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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11화 (111/201)

〈 111화 〉 서클 (8)

* * *

#17

어떤 아카데미에서 에픽 클래스가 한 명 배출되었다고 치자.

만일 그 아카데미가 기존 명문이 아니었다면 순식간에 명문이란 꼬리표를 달게 될 테고, 본래 위상과 관계없이 올바른 인재 육성을 위한 제국의 지원금을 받는 등 여러 혜택이 쏟아질 터다.

홍보 효과도 탁월하겠지.

프론티어의 일반 클래스 학생을 배출한 것도 충분히 모범 사례로 삼을 만한데, 까마득히 넓고 넓은 제국에서 전 대륙을 대상으로 한 모집에서 단 열다섯 명만 뽑는다는 에픽 클래스가 졸업생 중에 나왔다­?

그 지역에 사는 학부모들이라면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을 거다. 자기 자식을 그 아카데미에 보내려 다들 혈안이 될 것이다.

다만, 소위 ‘어쩌다 얻어걸린’ 경우도 있겠으나, 일단 한번 배출하기만 하면 막대한 자금이 제국으로부터 지원되기 때문에, 정말로 약소했던 아카데미가 명문이 되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물론 학장이 지원금을 가지고 별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이리저리 구구절절 늘어놓긴 했어도, 결국 에픽 클래스가 가지는 위상이란 그런 것이다. 아무도 쉽게 넘볼 수 없는 제국 최고의 아웃풋이 되는 셈이다.

명문(名門)이라는 말을 덧붙이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에픽 클래스는 오롯하게 에픽 클래스다. 거창하다면 거창한 ‘제국의 미래’란 수식어까지 따라붙는다. 그렇기에 에픽 클래스는 그들만의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세 명이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라… 이거 뭐가 잘못된 거 아냐? 이런 경우는 살면서 들어본 적도 없다, 야.”

네메시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운명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일이었다.

이런 기묘한 만남이 또 있을까.

누가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기에, 원래도 친구였던 이들이 여기서 다시 모이게 된 건 어떠한 큰 흐름의 일부가 아닐까 하고, 네메시스는 생각했다.

지금쯤 에지오와 루비아, 뮤가 졸업했을 아카데미는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카데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대체 지원금이 얼마나 퍼부어질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학장은 매일이 황금빛이겠지. 유리잔을 들어 올리며 축배를 몇 잔이고 마셨을 거다. 당연히 얼굴 한 번 본 적 없으나, 행복으로 어그러진 학장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듯했다.

‘게다가 전부 우리 서클에 가입했단 말이지……’

이번 신입생들.

정말 심상치 않다.

“유리 폰 아르티나… 라고 했나?”

가히 기적에 가까운 확률에 경악 섞인 감탄이 연속으로 터지던 것도 잠시, 네메시스가 유리 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네? 네.”

“혹시 너도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야?”

“……네? 저는 아녜요.”

유리가 그리 부정하자.

“아.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네메시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세 명까진 겨우 이해하겠는데, 유리마저 이들과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하면 그거야말로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다. 아마 정신이 가출해 버리지 않을까.

정확히는 프론티어의 완벽한 시스템에 감히 의문을 품어 버릴 것 같다. 전산 과정에서 뭔가 치명적인 오류가 있었다든지…… 이들의 겉보기를 본다면 에픽 클래스에 헛으로 들어온 건 분명 아니다 싶지만서도.

그러던 순간.

“…아르티나­?”

고개를 갸웃하던 아루가 눈을 번뜩였다.

“유리 폰 아르티나. 아르티나… 맞네, 어디서 들어봤다 했더니 아르티나 왕국이었구나! 왕가의 성씨를 가지고 있다는 건, 그럼 너 왕녀라는 거야?”

처음엔 루비아에게 쏠렸던 시선이 이번에는 유리에게 집중되었다. 부쩍 늘어난 관심에 당황한 유리는 어, 어? 하면서 슬쩍 몸을 뒤로 뺐다.

“듣고 보니 그렇군. 거기라면 나도 들어본 적 있지. 꽤 귀하신 몸께서 오신 모양이야.”

마침내 감았던 눈을 뜬 튀폰이 말했다.

유리가 나고 자란 아르티나 왕국은 제국의 제후국 중에서도 나름 강성한 나라였던 까닭에, 대륙 지리나 정사에 밝은 이들은 곧잘 알곤 했다.

다만 에픽 클래스에는 황족이나 왕족이 입학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던 연유로, 그렇게 진귀한 풍경까지는 아니었으나, 여느 왕가의 사람을 엄청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쩐지 조금 희귀한 동물을 본다는 듯 네메시스의 얼굴 역시 짙은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유리는 살짝 곤란한 낯빛으로 입을 열었다.

“제가 거기서 온 건 맞긴 한데…”

“그래, 뭐 신분 신경 쓰지 말잔 얘기지? 나도 알아.”

네메시스가 너스레를 떨며 그리 말하자, 유리는 제 입으로 그렇다고 답하기도 뭣해서 입을 가만 닫고 말았다.

“일단 너희 셋은 전부 동문이라는 거고… 그럼 전부터 계속 아는 사이였겠네? 서로 친했어?”

다른 화제로 자연스럽게 말을 돌린 네메시스가 맞은편을 쭉 둘러보았다.

처음엔 긍정의 대답이 나올 줄 알았지만.

“아뇨.”

뮤가 단호히 말하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는 듯하던 에지오와 루비아는 앗… 하는 표정으로 뮤를 돌아보았다.

“야, 뮤……”

에지오가 작게 소곤거리는데.

“왜? 사실이잖아.”

뮤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칠 뿐이었다.

“…응? 안 친했어?”

“네. 셋 다 친한 건 아녜요.”

네메시스의 반문에 뮤가 답했다.

“저랑 에지오, 그리고 이 사람이랑 에지오가 따로 친했던 거죠. 저랑 루비아는 친하지 않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는 뮤. 확실히 친구였다면 그런 말을 본인 앞에서 서슴없이 꺼내기도 영 껄끄러울 것이었다.

게다가 ‘이 사람’이라니……

냉담한 뮤의 반응에 루비아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결국 목소리를 내는 일은 없었다.

“그, 그렇구나……”

뭐라 답하기가 애매해 네메시스는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조용히 생각했다.

‘그보다 너희 같은 반 아냐…?’

처음 대면했을 때부터 둘은 왠지 거리감이 있어 보이긴 했는데, 저렇게 쌀쌀맞은 태도로 대해도 되는 걸까 싶었다.

일단 오래 보고 지낼 사이잖나. 뮤에 대한 얘기는 건너건너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철벽을 치고 다녔을 줄이야. 과연 다가가기 힘들 법도 하다. 그러면서 에지오랑은 잘도 친구였다고 하는구만.

잠깐 어색해질 분위기를 걱정한 에지오가 어깨로 툭툭 쳐봐도 뮤는 뭐 어쩌라는 듯 멀뚱히 에지오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맞아요. 저희, 하나도 안 친했어요.”

“……?”

말이 없던 루비아는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뮤랑은 졸업 가까울 때쯤 얼굴 한 번 봤던 게 전부구요. 에지오랑은 8살 때부터 친했죠. 초등부 입학 전부터 알고 지냈으니까, 벌써 9년 정도 됐네요.”

아까도 들었던 말이지만 새삼 오래도 알고 지냈다. 루비아의 이야기에 아루가 놀란 기색을 띠며 말했다.

“초등부 입학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고, 9년 친구씩이나 되면, 그거네! 소꿉친구!”

“아, 네. 맞아요. 부모님들끼리 서로 친하셔서 자주 같이 놀고 그랬어요.”

“오와… 정석이네…”

지금 뮤의 표정이 어떻든 간에, 루비아는 작은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루가 신나서 말을 이었다.

“나 그런 거 되게 좋아하거든. 뭔가 로망 있지 않아­? 어릴 적부터 쭉 이어져 온 인연이라니. 서로 커가는 모습도 계속 옆에서 봤을 거 아냐? 완전 부럽다! 막, 막, 처음엔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친구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머리에 피가 마르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옆에 있는 소꿉친구에게 이상한 두근거림을 느끼게­ 으겍.”

“이상한 소리 하지 말랬지!”

“아, 왜!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둘 다 예쁘고 잘생겼는데 같이 지내면서 그런 장면 하나 없었겠어? 분명 우리한텐 말로 못 하겠지만 뒤로는 서로 짝사랑하고 있었을 수도…… 으갹.”

“진짜로 그렇다고 해도 얘네 앞에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야! 후배들한테 실례잖아 이 자식아!”

“아, 아! 알았어!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때려! 폭력 반대! 결사 반대!”

“네가 주먹을 부르는 짓을 하지만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을 거거든­?”

네메시스에게 엉망진창으로 꿀밤당한 얼굴 여기저기를 손으로 문지르며 울상을 짓는 아루를 바라보면서, 에지오가 깊은 한숨을 목구멍 속으로 삼켰다.

‘얘네는 갑자기 왜 이래……’

루비아가 뮤의 말을 되받아 서로 안 친하다고 딱 잘라 덧붙인 건 꽤나 의외인 일이었다. 성격상 일단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할 줄 알았는데­ 기름을 부을 줄은 몰랐지.

유리도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루비아와 뮤의 관계를 정확히는 모르고 있는 상태였으나, 방금의 상황을 거치면서 둘 사이에 말로 할 수 없는 뭔가 있다고 어렴풋이 깨닫는 중이었다.

한편.

“……”

아루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는 뮤의 입장에선, 상당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에지오는 과거에 실제로 루비아를 좋아했던 게 맞고, 지금은 떨쳐낸 것 같지만…… 아직 불안한 요소는 많다.

근데 불안하면 뭐 어쩔 건가.

아무것도 못 하는데.

남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 걸 구질구질하게 막을 권리가 그저 ‘친구’에게 존재하는가?

아마 없을 거다.

다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전혀 거리낄 것 없이 해버리고, 지르고 싶은 게 있다면 고민 없이 질러 버리던 뮤의 성격상­

아루의 말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다고.

에지오는, 자신과 사귀었다고.

이 사람이 저 사람 때문에 무척이나 힘들어할 때, 옆에 있어 준 건 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한 여자가.

바로 나였다고.

그러니까, 예전이었다면 쓸데없는 우위를 점하기 위해 폭탄을 떨어뜨렸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자기 때문에 에지오가 곤경에 처할 테니까.

그럼 에지오를 곤경에 처하지 않게 하는 선에서 작은 폭탄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무심결에 생각해 버린다.

여전히 뮤는 비상식적이었다.

때문에 지금 에지오를 좋아하는 사람은 루비아가 아니라 나라고, 여기서 콱 공개적으로 말해버릴까 싶었지만.

그것도 영 아닌 것 같아서.

뮤는 조용히 침묵했다.

“……”

이 마음을 언제 밖으로 꺼내게 될 수 있을지.

그렇게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뮤는 아무것도 몰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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