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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18화 (118/201)

〈 118화 〉 낙인 (6)

* * *

#13

내 작은 중얼거림에 마루는 잠시 얼굴을 굳혔고, “감히…” 라는 말과 함께 으르렁거렸으나, 연보랏빛의 요정이 손을 들어 마루를 가볍게 제지했다.

슬쩍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본다.

“……꽤 당돌한 아이구나. 내 앞에서 농담도 할 수 있다니. 그런 걸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말이야.”

“아니 진짠데……”

“그 소리가 아니란다.”

웃고 있지만 표정에 살짝 금이 간 게 보인다.

“생각보다 태연자약하다는 거야. 나를 앞에 둔 사람, 그중에서도 남자들은­ 하나같이 매혹에 걸려들거든. 이래야 사람을 다루기도 편하고, 협상도 편해지니까. 그런데 너는 감탄하긴 했어도 매혹에 걸려들진 않았구나. 흐으으응.”

자신감이 강한 타입인가?

저 얼굴을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입밖으로 꺼내면 큰일 날 것 같아서, 가만히 입을 닥치고 있었다.

“그래, 화장실이 나 같은 사람의 등장 장소로 간택받기엔 다소 모양이 빠지긴 하지. 그렇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 이 마탑은 나의 전유물이니까. 내 집에 내가 어딜 가든 상관없잖아?”

그거랑 상식은 또 다른 개념이 아닌가 싶었지만, 요정—— 마탑의 주인, 테트라 크로울리는 그런 뜻이 아닌 듯했다.

“어차피 누구 눈엔 보이지도 않겠지만, 가끔 육감이 좋은 마법사들이 내 기척을 읽을 때도 있거든. 혹시라도 들키면 곤란하니까, 어서 따라오렴. 마루, 너도.”

“예, 주인님.”

테트라가 열린 칸 안으로 한 발자국 내디딘다. 그 뒤를 마루라 불린 소년이 따르려는 찰나.

“……그리고 나의 이름은 테트라 크로울리란다. 테트라 님이라고 부르면 돼. 존대는 꼭 붙이고. 너보다 한참 연상이니까.”

이미 확신하긴 했어도.

역시.

그녀가 바로 테트라 크로울리였다.

지고, 지엄한 아크 데카이자 대마법사.

하지만 입구에서 듣기론 자리를 비웠다고 했는데. 멀쩡히 여기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남들한테는 비밀인 듯했다. 그 정도로 눈치 없는 내가 아니었다.

잠시 뒤.

‘여기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나는 테트라와 마루가 사라진 곳으로 향했다.

활짝 열려 있는 문. 그 뒤로는 새하얀 변기가 보일 뿐이었으나, 이 안으로 들어섰을 터인 테트라와 마루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올려 천장을 보아도 없다.

텔레포트를 쓴 것도 아니었으니, 그렇다면……

목을 꿀꺽이며 똑같이 발을 옮겨본다.

“!”

한순간, 물결처럼 일렁거린 사위가.

경계면을 뚫고 완전히 반전한다.

“여기는……”

세때처럼 허공을 날아다니는 책의 무리.

웅장한 대도서관.

고개를 꺾어야 그 끝이 보일 만큼 아득한 천장.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문은 닫혀 있다.

“환영해. 마탑주의 집무실에 온 것을.”

언제 저기로 갔는지, 각선미가 드러나는 다리를 꼰 채 의자에 앉은 테트라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서 마루…… 뭐지, 아까는 소년이었는데, 어느새 청년이 되어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가 집사처럼 서 있었다.

정말이지 신비한 공간이었다.

현실 세계와 뚝 떨어져 있는 것만 같아서, 마치 환상 속 화원에라도 서 있는 것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 순간.

—가방은 여기 걸어주시죠, 손님.

뭐야 시발.

옆에 있던 옷걸이가 말을 했다.

“안심해. 널 해치거나 하지 않으니까.”

“……”

이건…… 테트라의 작품인가?

말하는 물건이라니, 동화에서밖에 본 적 없다. 무척 신기한 기분을 느끼며 조심스레 가방을 옷걸이에 걸었다. 그러자 옷걸이에 달린 바퀴가 드르륵거리며 한쪽 구석으로 이동했다.

“일단 앉아. 아니면 거기 앉을래? 얘가 거기 갈 거야.”

—저는 준비됐습니다. 손님.

소파가 말했다.

……일단 테트라가 가리킨 손끝에 걸린 접대용 소파를 향해 조심스레 다가갔다.

앉으면 갑자기 송곳니 달린 입이 쩍 벌어지면서 나를 집어삼키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귀하신 손님께서 놀랄 테니 앞으론 닥치고 있어.”

—넵.

옷걸이가 여자의 목소리였다면, 소파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심지어 듣기 좋은 중저음이라 기분이 또 오묘했다. 왠지 노래 잘 부를 것 같은데. 소파가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니, 상상해 보니까 이건 또 무슨 끔찍한……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을 듣지 못했구나.”

테트라가 부드러이 손짓하자, 어디 한구석에서 새하얀 접시와 찻잔이 허공을 유영하며 날아왔다. 그것은 나와 테트라 각자의 탁자 위에 조용히 안착했다.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듣기 편안한 클래식 음악이 장내를 잔잔하게 울린다.

“이름이 뭐니?”

“에지오 크라닐이라고……합니다.”

“에지오. 에지오 크라닐. 좋은 어감이야.”

저 혼자 글을 쓰기 시작한 깃털펜을 놔두고, 테트라는 내 맞은편의 소파로 이동했다.

다리를 꼬고 편안히 앉은 채 이번에는 마루에게 손짓한다. 마루는 주인의 명령대로 찻주전자를 갖고 왔다. 그러고는 테트라와 나의 잔에 쪼르르­ 뜨거운 찻물을 채운다. 예의는 지키려는지 나의 잔에만 흘러넘칠 정도로 채운다거나 하진 않았다.

테트라는 나의 앞에서 흥미로운 듯 중얼거렸다.

“정석적인 미소년이라. 엘레나 그년이 이런 취향인 줄은 몰랐네. 예상했던 거랑 완전 정반대의 스타일인걸……”

꽤 험악한 말이 들리자, 내가 입을 다물었다.

테트라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곤 픽 웃었다.

“오해하지 마렴. 걔와 나는 악우(??)일 뿐이니까. 서로 물고 뜯는 사이라고 생각하면 편해. 게다가 이번에 잘도 쓸데없는 짓을 해줬고 말이지……”

빠득. 테트라의 이마에 힘줄이 돋은 순간, 주위를 휘감은 대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내가 들고 있는 찻잔이 얕게 진동했다. 밸런스를 유지하느라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을 정도로 강력한 마력의 발현. 단순한 감정의 표출로도 이만한 위력을 내는 사람이라니…… 내 근육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손님을 앞에 두고 실례했네. 그렇다고 아직 히스테리 부릴 나이는 아니니까, 이것도 오해하지 마. 가끔 내가 원래 이래. 요즘 바쁘다 보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말이야.”

“예, 예……”

“이건 됐다 치고. 내가 사실 별로 시간이 없거든? 그러니까 조금 빠르게 진행할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테트라가 손을 내민다.

“네가 가지고 있는 낙인, 일단 나한테 줘.”

낙인이 뭔지 몰라도.

저게 뭘 가리키는 건지는 알겠다.

품을 뒤적이고 있자니.

‘……쪽지가.’

정확히는 그 안에 적힌 글씨들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맞게 가져왔나 보네.”

내 손바닥에 놓인 그것을 테트라가 띄워 올렸다. 자기 쪽으로 가져와 제대로 쪽지를 펼쳐본다.

“발동 주문은 제대로 적혀 있고. 피의 서약도 제대로 찍혔고. 마지막에 이건……”

잠깐 심각한 표정이 되었던 테트라가.

이윽고 말끝을 높였다.

“엘레나 이년이 진짜……”

이를 바득 갈았다.

“아니긴 개뿔이, 누가 봐도 너밖에 없는데!”

그리 고함을 치자, 서고 내에 테트라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옆에 바른 자세로 서 있던 마루는 일말의 미동도 없었던 반면, 나는 흠칫 놀라 찻물을 흘려버린 탓에, 당황하며 손수건을 꺼내 그것을 닦아야만 했다.

……이 세상의 마법사들은 전부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의견에, 아주 약간이나마 동의하게 되었다.

그래도, 잠깐 입술에 대었던 차의 맛은 달큰하니 쓰고, 굉장히 감미로운 맛이었다.

“후우, 진정하자. 진정.”

짧고 강렬한 분노를 털어낸 테트라는.

“……엘레나도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단 말야. 평생 한 번밖에 없는 기회를 이렇게 써먹는다니. 나 같았으면 좀 더 유용하게 써먹었을 텐데.”

그리 중얼거리며 손등 위에 턱을 괴었다.

살면서 한 번 볼까 말까 한 대마법사의 앞이라 바짝 긴장한 것도 있었지만, 어차피 결국 테트라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며 크게 긴장하지 말라고 했던 엘레나의 말을 떠올린다.

그렇게 엘레나와의 면담을 차차 되짚어가자, 문득 엘레나가 테트라에 대해 말했던 특이한 사항 하나가 기억났다.

‘맞는 걸…… 좋아한다고 했었나?’

아냐. 그럴 리가.

설사 그렇다고 해도.

머리가 헤까닥 미치지 않았고서야, 그걸 시험해볼 용의는 절대로 없었다. 목숨과 맞바꾸는 장난질이라니. 나는 아직 죽을 생각까진 없었다……

“하아…… 좋아. 이제 얘기를 진행해보자.”

그때 테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탓에, 혹시라도 들킬까 싶어 나는 불온한 생각의 편린마저 머릿속에서 빠르게 지워버렸다.

“일단.”

짧게 툭 내뱉은 테트라가 쪽지를 한 손에 든 채로,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찰나의 순간.

테트라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웅혼한 음성.

“——계약에, 동의한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우우우웅.

쪽지에 새겨진 글씨가 더 강렬한 빛을 흩뿌리는 것과 동시에, 테트라의 새하얀 손등이 푸른 빛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어, 어?”

몰랐는데, 내 몸도 같이 빛나고 있었다.

그러자 테트라의 손등에 나타난 것과 똑같은 문양이, 내 오른쪽 손등에 떠올랐다.

“놀라지 마. 너를 계약자로 지정했을 뿐이야. 나의 계약자임을 증명하는 낙인이지.”

테트라가 나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어떻게 문양의 생김새를 자세하게 확인할 여유도 없이, 한밤의 폭죽처럼 밝게 빛나던 빛무리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제 됐어. 계약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으니까.”

화르르륵.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된 쪽지를, 테트라는 가볍게 태워버렸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쪽지는 계약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을 텐데. 저리 태워버려도 괜찮은 건가 싶었지만.

“이건 가짜 계약서니까 괜찮아. 진짜는 여기가 아닌 다른 차원에 저장되어 있으니, 계약의 효력은 이행 전까지 절대 없어지지 않아. 무엇보다 계약서에 적혀 있던 내용은 네가 알고 있던 것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테트라는 찻잔을 홀짝이며 차분한 투로 그리 말했다.

‘……정말 이걸로 끝인 건가?’

방금 뭔가 큰 게 지나간 것 같은데.

시선을 옮겨 손등을 무심코 내려다봤으나, 그 위에 떠올랐던 문양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쉬이 떨칠 수 없는 묘한 감각에 손을 쥐락펴락했다.

“에지오라고 했지?”

“……아, 네. 테트라 님.”

테트라가 나를 돌아본 순간.

‘시작됐나.’

마침내 원하던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쪽지에 네 사정이 간략하게 쓰여 있긴 했는데, 그래도 네 입으로 직접 듣는 게 더 확실하지 않겠어?”

테트라가 슬쩍 입매를 끌어올렸다.

“뭐가 곤란하고, 뭐를 원하는지. 확실하게 말해.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 힘 있게. 자신감을 가지고, 어떠한 부탁이든 들어줄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네 부탁이 무엇이든 전부 이루어줄 수 있을 거란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나에게 부탁해 봐.”

요정 같은 얼굴의 대마법사가, 짙은 미소를 입가에 띄운 채 암시하듯 나를 뚫어지라 바라본다.

“그러면, 내가 널 도와줄게.”

드디어.

바라 마지않던 기회가 왔다.

“……”

엘레나, 그리고 테트라의 말대로.

그녀의 별빛 같은 눈동자를 피하지 않은 채, 주먹을 꾹 쥐고 고개를 똑바로 든 채. 더 이상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안주하지 않겠단 심정으로. 누구의 말처럼 이 상태가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저는……”

나지막이 입을 열며.

나의 진심을 실토했다.

#14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야기가 이어진 뒤.

그렇게 얻어낸 대답은.

“흐응. 생각보다 훠어어얼씬 쉬운 문제인걸.”

무심코 전신의 힘이 탁 풀릴 정도의, 아주 커다란 희망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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