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 서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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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생회관에 서클 관련으로 찾아온 건 에지오뿐만이 아니었다. 오늘의 날짜가 바뀌기 전에 친구와 같이 서클 가입을 신청하러 온 신입생은 여럿 있었다. 루비아와 유리도 그중 하나였다.
관계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을 터인 방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익숙한 얼굴이 걸어 나오는 것을 본 루비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에지오 크라닐.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인연이 이어져 온 소꿉친구이자, 최근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남학생. 잠깐 멈칫하던 에지오와 눈을 마주친 루비아는, 곧 자연스럽게 그 뒤를 향했다.
모르는 여선배가 거기에 있었다.
뭔가 인사를 나누는 목소리도 들은 것 같았다. 에지오는 방금까지 저 여선배랑 대화를 나누고 있던 게 분명했다. 루비아의 판단은 신속했다. 늦은 밤이고, 에지오는 서클룸에서 나왔다. 명패를 보면 「마스터피스」라고 멋진 글씨체로 적혀 있다. 제공받은 서클 목록에서 저 이름을 본 적이 있는 것도 같다고, 루비아는 생각했다.
저기서 나왔다는 건……
바로 그때.
“뭐야, 네가 왜 여깄어?”
유리가 한 발자국 나서서 먼저 물었다.
잠시 뒤 에지오는 머쓱하며 반문한다.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안 되는 건 아닌데. 뭐 하러 왔냐는 거지.”
“그럼 그렇게 물으면 되지 뭘……”
목을 긁적이던 에지오가 문득 뒤를 돌아봤다.
“친구들이에요. 같은 반.”
그러더니 뒤편의 레이린과 무어라 얘기를 속닥거리며 나눈다.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인 레이린은 곧 후배들을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학생회관에서 좋은 시간 보내, 얘들아.”
바쁜 모양인지 별도의 인사는 없었다.
에지오를 밖으로 내보내곤 레이린이 서클룸의 문을 스르르 닫자, 길고 한산한 복도에는 에지오와 유리, 루비아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
“……”
“……”
부자연스레 경직된 분위기도 잠시.
“…아는 선배야?”
그리 물어온 건 유리가 아닌 루비아였다.
에지오는 루비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얘기한 적 있었는데. 나한테 서클 홍보왔던 선배들 중 한 명. 3학년 레이린 아이오나 선배야. 여기 지금 적혀 있는 패션 서클 회장이시고.”
레이린 아이오나. 보석처럼 예쁜 이름. 입속에서 레이린의 이름을 굴려대던 루비아가 조용히 이어 물었다.
“둘이 꽤 친하나 봐.”
“뭐… 그렇지?”
아예 친하지 않다고 하면 그건 또 거짓말일 것이었다. 일말의 고민도 없는 긍정에 루비아는 잠시 침잠한 눈빛을 했다.
…이런 걸 자신이 신경 써서도 안 되는 걸 알지만,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막을 방도가 달리 없었다. 정말로.
에지오는 루비아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또 새로운 인연을 만들었다. 언뜻 봤는데 과연 패션 서클 회장답게 스타일도 좋고 예쁜 선배였다. 에지오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관계도 썩 나쁘지 않아 보인다.
‘기분이… 이상해.’
언제나의 감각이었다. 가슴이 꽉 조이듯 약간 답답해지고, 에지오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신은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는데.
에지오는 갈수록 멀어지고 있는 기분이었다.
‘…왜일까.’
멀어진다고 느낀다면, 자신이 더 다가가면 될 일인데. 함부로 그럴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루비아는 자신이 정말 그래도 되는 입장인지, 하루에도 수 번은 진지하게 고민한다.
그렇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금 이 순간 에지오를 볼 때마다 수면 위로 떠오르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닫고 있는 도중이지만. 루비아는 자신이 그 감정을 평생 묻을 수 없을 거라는 걸 안다.
그렇게 되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다. 분명.
“너흰 어쩐 일이야?”
그때, 에지오의 물음에.
짧은 상념에서 깨어난 루비아가 답했다.
“우리는…… 서클 가입하려고 왔어.”
“아, 너희도?”
에지오가 알 만하다는 듯 머리를 주억이자, 유리가 슬쩍 에지오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며 툭 던지듯 물었다.
“왜 여깄나 했더니, 설마 저기 가입 신청 넣고 온 거였어?”
옆에 있던 루비아도 같은 생각이었다.서클 가입하려고 자신들처럼 학생회관에 찾아왔고, 방금 서클룸에서 나왔다면 목적은 아마 한 가지밖에 없지 않았을까.
“패션이라. 네가 그런 데 관심 있는 줄은 몰랐네. …으윽, 옷 걸쳐 입고 멋진 척할 거 생각하니 벌써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이야.”
“미안한데 여기 회장 선배가 나라면 제국 패션계를 뒤집어 엎을 수 있다고 하셨거든?”
“뭐? 뭘 어떻게 뒤집어 엎어? 충격과 공포로?”
“……”
할 말이 없어진 에지오가 고개를 내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여기 신청하러 온 거 아냐.”
“……아니라고?”
“어.”
“그럼 왜 저기서 나오는데?”
“모처럼 나한테 가입 권유를 해주셨는데, 내가 다른 데 들어가게 돼서 아무래도 안 되겠다고 거절하러 온 거지.”
“아니, 가입하면 가입하는 거지 뭘 따로 알리기까지……”
“미안하니까 그런 거 아니겠냐. 모르면 조용히 해. 임마.”
“그니까 미안할 게 뭐가 있……”
에지오가 유리를 지긋이 응시했고, 사사건건 태클을 걸던 유리는 조용히 에지오의 눈을 피해 옆을 돌아봤다. 거기엔 아까부터 부쩍 말수가 적어진 루비아가 있었다.
“얘랑 난 지금부터 신청하러 갈 건데, 넌 따라오지 마. 혹시라도 우리가 들어가는 거 보고 네가 따라 신청할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걱정인지. 잘도 그러겠다. 에지오는 별 생각 없이 어깨를 으쓱였고, 유리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럼 우리는 이제……”
“에지오.”
유리가 루비아를 이끌고 어딘가로 향하려던 순간, 루비아의 입이 불현듯 열렸다.
“어, 왜?”
무슨 일일까.
에지오가 짧게 반문했다.
잠시 뒤.
“서클, 어디 들어갈 거야?”
“……”
뭐야, 그런 거였나.
그러고 보니 레이린한테도 말해주기로 하고 깜빡한 에지오였다. 어차피 달리 숨길 것도 아니었어서 의문에 흔쾌히 답해주었다.
“여러 가지 생각해 봤는데, 역시 처음에 끌린 게 최선의 선택 같더라고.”
“그래서 어디……”
“여행. 서클명은 「엑소더스」였나?”
엑, 하는 유리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뭘 그렇게 놀라?”
“아니… 진심이야?”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뭐 하냐.”
유리는 명백히 당황한 눈치였다. 여행 서클에 관한 얘기를 나누긴 했으나 정말로 거길 선택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반응.
에지오도 처음엔 여행 서클에 가입할 생각이 없었다. 하는 김에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선택해서 새로운 서클을 신설할까도 고민했었다.
다만 그건 너무 관리할 게 많을 듯해 귀찮을 것 같아 그만두었고, 결국 이런저런 흐름에 따라 여행 서클을 택하게 되었다.
뭐… 정 뭐 하면 탈퇴라는 방법도 있고. 중앙 서클이 아니라면 중복 가입이란 선택지도 있었으니까. 가브리엘의 경우 어쩐지 중앙 서클인 헬스 서클에 강제 가입을 하게 된 터라, 에지오가 향할 여행 서클엔 가입을 못 하게 되었다. 거기서 탈출하지 않는 이상은. 불쌍한 녀석 같으니.
에지오 역시 만만찮은 운동 매니아였지만, 서클 활동까지 근육에 파묻혀 살고 싶진 않았다……
“…굳이 거길 들어가야겠어?”
“내 마음이지. 왜. 뭐. 문제 있어?”
“……하아.”
그건 맞긴 하지. 곤란하다는 듯 유리가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옆을 돌아본다. 그러곤 루비아의 반응을 살피는데, 루비아는 말만 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정작 유리보다 더 곤란한 얼굴이었다.
다만 유리와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루비아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우리도 거기 들어가려고 했어.”
“……어, 진짜?”
에지오는 눈을 깜빡였다. 얘기를 나눴을 때부터 그쪽으로 기울긴 하는 것 같았는데, 설마 같은 서클에 가입하게 될 줄이야.
이제 와서 둘 사이의 합의로 이루어진 결정을 무르기도 뭣했던 까닭인지, 유리는 골치 아픈 기색만 드러낼 뿐이었다.
딴에는 “저 녀석과 같이 여행이라니…… 으으으으……”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막상 여행 일정이 정해지거나 하면 먼저 내빼지는 않을 것이었다. 대신 잠자리 선정 등에 있어 매우 까다로운 선택을 하게 되겠지. 어차피 에지오가 없다고 해도 이성과 여행을 함께한다는 것에 대해 무척 깐깐한 태도를 보일 게 분명했지만은.
“싫은데… 절대로 싫은데에에……”
유리가 얼굴을 감싸며 신음하고 있자, 에지오는 씨익 웃으며 유리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잘해보자, 우리.”
“싫어어어……”
물론 악수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손을 거둬들인 에지오가, 이번에는 유리 옆의 루비아를 보았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던 루비아는.
“…괜찮겠어?”
“어, 뭐가?”
그런 물음을 던져왔다.
…괜찮냐니?
“불편하지… 않아?”
“?”
불편할 게 뭐가 있겠는가.
질문의 의도를 해석하지 못해 고개를 잠시 갸웃하던 에지오는, 결국 루비아의 말뜻과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불편하지 않으려고 가는 거지. 지금의 나한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여행 좀 다녀보려고 하는 거니까.”
“그게 아니라……”
“…응?”
고개를 두어 번 휘휘 내저은 루비아.
“……아냐. 아무것도.”
결국 상황을 무마시키는 말을 입에 담는다.
“그래, 뭐…”
뭔가 떨떠름하지만 에지오는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 제펠린 교수와 나눴던 대화를 우연찮게 엿들은 탓에, 말은 저렇게 해도 자신과 같은 서클에 있으면 불편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루비아가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마도 계속 모를 것이었다.
“여하튼 잘해보자. 너희랑 함께라면 재밌는 일도 많이 생길지 모르겠네.”
여행은 대체로 즐거울 테니까.
루비아가 애매한 끄덕임을 보이는 새,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난 그 반대일 것 같은데……”
아까부터 궁시렁거리던 유리.
“너는 뭐 이렇게 불만이 많아. 임마.”
말 안 듣는 딸을 보듯 미간을 좁힌 에지오가 유리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려 하자, 유리는 갸악 하는 소리를 내면서 뒤로 냉큼 물러났다.
그러더니 매끈한 자신의 이마를 두 손으로 철저히 감싸 보호하는 포즈를 취하곤 바락 소리친다.
“함부로 손대지 말랬지!”
“아직 안 댔잖아.”
“대려고 했잖아!”
“그래서 안 댔잖아.”
“기회 생기면 또 손댈 거잖아!”
“그렇지 않을까?”
“뭐가 그렇지 않을까, 야!”
정말 쓰잘데기없는 유리와 에지오의 대화를 지켜보던 루비아는, 옆에서 조용히 어설픈 웃음과 함께 볼을 긁적이고 말았다.
#3
그 길로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된 세 명이었다.
자기들이 아는 친구들 중에선 스텔라를 제외하곤 여행 서클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 얼마 없어, 오늘 가입을 신청하는 멤버는 이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
“……”
“……”
“……?”
「엑소더스」서클룸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뮤의 모습을 발견하곤 그대로 멈칫한 에지오와 유리, 루비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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