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16화 (116/201)

〈 116화 〉 낙인 (4)

* * *

#11

“그게 궁금하십니까?”

“궁금하고 말고. 아끼던 후배였으니 말이지. 나는 그 아이가 어디서든 행복했으면 좋겠어.”

슈리엘은 진심으로 그리 말하는 듯했다.

“루비아가 에픽 클래스에 입학하게 된 소식은 들었다만, 너까지 입학했을 줄은 전혀 몰랐다. 마침 내 스스로 루비아를 찾아가 볼 면목도 없으니, 이렇게 너한테 근황을 묻는 수밖에 없구나. 치졸한 물음이다만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길 바란다. 솔직하게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니.”

“면목이 왜 없습니까?”

“그야…… 당연한 거 아니겠나.”

슈리엘은 침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나는 거기서 그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 구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였지. 이후로도 가능하면 얼굴을 보지 않는 편이 좋을 법한 말과 행동을 했고…… 여기까지 말하는 게 좋겠군.”

나는 묵묵히 슈리엘의 말을 들었다.

내 옆의 슈리엘은 혼자서 말하고 있다.

루비아를 대상으로 함이 분명한 이야기 속에서, 그 아이를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반면 구한 것은 나라고 한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린 가정이었지만, 보다 확실한 근거가 점차 더해져 가고 있었다.

“……그래, 이것도 네게 사과해야 하는 부분이군. 루비아의 근황을 물을 게 아니라 이걸 가장 먼저 해야만 했어.”

걸음을 옮기다 우뚝 멈춰 선 슈리엘은.

“미안하다. 에지오 크라닐.”

내게 고개를 푹 숙였다.

“……선배님?”

“루비아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건만, 그것을 깨뜨리고 말았다.”

나는 일순 당황했으나, 슈리엘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고개를 꿋꿋하게도 들지 않았다.

“나로선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어. 아마 루비아뿐만 아니라 너에게도 후폭풍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비밀을 유지하는 것이 정말 루비아를 위한 길이라고 해도, 나는 사실을 말하는 게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거짓된 업(?)으로 공적을 쌓는 일도 도저히 못할 짓이고 말이지.”

사실이라.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선배님, 고개 드세요.”

“전혀 도움되지 못한 무능한 선배였기에, 항상 네게도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언젠가는 꼭 찾아뵈어 정식으로 사과하고, 그 아이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하려 했다만…… 마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는 몸이 되어서 말이지. 사적인 용건은 거의 못 보게 되었다.”

겉만 봐도 알 수 있다. 슈리엘이 아카샤의 별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나는 일단 길거리 한복판에서 머리를 넙죽 숙이곤 내게 사죄하려는 슈리엘의 행동을 말렸다.

“선배님께서 제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감사의 인사는 꼭 해야만 하겠지. 그때 무능했던 나 대신 루비아를 구해줘서 정말로 고마웠다, 에지오 크라닐. 네 죽음을 불사르는 용기에는 진정으로 감복할 수밖에 없었다.”

“……”

뭐랄지. 참 올곧은 사람이었다. 루비아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이 어조에서 뚝뚝 묻어나오는 것도 그렇고.

침묵하던 내가 입을 달싹여 중얼거렸다.

“루비아를 구했다, 라…… 그렇습니까.”

“……?”

마치 남 일을 말하는 하는 내 오묘한 분위기에, 슈리엘은 잠시 의문을 표하는 듯싶었다.

“……그랬지. 내가 기억하기에 그때의 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어. 그러고는 따로 갈 데가 있다며 어디론가 가버렸지. 지금 너를 보면 흉터 하나 남지 않고 말끔하게 회복한 듯한데, 신전에서 대신관의 축복이라도 받은 건가?”

“그게.”

나는 잠시 말을 아끼다가.

상자를 고쳐 들면서 앞을 바라보았다.

“저도 모릅니다.”

“……?”

내가 말했다.

“슈리엘 선배님.”

“뭔가?”

“그리 사과를 하셔도, 저는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

그만큼 슈리엘이 큰 잘못을 저질렀나.

그게 아니다.

“저는 슈리엘 선배님께서 말하고 있는 내용의 전말을 무엇도 모릅니다.”

“……뭐라?”

“정확히 말하자면 그날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었죠. 지금 제가 기억하고 있는 건, 전부 루비아한테서 들은 얘기를 통해 얻어낸 단편적인 정보일 뿐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그날 루비아를 구한 것은 선배님이 아닌 저라고 하시지만, 막상 제겐 그 문장 한 줄에 담긴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저 남 일 얘기하듯 들릴 뿐입니다. 때문에 저는 제가 처했던 상황에 공감하질 못하니, 용서란 것도 결국 어불성설이겠죠. 정신적으로 당사자가 아닌 셈이니까요.”

궁금한 게 많을 터인 슈리엘의 의문에 어느 무엇 하나 대답해줄 수 없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기억을…… 잃었다는 건가? 그때 있었던 일 모두?”

“네. 정황은 대충 파악했지만요.”

분명히, 나와 슈리엘은 그날 같은 자리에 있었다. 대화도 몇 번 나누었겠지. 슈리엘이 마탑 입구에서 루비아의 친구를 운운하며 나를 아는 체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나는 슈리엘을 힐긋 보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재학 중에 슈리엘과는 인사 몇 번 빼면 무슨 접점이 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슈리엘이 내게 아는 척을 한 이상, 그것은 내 어렴풋한 가정이 얼추 들어맞았다는 방증이나 다름이 없었고, 때문에 나는 슈리엘의 앞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다.

슈리엘의 얼굴을 내가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눈이 폴폴 내리던 그 겨울날도­

루비아는 슈리엘과 함께 있었다.

마법부의 루비아와 슈리엘이 평소 친밀하게 지냈다는 사실마저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슈리엘을 온전히 기억해낼 수 있었던 것이겠지.

그날에 벌어진 사건과 연관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루비아와 그의 깊은 인연 덕분이었다.

무엇보다.

마법부 합숙날 조교 자격으로 초청된 선배라…… 내가 기억하기로, 로르센 아카데미 마법부는 매년 졸업 직전 합숙에서 작년도 수석 졸업생을 조교로 부르는 전통이 있다.

그럼, 조교가 될 사람은 한 명밖에 없지.

내 옆에 있는 슈리엘 데 라파르트다.

그 사람과 점심 식자재를 사러 상점가로 향하다가 마족한테 납치를 당했다고 했으니, 틀림없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총 세 명.

루비아, 나, 그리고 슈리엘 데 라파르트.

루비아는 그때 오두막에서 말하기를, 거기에 나도 휘말렸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자기를 구했다고. 마족들한테 엄청 심하게 당하면서까지.

실제로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은 게, 신전에서 깨어난 기억을 되돌아보면 신관이 내게 ‘죽었다가 살아났다’라는 식으로 말했던 적이 있다. 꽤 그로테스크한 비유를 들기까지 했지. 역시나, 끔찍하긴 하지만 기억이 없는지라 공감은 못 했다.

정리하자면.

나는 뮤의 생일날 루비아와 슈리엘이 상점가에 식자재를 사러 가는 도중 벌어진 납치 사건에 우연히 휘말렸고, 거기서 죽음에 가까운 상처를 입은 뒤 루비아를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직후 어딘가로 향했고, 그 공백에는 아마 뮤와 연관이 있을 터인 사건이 하나 벌어졌을 거다. 그 다음은 태양의 신전에서 치료를 받고 깨어난 것이고. 육체가 완벽하게 재구성된 채.

처음엔 의문만 가득했지만.

밤마다 끊임없이 고민해본 결과.

이제는 모든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건.

그래서, 뭐……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니 감상 또한 없었다.

이렇듯, 기억을 찾지 못하면 아마 평생토록 알 수 없을 것들이 내 안에 잠들어 있을 것이었다. 그걸 되찾게 되면 무서운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나는 기억을 꼭 찾아야만 했다.

“설마, 그런……”

슈리엘은 기억을 잃었다는 내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어둠이 깔린 숲속에서 네가 이를 악물고 결계에 몸을 부딪쳤던 일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건가?”

“……제가 그랬습니까?”

“그랬지. 아주 용감했어. 그 무식한 행동으로 루비아가 갇혀 있는 결계를 박살낸 것도 너였다. 직후에 쏟아진 그 신비한 빛의 정체는 아직도 모르겠다만…… 기억을 잃은 이상 네게 물어보는 것도 더 이상은 무리겠군.”

이것 봐라.

뭘 말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잖는가.

그나저나 내가 그랬다니…… 나 따위가 무슨 용기가 있어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결계라면 마(?)의 대가라는 마족들이 쳐놓았던 것일진대, 그걸 기어코 부수고 들어가서 나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걸까.

그걸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기억을 찾아야 하는 거다.

“네 표정을 보면 거짓말인 것 같지도 않군. 어떤 연유로 네 머릿속에 공백이 생겼는진 모르겠으나…… 내 생각에, 차라리 기억을 잃고 있는 편이 좋을 수도 있겠어.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네 모습은 한 명의 시체 같았다. 분명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이 결계 안에서 벌어졌겠지.”

슈리엘은 그때를 회상하는 듯 작게 몸서리를 쳤다. 대체 얼마나 충격적인 광경이었길래 저러는 걸까. 언급하는 사람마다 저런 반응을 보이니 슬슬 강한 호기심이 들기도 했다.

“제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사실, 잃어버린 기억을 도로 되찾기 위해서였습니다.”

“……뭐? 그게 정말인가?”

“예.”

“마탑주를 만난다는 것도, 그럼……”

나는 고개를 가만 주억였다.

“그분께서 아마 제게 도움을 주실 수 있을 거라고, 엘레나 크라이모어 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엘레나라. 거물 중의 거물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받을 정도라니, 지금의 네 위치가 정말로 실감이 나는군.”

입구를 지키던 사람과 달리 슈리엘은 내 말을 단박에 믿어주는 듯했다. 딱히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걸까. 역사적인 전쟁 영웅과 연이 닿았다는 사실에 감탄 내지 놀라움을 보인다.

“아카샤의 별에서 네가 원하는 바를 이루길 기원하지. 에지오 크라닐.”

“선배님도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노력은 매일 하고 있다만. 쉽지가 않군.”

슈리엘이 픽 웃음을 지었다.

그런 슈리엘에게, 나는.

“그런데 말입니다. 선배님.”

“뭔가?”

어느덧 마탑 지근거리에 도착하는 참이었다.

여기서부턴 자신이 들겠다는 듯, 슈리엘이 내가 들고 있는 상자 밑에 손을 넣었다. 그 무거운 것을 가져가서 짧은 기합과 함께 한 차례 고쳐 든다. 상자를 든 슈리엘에게 내가 손을 털면서 물었다.

“선배님께서 말하는 사실이란 무엇입니까?”

“……”

슈리엘이 내게 사과하는 이유.

루비아에게 사실을 말했기 때문에.

내심 짐작이 아예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당사자의 입으로 듣는 게 더 확실하겠지.

슈리엘은 잠시 눈꺼풀을 감았다 떴다.

“……너는 내게 의식을 잃은 상태의 루비아를 맡기곤 서둘러 어딘가로 떠났다. 가기 전에 부탁을 하나 했지. 이 자리에 있었던 건 네가 아니라 나라며. 루비아에게 네가 자길 구했단 사실을 절대 말하지 말라고, 너는 내게 간곡히 부탁했다.”

“……”

“나는 너와 그리 하기로 약속했고……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 죄책감에 떠밀려 루비아에게 그 사실을 실토하고 말았다.”

“……”

“그때 루비아의 얼굴은…… 후, 이래서 내가 걱정이 되었다는 거다.”

슈리엘은 근심 섞인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무얼, 네가 루비아를 구했다는 것만큼은 불변의 사실이다. 처음엔 그것을 모르던 루비아가 나로 인해 그 전말을 알게 되었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고.……루비아는 무척이나 착한 아이니, 네게 큰 죄책감을 가졌을지 모른다.”

과연 그 말대로다.

루비아는 내게 끊임없이 죄책감을 가졌다. 눈물을 흘리며 연거푸 사죄를 했다.

자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되었다고. 내가 자길 구해줬던 사실도 모르고 있었어서 미안하다고.

모든 일을 자기 탓으로 돌렸을 거다.

루비아는 그런 애였으니까.

남의 입으로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었을 루비아의 심정을 생각하면,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으나.

역시, 백 퍼센트 공감할 수는 없었다.

“이런. 벌써 시간이……”

슈리엘이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돌아봤다.

“아쉽지만, 나는 여기서 이만 들어가 봐야 한다. 네게 더 듣고 싶은 얘기가 있다만……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하군.”

“아, 네. 이야기 감사했습니다.”

“혹시라도 마탑주가 아닌 다른 마법사에게 볼일이 있다면, 안쪽 회랑에 위치한 접수대에 요청하면 될 거다. 그리고 오후 3시 정각 전까지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개방된 탑의 문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에지오 크라닐.”

“예, 선배님.”

“이거 하나만 다시 묻지.”

“말씀하세요.”

슈리엘이 뒤를 돌아 나를 직시하며,

“루비아는…… 잘 지내고 있던가?”

그렇게 물었다.

잘 지내냐.

아니냐.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저울에 놓인 추는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

그럼에도 나는,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가.”

슈리엘은.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듯한 낯빛을 띠더니,

“……그 아이가 부디 슬퍼하지 않을 수 있도록 옆에서 잘 보살펴주길 바란다. 그 아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지금으로선 너뿐일 테니.”

영문 모를 중얼거림과 함께.

“그래도, 안부 인사 정도는 전해주면 좋겠군.”

자그마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고는,

“이만 가겠다. 인연이 닿는다면 나중에 또 보도록 하지. 성질 나쁜 마법사들한테 괜한 시비 걸리지 말고 몸 조심히 있다 가라, 후배.”

터벅, 터벅.

거대한 탑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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