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화 〉 마법 (5)
* * *
#12
“너한테도 나는, 특별한 사람일까?”
유성우가 떨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 타이밍에 그런 질문을 잘도 해온다.
스텔라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팔목에 머리를 기대어 날 돌아보고 있고, 나는 갑자기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온 스텔라의 옆에서 말없이 굳어 있었다.
…아니, 자세하게 생각하면 엄청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진 않은 것 같긴 해도, 이 묘한 분위기 자체가 묘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었다.
수통이라도 있으면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은 심정이다. 여태껏 뮤로 단련되긴 했지만 스텔라 역시 만만찮게 예쁘긴 예뻐서, 계속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금세 부담스러운 기분을 느껴 버린다.
특별한 사람이라.
“그거야… 당연하잖아.”
혹여나 굳어 있는 새 침이라도 흘렀을까 싶어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곤, 잠시 동산 너머 풍경에 눈을 돌린 채 말을 잇는다.
“지금까지 남자인 줄 알고 있었던 어릴 적의 친구가 알고 보니 여자였고, 지체 높은 공녀님이 되어서 같은 반 동급생 신분으로 다시 만나면, 그건 분명 평범한 만남이라 볼 순 없겠지. 아마 나한테 너 정도로 많은 충격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을걸.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뭐야, 그게.”
내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듯.
스텔라는 부루퉁한 표정을 짓더니.
“나는 그런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말 같은 걸 기대한 게 아니거든?”
하고,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왔다.
“아니, 나한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친구라는 건 맞잖아. 대체 뭘 기대한 거야……”
“흥. 재미없어.”
과장되게 볼을 부풀린 스텔라가 머리를 홱 돌리길래, 이건 또 무슨 반응인지 당황스러운 마음에 잠깐 머쓱하려는데.
“…농담이야. 너다운 대답이라 좋았어.”
픽 하는 김 빠진 웃음소리와 함께 그리 입을 연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입매는 생글생글한 채였다.
…도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이 사람.
괜히 따라 올라왔나 이거.
“그래도 부끄러워했다.”
스텔라가 아 하는 얼굴과 함께 날 가리켰다.
“……안 했어.”
“했잖아. 얼굴 빨개졌어.”
“안 그런다니까.”
“거울도 없는데 그런지 안 그런지 어떻게 알아?”
“내 몸이니까 내가 잘 알지.”
카디건 벗어주니까 밤공기가 더 차게 느껴지네. 정말 얼굴이 벌게졌다면 분명 추워서 그런 거다.
손으로 얼굴을 슥슥 문지르고 있자,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맞아. 그대로였어. 근데 방금 진짜 조금 빨개지긴 했다. 내 말 의식하니까 더 그런 거야?”
“……”
내가 말을 말지.
날 놀리는 데 맛이 들린 스텔라를 상대하려니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나랑 눈만 마주쳐도 고개 푹 숙이던 수줍은 공녀님은 어디 갔을까.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을 땐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지금처럼 둘만 있으면 알프렌의 저돌적이고 장난스러운 일면과 스텔라의 외견 그리고 우아함이 한데 뒤섞여, 내 입장에서 장난을 온전하게 받아주기 영 껄끄러운 상대가 되고 만다.
정체를 밝히고 나니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건지, 아예 가드를 완전히 푼 채로 내게 다가오고 있다.
“…그래도 말야, 내 질문의 의도는 그거였어.”
기지개를 켜듯 깍지 낀 채 팔을 앞으로 쭉 뻗은 스텔라가, 별하늘 쪽으로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중요한 건 내가 너한테 어느 정도로 특별하느냐, 야.”
“……”
한참 뒤 내가 되물었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데?”
스텔라는 고운 손가락을 매만지며 말한다.
“다들 있지 않아? 친하다고 생각하는 친구한테 조금이라도 높은 우선순위를 가지고 싶은 마음 정도는. 누가 나랑 먼저 선약을 잡았는데 그 사람의 더 친한 친구한테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약속을 깼다고 생각해봐. 이해는 하겠지만 조금 서운할걸. 그 친구란 사람한테 내가 뒤로 밀린 셈이니까.”
글쎄, 나한테 그런 비유를 대입할 수 있는 친구란 사람은 루비아 정도밖에 없었고…… 음, 이 경우는 좀 아닌가.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는 했다.
스텔라가 말하니 살짝 느낌은 달랐지만.
“…너한테 독점욕 같은 것도 있었어?”
“실례네. 사람은 다 욕망의 동물인걸. 세상에 욕망 없는 사람은 없어. 게다가 내 기준에서 특별한 친구는 너뿐이라, 기왕이면 너도 날 특별하게 생각해주는 편이 더 좋잖아? 다른 친구들보다도 우선이면 더 좋고. 어떻게 보면 네가 말한 대로 독점욕, 일지도 모르겠네. 나쁜가?”
고상한 공녀님의 얼굴로 그런 말을 서슴없이 하니까, 이게 또 평소의 모습이랑 차이가 있어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쁜 건 아니지.”
아예 관심도 없으면 욕망도 생기지 않을 테니까.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되기도 하겠지만.”
어둡고 습한 독점욕이 뭉치고 뭉쳐 만들어진 집착은 때로 사람의 마음을 좀먹는 무서운 질병이 될 수도 있었기에.
“…으음, 그것도 그렇네.”
잠시 중얼거린 스텔라가 이어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 아직 대답 못 들었어.”
“…뭘?”
“내가 너한테 어느 정도로 특별해?”
“……그게 그렇게 듣고 싶어?”
“응. 듣고 싶어.”
공녀님으로 진화하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너 원래 이렇게 질척한 사람 아니었잖니. 공작가에서 지내는 동안 조신하게 행동하느라 말초적 욕망을 꾹꾹 눌러 담고 있었던 거냐고……
스텔라는 은근슬쩍 말을 흘린다.
“그래도 우리, 좋았잖아.”
“……누가 들으면 오해할 수 있는 말은 하지 말아줄래?”
주변에 아무도 없긴 하지만.
괜히 풀벌레밖에 존재하지 않는 주변을 둘러보며 팔을 쓸어내리던 내가, 스텔라를 돌아보았을 때.
“흐으음… 대답하기 곤란한 것 같으니까, 간단한 선택지로 고를 수 있는 쉬운 문제를 너한테 줘볼게.”
“…풀기 싫으면?”
“……”
“…아, 알았어. 뭔데?”
진지하게 정색하는 스텔라는 의외로 무섭다……확인.
“으으음……”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하는 듯하던 스텔라가, 손가락 세 개를 들곤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랑 뮤랑 루비아. 셋이서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할래?”
“……뭐?”
나는 멍하니 반문했다.
굳이 그 둘을 콕 찝어서 말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여전히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다.
현시점에서 나랑 가장 친하다 생각되는 친구를 선택지로 데려온 건가.
루비아는 전에 얘기한 것도 있으니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뮤와 나는 엄청 친밀한 사이까진 아니었을 텐데……
“…근데 있잖아. 스텔라.”
“응?”
“애초에 너랑 루비아는 그럴 일 자체가 없고, 만일 있다고 해도 마법으로 금방 빠져나올 수 있을 거고. 뮤는 애가 원체 비상식적인 신체 능력을 가진 친구라서 걔한테 익사 위기 같은 위험이 닥친다는 상상을 하기가 좀 어려운데……”
“……”
“…아, 알았어. 알았다고.”
진심으로 깬다는 표정을 하길래 황급히 정정했다.
이건 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스텔라, 뮤, 루비아인가……
내개 곤란한 질문을 던져온 스텔라는 옆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런 질문, 언젠가 뮤한테 들었던 것도 같은데. 비교 대상이 누구였더라. 아마 루비아였나.
그땐 뮤와 사귀고 있었으니까, 나도 이 정돈 해야겠다 싶어서 루비아가 아닌 뮤를 먼저 구하겠다 대답하려고 했었던 듯한데. 실제로 뭐라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뭔가, 굉장히 뻔한 대답을 했던 것도 같은 느낌이……
생각은 길지 않았다.
“전부, 동시에, 구할 거야. 어떻게든.”
후속 질문이 들어오지 않도록 명확히 대답한다.
문득 옆을 보니 스텔라가 너 참 대단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는지 입만 작게 벌리고 있다.
“…한 명밖에 선택할 수 없다고 하면?”
“그럴 일 없게 해야지.”
“그래서 가정을 하는 거잖아. 그렇다고 하면?”
무척이나 끈질긴 스텔라였다.
나는 잠깐 한숨을 쉰 뒤에, 장난을 당했던 것을 되갚아주듯 스텔라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널 먼저 구하겠지. 네가 가장 소중하니까.”
“……!”
그렇게 대답한 순간.
스텔라의 눈썹이 바짝 위로 올라갔다. 눈도 덩달아 커졌다. 워낙 커다란 눈망울이라 그런지 내 얼굴이 선명하게 비쳐 보인다.
“으, 어, 진짜……?”
어차피 이것도 장난의 일환이었던 셈인지, 내가 그리 직설적으로 말할 거라 생각도 못했다는 듯 스텔라가 말을 더듬거렸다.
나는 픽 웃었다.
“귀 빨개졌다.”
“아, 이건……”
스텔라가 어깨에 걸친 내 카디건의 소맷자락을 손으로 끌었다. 그러고는 손으로 자신의 달아오른 귀를 감싸듯 덮는다. 새우처럼 등이 둥글게 말려서 카디건이 그 위에 덮인 채였다.
근데 난 거짓말 안 했다. 진짜 빨개졌거든.
한 방 먹였다는 생각에 우쭐해진 것도 잠시, 정말 부끄러워하는 듯한 스텔라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자 내 기분도 오묘해졌다.
…뭔데.
이 이상한 분위기.
수줍은 스텔라가 돌아온 건 좋은데, 어……
아무튼, 나는 짧은 헛기침과 함께 원래 하려던 말을 입속에서 꺼냈다.
“…그리고 루비아가 나한테 이것과 똑같은 질문을 해오면 난 루비아를 먼저 구할 거라 대답해줄 거고, 뮤가 나한테 똑같은 질문을 해오면 뮤를 먼저 구할 거라 대답해줄 거야. 아마도 방금 너한테 대답했던 것과 똑같은 대답을 그 둘한테 돌려주겠지.”
내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스텔라가 카디건 속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다.
“……뭐야, 그럼 내가 질문한 의미가 없잖아?”
“맞아.”
“……”
누굴 먼저 구할 것인지 우선순위를 가리려고 하는 건데, 내 쪽에서 그렇게 말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
“뮤랑 루비아, 그리고 너. 셋 다 나한테 소중한 친구야. 이런 민감한 대화는 남이 들었을 때 은근 상처받을지도 모르는 일이거든.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이런 질문 안 했으면 좋겠어. 나도 곤란하고.”
“……”
“……나는 원래 뒷담화 같은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친한 친구들 사이에 굳이 우열도 가리고 싶지 않아. 아예 얼굴 몇 번 보고 만 친구라면 몰라도, 어느 정도 이상으로 친해지면 다들 소중해지니까.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도 누군가는 꼭 피해를 입는단 말이지.”
어릴 때 배운 사교술과 처세술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행동 양식이었지만, 어차피 난 더 이상 귀족도 아니었거니와, 실제로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었으니 별반 이상할 것도 없었다.
막말로 내가 여기서 스텔라의 호감을 얻고 싶었다거나, 아니면 그녀와 좋은 관계로 발전하길 원해서 매우 정석적인 대답을 내놓는다거나 하면 분명 스텔라와 지금보다 더 밀접하게 지낼 수 있었을 테지만, 그건 딱히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뭐……
어차피 누군가랑 연애할 생각도 없었으니까.
“그렇구나…… 미안해.”
잠시간의 침묵 뒤, 스텔라가 눈가를 누그러뜨리며 말을 잇는다.
“장난이 좀 심했지?”
“어. 어어어엄청.”
나한테 했던 거랑 똑같은 말과 행동을 일면식도 없는 남자애한테 그대로 했다간 아마 큰일이 났을걸. 주로 남자 쪽에서.
스텔라의 가까운 듯한 거리감이 막 싫은 건 아닌데, 당연히 싫을 리가 없는데. 선이라는 게 있으니까. 아까도 생각했던 거지만 누군가랑 연애할 생각 없기도 하고. 이게 또 괜히 스텔라는 마음도 없는데 내 쪽에서만 의식하는 게 아니라, 약간 그런 쪽 상황으로 흘러가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다.
나는 친한 친구 관계가 좋았으니까.
더 깊어지는 건 사양하고 싶다.
——그렇게 되면, 분명 불행해질 테니까.
이제 지쳤다는 마음이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라고 생각하던 순간,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원래 다소 비관적인 사람이긴 했어도.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뮤랑 사귀면서 이러한 부분들은 어느 정도 완화된 것으로 알고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을 텐데.
마치 본능이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경고하고 있는 것 같달까.
이 이상으로 친해지지 말라고. 친해지더라도 이성적 호감에 얽히지는 말라고. 남자와 여자란 친구 사이에 그게 존재하지 않을 수야 있겠냐만은, 제발 그러지 말라고. 그랬다간 파국을 맞이할 거라고. 내가 나한테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내오는 것 같다.
잠깐 심각해진 내 표정이 읽히기 전에 나는 스텔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하튼, 너도 이젠 알겠지만 한 명의 어엿한 숙녀라는 걸 잊지 마. 나한테 하는 것처럼 했다가 괜히 오해하고 그러면 어쩌려고. 알프렌이란 네 숨겨진 정체를 내가 아니까 다행이지……”
“으, 응…… 근데 다른 사람한텐 이럴 일 없는데……”
“나한테도 하지 마.”
“흐잉……”
거짓 울상을 지어도 소용없다. 예쁘긴 한데.
잠시 뒤.
스텔라가 중얼거리듯 입을 연다.
“지금까진 다 속을 알 수 없거나 목적을 알 수 없는 남자들 뿐이었어서……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지금은 너밖에 없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조금, 내가 생각했던 이성 친구와의 대화나 장난 같은 걸 괜히 너한테 기대하게 되고 그런 게 있던 것 같아. 그동안은 내 바뀐 신분이나 체면도 있고 여러 가지 있었으니까……”
직후, 스텔라가 날 본다.
“나, 어릴 땐 남자니 여자니 그런 쪽에 대해선 진짜 아무것도 몰랐고……”
“……”
그렇고 그런 추억들이 떠오르려 한다.
뭔가 더 이상한 대화가 되기 전에, 내가 먼저 한마디 했다.
“…별이나 보자. 별 보러 온 거잖아?”
결국, 생각 복잡할 땐 멍하니 밤하늘이나 올려다보는 게 최고였다.
스텔라도 내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올려다본 별하늘은 밝고 어두웠다.
밤이라……
오늘은 3월 30일.
내일이면 3월의 마지막 밤이 다가온다.
……생각을 텅 비우고자 검은 먹에 뒤덮인 하늘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건만, 정작 내 신경은 어느샌가 기숙사 방에 있을 터인 엘레나의 쪽지에 조금씩 옮겨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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