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03화 (103/201)

〈 103화 〉 마법 (6)

* * *

#13

밝기가 낮아진 조명.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진 논문의 페이지를 투영 마법의 묘리가 적용된 아티팩트로 스크린처럼 넓게 펼치곤, 단상 앞에서 차분히 거닐며 입술을 달싹이는 발표자.

증폭 마법으로 목소리를 키우고.

좌중의 시선을 한데 모으며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강의실 내부에 있는 모두가 쥐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는 새—— 6조의 발표자는 마침내 자신의 차례를 마무리 지었다.

이상입니다, 라는 짤막한 말소리와 함께­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드는 박수갈채. 이후 발표자인 나에게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아니, 의례긴 하지만 다른 조의 발표보다 유난히 시끄러운 것 같기도 한 손뼉들이 강의실 내부 공기를 덜덜 진동시켰다.

‘실수는…… 안 했다.’

수십의 학생, 그리고 교수 앞에 나서는 일이다. 긴장이 아예 되지 않을 순 없었다. 발표 직전 마른침만 삼키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대본을 점검한 뒤 조원들과 함께 앞으로 나섰었다.

알프리스는 나뿐만 아니라 레니와 헥토르에게도 자료를 나눠준 듯했는데, 조원들에게 따로 질문이 들어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레니는 꽁꽁 얼어붙어서 입술도 제대로 열지 못했건만, 차라리 다행인 일이었다.

발표는 20분 내외로 이루어졌다. 연구 결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평가를 맡은 게포르트 교수님이 가장 흥미를 보였던 부분은, 역시라면 역시일지. 조원들의 고유 마력 중에서도 나의 것을 발표할 때 의자가 덜컹거릴 정도로 아주 큰 소리를 내셨다.

—호오! 백색이라!

그러더니 질의응답 시간도 아닌데 나한테 불쑥 여러 질문을 해오셔서, 일일이 대답하느라 살짝 진땀을 뺐던 게 방금 전의 일이다.

자료를 찾아보면서 백색 마력에 대한 정보를 접한 듯한 학생들은 놀라운 눈치를 보였고, 모르는 학생들은 그게 뭐가 대단한 것인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교수의 차분하고 열정적인 설명이 끝나자 곧 일부 경악이 어린 눈으로 날 바라보기도 했다.

교수가 백색 마력에 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대륙 최고라 평가받는 위대한 대마법사의 이름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원래 15분 예정이었던 발표가 5분 뒤로 늦어졌다. 마나의 근본을 가르치는 교수님이라 그런지 아주 흥미로운 기색을 드러내시던데, 왠지 이 수업이 끝나고 개인적으로 불릴 것 같은 느낌은 나의 착각일까. 그랬으면 좋겠다. 제발.

아무튼 발표에 사용한 연구 논문과 함께 유스필의 불참으로 한 군데가 텅 비어버린 2번 과제의 그림도 제출을 마쳤고, 게포르트 교수는 그 그림을 슥 훑어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봐도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색칠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우리 조가 6조였으니까, 그동안 발표했던 조들의 그 삐뚤빼뚤한 완성본을 생각하면 아주 우수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A+……

받을 수 있겠지?

느낌은 좋다. 뭔가 한 건 제대로 끝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단상을 나섰다. 조원들도 나를 따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우리의 첫 조별과제가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 것이었다.

‘…이제 좀 안심할 수 있겠네.’

조금은 걱정이 덜어졌다.

박수 소리가 멎어들었을 즈음 각자 자리로 돌아가는데, 우리 다음 차례로 발표할 조가 의자에서 일어나 단상 앞으로 걸어간다.

선두에 선 사람은,

‘……7조였구나.’

루비아였다.

정말 찰나의 순간, 걸어가면서 교차로 중앙을 지나는 우리들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여느 때와 같은 루비아였다. 푸르고 진한 녹빛 눈동자를 감싼 눈꺼풀이 느릿하게 감았다 뜨인다.

실전 타입인 루비아는 차분하기 그지없는 반면, 그녀를 뒤따르는 조원들은 왠지 산만한 모양새였다. 나한텐 안 물어보겠지? 같은 말을 옆 친구에게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스윽.

발표 잘 하라는 응원이라도 보내줄 셈으로 조심히 주먹을 들어 보였는데, 루비아는 그걸 보고선 잠깐 어두운 표정을 하더니.

‘고마워’, 하고 입모양으로 그리 말하곤 작게 웃음 지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루비아는 날 지나쳐 갔다. 저벅, 저벅­. 루비아는 어느새 단상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고개만 돌려 루비아를 가만 쳐다보다가, 보는 눈이 많은 걸 깨닫곤 본래 자리를 찾아 의자에 얌전히 착석했다.

“…7조,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잠시 뒤.

루비아는 큼큼거리다 입을 연다.

아리따운 얼굴의 소녀가 듣기 좋은 고운 미성을 낸다. 까마득한 정적 속에서 홀로 고요히 말을 꺼내는 루비아는, 마치 어느 맑은 호숫가의 성스러운 페어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루비아의 모습에 여럿 감탄한 건지, 몇 남학생들이 수군거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따사한 연분홍빛의 긴 머리칼, 입가에 띄운 나긋한 미소, 우월하기보단 아담하다는 말에 가까운 신장 등, 루비아는 뭇 남학생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그런 청초한 매력의 집합체였던 것이었다.

……예쁘긴 예쁘네.

비교대상이 있으니까 괜히 더 그렇게 생각되는 것도 있다. 옆에 줄줄이 선 조원들은 전부 여학생인지라. 여기 있는 학생들의 대부분은 지체 높은 신분인 만큼 외적으로 빼어난 이들도 적잖은데, 루비아는 그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빛이 나는 존재다.

정말 개인적 친분 같은 거 다 떼놓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봐도, 루비아는 명실상부한 탑클래스에 속했다.

만일 외모에도 위계가 있다면 8위계쯤 될까.

아니, 일단 지금껏 살면서 루비아 이상의 여자아이를 본 적이 없었으므로—뮤랑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10위계로 쳐줘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런 내적 평가도 하면 안 되는 것이긴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때.

방금 눈이 또 마주친 듯한 건 착각일까.

착석한 좌중들 중에서도 정확히 내가 있는 쪽을 잠시 바라보는 듯하던 루비아가, 이어 말하며 발표를 시작한다.

처음 3분 정도 듣던 내가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A+ 확정이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진행이었다.

딱딱 끊어지는 제스쳐에는 절도가 있고.

청중의 귀를 절로 기울이게 하는 적당한 톤의 목소리가 강약을 적절히 조절하며 강의실 내부의 공기를 휘감는다.

루비아는 뭔가 제대로 할 땐 진지해지니까, 가끔 맹한 어린애 같이 보이기도 하다가 저럴 땐 묘한 어른스러움을 드러낸다.

당연히 루비아 혼자 다 했을 것으로 보이는 결과물의 평가엔 조원들의 이름이 들어가 있지 않길 바랐건만, 유감스럽게도 그럴 일은 없었다.

루비아는 루비아니까.

당하고 사는 것에 늘 익숙하던 루비아니까.

그러지 말라고 내가 옆에서 가끔 말과 행동을 교정해주긴 했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더 이상 그러지 못하게 되었던 우리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다시 만나서.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같은 수업을 듣고 있다는 게 새삼 묘한 감회를 불러일으켰다.

감상에 젖어 멍하니 턱을 괸 채 루비아의 발표를 구경하는데, 문득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옆을 돌아 보니.

강의실에 입장하면서부터 잔뜩 졸려 보였던 유스필이, 저기 탁자 위에 엎어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눈꺼풀이 내려앉은 듯 졸린 눈으로 날 흘기며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눈치를 챈 것 같자 고개를 다시 묻는다.

“……”

……결국 유스필은 그녀의 바람대로 0점 처리를 받았다. 6조의 결과물에는 유스필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았으니까.

유스필은 그러한 처사에 딱히 별다른 불만도 없이, 강의실에 들어서며 알프리스와 레니 등을 마주했을 때 그냥 입 닥치고 자리에 돌아가 지금처럼 탁자 위에 드러누웠을 뿐이다.

더 트러블을 일으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럴 힘이 없다는 게 맞는 건가.

잔뜩 지치고 피곤해 보이는 유스필의 얼굴은, 사정을 알기 전이라면 그냥 성질 더럽게 생겼다는 식으로 보였을 터였다.

유스필의 사정에 더 참견하진 않기로 했기 때문에, 나 역시 유스필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렀다.

—짝짝짝짝짝……

길었지만 짧게 느껴졌던 루비아의 발표가 끝나고, 나에게 쏟아졌던 것과 비슷한 규모의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질문… 있으신가요?”

그다음은 언제나의 질의응답 시간.

때로는 교수로부터, 때로는 학생들로부터. 여기저기서 번쩍 손을 드는 학생들의 말을 듣고 명료한 답변을 내놓는다.

질문 세례가 이어지고.

손을 들고 있는 학생들의 수도 점점 줄어들어, 결국 마지막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을 때.

“……네, 거기에 계신 분.”

루비아가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쩔 수 없이 내 쪽을 가리키며 그리 말했다.

원래 안 하려고 했는데.

딱히 효과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질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발표 주제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루비아는 당황을 감추며 차분히 말한다.

절반은 루비아를, 절반은 나를 보고 있다.

잠시 침묵하던 내가 말한다.

“그, 발표자분 말고.”

“……네?”

루비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나는 그 옆을 응시하며 말했다.

“옆에 분. 헤일라, 라고 하셨나요?”

“……!”

처음 조원들을 소개할 때 불렀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헤일라는 찰나에 숨을 삼킨다. 명백하게 동요하는 움직임.

대놓고 쟤 무임승차했어요, 라고 찌를 수도 없고.

정말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도 모르고.

그냥 확인 겸 질문하는 거다.

“아무래도 헤일라 학생의 고유 마력과 마력 회로의 상관관계에 대해 궁금한 부분이 있어서요. 발표자분보다는 본인이 더 잘 알 테니까, 저분께서 대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 그게……”

루비아는 말끝을 흐렸다.

어쩌지, 싶은 마음이 다 드러나는 표정으로 헤일라를 돌아보지만, 별로 아는 게 없어 보이는 헤일라는 작게 도리질을 한다.

만일 자료 조사를 루비아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했다면, 자신의 고유 마력이 가진 색깔 정도만 알지, 다른 건 하나도 모를 게 분명하다.

루비아의 발표를 옆에서 들으면서 얻어낸 게 있을지도 모르나, 어차피 단시간에 그 많은 정보들을 전부 머릿속에 저장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곤란해하는 헤일라를 대신해 루비아가 말한다.

“정확히 뭐가 궁금하신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아뇨, 헤일라 학생이 대답해 주세요.”

“……”

“처음 소개할 때 자료 조사 담당이라고 하셨죠? 워낙 복잡한 자료가 많았을 텐데도 논문이 정말 깔끔하고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던데요.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학생분께서 정말 열심히 연구하고 조사하신 것 같던데, 그렇다면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에 대한 해답도 어렵지 않게 내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헤일라는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실한 프론티어 학생이라면 진짜 어려운 질문은 아닐 텐데. 들어보지도 않고 그러네, 거 참.

아무튼 내가 이어 물었다.

“질문, 가능하겠습니까?”

“저, 아무래도 다음 발표해야 할 조도 있고…… 시간이 좀 애매……”

헤일라가 그리 말을 꺼내는 순간.

“에지오 크라닐 학생의 질문이라면 저도 관심이 있군요. 에지오 학생의 질문까지만 듣도록 하겠습니다. 헤일라 학생, 시간 걱정은 말고 진행하세요.”

나이스 서포트. 게포르트 교수.

“그럼 질문해도 괜찮은 걸로 알고……”

“……”

창백해진 헤일라의 안색을 흘기며, 나는 아까 루비아의 발표를 들으며 일부 끄적인 필기 내용을 보면서 군데군데를 짚어갔다.

처음엔 간단한 사실 확인 질문.

논문에서 인용된 연산식에 관한 질문.

아까 말했던 헤일라 본인의 고유 마력과 마력 회로의 상관관계에 관련한 질문 등……

중간에 멈추는 일 없이 말을 쭉 이어나갔다.

“어, 어… 어…… 음……”

그 뒤로도 세 가지쯤 더 얹으니, 헤일라는 오류가 걸려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강의실 내부의 많은 사람들이 죄 그녀를 보고 있고, 교수도 헤일라의 대답을 기다리며 조용히 지켜보는 중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그다지 못한다면 금세 페이스가 무너질 만한 압박감.

내가 처음에 꺼냈던 건 정말 쉽다면 쉬운 질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헤일라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발표의 핵심을 꿰뚫긴 하지만 그렇게 참신한 질문도 아니었다. 주관식보단 객관식에 가까운 질문을 몇 개 던졌을 뿐이다.

그것도 대답 못 한다는 건, 뭐……

정말 얼마나 놀았던 건지.

“저, 헤일라 학생분? 질문의 숫자가 많아 대답하기 곤란하시다면 두 개 정도만 답변해주셔도 괜찮은데요.”

“……”

이제 와서 루비아가 들고 있는 논문을 뺏어 팔락팔락 넘겨가며 겨우 찾은 정보를 답변이랍시고 내놓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다.

“혹시… 모르시겠습니까?”

“……”

모르면 모르는 걸로 끝이다. 우물쭈물하는 헤일라를 보고 신뢰를 잃어가는 학생들이 꽤 보이긴 한데, 그렇게 큰 영향까지 있진 않을 거다. 그냥 해프닝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 갑자기 많은 관심을 받아 버리면 머리가 새하얘지는 경우도 꽤 많으니까.

근데, 교수님은 아닐걸.

“거기까지. 됐습니다, 헤일라 학생.”

왠지 안색이 딱딱해진 교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헤일라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남은 조는 다음 강의 시간에 마저 발표하는 것으로 하고, 오늘 수업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게포르트 교수는 루비아 쪽을 돌아보며.

“루비아 학생을 제외한 7조 학생들은 잠깐 강의실에 남아주시길 바랍니다. …아, 루비아 학생은 그 논문 저한테 주시고. 그래요.”

단순히 압박감에 몰려 대답하지 못했다는 게 아니라는 걸 게포르트 교수도 눈치를 챘는지, 조원들을 따로 부르기까지 한다.

놀고 먹으며 점수까지 날로 먹을 생각인 듯했던 헤일라와 그 조원들은 저마다 안색이 창백해진 채 서로를 돌아본다.

그렇게, 강의 종료를 알린 교수의 말에 따라 하나둘씩 앉았던 자리에서 가방을 챙겨 일어서는 가운데.

단상 앞의 루비아가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

나는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그냥, 좀, 당하고만 살면 그렇잖아.

루비아는 내가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다는 것 같은 표정이지만, 막상 줄줄이 교수한테 연행되는 모습을 보니까 꽤 통쾌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쟤는 좀 더 선을 긋는 연습을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이 너무 유순해도 문제라니까. 물론 그런 점이 루비아답긴 했지만……

내가 잠깐 루비아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루비아는 아까처럼 내게 입모양으로 말하는 대신, 특유의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이는 것으로 지금의 감정을 표현했다.

#14

“이야­ 완전 청산유수던데, 에지오?”

조원들과 함께 강의실을 나서자, 알프리스가 내 등을 툭툭 쳐오며 말했다.

“네가 정리를 잘한 덕분이지. 종이에 쓰인 그대로 읽는 게 뭐가 어려워? 덕분에 점수 날로 먹었다.”

“날로 먹긴. 네 덕분에 에이쁠 받게 생겼는걸.”

“저, 저는 발표도 안 하는데 엄청 떨려서…… 으윽, 아직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아요오……”

헥토르는 먼저 어딘가로 갔고—발표를 마친 나한테 놀랍게도 혀를 차지 않았다. 그 헥토르가 혀를 안 찼을 정도면 나름 잘한 거 아닐까—, 나와 알프리스, 그리고 레니가 복도에서 잠시 수고했단 말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래서, 우리 언제 모일래?”

내가 아닌 알프리스의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끝나면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제안했던가. 내가 말해놓고 잊고 있었다……

“글쎄… 언제가 좋지?”

“이번 주말 어때? 다들 시간 있어?”

“일단 저는 괜찮아요.”

“그래? 레니는 됐고. 에지오 너는?”

“음……”

주말, 주말이라.

오늘은 3월 31일.

내일부터는 4월달의 시작이다.

그리고, 4월이 되면……

“이번 주는 안 될 것 같은데.”

“아, 그래?”

무슨 일인지 묻지는 않는다.

고민하는 듯 턱을 쓰다듬던 알프리스가 이어 말한다.

“그럼 다음 주 주말쯤은 괜찮나? 근데 그때는 내가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저, 저는 항상 비어 있어요.”

“음? 왜? 평소에 할 거 없어? 원래 갓 입학했을 때 가장 활발하게 친구들이랑 놀 텐……”

말해놓고 아차 싶었는지 알프리스가 입을 다문다.

레니는 시무룩해져서 중얼거린다.

“……그건 아닌데, 주말엔 훈련만 하니까…”

“아, 그래. 음. 좋아. 그럼 레니는 언제든 괜찮다 하고. 에지오 너랑 나만 조율하면 되겠네.”

레니, 우리 말고 딱히 친구가 없구나……

그 말은 속으로만 삼키며, 이번 주와 다음 주 일정을 생각해본 내가 말했다.

“이번 주는 확실하게 안 될 것 같아. 다음 주는 아마 될 거고.”

“역시 바쁜 녀석이네… 여자 만나러 가?”

“그런 거 아냐, 임마.”

라고 말하긴 했는데.

……테트라 님은 여자니까 딱히 틀린 말도 아닌가?

아무튼.

“너만 된다면 다음 주 토요일 어때?”

“뭐… 그래, 나도 될 것 같다. 그러자 그냥. 다음 주 토요일 오후 2시쯤 그때 모였던 카페에서 만나는 걸로. 이럼 되나?”

문제 없는 일정이다.

레니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좋아. 그럼 그때 보자 다들.”

우리는 그 길로 각자 수업을 받으러 헤어졌다.

#15

알프리스한테 일정이 있다고 하긴 했는데, 사실 아직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가봐야 아는 거지.신출귀몰한 사람이라 했으니 내가 찾아갔을 때 자리에 있을지 없을지 아무도 모르는 거다.

……그런고로.

나는 이틀 뒤, 마법의 정점을 만나러 간다.

만일 마탑주와의 접견에 성공한다 해도 내게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채였다.

방법이 없다고 들으면 어떻게 할까.

있다고 하면, 그 방법은 뭘까.

이 역시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내가 이 쪽지를 들고서 이번 주말 아카샤의 별에 걸어 들어가야 한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기에.

아마도 그곳에 있을 한 아카데미 선배의 이름을 별안간 떠올리며, 이유 모를 회상에 잠긴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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