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12화 (112/201)

〈 112화 〉 서클 (9)

* * *

#18

분위기가 박살나더라도 시간은 흐르고 흐른다.

하던 건 전부 마쳐야 하지 않겠는가. 자연스럽게 유리의 턴으로 넘어갔다. 이름은 알고 있어도 다시 한번 소개하고, 아까 말했듯 왕녀고. 그 외론 딱히 말할 게 있나 싶었지만 하나 있긴 했다.

염동력을 쓸 수 있다는 유리의 말에.

—그게 정말이야?! 내 몸도 띄울 수 있어?

—되, 되긴 할지도 모르겠는데 좀 위험할……

—할래! 할래! 띄워줘! 재밌겠다!

—되겠냐! 안에선 위험하잖아!

—그럼 밖에서 하면 되는 거 아냐?

—지금은 늦었잖아. 얘네들도 쉬어야지.

—쳇.

그런 연유로.

“자, 우리 신입 부원들 소개는 이쯤 하면 됐고.”

유리의 차례까지 마치고 나서, 네메시스가 손뼉을 짝 치며 선후배 간 미팅의 종지부를 찍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 벌써 11시 다 되어 간다. 오래 붙잡아둬서 미안. 그래도 오랜만에 신입생들이랑 얘기하니까 재밌었다, 그치?”

직후 네메시스가 고개를 꺾었다.

“세이라­? 다 했어?”

“아직.”

세이라는 불퉁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그렇게 물어볼 거면 좀 도와주지 그래?”

“싫어. 귀찮은걸.”

전엔 착하고 좋은 애들이라 옆에서 잘 도와준다더니. 의자에 앉은 네메시스는 씨익 웃으며 기지개를 쭉 켜기만 하고, 튀폰은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아루는…… 염동력을 통한 비행 불가 선언이 떨어진 후환으로 테이블 위에 축 늘어진 채였다.

그런 아루에게 문득 네메시스가 말했다.

“맞아, 아루.”

“머.”

“오늘 보니까 수납장에 과자 안 채워져 있더라?”

화이트보드에 그런 내용이 적혀 있던 것도 같다. 과자 몰래 먹은 범인을 찾는 누군가의 필적.

“……그,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아루가 네메시스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리 얼버무리지만.

“그거야 네가 범인이니까!”

“나, 나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긴 뭐가 아냐! 내 과자 몰래 처먹은 녀석은 지금까지 너밖에 없었어 이 자식아!”

“끄아아아앙!”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실내 비행이다! 마음껏 윗공기를 마셔봐라!”

세상에나, 사람 머리 양옆에 주먹을 딱 붙이곤 그대로 들어 올렸다. 아루의 몸집이 작은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너무 쉽게 들어 올려지는 게 아닌지……

느닷없이 투닥대기 시작한 네메시스와 아루의 옆에서 튀폰은 콧잔등을 긁적였다. 알고 보면 숫기가 없단 말은 거짓이 아닌 걸까. 그는 후배들에게 섣불리 말을 걸지 못하고 있었다.

“그, 원래 좀 이렇다. 너희들이 이해해라.”

부끄러운 자화상이라도 되는 듯, 튀폰이 작은 한숨을 쉬며 신입 부원들에게 대신 사과했다. 루비아 쪽은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 하는 채로 말이다.

“활기차고 좋은데요, 뭐…”

에지오가 중얼거렸다.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이 중등부 시절을 보낸 에지오의 입장에선, 심심할 틈 하나 없을 것 같은 서클의 분위기가 온통 신선하기만 했다.

그러다 옆쪽에 눈길이 갔다.

‘……걱정이 산더미긴 한데.’

잘 지낼 수 있을까.

얘네랑.

에지오 자기 자신은 몰라도, 루비아와 뮤가 서로 친해질 수 있을까. 그렇게 나쁜 사이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얘네는 딱히 서로에 대한 인식이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루비아의 뮤를 향한 적대 비스무리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 모습은 에지오로서도 처음 보았다.

좀, 어떻게, 뭐 안 되나……?

자신이 어떻게 중재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닌 것 같은데. 인간관계에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모르겠으나, 에지오는 그다지 능숙한 편이 아니었다. 아무렴 그랬다면 계속 외톨이로 지내지 않았겠지……

유리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루비아를 뒤로하고, 에지오는 옆에서 가만 손을 꼼지락거리는 뮤에게 말을 걸었다.

“뮤.”

“…! 어? 어. 왜?”

이거 봐라.

금세 표정이 풀리고, 어벙한 얼굴을 보여준다.

뮤는 아무한테나 이러지 않는다.

오직 에지오한테만 이러는 거다.

에지오는 뮤로부터 특별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게 어쩐지 달가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이래서야 여기서 평생 친구 한 명 못 만들고 끝나버릴 텐데. 뮤도 겉으로 내색은 안 하나 사실 외톨이 생활이 힘든 게 아닐까. 물론 뮤의 경우는 자발적 외톨이긴 하다만……

아무튼,

게다가.

겉으론 이리 멀쩡해 보이지만, 그 속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곯아 있다는 것도, 이 방 안에서는 오직 에지오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그것도 결국, 자신과 연관되어 있었으니.

뮤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오롯이 에지오가 끌어안고 있는 셈이었다.

달리 말해 뮤가 곤경에 처했을 때 도와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소리기도 했다. 실제로 별반 다르지도 않다. 뮤는 에지오 외의 사람에게 절대로 의지하지 않았으니까.

에지오 자신한테 하는 것만큼 남들한테 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뮤 역시 예전에 비해 확 변하긴 했다.

원래는 평소에도 말괄량이 같은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얼음 풀풀 날리는 냉미녀가 되어 있지 않은가.

에지오 한정으로 해동되긴 하지만.

“나 왜 불렀어…?”

뮤의 조곤한 음성이 울린다. 바로 옆에서 들려온 터라 귓바퀴가 간지러웠다. 잠시 뮤로부터 거리를 떨어뜨린 에지오가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

뮤는 무구하게 머리를 기울인다.

그래.

너무 성급할 필요도 없다.

무언가에 쫓기듯 살지 않기로 했을뿐더러.

이제 막, 시작일 뿐이었으니까.

#19

“근데 있잖아, 세이라.”

“응?”

후유증으로 비틀거리다 바닥에 대자로 널브러진 아루의 볼을 콕콕 찌르던 네메시스가, 슬슬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던 세이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신입 부원도 들어왔는데, 오티는 언제 할까?”

오리엔테이션.

입학 초에 있을 예정이었던 교류회도 와락 엎어진 마당에, 연례행사 한 번쯤은 해야 하지 않겠느냐 싶은 마음들이었다.

이번 주 서클 일정을 훑어보던 세이라가 답한다.

“글쎄… 이번 주말이라도 당장 할 수 있지.”

“어, 이번 주말에 당장?”

“좋은데!”

아루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렇게 맞아놓고 잘도 일어서는 걸 보면,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몸이 꽤 튼튼한 모양이었다. 약하게 때린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실천 압축 근육이라든가 있는 거 아니겠지. 에지오는 조용히 생각했다.

“지금 여기 없는 애들은 뭐 저기 적어놓으면 알아서 확인하겠지. 이번 주말 괜찮지 않아? 일단 난 주말에 할 거 없으니까 괜찮은데.”

네메시스가 말했고.

“난 내일 저녁이라도 상관없어!”

아루가 만세 포즈를 취하며 다시 드러누웠다.

“난 아마 바쁠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은 최대한 맞춰 보겠……”

“바빠? 누가­? 네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어디서 바쁜 척하고 있어. 예쁜 후배들이랑 오티할 생각에 벌써 기대하고 있는 거 다 보이거든, 튀폰?”

“…넌 진짜 닥치라고 했지.”

튀폰이 손을 들어 네메시스의 얼굴로 가져가자, 네메시스는 꺄악거리며 뒤로 깡충 물러섰다.

“너희는 어때? 주말에 시간 돼?”

일단 셋은 전부 괜찮다고 한다.

남은 부원들은 그렇다 치고, 이 자리에 있는 에지오 등을 돌아보며 세이라가 물었다.

“어, 저는……”

가장 먼저 루비아가 대답하려는 새.

“죄송합니다.”

“……?”

“그, 저는 안 될 것 같아요.”

에지오가 번쩍 손을 들었다.

오티라. 오티. 재밌겠네. 에지오랑 함께라면 재밌을 것 같기도. 도서관리부엔 그런 거 없었으니까. 뮤가 그렇게 생각하며 오티 참여를 고려한 순간, 에지오가 갑작스레 불참 선언을 해버렸다.

세이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무슨 일 있니?”

“네. 잠깐 어딜 나갔다 와야 하는 일이 생겨서……”

“그렇구나. 토요일 일요일 전부?”

“아마 그럴 것 같아요. 중요한 약속이라 아무래도 취소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오티를 꼭 이번 주에 하셔야 하는 건 아니죠…?”

“그렇긴 한데……”

에지오의 말을 듣던 뮤는 그가 한 약속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일전에 에지오와 벤치에서 얘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뭐라고 했었지. 아카샤의 별에 간다고 했었나. 분명, 제3 마탑주 테트라 크로울리를 만나러 간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아.’

뮤의 눈가가 낮게 침잠했다.

그렇구나.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은 마음과, 에지오를 돕고 싶은 마음이 상충한다. 방법을 정말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자기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대마법사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모방의 영역을 넘어 창조를 하는 사람이니까. 없는 방법이라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에지오는,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미래를 상상하기가 두려웠다.

에지오의 불참이 확정된 이상 에지오를 빼고 오티를 진행할지, 아니면 나중에 부원들의 시간을 전부 맞춰서 그때 하는 걸로 할지. 세이라를 비롯한 선배 부원들은 고민하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뮤는 홀로 불안하게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잘못을 제 부모님에게 숨기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몰래 숨겨온 비밀이 들키면 혼이 날까 두려워 벌벌 떠는 모습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서 제 잘못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한테 상냥하게 대해주는 에지오의 얼굴을 볼 때마다 죄책감이 밀려온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

계속 이러고 싶어진다.

그냥 이대로 평생 잘못을 묻고 살아가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잘만 하면. 에지오와 다시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스스로도 무심코 실소가 흐를 만큼 머저리 같은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만일, 여기서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다면 기억이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자.

그럼 기억을 되찾지 않는 편이 자신에게나 에지오에게나 이로운 게 아닌가?

뮤는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해봤다.

전혀 실현 가능성 없는 얘기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나쁜 일은 전부 잊고.

좋은 기억만 남게 만든다.

자기만 어떻게 과거를 잘 떨쳐내는 데 성공하면, 에지오도 뮤 본인도 지금보단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여기서 과거를 잊은 건 에지오뿐이다.

자신은 잊지 못했다.

차라리 잊는 게 좋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들이다. 주말에 에지오한테 같이 가자고 부탁해 볼까.

그 뒤 에지오가 기억을 찾지 말도록 만들고, 자기는 그 대마법사한테 기억을 지워달라고 부탁해 보는 거다. 그러면, 그러면…….

‘……아.’

그때였다.

스윽­.

테이블 아래에서 누군가가 조용히 손을 맞잡아 왔다.

뮤는 흠칫하며 옆을 돌아봤다.

에지오의 푸른 눈동자가 비치고 있었다.

‘괜찮아’, 라고 입모양으로 속삭인다. 뭐가 괜찮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뮤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자신은 어느샌가 떨고 있었던 모양이다.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르며 뮤는 고개를 수그렸다.

뮤의 손등 위에 덮인 에지오의 손바닥은 서늘하고 차가웠다. 의자의 금속 파이프를 만지고 있던 탓에 차가운 손. 그러나 뮤에게는 따뜻한 손.

‘……미안해요. 선배.’

그의 얼굴을 차마 마주하지 못했다.

뮤는 고개를 뚝 떨구고 말았다.

도망치지 말자, 도망치지 말자. 그렇게 자신을 세뇌하듯 중얼거렸지만, 아직 완전하게 암시가 걸린 건 아닌 듯하다.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데 뭘.뮤는 한심한 자신을 비난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그래선 안 된다고.

“이번 주말은 에지오가 안 된다고 하니까, 다음 주나 다다음 주쯤으로 잡을까 그럼?”

“어… 근데 그때 중간고사 준비해야 하지 않아?”

“응? 아루 너는 어차피 공부 안 하잖아?”

“뭐?! 너무해!”

“너무하긴. 사실이잖니. 아무튼 이번 주말은 안 된다 치고, 다음 주 주말은 어때, 에지오? 그때도 바쁘니?”

“다음 주는 토요일만 약속 있어요. 일요일은 괜찮아요.”

“그때도 선약이 있는 거구나… 바쁘게 사네, 후배님.”

“아하하… 아녜요. 평소엔 되게 널널해요. 최근 유독 신경 쓸 일이 많아져 가지고……”

고개를 돌려 선배들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에지오는 뮤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부드럽게 포갠 채였다. 뮤는 어쩐지 부끄러움과 혼란 속에서 얌전히 다른 한쪽 손의 주먹을 꾹 쥐었다. 얼굴, 빨개졌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거울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뮤는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그렇게 많이도 잡아봤던 에지오의 손이건만. 더 커져서 그런 걸까. 이상하게 그때보다도 심장이 더 빨리 뛰는 것 같았다.

주위 사람들의 말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고, 네메시스와 아루 등으로 어지러이 시끌벅적하지만, 지금 뮤가 앉은 자리만큼은 어두컴컴한 동굴 속 고요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유유하게, 뮤의 심장만이 고동친다.

정말 나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조금만.

잠시만.

아주 잠깐만이라도.

더.

이 형태 없는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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