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낙인 (2)
* * *
#4
토요일, 대낮.
‘이런 복장이면 충분하려나.’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칼 끝자락을 매만져보던 내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곤 턱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귀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오늘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이다 보니 여러 가지에 저절로 신경을 쓰게 된다.
“으으음.”
어쩐지 자꾸 한쪽 머리가 삐죽 튀어나오는 것 같긴 한데, 몇 번 꾹꾹 누르자 대충 해결되는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이른 새벽부터 칼같이 기상하여 외출 준비를 모두 마친 내가, 거울 앞에서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긴장되네.’
어쩔 수 없었다.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대마법사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 엘레나 말로는 오늘 만날 수 있을지도 확신할 수 없다곤 했으나…… 혹시라도 접견에 성공하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꽤나 곤란할 것 같았다.
가서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까. 대뜸 엘레나의 쪽지를 내밀어야 하나?
아니, 그전에 아카샤의 별에 가면 어떤 식으로 테트라를 불러야 하지?아무것도 모르겠다.
모르면 이제부터라도 알아야지.
가면 알게 될 거다.
학생의 신분이라 비싼 옷은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단정한 셔츠에 바지 정도. 구두도 하나 있기는 한데, 품질이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이번에 피해 보상금이란 명목으로 돈이 꽤 쌓였긴 하나 옷을 구비한다는 걸 깜빡했다. 부디 이러한 복장으로도 테트라에게 폐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후우… 됐다. 가자.”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멨다. 방의 상태를 전체적으로 한번 점검한 뒤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지금부터 나는 각 학구의 출입 게이트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한다. 로비에서 헥토르 등을 마주쳤지만 개의치 않고 기숙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단 외출 허락은 받아야 하니까. 정확히는 기록을 남기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외출증을 끊기 위해 프론티어 본부로 먼저 향해야 했다.
학생의 외부 출입 기록은 각 클래스의 기숙사에서 담당하는 게 아니다. 프론티어 밖으로 나갈 일이 있는 학생은 프론티어 본부에서 행정을 처리해야 한다. 어차피 본부가 있는 곳에 출입 게이트도 있으니, 이동 과정에서 생기는 귀찮음도 덜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쨍한 하늘을 보았다.
무척 밝고 화창한지라 눈을 뜨기도 여간 힘들지만, 태양이 선명하게 내리쬐는 대낮이었다.
#5
정거장 앞에서, 유리를 만났다.
나처럼 어딜 가려는 건지 사복 차림의 유리는, 누구에게 관심도 없이 벤치에 앉아 트램을 기다리다가 불현듯 내 인기척을 감지하곤 머리를 돌렸다.
“……”
“……왜 그렇게 보는데?”
그러곤 팔짱을 낀 불퉁한 얼굴 그대로 굳었다.
날 보며 눈을 살짝 치떴다가, 곧 원래대로 침잠했다. 뭔가, 굉장히 심기가 불편한 듯한 얼굴. 할 말이 있어 보이는 듯 씰룩거리는 입가.
가만히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니, 유리는 아무 말도 없이 정면으로 고개를 다시금 돌렸다.
‘……?’
뭔 반응인지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인사도 안 했네.
“안녕, 유리. 어디 가냐?”
잠시 뒤.
유리는 순순하게 내 인사를 받아주나 싶었는데.
곧 묘한 미소가 떠오른 채 말했다.
“그래, 안녕. 재능살(???).”
“아.”
제발.
“그 별명으로 부르지 마. 진짜 미치게 오글거리니까.”
“푸흡…”
질려하는 내 반응을 보던 유리가 한동안 키득거리며 웃더니, 은근한 어조로 말해왔다.
“내 재능도 뺏어갈 거야? 염동력은 무시무시한 힘이라구?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다루면 정말 큰일이 일어날 텐데.”
“그러니까 뺏는 건 없는 능력이라고 말했잖아.”
“그럼 내 재능을 죽여 버릴 건가? 이번에는 아예 흔적도 남기지 않고? 너 재능 살인마잖아. 이 범죄자야.”
“범죄자라니. 난 아무 짓도 안 했거든?”
“살인마는 원래 그런 이름이잖아. 게다가 넌 범죄자 이미지에도 딱 어울려. 사람을 맘대로 으슥한 곳에 끌고 가질 않나… 네가 나한테 여기서 한 짓들은 여기가 만약 아르티나 왕국이었다면 사형으로도 형벌이 부족했을 거야.”
아마 그럴 수도 있겠지. 입학식에서 봤던 것처럼 유리의 부모님들은 유리를 아주 끔찍이도 아끼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여기는 아르티나 왕국이 아니었다. 더 이상 학생 부모님들의 입김이 닿지 않는 자율적인 학교. 여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 개인이 책임을 진다.
“그건 네가 쓸데없는 말을 하려고 해서 그런 거고.”
“그렇다고 막 가냘픈 여자를 함부로 다뤄도 되는 거야? 누가 변태 아니랄까봐.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죄의식도 하나 없구나?”
“아, 거. 불만 있으면 한 대 때리던가. 이미 해결된 일에 뭐 이렇게 사족이 많어?”
“때려? 네가 때리라고 했다?”
“그래 임마.”
내가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자, 유리는 네가 먼저 시작한 거라는 듯 벤치에 앉아 번쩍 손을 들었다.
그런 순간.
유리의 붉은 눈이 선혈처럼 빛난다.
주변 대기가 한 차례 진동하고, 유리의 머리칼 가닥이 위로 붕 떠오른다. 붉은빛 안광이 넘실거리는 가운데, 유리는 여느 악단의 지휘자처럼 힘 있게 쥔 손을 홱 하고 위를 향해 뻗었다.
그리고.
“역시, 너한테는 안 먹히네.”
내 머릿속에서 하얀 불빛이 튀기는 것과 동시에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자, 유리는 기운 빠지듯 한숨을 폭 내쉬며 그리 중얼거렸다.
내가 짐짓 허탈한 투로 물었다.
“……지금 사람한테 염동력 쓰려고 했냐?”
“어차피 안 먹히잖아.”
“아니, 아는데. 그 의도 자체가 괘씸하다 이 말이야.”
“괘씸하면 어쩔 건데? 결국 안 먹혔잖아.”
유리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하는 모양새가, 꼭 참새 같았다. 저 얄미운 주둥이를 손으로 잡고 쭉 늘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정말로 한 대 맞겠지만.
“루비아가 전에 말했지 않냐? 사람한테 능력 쓰지 말라고.”
“너는 경우가 다르지. 의도의 문제라면 결국 난 너한테 능력이 먹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구.”
“…어휴, 그래라. 그래.”
내가 뭐라고 유리를 통제하겠는가.
“근데 진짜 이상하네. 왜 안 먹히는 거야…”
이윽고 유리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를 유심히 지켜보더니, 말없이 손을 뻗었다.
다시금 유리의 눈이 빛난다. 한껏 집중한 유리가 손을 위로 들어 올리자, 날개도 없을 터인 돌멩이는 허공으로 웅웅거리며 떠올랐다.
유리의 염동력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다. 돌멩이를 띄우는 일 정도야 부유 마법으로도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긴 하지만, 유리는 어떠한 술식의 구현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다.
입을 작게 벌리며 미약한 감탄사를 내보이는 나를 힐긋거린 유리가 말했다.
“…원래라면 너처럼 무거운 것도 들어 올릴 수 있어. 저 하늘에 띄워서 멀리 던져버리는 건 일도 아니지.”
말을 마친 뒤 손을 거둬, 툭, 하고 돌멩이를 떨어뜨린다. 데구르르. 돌멩이는 굴러가다가 어느 지점에서 멈춰 섰다. 유리는 그것을 한참이나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문득 고개를 돌려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넌 뭐 하러 어디 가는데? 쓸데없이 차려입고.”
“처음에 어디 가냐고 물어봤던 건 나였는데.”
“그런 건 됐잖아.”
테니스 스커트에 흰 티셔츠. 작은 핸드백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 외론 한데 묶은 금발이나, 검은 리본이나 똑같았다. 팔짱을 낀 채 그리 말하는 유리를 보면서 내가 짧게 대답했다.
“아카샤의 별.”
“……뭐?”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
“거길 네가 왜 가는데?”
“볼일이 있어서.”
“무슨 볼일?”
“그건 너한테 알려줄 만한 게 아니야.”
“……아, 그러셔? 흐응.”
“너한테만 일부러 안 알려주는 게 아니라 정말 말하기 곤란한 내용이라 그래. 혹시 삐졌냐?”
“……벼, 별로 안 삐졌거든?”
감정 상한 게 확 보이는데. 내가 그렇게 말하자 또 얼굴 표정이 휙휙 바뀌는 것도 보였다. 귀엽기는.
“……외부인은 들여 보내주지도 않을걸? 소속 마법사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통제구역이잖아, 거기.”
“그렇지.”
“근데 네가 가서 뭘 한다는 거야?”
“나도 몰라.”
“뭐?”
“가봐야 알아. 과연 들어갈 수나 있을지, 가면 내가 뭘 해야 할지. 전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가는 거야.”
“……아무런 계획이 없다고?”
“계획을 짜도 소용이 없다는 쪽이 맞겠지.”
유리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이제 신경 안 쓸래.”
“그래.”
그렇게 한참 말이 없다가.
트램이 도착할 때가 됐을 즈음 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넌 어디 가는데?”
“……그건 왜 자꾸 물어?”
“너도 차려입었잖아. 사복 차림이라 신선해서 잘 어울리네. 얼굴도 좀 평소보다 신경 쓴 것 같고.”
“……”
유리는 잠깐 입을 꾹 다물더니 작은 목소리를 냈다.
“……신경 꺼. 너랑 마찬가지니까.”
“뭐? 아카샤의 별에 간다고?”
“아니, 그게 아닌 건 당연하잖아. 나도 너한테 말하기 곤란한 내용이라는 거야. 이 정도 말했으면 대충 알아들어.”
“흐음……”
사복 차림. 남한테 함부로 말하기 곤란한 내용. 주말 대낮. 적당히 놀러 나가기 좋은 시간대. 그러면서 주변에 같이 가는 친구는 없다, 라……
내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남자친구라도 만나러 가냐?”
“……!”
유리가 화들짝 놀라 벤치에서 펄쩍 뛰었다.
“가, 가, 갑자기 뭔 소리야!”
“어, 뭐야. 진짜냐? 왜 그렇게 반응이 격해?”
“……네가 갑자기 이상한 말 해서 그런 거잖아!”
유리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렇게 박박 소리치다가, 어지러운 듯 이마에 손목을 짚으며 벤치에 도로 앉았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너도 알 거 아냐. 그런 걸 내가 만들 것 같아?”
“글쎄. 사람 일 모르는 법이지.”
“하아…”
유리는 여간 골치가 아픈 듯했다.
“난 평생 그럴 일 없어. 모든 남자는 내 적이야. 아무도 내 옆에 두지 않을 거고.”
“어……”
그때 내가 날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
“난 지금 네 옆에 있는데?”
“…시끄러워.”
오호.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우리 친구잖아? 나는 남자고. 그럼 나는 네 남자친구……”
“아, 진짜! 시끄럽다고 했잖아!”
유리는 벌떡 일어나 내 가슴팍에 주먹을 날렸다.
#6
그로부터 두어 시간 뒤.
“죄송하지만…마탑주 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마침내 도착한 그곳에서, 나는 허탈한 심정을 느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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