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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06화 (106/201)

〈 106화 〉 서클 (3)

* * *

#4

한쪽 팔 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고민하는 듯하던 뮤가 근처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썹을 치켰다.

“아, 에지……”

고개를 돌린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맞이하자 금세 얼굴에 미약한 화색이 돌았던 뮤였으나.

‘……왜 저 사람이랑 같이?’

전혀 예상지 못한 장소에서 마주쳤다는 듯, 놀란 표정을 한 에지오의 옆에 들러리처럼 붙어 있는 루비아와 유리를 보곤 얼굴이 빠르게 굳었다.

“안녕, 뮤. 여긴 무슨 일이야?”

“아, 안녕. 에지오. 어……”

에지오와는 짧게 인사를 나눴지만.

“……”

“……”

뮤는 마른 침이 발린 입술을 달싹이는 걸 반복하며, 루비아와 눈을 지긋이 마주하고만 있었다.

의료원에서의 일 뒤로 둘은 딱히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마저도 중간에 벌어진 작은 사고로 인해 애매하게 끊겼던 탓에, 루비아와 뮤의 관계는 아직 친구 사이조차 되지 못한 그런 사이였다.

다만 남들 앞에서 대놓고 적대적인 태세를 취하진 않았다. 일단 여긴 누구보다도 에지오가 있었으니까. 뮤는 아무 말도 없이 루비아를 응시했으나, 그에 루비아는 작은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안녕, 뮤. 여기서 또 보네.”

“……”

겉으론 반가운 웃음을 표방하고 있지만, 뮤를 향한 루비아의 시선은 다소 복잡한 감정을 띠고 있었다.

저번에 공터 벤치에서 화기애애한 이야기꽃을 피우던 에지오와 뮤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던 까닭이다.

그때 루비아 자신은 그걸 뒤에서 조용히 지켜 보았고, 아이리스의 등장으로 깜짝 놀란 탓에 그만 넘어져 존재를 발각당하고 말았다. 그걸 에지오와 뮤가 지금도 신경 쓰고 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 외에도.

루비아는 원체 뮤라는 사람—에지오의 전 여자친구—의 존재를 달갑게 여기진 못할 입장에 놓여 있었기에, 방금처럼 평범을 가장해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반응을 대신하자, 루비아의 옆에 있던 유리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온다.

“나, 나도 안녕. 뮤.”

“……?”

“그… 나, 나 알지? 유리 폰 아르티나라고 하는데……”

유리의 말끝은 긴장으로 떨리는 채였다.

명백한 사실만 말하자면, 유리와 뮤는 친하지 않다. 그전에 일단 대화 몇 번 나눠본 적 없는 사이다.

서로의 존재는 깨닫고 있지만, 정작 유리는 루비아와 스텔라 등과 먼저 친해져 이미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상태였다. 하여, 대체로 혼자 다니는 뮤와 개인적으로 얘기를 나눌 기회가 별로 없었다.

유리가 뮤에 대해 갖고 있는 인상은 매우 좋은 쪽에 속했으나, 지극히 유감스럽게도 뮤는 에지오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적었던 까닭에, 애당초 둘의 상호작용이 잘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었다.

유리의 빳빳이 굳은 손인사를 보고선 에지오가 키득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그 어색한 인사 뭐야. 기계인 줄 알겠네.”

“벼, 별로 안 어색하거든?!”

“네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는데?”

“시, 시끄러……”

귀엽기는. 에지오가 이어 말했다.

“뮤랑 친해지고 싶어? 내가 도와줄 수 있는데.”

“뭐, 뭐어? 피, 필요 없어…!”

“…어? 필요 없다니. 지금 뮤가 네 친구로서 적합하지 않단 소리야?”

“……!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자꾸 놀리지 말라고!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유리가 빼액­ 소리를 지르며 에지오의 등짝을 후리려는 모습을 지켜보던 뮤의 머릿속에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같이 다닐 정도로 친해졌다고……?’

루비아는…… 그렇다 치고.

저 유리라는 여자애.

에지오와 상당히 친밀해 보인다.

장난까지 칠 정도로 친한 여자 사람 친구라…… 어쩌다 저런 관계가 되었을까.

에지오가 유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까진 잘 모르겠지만, 혹시 모를 ‘가능성’에 염두를 두고 벌써부터 오만 가지 뇌내 상상을 돌려보던 뮤가 마침내 반응을 보였다.

“…그래, 둘 다 안녕. 너희 에지오랑 많이 친한가 보네. 늦은 시간에 따로 같이 있을 정도면.”

유리는 그 대화 한번 제대로 하기 힘들다는 뮤에게 인사를 받아낸 게 은근히 감격이었는지, 일말의 두근거림마저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 자리에 에지오가 없었다면 뮤는 유리도 무시했겠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유리는 속으로 마냥 기뻐하는 중이었다.

일행을 돌아본 에지오가 말했다.

“얘네랑은 여기서 우연히 마주친 거야. 학생회관에 서클 가입 신청하러 왔더라고.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

“응. 너는 여기 왜 왔다고 했었지?”

“아직 안 말했어.”

뮤는 그러더니 이어 말했다.

“나도 똑같아.”

“……서클 가입하러 왔다고?”

“응.”

그랬던 건가, 싶으면서도 방금 뮤의 시선이 향하던 곳을 따라 돌아본 에지오의 표정이 일순 묘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설마… 너도 여기 가입하려고 온 거야?”

“여기라니?”

뮤가 고개를 기울이자 머리칼이 찰랑였다.

“「엑소더스」라고, 여행 서클 있잖아. 보니까 이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던데……”

처음 볼 때만 해도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안에 들어갈까 말까를 고민하는 듯한 얼굴. 정황상 확실해 보였다. 에지오의 물음에 뮤는 예상대로의 답변을 내놓았다.

“이름이 그거였는진 모르겠는데, 여긴 맞을걸. 그런데 문이 잠겨 있는 것 같아서——”

그리고.

“……어, 너도, 라니?”

에지오의 말에서 하나 암시된 사실을 그제야 자각한 뮤의 눈꺼풀이 스르르 말려 올라갔다. 무척 느릿한 속도로 크게 뜨인 뮤의 자줏빛 눈동자는 대단한 놀라움의 기색을 담고 있었다.

‘…설마?’

그러고 보니 가입할 서클에 대해 에지오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언제 한번 얘기를 나눠볼 생각이긴 했는데.

서클 활동에 흥미도 관심도 없어 강제 가입이란 얘기를 듣고 그냥 랜덤으로 아무거나 콕 찝어 선정했던 터라, 혹시라도 에지오와 같은 서클에 들어가 팀을 이루어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그랬었는데——.

“맞아. 우리도 여기 가입하려고 했거든.”

“!”

뮤가 입을 작게 벌렸다.

대충 명부에 이름만 달아놓고 회비만 내면서 정규 모임 같은 것엔 일절 출석하지 않을 셈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얘기는 180도 달라진다.

마침 서클의 취지도 ‘여행’이다.

에지오.

에지오와 여행.

지금까지 에지오와 사귀면서 정작 대륙 바깥이라거나 유명 관광지 한번 가보지 못했던 뮤였기에, 그러한 로망이 가득 담긴 여행이란 단어에는 기대감으로 두근거리는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먼 휴양지까지 이어지는 철도 위의 마력 열차 객실에서, 여행 당일 이른 새벽부터 준비한 도시락을 같이 까먹는다거나.

긴 시간의 기다림 끝에 설레는 마음을 안고 마침내 도착한 여행지의 해변가 모래사장에서­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가운데 밀짚모자를 쓰곤 맑은 물에 발만 담그며 함께 산책을 한다거나.

때마침 주위를 거닐던 여행객에게 사진기를 잠시 맡긴 뒤, 서로 팔짱을 껴곤 활짝 웃는 얼굴로 브이 자를 치켜든 채 그 순간을 한 장의 추억으로 남겨 영원히 기록한다거나.

바빴던 하루의 일정을 모두 마친 뒤, 어느 고급 호텔의 최상층에 위치한 럭셔리한 룸의 발코니에서 적당히 기분 좋은 취기가 오를 만한 와인 한 잔을 조용히 부딪친다거나­.

좋아하는 소설에 자주 나왔던 로맨틱한 장면들을, 어쩌면 에지오와 함께 재현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전이라면 당장 가자고 했을 텐데.’

……적잖은 시간이 흐르고 이런저런 많은 일을 겪은 지금에 이르러선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아주 작은 실현 가능성이라도 생겼다는 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보는 눈이 있어 겨우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며, 속으론 갖가지 밝은 빛의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던 것도 잠시.

다시금 뮤는 에지오의 말로부터 한 가지 사실을 발굴해 낸다.

이번에는 전혀 반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우리도, 라니?”

아니겠지.

아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지만.

“말 그대로야.”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얘네도 나랑 같은 서클 들어간대.”

에지오가 루비아와 유리를 돌아보며 그들을 가리키자, 뮤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잔뜩 복잡해진 심경을 맞이해야만 했다.

차라리, 다른 애라면 몰라도.

‘하필이면… 루비아가…’

인연 깊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같은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둘을 맘 편히 지켜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어린 시절에 에지오는 곧잘 루비아와 함께 여행도 많이 다녔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왠지 심술이 난 뮤는 자신이랑도 같이 여행 가자고 한참이나 졸라댔었지만, 결국 에지오와 단 둘이서 어딘가의 휴양지로 날을 잡아 떠나는 일은 없었다.

하여, 나중에 일이 어떻게 흘러갈진 몰라도, 만일 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에지오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자 했던 뮤였는데.

‘이럴 수는……’

루비아가 서클에 합류한 이상, 그게 될 리가 만무했다. 때문에 뮤는 어째서인지 루비아로부터 의도치 않게 방해받은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이도… 괜찮아지는 것 같고.’

지금 같이 다니면서도 그렇게 행동거지가 부자연스럽지 않은 걸 보면, 둘의 관계 회복도 차츰 진행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건 뮤에게 있어 별로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비록 헤어졌다곤 하나 아직 에지오를 마음에 담고 있는 뮤였다. 그의 곁에 친한 이성 친구가 존재한다면 당연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아주 오래전부터 뮤의 깊은 고민거리로 작용했던 사람이라면 더욱.

활동을 아예 안 하자니 둘이 뭐 하고 다니는지 신경 쓰이고. 그렇다고 같이 활동하자니 어쨌거나 같은 장소에 있는 둘을 직접 봐야 하고.

원체 누구 눈치 보는 성격은 아니긴 했지만, 가능하면 에지오와 둘이서 있을 때만 자신의 본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뮤였기에.

‘앞으로 어떻게 하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으나­.

이제부터 같이 활동하게 될 서클 내부에 신경 쓰이는 존재가 있어서 곤란함을 겪는 건 비단 뮤뿐만이 아니었다.

‘뮤랑, 에지오가, 같은 서클……’

유리와 늦은 밤까지 대화를 나누며 결국 여행 서클에 가입하기로 결정에 이르렀던 루비아.

그녀도 내심 심경이 복잡한 건 매한가지였다.

에지오와 어쩌다 보니 같은 서클에 가입하게 된 건 약간 좋으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데, 거기에 뮤까지 들어온다고 한다.

지금의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루비아는 아무것도 몰랐다.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되는 거야­.

차라리 지금이라도 가입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지만, 그렇게 되면 에지오는 자신이 없는 장소에서 뮤와—전 여자친구와—같이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것만큼은 어쩐지 눈 뜨고 보기가 힘들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

이미 한번 깨진 관계라지만­ 저번에 루비아가 보았던 것처럼, 둘은 점점 다시 친밀해지고 있었다.

아무렴 서로 잘 맞으니까 사귀었던 거겠지.

그러다 없어졌던 감정마저도 다시 생길 수 있었다.

어쩌면 여행이란 전환점을 통해 완전한 관계 회복에 성공할 수도 있을 거다. 루비아는 그 자그마한 불안을 계속 안고 살긴 싫었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을 꾹 깨물고만 있었다.

더군다나 최근 에지오와 스텔라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뒤로, 루비아의 영문 모를 감정은 한층 더 가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 탓에, 어째서인지 더 이상 뒤처지면 안 될 것 같다는 다급함이 루비아의 마음 한켠으로부터 생겨난 것도 한몫했다.

아무튼.

자기가 왜 불안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지만.

그렇게 두긴 싫었다.

“……”

그리고.

마지막으로.

‘…좆됐네 이거.’

이미 한 번 고백했다 차인 전적이 있는 소꿉친구와, 둘도 없을 친밀한 애인 사이였다가 모종의 이유로 헤어진 전 여자친구가 같은 서클의 부원이 된 이 난장판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에지오는 작금의 순간을 태연하게 넘기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해야만 했다.

#5

“문이 잠겨 있다고?”

“응. 노크를 해봐도 안 열려서 돌아갈까 생각하던 중이었어.”

에지오는 「엑소더스」명패가 달린 문의 손잡이를 잡아 돌려 보았다. 물론 카드키를 대지 않았으니 당연하게도 열리지 않는다.

잠시 뒤, 귀를 갖다 대어 문에 바짝 밀착시켜보자 안쪽에선 무슨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방금 뮤가 언급하긴 했지만 혹시 몰라 문을 두드려 본다. 똑똑­. 노크 뒤에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네.”

꼭 서클룸에 부원이 항상 있으란 법은 없지만, 보통 이 시간대면 한 명쯤은 있을 법도 한데.

“내일 다시 와봐야 하나……”

가두 모집 기간에 끝나버린 탓에 입부 신청을 하려면 서클 관계자와 접촉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관계자가 자리에 없다면 나중에 다시 찾아오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서클 연합회실에 찾아가 명단을 구해온 다음 회장을 직접 찾아가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시간도 늦었으니 결국 오늘 신청하는 건 불가능한 셈이었다.

“오늘이 마감 기한 아냐?”

“그랬나?”

유리의 의문에 에지오는 턱을 쓰다듬었다. 담임 교수 타일러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됐든 가능한 한 빨리 가입하는 게 별 탈이 없을 텐데 말이다.

자리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 문으로부터 돌아선 에지오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오늘은 일단……”

바로 그 순간이었다.

“…너희들 거기서 뭐 하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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