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07화 (107/201)

〈 107화 〉 서클 (4)

* * *

#6

귀를 확 잡아끄는 목소리.

그곳에 있던 모두가 동시에 등 뒤로 시선을 옮기자, 거기엔 묘한 분위기의 실루엣이 있었다.

하늘하늘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허리춤 중간에 닿아 있다. 그 색깔은 스텔라의 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다만 스텔라의 백은발과 다른 점이 있다면, 스텔라는 별빛을 품은 듯 반짝이는 머릿결이고, 저 사람은 물안개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신비로운 은발이었다.

무엇보다 눈동자는 대해(大?)처럼 푸르고 맑다. 에지오보다는 조금 더 옅고 흐린 색깔.

신장은 루비아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큰 정도일까. 따라서 보폭도 그리 짧지 않다. 차분한 걸음걸이로 몇 걸음 앞을 향해 옮기니, 정체불명의 학생은 어느덧 에지오와 그들 앞에 도달해 있었다.

가까이서 본 그 혹은 그녀의 피부결은 무척이나 곱디 고왔다. 티끌 한 점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무결함. 아름답다, 라는 인상을 갖기도 전에 무심코 신령(??)이라 생각될 만큼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는 사람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할 말을 잊어버린 채 입을 작게 벌리고만 있는데, 그중 에지오의 눈에 순금으로 빛나는 별 세 개가 보였다.

에픽 클래스 3학년이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름을 몰라 일단 그렇게만 인사했다. 엉겁결에 에지오를 따라 루비아와 유리마저 인사하고 나니, 은발의 학생은 마주 고개를 끄덕여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안녕. 네가 에지오구나?”

“……저를, 아세요?”

에지오가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그렇게 묻자,

“그럼­. 당연하지. 너뿐만 아니라 저기 루비아, 유리, 그리고 뮤도. 다 알고 있어.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구나. 다들 예쁘고 멋진 후배들이네.”

후훗, 하고 짓는 따사한 웃음에 에지오는 목구멍으로 넘어가려는 침을 조용히 삼켜야만 했다. 비슷한 분위기의 스텔라에게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이 사람에게는 완연한 성숙미가 느껴졌던 탓이었을까. 과연 연상이었다. 그런 에지오의 살짝 긴장한 모습을 옆에서 흘겨보던 루비아는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내렸다.

“그래서, 너희는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던 거니? 혹시 우리 「엑소더스」에 볼일이 있는 걸까?”

묘한 분위기. 그리고 묘한 목소리.

그렇게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다. 굳이 따지자면 높은 하이톤의 미성에 가까울지 모르겠는데, 어조가 잔잔하고 부드러워서 낮게 들리기도 한다. 단순히 음성만 듣고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분간하기가 영 어려울 법한 중성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그것도 그거인데.

‘……’

에지오는 조용히 생각을 삼켰다.

이 사람… 치마를 입고 있지 않았다.

하의실종의 변태라는 소리가 절대로 아니었다.

은발의 선배는 보통 성별에 맞추어 입학 시에 지급되는 유니폼 치마가 아닌, 지금 에지오와 입은 것과 똑같은 유니폼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몸의 전체적인 비율도 좋고 기럭지의 길이도 상당해서 굉장히 잘 어울리긴 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여학생은 치마를 입고 남학생은 바지를 입으라고 규칙으로 딱 정해진 게 아니니까. 여자도 편의상 바지를 입을 수 있지.’

달리 말하면 규정상 남자도 치마를 입을 수 있단 소리겠지만, 그건 왠지 상상하면 끔찍한 그림이 나올 것 같아 그만두었다.

무엇보다.

이게 어떻게 남자야.

머리 긴 스텔라에서 인상을 좀 더 이국적으로 바꾸면 딱 이 사람이 될 것 같은데 말이다.

남자도 충분히 예쁠 수 있지 않느냐.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어찌 보면 편협한 시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는 입장에서 도저히 여학생이란 판단 외의 선택지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스텔라도 남자인 척하고 다녔긴 해.’

어릴 적 곱상하게 생긴 소년쯤 되어 보였던 스텔라는 지금에 이르러 성스러운 용모를 지닌 아름다운 소녀가 되어 있었다.

아니, 지금 이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에지오는 속으로 머리를 흔들어 상념을 전부 털어냈다.

일단 이 의문은 속에 담아두기로 하고.

에지오가 슬며시 중얼거렸다.

“’우리’ 「엑소더스」라면, 혹시……”

“맞아.”

아름다운 은발의 선배가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기품 섞인 몸짓이었다. 에지오를 비롯한 그들을 한번에 눈으로 훑으며 웃음을 짓는다.

“내가 에픽 클래스의 중앙 서클 중 하나인 유람(??) 서클 「엑소더스」의 회장, 3학년 세이라 데 바이에른이야.”

타이밍 좋게 등장한 서클 회장 세이라.

역시, 하는 마음으로 작게 감탄한 에지오가 잠시 옆을 돌아보다, 세이라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저희는… 세이라 선배님의 서클에 입부 신청을 좀 하려고 찾아왔습니다.”

#7

“들어오렴, 지금은 나랑 너희 말고 아무도 없어.”

세이라를 따라 들어간 방은 어두컴컴했다.

“처음 홍보한 날엔 두 명 정도 찾아오고 말았었는데… 마지막쯤 되니까 네 명씩이나 오는구나. 서클이 한층 더 북적해질 것 같네.”

벽 어딘가에 있을 스위치를 더듬거리던 세이라가 딸칵­ 하고 불을 켜니, 곧 시야가 환해지며 내부 풍경이 드러났다.

“여기가, 서클룸……”

학교 생활에서 가장 기대했던 부분 중 하나인 서클 활동의 일면을 접한 유리의 눈빛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만일 침이 흐른다면 그 사실도 모를 만큼 입을 벌린 채로 서클룸의 여기저기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유리의 어린아이같은 순수한 모습을 보곤 세이라가 얕게 웃었다.

“여기가 어떤 서클인지는 다들 알고 온 거지?”

“아, 네.”

에지오가 대답했고, 나머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세이라가 입을 열었다.

“그럼 더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형식적으로 설명해 보자면, 우리 「엑소더스」는 20년 전에 만들어진 비교적 신생 서클이야. 다른 유구한 역사를 가진 에픽 클래스의 기존 서클들에 비하면 다소 역사가 짧지만, 지금은 규모가 꽤 큰 중앙 서클로도 인정을 받고 있고, 「엑소더스」 출신 선배님들의 후원금도 매년 적잖게 받고 있어.”

잠시 뒤 세이라의 입에서 나온 「엑소더스」서클 출신 선배들의 이름은, 에지오도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듯한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꽤 장장하신 고위 계층의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에지오는 짤막이 감탄하며 세이라의 말을 경청했다.

“서클이 만들어진 목적에 대해 소개를 하자면, 「엑소더스」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모토로 삼아 탄생한 서클이야. 때문에 단순한 여행이 아닌 ‘모험’을 하기도 해. 분기마다 제국 바깥으로 최소 일주일 이상의 긴 유람을 떠나기도 하고, 일정만 맞으면 부원들끼리 알아서 주말에 짧은 외출을 하기도 하고. 그런 식의 자유로운 서클 활동을 지향하고 있어.”

“바깥 여행에 참여할지 말지도 자유야. 에픽 클래스가 제국의 존귀한 보호를 받는 집단이긴 하지만, 대륙 구석까지 수행원을 파견해주진 않거든. 안전 방비를 위해 각자 가문의 수행원을 대동해도 되긴 하는데, 실제로 그러는 부원은 별로 없어. 그럼 모처럼의 ‘자유’가 제한되어 버리잖아?”

하기야 그럴 것이다. 아이들 노는 데 어른이 끼어 있는 것 같은 불편한 기분을 느껴야만 하겠지…

“더 자세한 건 입부 이후에 제대로 알려주도록 할게. 일단 마음껏 둘러보렴.”

세이라의 짧은 설명이 끝나자.

이제야 전경을 제대로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전문성 가득한 작업실 분위기가 물씬 났던 「마스터피스」의 서클룸과 달리, 「엑소더스」의 서클룸은 대체로 심플했다.

공간은 마찬가지로 널찍하지만, 있을 건 있고 없을 건 없는 느낌이다.

의자 몇 개와 테이블이 중앙에 놓여 있고, 저쪽 구석에는 피아노, 벽에 걸린 기타, 소형 냉장고와 고풍스런 접시, 컵, 주전자, 디저트용 쿠키 등…… 이것저것 뒤섞인 휴게소란 느낌이 강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테이블 옆 화이트보드와 그 뒤편의 벽면에 수놓아져 있는 여러 장의 단체 사진들이었다.

루비아와 뮤도 조심스레 서클룸 내부를 구경하는 새, 에지오는 화이트보드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기엔 부원들의 글씨로 보이는 것들이 어지럽게 낙서되어 있었다.

—★1학기 중간고사 이후 2분기 여행지 투표(by. 아루)★

—1. 마대륙 2. 마대륙 3. 마대륙 4. 마대륙

—└ 마대륙은 제발 너 혼자 가 미친년아

—(누군가의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그림)

—└ 정답 원시 고릴라

—└ 이거 누가 그렸냐 죽여버린다

—└ 아무도 본인이라고 말 안 했는데 혼자 찔렸죠? 특징 너무 잘 잡았죠? 완전 예술가였죠? 캬 지렸고 오졌고

—어제 수납장 안에 있던 내 과자 먹은 사람은 알아서 자수하도록. 내일 오전까지도 새로 채워져 있지 않을 시 서클 내 암묵적 합의에 따라 아루를 줘패겠음.

—└ 나 아니라고 진짜

—└ 누가 너랬음? 검거 완료

—xx월 xx일… 신입이 없다… 내 서클이 망했다…

—└ 네 서클 아닌데? 세이라 서클인데?

—아 배고프당

“분위기가 좀 산만하지?”

어느샌가 세이라가 에지오의 옆에 있었다.

“다들 활기차 보이긴 하네요…”

확실히… 글씨에서부터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다. 부원들이 이 자리에 없어도 대충 평소에 어떤 분위기인지 알 만하다고 해야 할까.

서클에 소속된 부원 중엔 귀족들이 태반일 텐데 잘도 이러고 노는구나 싶으면서도, 그게 별로 나쁘단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래 이런 느낌이야. 부원들 중에 자유분방한 친구들이 좀 많거든. 게다가 걔네랑 같은 서클에서 어울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친구들도 물든다고 해야 하나… 아하하, 아무튼 그래. 저렇게 보여도 다들 착하고 좋은 친구들이야.”

세이라는 부끄러운 듯 볼을 긁적였지만, 정말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좋은 친구들이라며 부원들을 언급할 땐 은은한 기쁨마저 묻어 나오던 것을 보면, 아마 이 서클에 대해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것치곤 선배님은 차분해 보이시네요.”

“나? 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부원들을 제대로 잘 이끌어야 하는 회장이니만큼, 어느 정도 통제력과 절제력은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보이나? 나, 난 잘 모르겠는데…”

에지오와 세이라의 얘기를 몰래 듣고 있던 루비아와 유리도 긍정하는 모양새였다.

잠시 애매하게 웃던 세이라는,

“너희들 앞이라 괜히 얌전해 보이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 기껏 입부하려고 들어왔는데 도망가면 안 되니까 말야.”

라고 말했다.

…그 발언은 조금 무서울지도 모르겠다고 내심 생각한 에지오였다.

“그런데, 내 첫인상이 어땠길래 그러니?”

세이라의 순수한 물음이었다.

에지오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어… 처음 뵈었을 때부터 되게 성숙하고 예쁘신 선배님이라고 생각했어요.”

“…성숙? 예쁘다고……?”

세이라가 멍하니 고개를 갸웃하자.

“……아, 제가 너무 직설적으로 말씀드렸나요? 전 그냥 칭찬의 의미로…”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음, 그렇구나. 에지오 너는 나를 성숙한 여성으로 봤단 얘기지. 으으음.”

무슨 반응인지 감을 잡기가 힘들었다. 에지오의 후진 없는 칭찬에 약간 부끄러워하는 것 같기도, 어색해하는 것 같기도, 조금 곤란함을 겪는 것 같기도 했다. 세이라의 그런 반응을 흘기던 유리가 매우 질렸다는 듯한 얼굴로 에지오를 바라봤다.

“……지금 선배한테도 작업 거는 거야? 저질.”

“아니, 뭔……내가 그러겠냐?”

“응.”

“……”

에지오 스스로 맹세컨대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 다만 유리처럼 객관적인 시선에서는, 저 사기적인 외적 조건을 이용해 멘트를 던지는 꼴이 썩 능숙해 보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음, 으음, 으으음……”

아무튼.

세이라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자리에 있던 루비아와 뮤도 에지오 쪽을 돌아보며 작고 어두컴컴한 감정의 꽃을 피우던 새,

“그게, 나는 있지… 이런 오해는 자주 받아서. 날 누구한테 소개할 때마다 매번 똑같이 해명하긴 하는데, 이번에는 기분이 좀 더 이상하네. 아하하…”

대체 무슨 오해일까.

에지오를 제외한 이들은 그 어떤 가능성도 떠올리지 못했다. 자신들이 보기에도 영락없는 소녀상의 아름다운 선배님이, 사실을 알고 나면 자연히 경악할 수밖에 없는 비밀을 안고 있다는 것을. 어쩌다 보니 의도치 않게 비밀이 된 셈이지만 본인이 그것을 숨길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도.

“너희들도… 에지오랑 같은 생각이니?”

뭘 말하는 건지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멀뚱히 세이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 루비아와 유리, 뮤.

“하아… 그러니까…”

그들을 차례로 천천히 돌아본 세이라가 짧은 침음성을 삼켰다.

그리고는 볼을 긁적이며 부끄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정상적인 취향을 가진 성인 남성이라면 무심코 한눈을 팔 수밖에 없을 정도로 청순한 미소였다.

“나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야. 얘들아.”

바로 그 순간.

결국 예상을 비껴가지 않은 대답에, 에지오는 미리 대비하고 있긴 했어도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라니.

저 얼굴, 저 몸으로 남자라니……

에지오는 처음부터 약간 의심을 하고 있던 부분이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 나나, 나난나, 남자———갸악?!”

당사자한테는 매우 실례스러운 반응이 아닐 수가 없지만, 유리는 마치 불가해한 존재를 마주한 것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치더니, 결국 단단한 벽에 뒤통수를 거하게 부딪치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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