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09화 (109/201)

〈 109화 〉 서클 (6)

* * *

#12

벌컥 열린 문 밖에서부터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사람은, 서클룸 안의 못 보던 얼굴을 발견한 작은 키의 여학생이었다.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데굴데굴 굴러가던 눈동자가 대각선에 위치한 에지오와 잠시간 마주친다.

“…뭐야, 얘네는?”

의문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응, 모르겠어? 아루. 내가 보기엔 얘들이 여기 있는 이유는 딱 하나뿐인 거 같은데.”

그 뒤에서 또 다른 여학생이 말한다.

아루라고 불린 여학생은 에지오와 눈을 마주한 상태에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윽고 설마­ 하는 눈빛으로 뒤를 서둘러 돌아본다.

“그, 그럼, 혹시…!”

“세이라. 신입들인가?”

중후한 음성.

가장 뒤편에 서 있던 거대한 체구의 남학생이 한마디를 내뱉자, 주변 공기가 묵직하도록 한 차례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일대를 뒤덮었다.

그에 세이라는 앉은 자세 그대로 머리를 주억인다.

“맞아. 오늘부터 우리랑 함께하게 될 신입 부원들이야. 다들 귀엽고 착한 아이들이니까 앞으로 친하게 지내길 바라.”

그런 세이라의 말에.

“안녕하세요, 선……”

저들이 누군지 대강 눈치를 챈 에지오가 먼저 일어나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오.”

아루가 눈을 빛냈다.

자리에 굳어 멀뚱히 에지오와 루비아 등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아루의 시선이, 그들에겐 영 부담스러웠다.

“그렇구나­. 신입이란 말이지.”

다음으로 건강미가 물씬 나도록 살갗을 적당히 태운 여학생—— 네메시스는 흥미로운 듯 콧소리를 흘렸다.

그리고는.

“야, 튀폰.”

“뭐.”

“인상 풀어. 애들이 니 얼굴 보고 겁먹잖아. 괜히 신입들 앞이라고 가오 잡지 말고. 짜샤.”

“난 평소랑 똑같아.”

“그러니까 웃으라고, 웃어. 안 그래도 험악한 얼굴 인상도 안 피면 진짜 곤란한 거 몰라? 내가 웬만해서는 잘 안 쪼는 성격인데 너 처음 봤을 땐 진짜 지리는 줄 알았다니까?”

“닥쳐. 네메시스. 내가 알아서 해.”

“알아서 하긴 뭘 해. 알고 보면 숫기도 전혀 없는 주제에. 큭큭.”

“……죽여버린다.”

“죽여? 나를? 어디 한번 해보시든가. 개인 평가 랭킹에서 나한테 처발린 튀폰 씨.”

“연무장으로 따라 나와. 오늘 결판을 짓자.”

“뭐? 싫어. 내가 왜? 난 이미 너보다 강하다는 결론이 나왔는데? 내 불주먹 한 방이면 금세 나가떨어질 주제에­.”

“그땐 컨디션 문제였고. 지금은 달라. 따라 나와.”

“컨디션 이슈 핑계는 지랄. 그보다 지금 신입들 앞에 있는 거 안 보여? 가긴 어딜 가.”

“아, 그랬지.”

자기들끼리 치고 박기 시작하던—네메시스가 일방적으로 튀폰을 놀리는 듯한 모양새였지만—두 학생의 앞에서, 인사할 타이밍을 어정쩡하게 잡고 있던 에지오에게 문득 시선이 꽂혔다.

“드, 드디어, 나한테도 후배가…!”

파릇파릇한 신입생.

아루의 가슴팍에 달린 것은 별 두 개.

에픽 클래스 2학년으로서, 신입생들이 들어오지 않았던 지금까지 서클의 막내를 담당하던 아루는, 드디어 막내 자리에서 탈출하게 되었음에 무척이나 감격하고 말았다.

그래봤자 워낙 위아래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인 성격 탓에 막내란 게 별 의미는 없었지만 말이다.

“얘들아.”

그때 세이라가 모두를 불렀다.

“나는 잠깐 저기서 할일 좀 하고 있을 테니까, 너희끼리 일단 자기소개라도 하고 있을래?”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교차했다.

잠시 뒤.

“좋아!”

씨익 웃은 아루의 송곳니가 반짝였다.

#13

중앙 테이블의 왼쪽 라인에는 에지오, 뮤, 루비아, 유리가 차례로 줄을 지어 앉았고, 오른쪽 라인에는 네메시스와 튀폰, 그리고 아루가 저마다의 자세로 착석한 채였다.

아루는 어쩐지 동질감이 느껴지는 듯한 싱글벙글한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으며, 유리는 그런 아루의 시선을 조금 부담스러운 듯 살살 회피하고 있었다.

사각, 사각­.

어색하다면 어색하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침묵이 감도는 새, 저편에서 세이라가 종이 위에 펜을 끄적였다. 사각거리는 소음이 조용하게 울려 퍼졌다.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포니테일로 묶은 흑발을 살랑거리던 네메시스가, 자기 앞의 에지오를 여전히 흥미로운 듯한 눈길로 직시하고 있었다.

튀폰은 묵직하게 팔짱을 낀 채 루비아를 내려다보는 중이었고. 앉은 키만 해도 루비아보다 머리 두어 개쯤은 큰 것 같았다. 저런 튀폰의 육중한 체구를 온전히 버텨내는 의자 설계의 비밀이 문득 궁금해진 에지오였으나, 그 의문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없었다.

“우리가 먼저 소개하는 게 나을 것 같네.”

한참의 정적 뒤, 드디어 처음으로 대화의 포문을 연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네메시스였다.

“나는 네메시스 아르고노이. 제국 출신이고, 여기 있는 튀폰, 그리고 세이라와 똑같은 에픽 클래스 3학년이야. 너희처럼 1학년 때 세이라와 같이 이 서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어. 너희보다 2년 선배인 셈이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세이라한테 물어보지 말고 나한테 물어봐도 돼. 아마 어떤 부분에선 내가 세이라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게 있을걸? 예를 들어 식량이 떨어졌을 때 동물을 사냥하는 방법이라든가……”

그건 좀 흥미롭네. 에지오가 생각했다.

네메시스의 짧은 소개가 끝나고, 그 옆에 있던 튀폰이 느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튀폰 드 그레이, 다. 방금 네메시스가 말한 대로 3학년이고, 똑같은 제국 출신에, 음…… 별로 할 말은 없군. 궁금한 게 있다면 나한테 물어봐도 좋아. 내가 아는 선에서 대답해줄 용의가 있으니까.”

그쯤에서.

“튀폰.”

“닥쳐.”

“예쁜 후배들 앞에 있다고 긴장했어?”

“닥치라고 했지. 네메시스.”

선배들의 등장에 살짝 긴장한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루비아, 그리고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뮤, 마지막으로 유리까지 앞에 두고서 평소보다 위압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 튀폰을 보고선 네메시스가 툭툭 장난스레 말을 던졌다.

아울러 효과는 굉장했는지, 좌중들의 눈에 확연하도록 튀폰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너희들이 이해해. 이 새끼, 2년 동안 여친 한번 없었……”

“아­ 안 되겠다. 너 따라 나와.”

드르르륵. 의자를 거칠게 뒤로 끈 다음 네메시스의 뒷덜미를 잡아 밖으로 이끌려던 튀폰을 제지한 건, 저쪽에서 그쯤 하라는 듯 아하하­ 하며 웃고 있던 세이라였다.

“…후우. 한 번만 더 지랄하면 목을 따버리겠어.”

“네에, 네에­. 큭큭.”

솥뚜껑만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린 튀폰이 분을 삭이며 자리에 도로 착석했다. 네메시스는 그런 튀폰의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옆에서 키득거렸다. 분노에 차 순간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튀폰의 박력에 압도될 만도 했는데, 네메시스는 아주 여유로이 받아칠 뿐이었다. 어차피 튀폰이 날고 기어봐야 자신의 손바닥 안이라는 듯. 사실 그건 딱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긴 했다.

“흠, 흠.”

헛기침 소리가 울렸다.

의자 위에 양반다리로 앉은 아루가, 유리를 포함한 신입 부원 모두를 눈으로 둘러보며 생글거리는 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나는 2학년 아루 리노. 미리 말하는데 난 제국 출신 아냐. 저기 다른 섬나라에서 왔거든. …음, 그리고, 이 서클에서 활동한 지는 일 년 정도 됐어. 좋아하는 건 공부를 제외한 모든 거? 응, 그거고. 주특기는 그리고 지금까지 막내로서 팀의 귀여움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젠 네가 더 귀엽네! 너 이름이 뭐야?”

네메시스와 아루도 그렇지만, 튀폰의 거대한 남성성에 살짝 눌려 있던 유리에게 아루가 말을 걸어왔다.

선배의 질문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유리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유리 폰 아르티나, 라고 하는데요……”

“유리! 이름도 귀엽네!”

눈을 반짝인 아루가 손을 척 내밀었다.

“잘 부탁해!”

“…네, 네에. 저야말로.”

유리는 얼결에 아루와 손을 맞잡았다. 둘은 체구도 비슷하고, 손 크기도 비슷했다. 왠지 흐뭇한 미소가 떠오를 것 같단 생각에, 에지오는 무심코 흐를 것 같던 웃음을 티내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귀여운 여동생이 한 명 더 추가된 느낌. 하지만 아루는 선배였다. 제대로 친해지기 전까진 대놓고 유리한테처럼 장난을 칠 수도 없었으니, 살짝 아쉬움을 느끼고 말았던 에지오였다.

“우린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

“…그런가요?”

“응. 분명.”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던 아루의 말뜻도 정확히 모른 채, 유리는 그저 갸웃하던 고개를 가만히 끄덕일 뿐이었다.

그렇게 아루의 차례까지 끝나고.

네메시스가 말했다.

“나머지는 오늘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는데, 뭐 그때 따로 인사하면 되겠지. 일단 우리들의 소개는 여기까지야.”

네메시스는 신입생들을 차분하게 돌아본 다음, 에지오의 쪽에서 시선을 멈춘다.

잿빛 머리칼과 신비한 푸른 눈동자를 가진 미소년.

누군가 에지오를 처음 볼 때마다 느끼는 감정이란, 대개 감탄 섞인 호의에 가까웠다. 네메시스 또한 동급생 중에서 에지오 만한 인물을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가까이서 그의 모습을 관찰하니 더욱 놀라움의 연속이었던 탓에, 네메시스는 문득 자신 옆에 앉은 튀폰을 바라보았다.

“뭐.”

튀폰이 어쩔 거냐는 듯 네메시스를 내려다보았다.

“아냐.”

네메시스가 방긋 웃었다.

혹시라도 신입생들에게 관심이 생겼다면 미리 포기하는 게 좋을 거라고, 네메시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에게 눈이 제대로 달려 있다면 저 남자애보다 튀폰에게 더 강한 호감을 느낄 리 없을 테니까. 이 덩치만 큰 인간 고릴라를 과연 누가 데려갈까, 싶은 생각만 속으로 삼키던 네메시스였다.

아무튼.

다음으로, 신입 부원들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에지오 크라닐입니다. 이번에 새로 입학한 신입생이고……”

“에지오 크라닐!”

바로 그때.

네메시스가 손뼉을 짝 쳤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새.

네메시스는 흥미 짙은 얼굴로 소리친다.

"네가 걔구나? 재능 살인마!"

"……?”

이건 도대체 또 무슨 헛소리인가 싶어, 에지오는 잠시 아찔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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