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15화 (115/201)

〈 115화 〉 낙인 (3)

* * *

#7

본부에서 외출 기록을 남긴 뒤.

제 2학구 출입 게이트를 통과하여 수도 헬리오스로 이어지는 워프 게이트에 프론티어 학생증을 내밀자, 거의 반값 할인한 금액으로 이용권을 구매할 수 있었다.

근 3주만의 외출이었다. 십대를 아우르는 학생들이 아닌 다양한 나이대의 시민들이 가도를 꽉 채우고 있었다.

활기찬 생기가 썩 기분 좋다. 딱 좋은 온도의 바람이 불고, 달큰한 봄향기를 싹틔우는 밝은 색채의 꽃잎들이 풍경 한켠에서 넘실거린다.

주말의 거리는 무척이나 북적거렸던 까닭에, 몇 번 인파에 휩쓸려 길을 잃을 뻔하기도 했으나­ 결국 아카샤의 별로 향하는 워프 게이트를 찾는 데 성공했다.

“…워우.”

그렇게 도착한 거대 마탑.

내가 향한 곳은 제3 마탑의 입구였다.

아카샤의 별을 구성하는 세 마탑의 위치를 선으로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데, 제3 마탑은 그중 동쪽에 위치하여 있었다.

‘이게 아카샤의 별이구나.’

에테르 학파를 상징하는 문장이 아치형 입구 중앙에서 바람에 나부낀다.

창공을 뚫을 듯 대지 위에 드높이 세워진 건축물의 위엄은, 고개를 꺾어 마탑을 올려다본 나의 오금을 저리게 할 정도였다.

구름 위에 있을 첨탑은 보이지도 않는다.

부유석들이 나선형으로 쭉 마탑을 휘감고 있는 모양새. 꽤 멀리서 보는 것임에도 마탑은 그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안은 도대체 얼마나 넓을지 감도 잡히지가 않았다.

주위에는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도 여럿 보였다. 별 문제 없이 입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대개 아카샤의 별 소속 마법사들이었음이 분명했다.

인류 마법의 정점에 올라 있다는 마탑 소속이라니. 그들의 자부심은 아마 마탑의 수준과 동일하게 세계 최고일 것이었다.

“후.”

한 호흡에 긴장을 털어냈다.

기본적으로 개인주의가 만연하여 자신을 제외한 타인에게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마법사들이었지만, 내가 있는 쪽에 은근히 시선을 던지는 이가 꽤 있었다.

외부인 티가 확실히 나서 그런 걸까. 이럴수록 오히려 당당해져야 했다. 가슴을 펴고 힘 있는 워킹으로 입구 쪽 로브의 인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소속과 신원을 밝혀 주십시오.”

“아, 저는……”

“방문객이십니까?”

“예.”

“통행증 가지고 계십니까?”

“아뇨.”

“초대장 가지고 계십니까?”

“아뇨.”

“신분을 증명할 만한 다른 수단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뇨.”

“그럼 돌아가시죠. 아카샤의 별과 전혀 상관없는 외부인이 여긴 왜 왔습니까?”

입구컷 당했다.

#8

“……예? 쪽지?”

방금 전.

내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일개 학생이라는 걸 깨닫자, 남성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아마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일단 이거라도 제출할까 싶어 품에서 프론티어 학생증을 꺼냈더니.

남성은 잠깐 흠칫하는 기색을 보이는 듯하다가 다시 일관적인 태도를 내보였다. 그냥 내 학생증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곤란한데.’

이대로 돌아가기도 뭣한 노릇.

엘레나가 아카샤의 별에 들어가는 방법까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냥 자필로 휘갈긴 쪽지 하나 건네줬을 뿐이지. 이거 하나면 제3 마탑주가 내 부탁이 무엇이든 하나 정돈 들어줄 거라며. 근데 이걸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쪽지를 가지고 왔다고 말하니.

남성은 지금 저 표정, 그러니까 얘가 뭐라는 거야? 같은 얼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가진 쪽지가 뭐 어쨌는데, 싶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잠시만요. 이게……”

주섬주섬 접었던 쪽지를 꺼내어 펼친 뒤.

“이건……”

남성에게 보여주자 눈을 부릅떴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설마 저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건가?’

엘레나가 새긴 글씨는 나로선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문자였다. 그러나 남성은 눈을 가늘인 채 미간을 집중하여 쪽지를 이모저모 살피는 중이었다. 간혹 눈썹이 꿈틀거리기도 했다.

과연 아카샤의 별.

한 번도 보지 못한 문자이나 읽을 줄 아는 것 같았다.

“이게 뭔데요?”

“……”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돌아가시죠. 저희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 아닙니다. 주말에 당직 선다고 해서 이런 어린아이 같은 장난질에 어울려 줄 만한 수준은 아니란 겁니다.”

아무래도 문자를 읽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길 놀리는 거라 생각하는 건지, 남성은 짐짓 화난 투로 내게 그리 쏘아붙였다.

나는 그를 차분히 달래며 말했다.

“이게 사실, 엘레나 크라이모어 명예 대신관님께서 작성해주신 쪽지거든요.”

“…예? 엘레나 크라이모어라면 그 전쟁 영웅 엘레나 말씀이십니까?”

“네, 네. 맞아요. 그분이……”

“그분이 왜 당신한테 쪽지를 써주십니까?”

“제가 엘레나 님의 후배라서, 잠깐 도움을 받을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 쪽지를 들고 아카샤의 별에 찾아가면 마탑주 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마탑주 님?”

남성은 짧은 침묵 뒤에 이어 물었다.

“아크 데카(Archdeca), 테트라 크로울리 제3 마탑주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10위계를 뜻하는 ‘데카’를 넘어선 위계. 그 천외천(?外?)의 영역을 가리켜 ‘아크 데카’라고 부른다.

현시점의 알티마 대륙에서 아크 데카란 칭호를 달고 있는 인물은 테트라를 제외하곤 단 한 명뿐이었다. 역사를 넘어 살아 있는 신화가 되기 직전의 인물들.

입구를 지키는 남성은 영 탐탁지 않은 얼굴이다. 나처럼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대뜸 마탑주를 보러 왔다고 하면, 지금처럼 의뭉스러운 눈초리를 보내오는 것도 당연하다.

—테트라? 마탑주 이름이 저기서 왜 나와?

—그러고 보니 벌써 1년째인가? 세월 참 빠르군 그래.

—에테르 학파는 참 신기하단 말이지. 학파의 수장인 마탑주 자리가 거의 항시 공석이나 다름이 없는데도 잘만 굴러가니 말이야.

—이 사람아, 그것도 이제 옛말이 되어가는 중일세. 학파 내부서도 그녀의 행보에 불만을 품는 이들이 적잖게 되었어. 이대로 가다간 제3 마탑주는 더 이상 본인의 자리를 유지할 수 없을 걸세.

—그렇기도 하겠지. 쯧쯧, 복귀를 예고했으면 환영식에 모습이라도 잠깐 보일 것이지, 휘하 마법사들을 죄 기만할 게 뭐람…… 에잉.

테트라 크로울리란 이름을 언급하자 날 압박하는 시선들이 꽤 늘어난 것도 같았다. 로브를 뒤집어쓴 초로의 마법사들이 내 주위를 지나간다.

한참 쪽지와 나를 번갈아 보던 남성은,

“쪽지의 진위 여부를 가릴 필요도 없겠군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내게 쪽지를 돌려주고선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하지만… 마탑주 님은 지금 안 계십니다.”

#9

허탈한 심정이었다.

……아니, 뭐.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었다. 이럴 거 전부 상정하고서 왔으니까. 테트라가 워낙 신출귀몰한 사람이라 들었던 것도 있는 탓에, 별다른 수확 없이 빈손으로 돌아갈 미래마저도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다만.

‘왕복 비용이 꽤 든단 말이지.’

내 통장은 무한이 아니었으니까.

헛걸음은 가능하면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언제쯤 돌아오시는지 아십니까?”

“그걸 제가 알겠습니까?”

남성은 어이없다는 듯 기가 찬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프론티어, 특히나 에픽 클래스 학생이니만큼 신의로 상대해 드리고 있었지만, 이 이상은 당신의 사정에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마탑주 님께서 복귀하시거든 그때 다시 찾아오십시오. 이런 의미도 알 수 없는 쪽지 말고, 정말로 엘레나 그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정식으로 임시 통행증 하나 발급해달라 하시고.”

명백한 축객령이 떨어졌다.

남성의 관점에서 보자면 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던 까닭에, 마탑 입구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나.’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이대로 돌아가긴 뭔가 아쉬운데……

“그러면.”

“또 뭡니까?”

“이름이라도 남길 순 없습니까?”

“이름……?”

남성이 눈썹을 치켰다.

“그건 저한테 말씀하실 사항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뭐, 한번 말이나 해보십시오. 접수대에 전달은 해볼 테니.”

내가 만일 프론티어 학생이 아니었다면 진즉 엉덩이를 걷어차 밖으로 쫓아냈을 게 분명했다. 귀를 후벼파며 자못 건성으로 임하는 남성에게 내가 또박또박 말문을 열었다.

“황립 프론티어 아카데미 제 2학구 에픽 클래스 1학년 소속 15번, 에지오 크라닐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에지오 크라닐?”

나의 이름을 복기하는 목소리.

그 음성은 남성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레 발원지 쪽으로 옮겨 갔다.

시약이 담긴 플라스크와 갖은 재료들이 가득한 상자를 품에 안아 들고,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다리를 후들거리던 청년이 한 명 있었다.

“에지오 크라닐이라면, 혹시……”

청년은 긴가민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눈꺼풀을 위로 끌어올렸다.

그 아래 깔린 짙은 피로감을 엿본 내가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한 기시감을 떠올리던 것도 잠시.

연갈빛 머리칼의 청년은 천근만근 무거운 상자를 바닥에 쿵­ 하고 내려놓으며 말을 흘렸다.

“로르센 아카데미에 재학하던 루비아의 친구, 에지오 크라닐…… 그게 너라는 말인가?”

바싹 메마른 입가를 손으로 훑는데, 그 뒤에 자리한 얼굴은 나로서도 익숙한 낯이었다.

하물며 나를 알아보기까지 했으니.

확실했다.

“……슈리엘 선배님, 이십니까?”

슈리엘 데 라파르트.

수석 졸업 직후 아카샤의 별에 입탑한 나의 아카데미 선배가, 고작 반년 지났을 뿐이나 사뭇 다른 인상으로 내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10

“펜테(Pente) 슈리엘. 아는 분이십니까?”

“알다마다. 동문이자 후배였지. 개인적으로 큰 빚을 진 은인이기도 하고.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슈리엘은 허리를 꺾으며 내게 다가왔다.

날 향한 눈빛에는 의심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리 변할 줄도 몰랐군. 정말 네가 그 에지오 크라닐이 맞는 건가?”

“오랜만입니다, 선배님.”

“……믿을 수가 없군.”

로르센 아카데미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는 반응이 돌아왔다.

일전 슈리엘을 까마득히 올려다봐야 했던 나다. 지금은 서로의 눈높이가 일치하고 있으니, 반년도 채 되지 않는 단기간에 얼마나 성장한 건지 감도 잡을 수 없을 것이었다.

“인상이 전혀 달라졌군. 마치 새로운 몸으로 갈아 끼우기라도 것 같아.”

슈리엘이 보았던 나의 마지막 모습은, 갈가리 찢겨 고깃덩이가 되기 직전이었던 피투성이의 소년이었을 거다.

가만 놔두면 얼마 걷지도 못하고 길거리에서 객사할 게 뻔해 보였던 소년.

그랬던 소년이 멀쩡히 살아 돌아온데다 이리도 격변해 버렸으니, 혼란스러움을 느끼는 건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일순 피로감에 젖었던 슈리엘의 눈빛이 형형한 색채로 물들었다. 불신할 정도로 변화한 내 모습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라도 느낀 듯, 내 몸을 아래부터 머리끝까지 오밀조밀 훑으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린다.

“영()과 육(?)이 전체적으로 매우 강인해졌어. 내재된 회로에서 느껴지는 기운도 심상찮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이건 노력으로 가능한 영역이 아닐진대……”

세상에는 가능한 게 있고 불가능한 게 있는 법이다. 지금 슈리엘은 불가능한 일을 눈앞에서 마주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팔뚝이라도 매만져볼 기세에 내가 잠시 움찔거리자, 슈리엘은 아차 하며 고개를 번뜩 들었다.

“이럴 게 아니지. 혹시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

입구를 지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던 내 모습을 떠올리기라도 한 듯, 슈리엘이 내게 그리 물어왔다.

마탑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자리에 없다면 굳이 들어갈 이유도 없다. 하지만 기껏 먼 길을 왔는데 이대로 돌아가기도 좀 그렇고, 무엇보다 슈리엘이 내게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게, 마탑주 님을 뵈러 왔는데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요. 그렇다고 해도 막상 들어갈 방법이 없었어서 잠깐 여기에 남아 있었습니다. 볼일이 사라졌으니 이제 곧 돌아갈 생각……”

“아니. 이것 또한 인연인데, 들어가서 얘기하지. 잠시 기다려라. 이래 보여도 아카샤의 별 소속 마법사이니. 너 한 명쯤은 어렵지 않게 안쪽으로 들여보낼 수 있을 거다.”

마탑주를 만나러 왔다는 말에 슈리엘은 놀라운 기색을 내보였지만, 머리를 주억이곤 입구를 지키는 남성을 향해 무언가를 내민 뒤 둘이서 잠시간 쑥덕거렸다.

그러자.

“이제 되었다. 네게 허락된 시간은 2시간 정도에 불과하나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슈리엘이 날 돌아보며 입구의 기둥 사이를 지나친다. 뭘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내 신분 증명을 위탁한 모양이다. 역시 관계자라는 건가. 같은 아카데미를 졸업한 선배가 저 거대한 마탑의 일부분이라 생각하니, 새삼 슈리엘이 대단스러워 보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무얼, 오랜만에 만난 네게 듣고 싶은 얘기가 있었을 뿐이다. 맡은 일이 있어 길게 얘기하진 못하겠지만……”

흰빛의 석상을 지나 제3 마탑으로 이어지는 길을 슈리엘과 함께 걸었다.

슈리엘은 아까 보았던 상자를 꽉 안아 든 채였다. 부쩍 성장한 나에 비해 어쩐지 생기를 잃어버린 듯한 슈리엘의 겉면을 흘기던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들어드릴까요?”

슈리엘은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었다.

“내가 다뤄야 할 짐이다. 혹시라도 네가 들었다가 문제가 생기면 책임이 너한테 옮겨 간다. 더군다나 이 상자 안에 들은 건 나의 것도 아닌 값비싼 물건들이니, 나의 사수 되시는 분께서 네게 책임을 묻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단순한 방문객에게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떠넘길 순 없지.”

말은 그리 하지만.

“글쎄, 괜찮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선배님이 드시는 게 더 위험해 보이니까요. 절대 떨어뜨릴 일 없게 꽉 붙잡고 있을 테니 걱정 마세요.”

들어주면 고맙겠단 표정이 어렴풋이 드러나는 듯해서, 말없이 상자 아래쪽에 손을 넣자 슈리엘은 순간 곤란해하다가, 결국 내게 상자를 넘겼다.

“어우…… 장난 없네요. 뭐가 들었길래……”

“실험에 쓰일 시약들과 먼 타지로부터 수입한 재료들, 그리고 이론서 몇 권.”

어후­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무겁긴 한데, 그렇게까지 큰 기력이 소모되진 않았다. 이런 걸로 버거워하는 슈리엘의 팔뚝 힘이 약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그러나 슈리엘의 현 상태를 보면 몸이 허약한 것도 이해가 간다.

“나의 사수 되시는 분께서 운반 비용을 아끼고자 하였음에, 지금까지 내가 직접 공수해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 시간쯤 꼬박 들고 걸으니 힘에 부치는 건 어쩔 수가 없더군……”

슈리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목을 이리저리 꺾는다. 한 번 돌릴 때마다 뚜둑, 하는 무서운 소리가 울렸다. 옆구리와 허리도 주먹으로 몇 번 두드리는 모양새가 꼭 늙은 사람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측은한 심정이 드는 것은 왜일까……

여러모로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경량화 마법을 쓰면 되지 않나요?”

“안에 든 물건 중에 마법적 처리가 가해지면 효용이 없어지는 것이 있어서 말이지. 최대한 외부에서 간섭을 배제한 채 온전히 운반해야만 했다. 내게 아공간 아티팩트를 지원해주지 않으신 이유도 아마 거기에 있는지 모르지……”

그렇구나. 시약이고 재료고 마법사들의 세계에 대해 자세한 건 아는 바가 없었던 까닭에,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슈리엘이 문득 말문을 열었다.

“방금 들었을 때, 네 소속이 분명……”

입구에서의 일을 언급하는 것 같았다.

슈리엘이 대충 무엇을 말하려는지 짐작한 내가, 가볍게 수긍하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올해 프론티어에 입학했어요.”

“……이것 또한 놀랄 일이군.”

슈리엘은 허어­ 하는 소리를 흘렸다.

“제국에서 으뜸가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게 된 걸 축하한다, 에지오 크라닐. 하지만 내가 들은 것은 프론티어에 입학했단 사실이 끝이 아니었다만.”

“운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운이라…… 비범한 재능도 날 때부터 타고나는 운의 일종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닌 듯하군.”

슈리엘은 내가 별 볼 일 없는 학생에 불과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다. 그 흔한 재능 하나 없었던 구제불능의 학생이었단 것도. 그런 내가 프론티어에 입학한 것이다. 더 나아가서, 오직 한 해에 열다섯 명만 뽑는다는 에픽 클래스에 당당히 실력으로 입학한 것이다.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 되도 않는 허세라든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이미 이렇게나 바뀌어 버린 나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슈리엘이다. 아카샤의 별 정도나 되는 기관에서 마탑주 운운하며 신분을 위조할 생각을 하다니. 그쪽이 되레 하기 힘든 상상이라는 건 슈리엘도 충분히 알고 있을 터.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오래 걸릴 뿐이다.

슈리엘은 아마 궁금한 게 많을 거다.

그날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대체 내가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겨우 살아난 내게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지금 이런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건지. 그러나 대부분 나조차도 내막을 알려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슈리엘이 묻는다고 해도 나는 어느 하나 명료히 대답해줄 수 없었다.

슈리엘도 내 짧은 대답의 기저에 깔린 분위기를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는지, 별다른 말을 건네오진 않았다. 개인적으로 얽힌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거니, 하는 생각일까.

“에픽 클래스. 에픽 클래스란 말이지……”

다만 슈리엘은 과정이 아닌 결과에 주목했다.

한참을 그리 곱씹던 슈리엘은.

허심탄회하게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거기에 그 아이도 있겠군.”

“……”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직감적으로 알아챌 수 있었다. 슈리엘이 말하는 그 아이가 누군지.

“때마침 나의 모교에 대한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참이었다. 이번 졸업 기수에서 무려 두 명씩이나 제국의 미래를 배출했다고. 나머지 한 명은 로르센 아카데미 출신이긴 하나, 자퇴를 해버린 탓에 졸업은 인정되지 않았다고……”

말끝을 흐리며 슈리엘은 터벅터벅 걸었다.

다음 순간.

“그래­.”

어조에 서린 착잡한 기운을 털어내듯.

쓰디쓴 미소를 짓는다.

“……루비아는, 잘 지내고 있던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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