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 낙인 (7)
* * *
#15
“저, 정말입니까?!”
“잠깐, 진정해.”
금방이라도 탁자를 부수고 벌떡 일어날 기세에, 테트라가 나를 잠시 소파에 도로 앉혔다.
“…아, 죄송합니다. 테트라 님.”
“아냐. 그럴 수 있지. 충분히 이해해. 마루 너는 그거 빨리 거두고. 손님이잖니. 예의를 차리렴.”
“……”
허리춤에서 뭔가를 꺼내려던 마루가 조용히 손을 제자리에 돌려 놓는다. 대체 나한테 뭘 하려고 한 거지?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훨씬 쉬운 일이라면……”
“맞아.”
테트라가 고개를 주억인다.
“딱 잘라 단언하자면, 가능해.”
“……아.”
정말로.
찾을 수 있구나.
내심 불안했던 감정조차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아서, 그만 몸에 힘이 탁 풀려 버렸다. 물가에 내놓은 물고기처럼 힘없이 늘어진 나를 보면서, 테트라가 말했다.
“네 이야기와 사정은 대충 알겠어. 부탁의 핵심은 그거지? 네 안에 봉인되어 있는 걸 전부 깨워달라는 거. 그 과정에서 어떠한 부작용도 없이, 말이야.”
“맞습니다.”
내 긍정에 테트라는 입술을 혀로 훑는다.
“과연, 마족년놈들의 먹잇감이 됐을 만하네. 네 몸에서 느껴지는 신성. 그거 절대 작은 거 아냐. 뭘 좀 아는 악마라면 목숨을 대가로 바쳐서라도 전부 먹어 치우고 싶을 정도로 달콤한 유혹이었겠어. 흥미롭네. 흥미로워.”
“저, 근데 납치를 당했던 건 제가 아니라 루비아라는 친구였……”
“그거 말고.”
테트라가 고개를 내젓는다.
“대악마가 너한테 접근했었다면서?”
“아, 네.”
“근데 너는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 거야?”
“……”
“넌 그때 죽었어야 했어. 반드시.”
저주의 말 따위가 아니었다. 대악마의 손아귀로부터 살아남아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가장 기적이노라고, 테트라는 말하고 있었다.
“있잖아. 그냥 평범한 인간이 1이라면, 평범한 악마는 7이야.”
테트라가 목소리를 낮추어 입을 연다.
“인간과 마족은 태생부터 가진 힘의 격이 달라. 육체도, 마력도. 네가 아무리 비범한 인간이라 쳐도, 그 나이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지. 그럼 대충 5라고 치자. 평범한 악마가 7이라고 했지? 그럼 내가 방금 말했던 대악마는 어떨까?”
“……100?”
“추산할 수 없어.”
조금 큰 숫자를 불러 보았음에도.
테트라는 자기 목에 손날을 확 그어 보인다.
“혹시라도 마주치는 순간, 끝이야.”
똑, 하고 부러뜨리는 제스쳐를 취했다.
“굳이 따지자면 2000? 그 이상? 그 대악마가 얼마나 오래된 악마인지에 따라 숫자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어. 그럼 숫자놀음 같은 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지금의 너 같은 아이들은 설사 수백만이 있다고 한들 절대 대악마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어.”
“……그 정도입니까? 악마라는 게.”
“물론이야. 괜히 인류 최대의 적이겠어?”
다른 누구도 아닌 테트라의 말이다. 신뢰할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하나 의문이 생겼다.
그런 악마들이 뭉치고 뭉친 마계 전선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둔 진영은, 우리 인간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은, 그 유명한 인마대전에 참전해 큰 성과를 올렸던 전쟁 영웅이었고.
테트라는 나의 마음이라도 읽은 듯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관련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 무시무시한 마족 새끼들한테 우리 인간이 어떻게 대항할 수 있었겠어? 수명이라고 해봐야 고작 백 년도 안 되는 하등한 종족들이잖아. 수백 년 동안 무식하게 힘만 키우며 살아온 대악마들을 상대로 무얼 할 수 있었겠냐, 이 말이야.”
그리 오래전부터 마족과 전쟁을 벌여왔던 인간이다. 그런데도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끝없는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면서, 결국 가장 최근 있었던 전쟁에선 승리를 쟁취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결과만 말하면, 뭔가 할 수 있긴 했지.”
제국의 황궁이 결코 무너지지 않고 굳건하게 강성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다.
“정확히는 칼 하나 들려줘봤자 마법 하나에 픽픽 죽어 나가는 잡졸들 말고, 바로 나 같은 화신(化?)들에 의해 말이야.”
“화신……?”
새로운 지식에 내가 짐짓 엘레나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역천(??)한 사람들을 말하는 겁니까?”
“……들은 적 있구나? 엘레나가 말해줬니?”
“엘레나 님한테는 그것밖에 듣지 못했어요.”
“그래도, 그 정도면 이해가 빠르겠네.”
테트라가 한숨과 함께 입술을 달싹였다.
“화신이란, 저 하늘 위 주신의 의지에 따라 원치도 않은 힘과 운명을 부여받은 자들. 제 피조물이 낳은 굴레의 혼란을 잠재우고자 제 피조물에게 다시금 부여한 속박이자 또 다른 굴레.”
테트라가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빌어처먹을 불법 계약이지. 사람을 일부러 한계까지 몰아넣고 구원의 동아줄을 던져주는 셈이니까. 악질도 그런 악질이 없어.”
이 자리에 신실한 신관이 있었다면 놀라 까무러칠 만큼, 주신에 대한 원망과 독기를 가득 담아 이를 갈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너도 똑같네?”
이래서 엘레나가 널 나한테 보낸 건가, 하고 덧붙이듯 중얼거린다.
“게다가 운명의 형태도…… 나와 비슷한 점이 꽤 많아. 그래, 너도 백색(白色)이구나. 이 무슨 필연일까.”
백색.
그 단어에 내가 반응했다.
“고유 마력……”
“어라, 알고 있구나? 하긴, 모를 리가 없지.”
테트라가 눈을 깜빡였다.
“일각에서는 고유 마력이라고 부르는 것 같지만, 그건 정확히 말하자면 신성(??)이야.”
신성(??).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그 신성이란 게 대체 뭐죠?”
“글쎄, 그것도 일종의 마력이라고 봐야 하나? 그러니까 고유 마력 같은 네이밍을 따로 지어줬겠지.”
일순 권태로운 듯한 눈빛을 띤 테트라가, 내 앞에서 손바닥을 펼쳤다. 우우웅. 그 위로 동그랗게 빚어진 하얀 구체가 떠올랐다. 한밤에 떠오른 태양처럼 눈부신 빛을 발광하던 그것은 테트라가 손을 꽉 쥐자 파직거리며 사라졌다.
“인간이 날 때부터 받은 힘이라고 할까. 흔히 재능이라 부르는 것 따위가 신성의 영역에 속하지.”
재능. 그 두 글자에는 치가 떨린다. 나한테도 처음부터 그게 있었다면, 지금껏 고생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고유 마력에 따라 뭐에 소질이 있고 뭐에 재능이 있고…… 그런 설명은 수업에서 들었을 거 아냐? 지금이 4월달이니까, 기초 강의는 받았을 텐데. 내가 알기론 그래.”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토(?) 계열에 적성이 있다는 알프리스의 고유 마력. 화염 계열에 적성이 있다는 레니의 고유 마력. 그리고, 모든 속성에 적합성을 보인다는 나와 테트라의 고유 마력.
“사실은 그럴 재능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에 그치긴 하지만, 대부분은 맞는 얘기야. 그리고 그건 이 세상이 불공평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방증이기도 하고. 날 때부터 능력의 한계가 정해지다니. 이러면 사람이 무던하게 죽을 때까지 노력하는 이유가 대체 뭐겠어?”
그 말에는 일부 동의했다.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이야. 그래서 나는……”
무어라 중얼거리던 테트라가 입을 닫는다.
그때 내가 의문을 표했다.
“그런데, 테트라 님.”
“뭐야?”
“사람의 재능이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면, 제 경우는 무슨 경우인가요? 전 원래 뭘 하든 적성을 찾지 못한 일개 학생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훨씬 더 쉽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좋은 질문이야. 그런 의문을 가져야지.”
테트라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아까 말했던 예시의 연장인데. 일반적인 인간들은 조건을 충족해서 본인의 신성을 완전히 개방한다는 전제하에, 악마를 상대로 몇 초 정도는 버틸 수 있게 돼.”
“그 개방이라는 건……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응? 간단해.”
테트라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목숨을 바치면 돼.”
“……”
아무래도 더 파고들지 않는 게 좋아 보였다.
“아무튼, 만약 어느 인간이 강력한 신성을 가지고 있다면 몇 초는 물론이고 몇 마리 정도 죽여버릴 수 있지. 인간의 신성은 악마들이 가장 탐하고 싶어 하는 힘이면서, 동시에 가장 두려워하는 힘이기도 하니까.”
그녀의 얘기에 집중하느라 몇 잔 마시지 못한 나였다. 반면 테트라는 어느새 차를 전부 비웠는지, 마루에게 한 잔을 더 부탁하면서 옆으로 찻잔을 내밀었다.
쪼르르르.
마루가 따르는 찻물을 받으며 말한다.
“그런 평범한 인간들과 달리, 우리 화신은 날 때부터가 아니라, 어느 순간에 새로이 신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야.”
한 잔 기울인 테트라.
“불공정 계약은 바로 그 순간에 이루어지지.”
탁, 하고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가장 절박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을 원망하고, 이대로 죽고 싶지 않아서, 아직 너무나도 이루지 못한 비원이 많아서, 살고 싶어서 아득바득 생을 원할 때…… 비로소 손을 내미는 거야. 잡을 수밖에 없는 동아줄을 내려주는 거야.”
테트라는 분명 나를 보고 있었지만, 그 별빛 같은 눈동자는 어쩐지 나를 향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끝으로 갈수록 점차 작아지던 목소리에, 내가 입을 달싹였다.
“그럼, 제가……”
“맞아. 넌 이미 한 번 죽었던 몸이야.”
“……”
쉬이 믿을 수 없었다.
다짜고짜 넌 죽어본 적이 있다. 라고 말하면, 현실감이 들지 않는 게 당연하다. 난 여기 버젓하게 살아 있었으니까. 죽는다는 게 무슨 감각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가 이 모든 얘기를 왜 너한테 해주는 걸까?”
“필요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렇지.”
테트라는 명쾌히 손가락을 튕겼다.
“너한테 최대한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하는 계약 내용 때문도 있지만,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네가 스스로의 상태를 잘 모르고 있단 점이야. 지금 네 상태에 대해 네가 알고 있는 걸 말해볼래?”
테트라의 질문을 듣고,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엘레나 선배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제 기억은 봉인되어 있고, 그 봉인을 잘못 건드리면 저는 괴물이 될 거라고……”
“괴물이라.”
테트라가 피식 웃었다.
“아예 틀린 표현도 아니네. 타의에 의해 강제로 각성한 어리숙한 화신은 이성을 잃고 뇌리에 각인된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움직일 테니까.”
“단 하나의 목표……”
“모든 마(?)를 멸하고 부순다. 그러니 마에 관련된 것이라면 죄다 파괴하려고 드는 거야.”
짙은 폭력성에 잠식되어 한 마리의 괴물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별로 좋은 모습은 아닐 것 같았다.
인상을 찌푸리며 한잔 홀짝이고 있는데, 테트라는 턱을 괸 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너는 놀랍게도, 이지가 없는 상황에서 너의 폭주를 스스로 막기 위해 천상의 물건을 사용했어. 엘레나가 쪽지에 그렇게 적어주긴 했는데. 글쎄, 난 믿을 수가 없네. 아예 처음 듣는 경우라 말이지. 근데 네 흔적을 보면…… 거짓말인 것 같지도 않아.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테트라가 고개를 쭉 내밀어 나를 살피고 있었다. 당황하여 잠깐 몸을 내뺐으나 테트라는 곧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튼, 지금 네가 입은 후유증은 감히 천상의 물건을 멋대로 사용한 대가야.”
내가 기억을 잃은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지도 못할 사용법을 정확히 알고서 미스틸테인(Mistilteinn)을 꺼낸 건진 의문이지만…… 그렇기에 네가 특별한 거겠지. 넌 참 흥미로운 존재야, 에지오 크라닐.”
미스틸테인이라.
그전에, 나는 의문을 담아 물었다.
“천상의 물건이…… 뭐죠?”
“화신들이 제 신성을 완전히 개방한 상태에서만 비로소 열 수 있는 하늘의 무기고. 거기서 꺼낸 물건.”
하늘의 무기고라니. 이름만 들어도 굉장한 것들이 잠들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난 전쟁에서도 아주 큰 활약을 했지. 아마 네가 한 번쯤 들어봤을 시아인 케테르의 ‘천상의 검’도 그곳에 잠들어 있을 거야. 그걸 다룰 수 있는 건 같은 화신 중에서도 케테르와 동일한 백색의 신성을 가진 화신이라지만…… 나는 결국 다루지 못했어. 너라면 다룰 수 있을까? 궁금하네.”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진 몰라도, 저는 아마 안 될 것 같은데요……”
“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거지. 물론, 난 네가 무기고에 손을 대는 일이 앞으로 없었으면 좋겠어. 이건 진심이야.”
테트라는 그리 말하며 나를 바라봤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정리하자면.”
이야기를 찬찬히 되짚듯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얹었다. 나머지 한쪽 손으로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에지오 너는 대악마에 의해 강제로 각성을 당했고, 허락받지 않은 무기고의 문을 억지로 열어젖혀 그 안에 있던 물건을 마음대로 갖다 썼다는 거지. 사실 그 대가라 보기에도 애매하지만, 네 폭주를 막으려면 강제 각성의 트리거가 된 기억들을 죄다 묶어 봉인하는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됐다는 겁니까?”
“응, 맞아.”
머리가 다 아프군.
얻은 정보를 정리하는 데도 한세월일 거다.
잠시 호흡을 고르던 내가 말문을 열었다.
“해결법은…… 뭔가요.”
“뭐겠니.”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처럼.
테트라가 말했다.
“천상의 물건이 남긴 구멍이라면, 당연히 같은 천상의 물건으로 메꿔야지.”
겉으론 그리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으나.
방금 테트라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헤아린 내가, 사뭇 심각한 얼굴이 되어 입을 열었다.
“잠시만요.”
“응?”
“그 천상의 무기고라는 것을 열려면…… 신성을 완전히 개방해야 한다고 하셨죠?”
“그랬지? 잘 기억하는구나.”
어린아이 칭찬하듯 손뼉을 짝짝 친 테트라가 밝게 웃었지만, 정작 나는 웃지 못했다.
한참을 우물거리다 결국 토해내듯 말했다.
“테트라 님께서는 아까…… 인간이 신성을 완전히 개방하려면, 목숨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니까.
테트라의 말에 틀린 설명이 하나 없었다면,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다면.
테트라는 지금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단 거다.
이건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응, 그랬지. 그게 왜?”
“……”
“어쩌겠어. 그게 네 부탁이고 우리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인데.”
“그치만……”
“에지오. 들으렴.”
내 동요와는 달리 테트라는 차분하기만 하다.
“나는 계약에 의해 살아가는 몸이야. 이걸 깨뜨리는 순간 내 존재는 무너지게 되어 있어. 계약을 이행하지 않는 쪽이 더 좋지 않은 길이니까, 더 이상 말릴 생각은 마.”
“하지만, 분명 제 기억을 되찾는 건 쉬운 일이라고 하셨잖습니까. 목숨이 걸린 일이 어떻게……”
제아무리 계약이라고 하나, 이건 도를 넘어섰다. 고작 나 하나 때문에 제국의 지엄한 마탑주가 목숨을 바친다니.
그 누구보다 현명한 대마법사인 만큼 다 생각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해도, 본능적으로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들으라고 했지. 에지오.”
테트라는 한층 누그러진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말이 목숨을 바친다, 지. 살아남는 경우도 있어. 우리가 괜히 지난 전쟁에서 생환했을까? 신성을 개방하지 않고선 절대 이길 수 없는 싸움터였어. 그리고 우리는 돌아왔지. 결국 돌아오지 못한 화신도 꽤 있긴 했지만 말야.”
전사한 전쟁 영웅들.
그들의 비석은 영원의 언덕에 세워졌다.
“그리고 크게 걱정하진 마. 다른 화신들은 몰라도 나는 제어에 특히나 능숙한 편이거든. 자아를 잃지만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어. 하늘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어. 아무렴 나도 무척 소중하게 여기는 내 목숨을 함부로 버리겠니?”
테트라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기지개를 켜면서 팔을 위로 쭉 뻗는다. 으으으응. 하고 기분 좋은 신음을 낸 테트라가 입가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무엇보다 내가 운명을 깨달은 순간부터 일평생을 바쳐온 연구는, 그렇게 헛되지 않았거든. 그 연구를 끝마치기 전까지는 죽을 생각 따위 절대로 없기도 하고.”
그 미소는 곧 옆에 있던 마루를 향했다.
“……”
잠시 침묵하던 내가.
결국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무리한 부탁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글쎄, 아니라니까? 나 안 죽는다니까?”
“그렇지만……”
“에지오.”
나의 이름이 불렸을 때.
테트라는 슬쩍 내게 다가와 볼을 손으로 쓸었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역시나 눈이 멀 듯한 아름다움에 나는 불현듯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엘레나가 왜 널 도와주고 싶었는지 알 것도 같아. 눈동자와 혼(?)이 참 맑은 아이구나.”
마치 어머니처럼 자상한 모습에 마루가 일순 꿈틀거리며 경기를 일으키는 듯싶었으나, 막상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못했다. 테트라의 제지가 있었던 까닭이다.
“나는 너 같은 아이를 위해 연구를 하고 있단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진실로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어. 만물과 생명이, 정결하고 깨끗한 혼(?)이, 전부 구원받기를 원해.”
“그러니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야.”
“나는 얼마 뒤면 여길 나가야 하니까, 이만 시작하자.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나에게도, 너에게도.”
호숫가처럼 잔잔한 음성이 귓전을 울리고, 테트라가 내 볼을 쓸어내리던 손을 도로 거두자.
나는 굳게 다물었던 입을 겨우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테트라 님.”
“그래, 그래.”
건성으로 손을 휘적인 테트라는.
“여기서 기다려. 금방 꺼내올 테니까.”
옆에 있던 마루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나.
“……주인님.”
“응?”
굳은 눈으로 진중히 말을 잇는다.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가 있습니까?”
“응. 있어.”
“……”
마루는 어두운 낯빛으로 입을 다물었다.
“계약 때문이 아니더라도 저 아이를 도와주는 게, 결과적으로 나한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거든.”
테트라가 문득 내게 혀를 귀엽게 내밀어 보이면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쭉 찢었다.
“설마 날로 먹으려 했니? 그래야 할 의무는 없다지만 양심적으로 그건 좀 아니잖아. 그치?”
“……”
차라리 다행이다.
그렇게, 테트라가 본인이 만든 공간의 균열 속으로 한 발짝 내디딘 순간.
“돌아오면 내 연구 좀 도와줘.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정말 징글징글한 연구에도 끝이 보일 것 같거든.”
그런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16
테트라는 나에게 금방 돌아온다고 했다.
그 약속은 결과적으로 지켜졌다.
지지지직. 공간에 다시금 균열이 일었다. 찢겨진 곳에서 두 남녀가 걸어 나왔다.
메마른 숨소리와 단내가 확 밀려 나온다. 폭포수라도 흐르듯 물결치던 테트라의 머리칼은 정말로 푹 젖어 있었다.
눈꺼풀이 닫힌 그녀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이 일그러진 채였다. 백옥 같던 피부는 군데군데 땀방울과 핏물이 맺혀 후덥지근하고 송골송골하다.
완전히 탈력한 모양새의 테트라를 옆에서 부축하며, 입술을 짓씹은 마루가 날 노려봤다. 자신의 주인을 이렇게까지 만든 대상에게 강한 원망을 담아서. 그 서슬 퍼런 독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인류 최강을 능히 자처할 수 있는 존재가 저리 될 정도라면,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나는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마력을 전부 소진하셨어요. 당분간은 요양이 필요하실 거예요. 그 테트라 님이라고 하나 반나절은 걸릴 테니, 당신은 그때까지 여기 있어야 해요. 알아들었으면.”
제대로 걸을 힘마저 부족한 그녀를 대신하여 테트라의 손에 들린 그것을 받아든 마루가,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내게 그것을 건네주며 말했다.
“받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