 혼자서 운치를 즐길 생각이었던 걸까.

굳이 방해하진 않으려 했건만, 나는 어느샌가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휴식도 중요하니까.’

스텔라는 알게 모르게 내 활력소가 되어주고 있었다. 순수한 호의와 친한 친구로서 밀접하게 다가갈 수 있는 관계. 스텔라는 착하고 나긋하며 다정하지만, 가끔 보여주는 알프렌으로서의 그 장난스러움이 썩 마음에 든다.

알고 보니 여자였다는 건 아직도 거한 충격을 안겨주고 있었지만…… 이젠 보다 보니까 적응이 됐다. 사실 뇌내에서 별개의 존재로 구분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른바 현실 부정이라는 거다. 내 알프렌이 이럴 리가 없어…… 같은.

…뭐어, 둘 다 좋지 않은가.

알프렌이든, 스텔라든.

모두 내 친구인 건 변함이 없을 테니까.

문이 열렸고, 나는 고민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8

봄의 밤공기는 차다.

적당한 외투를 걸치고 나왔다. 언제나 애용하는 카디건. 대본 읽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런지 목이 뻐근하다. 뿌득­. 대충 꺾어주며 늦은 밤의 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다들 부지런한 건지, 어디 실내에서 공부나 훈련을 하고 있는 건지. 나도 원래 이맘때쯤이면 체단실에서 땀흘리며 운동하고 있거나 강의 복습을 했을 거다.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저편으로 사라진 스텔라의 흔적을 좇아 으슥한 계단 입구에 들어섰다.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가 반가웠다. 흙과 풀이 뒤섞인 친환경적 내음도. 어디 외진 시골에 오래간 살다 보면 지겹도록 듣는 후청각 요소들이다.

언뜻 그리움마저 들 정도로 생생한 그 소리들을 배경음 삼아 나는 계단 위에 발을 걸쳤다. 그리고는 한 걸음씩 움직였다. 저벅, 저벅. 조금씩 부는 바람에 잎사귀가 나부꼈다.

‘……아,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다른 길로 샜으면 어떡하나 싶었다. 그래도 문제는 별로 없었다. 여긴 마음을 안정할 수 있는 차분한 장소였다. 나 혼자 여기서 시간을 보내며 힐링해도 괜찮았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한켠에 품고 있었는데, 언제나의 반짝이는 머리칼이 저기에 보였다.

흙바닥을 깔고 앉은 스텔라가 상서로운 신전의 신관처럼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듯 눈을 감고 있었다.

밤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별빛과 어우러져 언뜻 신성함마저 느껴지는 아우라.

마치 성녀(??)처럼 빛나는 비주얼에 감탄한 내가 속으로 그 목소리를 삼키는데.

“……거기, 누구세요?”

슬며시 눈을 뜬 스텔라가 옆을 돌아본다.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내가 있는 걸 알았나 싶어 잠깐 주춤거리다가.

“…에지오? 여긴 왜……”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다 나라는 걸 눈치채고 손으로 입을 가리길래, 나는 어설픈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어 주었다.

#9

늦은 밤. 기숙사 공터.

“이거 다는 못 먹겠다. 분명 살찔 거야.”

“먹은 만큼 운동하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구, 루비아……”

하루 일과를 모두 마치고, 이전에 약속한 대로 루비아의 방에서 잠시 모임을 갖기로 한 루비아와 유리는 각각 간식이 담긴 봉투를 손에 든 채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 맞다. 루비아.”

“응?”

“너 내일 뭐 있다고 하지 않았어?”

“내일……?”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비아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아­ 하는 목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이미 준비 다 끝났어.”

“어, 그래? 진짜?”

“응. 숙제 미루는 거 싫어해서…… 그리고 조원 애들한테 미리 보여줘야 되기도 하고. 교수님이 발표자인 나 말고 다른 애들한테 질문하실 수도 있으니까. 혹시 몰라서 작성한 거 복사도 하고 나눠주고……”

“……너 되게 당하고만 사는구나. 루비아.”

“그, 그렇지 않아. 여기선 내가 제일 잘한다고 하니까, 그리고 나도 점수 잘 받아야 하고……”

“가끔 보면 네가 제일 어설프다니까.”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루비아가 워낙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이란 걸 알곤 있었지만,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당장 내일이 조별과제 발표날인 만큼 뭐라고 해봐야 소용도 없다. 다음부턴 절대 호구처럼 이용당하고만 살지 말라고 주의를 확실히 주는 게 낫겠다 싶은 유리였다.

잠시 뒤 유리가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서클이라니­ 이제 진짜 학교 생활 한다는 느낌이 드네. 공부 같은 거 말고 제대로 즐기는 외부 활동, 진짜 하고 싶었거든.”

“부활동 해본 적 없어?”

“당연하지! 그동안 왕성에 갇혀 있다시피 살았다니까? 공부나 취미생활도 죄다 가정교사 불러서 하지, 방 밖으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바로 수행원 따라 붙지, 내가 보고 들은 학교 생활은 책에서 본 게 대부분이었단 말야.”

“히, 힘들었겠네……”

“무우우우우지 답답했지. 그래도 이젠 괜찮아. 드디어 왕성에서 해방됐기도 하고,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긴 한데 확실히 즐겁고. 친구도 사귀었고. 너희랑 5년이나 더 함께 있을 생각 하니까 보상받은 기분도 들고 그러네. 히힛.”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유리가 루비아를 돌아보며 웃음 짓자, 루비아도 마주 웃어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래서 말인데, 서클……”

“……”

그때.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하려던 유리는 기숙사 쪽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었으나.

어느 순간 자리에 멈춰 선 루비아가 말없이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루비아의 시선은 쭉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누군가 강제로 떼어놓지 않는 이상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끈끈했다.

발자국 소리가 자신의 것밖에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유리가 뒤를 돌아보았고, 입을 작게 벌리고 있는 루비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루비아?”

“……”

유리의 말에도 루비아는 대답이 없었다.

뭐야, 무슨 일이지? 상황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유리는 루비아의 눈이 향하고 있는 쪽을 보았다.

수풀과 수풀. 그리고 나무. 건물의 사잇길.

…저기 뭐가 있다고 계속 보는 거야?

대답이 없는 루비아에게 다가가 손을 흔들어 보려던 유리의 앞으로, 알 수 없는 표정의 루비아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유리야. 잠깐만.”

“…어? 왜?”

“이거 들고 내 방에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래?”

“……으으응?”

“조금 있다 돌아올게. 먼저 가 있어.”

엉겁결에 봉투 두 개를 품에 안아 든 유리가 무수한 물음표를 띄웠다.

무슨 일인가 물어보고 싶었는데 워낙 다급한 표정이라, 말해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고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있다 돌아온다 했으니까 기다리면 돌아오겠지.

“아, 알겠어...”

유리의 대답을 받은 루비아가, 빠르게 걸음을 옮겨 어딘가로 향했다.

#10

스텔라는 내 등장을 보고 처음엔 꽤 놀라는 듯했으나, 이내 얼굴 전체에 화색이 돌 정도로 반가워하면서 자기 옆자리를 가리켰다.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묻길래 네가 여길 가는 걸 멀리서 보고 뒤따라 왔다 했더니, 태도가 싹 바뀌어선 정색하며 스토커냐는 물음을 받았다.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 잠깐 움찔했지만 장난이라며 어깨를 툭 치는 스텔라의 얼굴을 보곤 긴장이 탁 풀렸다.

아무튼 그렇게 스텔라의 옆자리에 앉았다.

저번과 똑같은 위치였다.

흙바닥은 여전히 서늘하고, 그때도 보였던 별자리가 지금도 똑같이 보였다.

주변은 또 고요하기 짝이 없다. 편안한 침묵. 아무런 방해꾼도 없는 지금은 정말 밤하늘에 집중하며 멍을 때리기에 최적의 시간이었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크다.”

“그러게……”

에픽 클래스 기숙사 부지가 한눈에 보이기도 하는데, 그 저편의 높고 낮은 건물들이 물안개처럼 희끄무레한 형체로 바글바글 줄지어 있었다.

제국의 수도인 헬리오스에서도 손꼽히는 부촌마저 프론티어에 비해선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정도란 얘기가 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다.

황금의 도시라는 이명답게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로 취급받는 곳이 바로 황립 프론티어 아카데미였다.

이 도시에 얼마나 많은 자원과 자금, 그리고 기술력이 투입됐는지 상세하게 파고들면 하나의 독립적인 나라를 세웠다고 봐도 무방할지 모른다.

오죽하면 프론티어를 졸업해서 어딘가에 취직하는 것을 거부하고, 유급에 유급을 거쳐 프론티어에 학생 신분으로 남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적잖게 있을까. 어찌 보면 그들은 모두 현명한 사람들이었다. 제국을 넘어 대륙 어디에 간들 프론티어보다 월등한 인프라를 구축한 대도시는 없을 테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한참 말없이 풍경을 구경하던 내 옆으로, 하얀 원피스만 입은 스텔라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

굳이 셔츠에 카디건까지 입을 필요는 없었는데, 따로 걸치고 나온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어? 아니­”

카디건을 스윽 벗어 스텔라의 어깨에 덮어주자, 스텔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리 입을 열었다.

“걸치고만 있어.”

기숙사에서 나오자마자 춥다는 걸 느꼈을 텐데. 맨 어깨가 전부 드러나는 원피스만 입고 나온 스텔라의 잘못이다. 밤공기가 차갑긴 했지만 나는 별로 춥지도 않았으니까, 괜찮았다.

잠시 말이 없던 스텔라는 당황하면서도 내가 벗어준 카디건의 소맷자락을 손으로 꾹 잡아끌며.

“그게 아니라…”

“응?”

내가 눈을 깜빡였고.

“마법, 쓰려고 했는데……”

“……”

아, 그랬지.

스텔라도 생활 마법 쓸 줄 아는구나.

“…돌려줘.”

“싫거든.”

스텔라가 혀를 내밀곤 배시시 웃었다.

뭔가 예의상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매너를 지켰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돌아오자 몹쓸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내가 원래 이런 걸 막 자연스럽게 하고 그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아니, 좀. 이러니까 괜히 부끄럽고 그러네, 어……

“돌려달라니까.”

“줬다 뺏는 게 어딨어?”

“……”

그건 그렇긴 하지.

“…마법 쓴다며.”

“그냥 안 쓸래. 마법보다 이게 더 따뜻해.”

그러시구나……

그럴 린 없겠지만……

“그래도 고마워.”

내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자, 스텔라는 쿡쿡 웃다가 돌연 감사 인사를 건네왔다.

잠시 뒤 얼굴을 가렸던 손을 내리고 옆을 돌아보니, 생글생글한 스텔라의 미소가 나를 반겼다.

“…너처럼 듬직한 남자애가 이런 에스코트 해주면, 아무리 상대가 너라도 조금 두근거려 버린다?”

……아, 제발.

괜히 더 부끄럽게 하지 마시라고요.

내가 딱딱히 굳은 표정을 하고 있자, 그런 반응을 원했던 건지 스텔라는 장난스러운 손길로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알프렌.

하나도 안 변했어.

오히려 더 악질이 되었다……

“근데 진짜 신기하다.”

“…뭐가?”

내가 되묻자, 악질이 된 스텔라가 말했다.

“아까 별님께 기도하면서 네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나타나서 깜짝 놀랐어.”

“……”

얘 오늘 진짜 왜 이러지.

이건 정말 다양한 의미로 악질인데. 순수하게 웃으면서 그런 식으로 말하면 대부분의 남자는 스텔라에게 넘어가 버릴 거다.

나는 알프렌이란 실체를 알고 있으니까 가까스로 버티고 있긴 한데… 모르겠다. 그냥 닥치고 있자. 그게 최선인 것 같다. 진짜.

“따로 기숙사까지 찾아가서 나랑 같이 별 보러 갈래? 이러는 것도 좀 이상하고. 남자 기숙사에 들어갈 용기도 없고. 아예 생각 안 해본 건 아닌데 정말 용기가 안 나더라. 너는 어떻게 여자 기숙사까지 들어온 거야, 대체?”

“일단 약속을 했으니까, 가야지……”

나라고 없던 용기가 무럭무럭 솟은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밀고 들어갔을 뿐. 걸릴까봐 조마조마했던 것도 사실이다.

유리와 루비아가 날 발견하기 전에 가까스로 잠입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그닥 좋지 못한 추억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말하다 말고 잠깐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는 내 옆의 스텔라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근데, 스텔라.”

“응?”

“별은 다른 애들이랑 봐도 되잖아.”

“어……”

거기엔 어째서 굳이 별 같이 보고 싶은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에서 특정을 지었는가, 라는 의문이 들어 있었다.

스텔라한테도 루비아나 유리란 친구가 있을 거고. 걔네들은 착하니까 일단 같이 별 보러 가자고 하면 무조건 들어줄 텐데. 오히려 걔네가 더 신나서 스텔라를 끌고 갈지도 모르는 일인데.

오늘 스텔라는 혼자 나왔고, 나는 그 뒤를 따라 나왔으며, 스텔라는 내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결국 실제로 왔지만.

“너는 다른 애가 아니잖아.”

스텔라의 말이었다.

“여기서 나한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그건 알프렌과의 추억을 가진 날 의미하는 걸까. 풀벌레 소리에 섞여들어 바람을 타고 전해진 스텔라의 목소리가 내 귓바퀴를 간질였다.

순간은 고요함에 젖어들었다.

짧은 침묵을 연달아 깬 스텔라가 입을 연다.

“너는 어때?”

“……”

스텔라는 이어 묻는다.

“너한테도 나는, 특별한 사람일까?”

맑은 호수처럼 투명한 은백색 눈동자 속에 내 얼굴이 비쳐 보였다.

#11

찌르르르……

찌르르르……

우는 벌레들의 소리 속에서.

소녀는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관찰은 조금 전에 그만뒀다.

처음엔 반가운 뒷모습을 발견해서, 그리고 왠지 본능적으로 그 뒤를 따라가야 할 것 같단 느낌에 이끌려서. 저 오솔길 같은 계단은 자신도 가본 적 있는 장소였다. 그곳을 걸어 올라간다는 건, 목적지가 하나뿐인 계단의 끝을 향한다는 것이었기에.

정말 잠깐, 아주 잠깐 내일 조별과제 이야기를 핑계 삼아 얘기라도 해볼까 싶어서.

그랬는데.

……나만 모르고 있던 거구나.

아니야.

사실은 알고 있었어.

저 둘 사이의 좁혀진 거리감은 소녀가 보기에도 티가 날 정도였으니까.

소녀가 모르는 사이에 친해져 버렸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 만큼 그렇게 충격받을 일도 아니었을 텐데.

“……읏.”

또 아려오는 심장에,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소년을 몰래 따라가 보았더니, 다른 소녀가 있었다.

둘이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걸까.같은 장소에서 만났다.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익숙하다는 듯 옆자리에 앉고, 어깨가 닿을 듯 말 듯한 가까운 거리에서 같이 별하늘을 구경한다. 소년과 소녀는 화기애애하게 웃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편하게 대화했다.

지금 나무 기둥 뒤에 숨어 있는 소녀의 앞에서 보였던 그 수줍은 모습, 부끄러운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언뜻 들려오는 말소리에 고상한 존대는 섞여 있지 않다. 자신들한테도 놓지 않은 말을, 오직 소년에게만 편히 놓았다.

……대체 언제?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소녀는 고개를 내려 자신의 발치를 보았다. 정확히는 고개가 스르르 떨어진 것이다. 나무 기둥 뒤 그림자에 숨은 자신의 모습을 그제야 자각한다. 서늘한 달빛이 그림자의 경계면을 두르고 있었다.

별빛이 쏟아지는 동산 아래서 찬란하게 빛나는 그들과, 그림자 속에 숨어 그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소녀는, 좁힐 수 없는 절대적인 입장의 차이를 깨닫고 만다.

자신은 저기에 나설 수 없다.

저 둘의 대화를 방해하는 건, 할 수 없다.

……그래.

방해였다.

—오늘 유성우래! 유성우! 빨리!

—루비아, 나 팔 아파……

더 높고 깊은 시골의 산속에서 신이 난 채 내달리던 두 소년 소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두려움에 감았던 눈을 뜨면, 연분홍빛 머리칼의 소녀 대신 은백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어라.”

꿈결처럼 흐릿한 눈가를 비벼본다.

조금 뜨거웠다.

비벼도 깨끗해지지 않고, 더 흐려지기만 한다.

……뭐야, 나.

꼴사납게……

이젠 부정할 수도 없는 감정이 솟구쳐 오르는 걸 막을 수도 없는 소녀가, 그것보다 더 큰 배려심에 안타깝도록 잡아먹혀, 소년과 소녀의 모습으로부터 천천히 눈을 떼고 만다.

도망치고, 후회하고, 다가가지 못한 결과가 이거였다. 비참하단 심정을 가질 이유도 논리도 없었다. 어느 무엇을 하든, 이제 와서­, 라는 말이 가장 첫 번째로 들어가게 된다.

이제 와서 뭘 바라고 있는 거야.

돌아가자.

유리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저벅.

그림자 속에서 소녀는 걸음을 반대로 돌린다.

소리 없는 울음을 삼키고.

혹시라도 자신의 뒷모습을 저들이 발견할 수 없도록, 일부러 달빛이 비치지 않는 곳을 밟으며 계단을 조용히 내려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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