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 낙인 (8)
* * *
#17
내 시야에 두 개의 사물이 들어왔다.
하나는 안쪽으로 뾰족한 가시가 돋은 팔찌고.
하나는 이 시대의 감성으론 이해하지 못할 디자인의 유리병이었다.
“각각 ’글레이프니르’와 ‘넥타르’다. 문지기의 눈을 피해 가져오느라 어쩔 수 없이 열화된 레플리카가 되어 버리긴 했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해. 네 상처를 수복하고 강제 각성을 방지하는 데엔 전혀 무리가 없을 거다.”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죠?”
“보면 몰라? 팔찌랑 음료잖아. 그럼 뭘 해야겠어?”
가시 돋친 마루의 말이 이어진 직후.
“마… 루……”
“주인님.”
“손님…… 에게, 제대로……”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마루가 날 바라봤다.
“이 팔찌를 끼세요.”
역시나 읽을 수 없는 문자로 바깥 테두리에 무어라 음각된 금속 팔찌.
이걸 이대로 착용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뾰족한 가시가 안쪽에 돋아 있었는데, 원래 그렇게 생긴 건지 마루와 테트라는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받아든 그것을 손목에 두르기 전, 잠시 목울대를 꿀꺽인 내가 마루를 향해 물었다.
“이걸 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가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지금은.”
“그럼……”
“당신이 ‘넥타르’를 마신 뒤에 벌어질 상황을 수습하게 만들어줄 물건이에요. 신성이 멋대로 폭주하는 걸 막고, 미쳐 날뛰려는 기운을 갈무리하게 만들어주죠. 그 과정에서 팔찌는 제 역할을 다한 뒤 소멸하게 되어 있어요.”
마루가 말을 마치자 나는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왠지 끼면 아플 것 같은데. 금속으로 된 거라 돌려서 낄 수도 없고. 손가락을 모은 상태로 원형의 구멍 안에 손을 천천히 집어넣어 본다.
‘윽.’
당연히 찔렸다. 팔찌를 끼는 과정에서 그 아래의 가시가 내 살갗을 찌르고 지나갔다. 손등의 연한 살결 위에 붉은색 선혈의 줄기가 쭉 그어졌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 고통이었던 까닭에, 인상을 찡그리면서 결국 손목에 팔찌를 둘렀다.
“이걸로 됐나요?”
“아직이에요. 흡수 과정을 거쳐야죠.”
“흡수……?”
그때였다.
—콱!
“끄아아아악!”
뇌리에 피가 튀는 듯했다.
분명 크기가 널널했던 팔찌가 급속도로 수축하여, 가시를 내 손목에 푹 찔러넣는다.
‘미, 친……’
뼈를 꽉 옥죄이는 감각과 마치 불에 생살이 타는 듯한 고통. 손목이 이대로 잘려 나갈 것 같았다.
단말마를 내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은 내가 오른 팔목을 다른 한쪽 손으로 강하게 붙들었다.
새빨간 피가 무서울 정도로 흘러내리고, 덜덜 경련하는 손목에선 화끈한 격통이 계속 일었다.
“참아요.”
마루는 단지 날 내려다보며 그럴 뿐이었다.
“끄으으윽……”
눈물이 왈칵 터져 나왔다. 팔찌는 내 손목을 뼈까지 부숴버릴 듯 더욱 세게 조여왔다.
바깥에 새겨진 괴상한 문자가 빛을 발아한다. 머릿속이 아득해질 정도의 격통에 정신을 영 차리지 못하던 나였으나, 그게 어디서 본 것 같은 형식의 문자란 건 불현듯 알 수 있었다. 엘레나가 작성한 편지의 글씨와 매우 비슷한 생김새.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엄살 부리지 말고. 이제 일어나세요.”
“흐… 흐으으으……”
어느 순간 옥죄이는 감각은 사라졌으나.
내 손목.
내 손목이……
“……?”
눈물을 줄줄 흘려대던 내가 겨우 고개를 들어 붙들고 있던 내 손목을 바라봤다.
분명 도중에 손목이 끊어지거나 절단된 줄 알았는데, 어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하디 멀쩡했다.
무척이나 생생하고 끔찍한 감각이었는데. 꿈이라도 꾼 것처럼 멍한 기분이었다.
그렇지만 내 뇌리에 스며들었던 그 번갯불 같은 격통의 잔향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나는 눈썹을 가운데로 모았다.
비단 손목이 멀쩡한 것뿐만이 아니라, 팔찌마저 어느샌가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흡수라는 건, 이걸 말하는 것이었을까.
감각이 남아있다는 걸 확인하듯 손을 연거푸 쥐락펴락했다. 여전히 핏줄을 바늘로 찌르는 듯 따끔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니 아예 참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제 이걸 마시세요.”
손가락으로 남은 눈물을 털어낸 내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마루가 들고 있던 유리병을 받아들었다.
찰랑.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신묘한 빛깔의 액체가 한 차례 출렁거렸다.
“천상의 신들만이 취할 권리가 있다는 ‘넥타르’예요. 이것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연금술사들이 넥타르의 하위호환인 ‘엘릭서’라는 걸 연금하려고 그렇게 애를 쓰던데, 전부 부질없는 짓인 거 아는지나 모르겠어요.”
엘릭서. 모든 병마를 낫게 할 수 있다는 전설의 영약. 내 눈앞에 있는 것은 그 엘릭서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당연히 열화판이에요. 그러나 당신이 하고자 하는 건 불로(?)나 불사(死)보다 훨씬 쉬운 종류의 일이니, 이 정도로도 전혀 걱정은 없죠. 결함 없는 진짜를 가져왔다간 오히려 후유증이 남았을 거예요.”
마루는 내게 그리 설명하며, 부축하던 테트라를 조심히 소파에 눕혔다.
안타까운 듯한 눈빛으로 테트라를 내려다보던 마루는, 그녀의 옆에서 조용히 주문을 읊었다.
“—. ——.”
따스한 빛이 한 차례 일자, 잔뜩 일그러져 있던 테트라의 안색도 한결 편안해진 것 같았다.
마루는 허공에 짧은 손짓을 했다. 어디선가 마른 수건이 날아왔다. 마루는 눈을 감은 테트라의 이마와 얼굴을 비롯해서 땀방울이 맺힌 곳에 잠자코 손길을 가져갔다.
그러던 사이 유리병 안의 액체를 관찰하던 내가 슬쩍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걸 마시면…… 기억이 돌아오는 겁니까?”
“네.”
마루는 고개를 끄덕인 뒤.
“한번에 돌아오진 않겠지만요.”
그렇게 말했다.
“적응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거죠. 일시에 잠재웠던 모든 걸 깨워 버리면, 당신은 필연적으로 미칠 거예요. 아니면 각성을 하거나. 이게 좋은 뜻이 아니라는 건 당신도 알겠죠?”
“……대충은 알겠습니다.”
“물론 적응을 한다고 해도 넥타르만으론 한계가 있어요. 절대 피할 수 없는 위험성이 동반되죠.”
마루는 테트라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말했다.
“그런 부작용을 최대한 없애고 싶다는 당신의 부탁 때문에, 주인님이 무리를 하시면서까지 그 팔찌를 가져오신 거예요.”
“……”
“봉인되어 있는 걸 전부 깨우지 않고 원하는 것만 골라내어 부분부분만 해방시키는 건 절대 불가능해요. 차라리 처음부터 모든 걸 해방시킨 뒤에, 가장 위험한 것들만 다시 잠재우는 거죠. 그 팔찌는 거기서 잠재우는 역할을 할 거예요.”
손님에게 제대로 대접하란 말을 테트라에게 들었던 까닭인지, 마루는 내게 태도를 바꾸어 친절히 설명을 해주고 있었다. 반면 어조에 서린 분위기는 결코 친절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쯤에서.
“당신이 무얼 되찾으려 하는 건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죠?”
마루는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모든 걸, 받아들이세요.”
“……”
막 유리병의 뚜껑을 열려던 나의 귓전에 왠지 모를 마루의 말들이 들려왔다.
“테트라 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아니, 깜빡 잊으신 건지. 아니면 당신이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 건지. 넥타르를 마시고 당신의 내면에 당신 스스로 접근한 이후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경고하는 거예요. 혹시 몰라서.”
대체 무엇을 경고하려는 것일까.
“모든 화신들은 말이죠. 단순한 계약을 통해 생(?)을 얻는 게 아녜요.”
생을 간절히 바라는 인간이 완전한 죽음에 이르기 직전, 비로소 내미는 하늘의 손길.
그 손을 잡는 순간 이루어지는 계약.
화신이란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랬다.
“본인의 미래를 운명에 저당 잡히는 것도 모자라서, 가엾고 불쌍하게도. 자신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증명해야만 하죠.”
마루가 짤막이 읊조렸다.
“그렇기에 겪는 것이 고행(?行).”
정말 이상한 일이지만, 나를 바라보는 마루의 눈빛에 일말의 동정심이 스며든 것도 같았다.
“계약이 이행되는 과정에서, 화신이 될 인간에게 하늘은 영혼이 버틸 수 있는 한계까지 고행을 시켜요. 계속. 무한히. 혼(?)이 붕괴하여 결국 누구의 도움 없이는 기본적인 판단조차 불가능할 정도가 될 때까지. 영겁의 시간 동안.”
무한과 영겁을 강조하는 어조에 미약한 두려움마저 들 정도였다.
“본인은 이미 한계까지 부딪혀 절대 일어설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본인의 영혼의 그릇이 크고 넓다면 고행은 절대 끝나지 않아요. 어떻게든 다시 일어서야만 하죠. 그렇지 않으면 더 깊은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 테니까요.”
무엇을 말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깊은 나락, 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무언가 떠오르는 것도 같았다.
‘……뭐였지?’
다만 그 기억은 너무나 흐릿해서, 결국 까마득히 깊은 수면 아래 다시금 잠들었다.
“화신에게 있어 신성의 개방이란 그런 거예요. 당신이 지금 넥타르를 마심으로써 결과적으로 행하려는 것도 마찬가지고.”
나는 아직 유리병을 쉬이 기울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루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형용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던 까닭이다.
“다른 인간들처럼 단순히 목숨을 바치는 게 아니라, 육신 말고도 영혼이 죄 붕괴할 각오를 해야 하는 거죠. 증명을 위한 고행의 끝에서 비로소 얻은 기적을 불러오는 것인 만큼, 고행을 겪은 뒤 마모되었던 영혼마저 도로 강림시키는 것이니까요.”
한마디로 각성이란 그런 것이다. 고행이라는 과정에서 얻은 힘을 불러오면,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이 붕괴한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사령(死?)으로도 남지 않는 완전한 소멸.
“그래서 신성을 개방한 화신들은, 대부분 미쳐버린 채 단 하나의 목표만을 쫓게 되는 거예요.”
달리 말해 미치지 않는 화신도 있다.
마루는 열심히 테트라의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중간중간 새하얀 빛을 머금은 치료의 주문을 외면서.
테트라는 나를 위해 신성을 개방했다고 한다. 그건 자신의 영혼이 붕괴할 각오를 마쳤다는 이야기다.
물론 제어할 방법은 있다고 했으나, 테트라로선 얼마나 큰 결심을 마치고 안에 들어섰던 건지, 불현듯 생각해 보면 아랫입술을 짓씹을 수밖에 없었다.
비릿한 피맛을 느끼며 내가 물었다.
“고행이란 건… 뭔가요.”
“……”
마루가 입술을 달싹였다.
“예비 화신으로 지정된 인간이, 언제 끝날지, 얼마나 어려울지, 그 끝에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어느 무엇도 지니지 않은 맨몸으로 행하는 영겁의 시련.”
“……”
“시련을 받는 대상의 영혼이 붕괴하는 순간 고행은 끝나요. 그 상태로 얻은 것을 결산하죠. 앞서 말한 고행의 기간, 난이도, 고행에서 증명한 자격 등을 전부 합산하여 차등적으로 신성을 새로이 부여하고, 혼을 초기의 상태로 되돌린 뒤, 고행을 완수한 자의 생(?)과 사(死)를 뒤집어주죠.”
“……”
“그렇게 생을 얻은 인간은 신성의 영향으로 전에 없던 능력을 얻거나, 외형이 바뀌기도 해요. 바로 당신처럼 말이죠.”
“……”
내 몸이 이렇게 된 이유가.
그 고행이란 시련의 결과라는 것인가?
마루가 날 또렷이 직시한다. 청년의 눈동자와 일직선으로 마주쳤다. 나는 숫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백색(白色)은 일반적인 인간들에게는 부여되지 않아요. 오직 계약과 고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신성.”
이 넓은 대륙에서도 백색 마력을 지닌 사람의 숫자가 극히 적었던 이유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주인님께서는……”
마루는 말끝을 흐렸다.
결국 거기서 더 말을 잇는 일은 없었다.
“아무튼.”
손가락으로 내 손에 들린 유리병을 가리킨다.
“그걸 마시면, 아마 당신은 원하지 않았던 기억까지도 되찾게 될지 몰라요. 이것이 제가 당신한테 경고를 드리는 이유입니다.”
엘레나가 말했었다. 내가 찾으려는 기억은 워낙 깊숙한 곳에 봉인된 탓에, 그걸 찾으려면 필연적으로 2단계 봉인이란 것도 풀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고.
마루는 지금 그 2단계 봉인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었다. 풀면 괴물이 된다는 엘레나의 말뜻을 이제 알 것도 같았다.
“…당신도 화신인가요? 어떻게 그런 세세한 걸 알고 있는 겁니까?”
“아뇨. 저는 화신이 아니에요.”
마루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전에, 인간도 아니죠.”
“……!”
인간이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마루는 내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이 모든 지식은 주인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 저는 그 지식들을 이어받은 것에 지나지 않아요.”
아무래도 그들은 평범한 사용인과 주인의 관계가 아닌 듯했다.
“알았으면 넥타르를 마시세요. 그리고 아무도 못 도와줘요. 모든 건 당신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니까요.”
안다. 이것은 오로지 나의 문제였다. 내가 처음 부탁했고, 그리하길 바랐으며, 모든 위험을 감수하기로 했다. 테트라는 그런 나의 의지를 믿고서 무척이나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었다. 여기서 두렵다고 내빼는 건 도저히 할 만한 게 아니었다.
“어차피 모든 게 끝나면 고행에 대한 기억 같은 건 글레이프니르가 알아서 잘 제어해 주겠지만, 그전까진 당신이 그걸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아요. 다만, 당신을 주인님께서 제대로 본 게 맞다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대가일 거예요.”
고개를 주억인다. 다 해결할 방법이 있으니까 이것들을 건네준 거겠지. 오늘 처음 봤다곤 하지만 나는 테트라를 믿는다. 그녀가 내게 보여준 모습을 믿는다.
‘……’
그렇지만.
나도 인간이니까.
두려움이 먼저 앞서는 건 사실이다.
저리 무섭게 경고하는데, 두렵지 않을 인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유리병을 붙들고 있는 내 손목도 잘게 떨리고 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아주 약간 후회된다.
이런 짓을 하면서까지 기억을 찾는 게 맞나?
엘레나가 말했던 대로 내 인격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인데, 정말 이게 옳은 길인가?
이대로 전부 잊고 사는 게… 훨씬 더 나은 길이 아닌가?
‘아니지.’
그러나 그에 대한 결론은 이미 내려진 채였다.
넥타르의 마개를 열어, 옆에 있던 탁자에 턱 하고 내려놓는다. 그 마개는 곧 빛의 조각으로 화해 공중에 스며들었다.
“후…”
짧은 숨결을 내뱉고.
넥타르를 들이켜기 전.
“저기,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무언가요?”
눈을 끔뻑이는 마루에게.
나는 물었다.
“…포기만 안 하면, 되는 건가요?”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건데.
나는 아예 무재능이 아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실패하고 실패하면서, 결국 끝까지 놓지 않았으니까. 그럼 나는 포기하지 않는 재능이라도 있었던 게 아닐까. 별 같잖은 것도 재능이라 부를 수 있을진대, 그 정도면 하나의 재능으로 쳐줘도 되는 게 아닐까.
남은 한쪽 손의 주먹을 쥐었다. 마루는 말이 없었다. 잠시간의 적막이 장내를 훑고 지나간 뒤에.
“…저는 몰라요. 제가 겪어본 게 아니니까요.”
다만, 이라고 덧붙이며.
“주인님이었다면, 그래, 라고 말씀하셨겠죠.”
마루는 얌전히 테트라의 앞머리를 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믿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했으므로.
고개를 끄덕인 뒤.
—확!
단번에 넥타르를 벌컥 들이마셨다.
#18
그러나.
의외로 평범하게 청량한 포도주의 맛을 내던 넥타르를 전부 비우고, 마지막 물방울까지 탈탈 털어낸 뒤, 이를 악물고 곧 닥쳐올 반응을 기다렸던 나는 의문을 표했다.
‘뭐 없는데?’
멀쩡했다. 몸도, 정신도. 평소와 같았다. 배 안에 액체가 들어찬 느낌은 나는데, 술처럼 화끈거린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럴 린 없지만 혹시 착각해서 그냥 포도주를 가져온 게 아닌가, 같은 생각마저 들었을 무렵.
“아무 반응도 없……”
“명심하세요.”
아무 반응도 없다, 라고 말하려던 찰나에, 마루가 한층 진중해진 눈빛으로 내게 입을 달싹였다.
“네? 무슨……”
무엇을 명심하라는 걸까.
그때였다.
세상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가장 먼저 귀를 바닥에 처박았다. 눈은 멀었고, 감각은 불시에 차단되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앞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까마득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세상. 거기서 아주 얕고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점 하나.
“주인님과 동일한 백색 신성을 지닌 당신은, 수백 년 이상의 고행을 버틴 극소수의 인간이라는 걸.”
귀가 아닌 뇌를 통해 직접적으로 짓쳐오는 괴이한 소리들. 내 머릿속은 삽시간에 높고 낮은 이명들로 가득 들어찼다.
‘점이……’
새까만 도화지에 하얀 점을 찍은 듯. 마루가 내 주변에 둥그런 결계를 치고, 바닥에 엎어진 내 입에서 침이 흐르고 있는 것도 모르는 채, 나는 그저 먼눈으로 그 점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 점은 점점 커져서,
곧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불그스름한 빛무리. 일순 새하얗게 물든 공간. 눈이 부시고, 물소리가 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대해(大?)가 펼쳐진다. 이글거리는 저녁놀 아래 주홍빛 바다가 물비늘을 무겁게 뒤척인다. 기억을 관통하는 익숙한 기시감에, 애당초 감지도 않았던 눈꺼풀을 서서히 열어본다. 그러자.
—기적을 원하나. 소년이여.
누군가 내게 속삭였다.
#19
“으음……”
소파 위에서 테트라는 눈을 떴다.
‘윽, 머리야……’
덜덜 흔들리는 시야를 겨우 다잡았다. 머리가 핑핑 돌고 속은 금방이라도 토악질을 할 듯 부글거리며 메스껍기만 하나, 전보단 훨씬 괜찮아졌다.
‘마루는…… 에지오는……’
멍하니 올려다본 곳에는 책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여전히 자신의 집무실이다. 등허리를 감싼 푹신한 감각. 자신은 소파에 누워 있었다.
‘산 건가……’
테트라가 안도의 기색을 내보이며 이마에 팔목을 올렸다.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될 정도로 감각이 돌아올 때까진 시간이 꽤 걸렸다.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조금만 늦었다면 더 이상 손쓸 새도 없었을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혼이라면 만일 부서지더라도 그 파편들을 어떻게 잘 조합해볼 순 있겠지만,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혼이라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성공했어.’
그건 분명한 쾌재였다. 테트라가 한숨을 토했다.
그런데……
“마루?”
본래라면 테트라가 이렇듯 정신을 잃었을 때 밀착하여 간호를 해주는 마루였건만, 지금은 자신의 곁에 없었다.
이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뭘 가지러 간 걸까. 딱히 그럴 게 없을 텐데. 따로 할 일이 있어도 이처럼 끙끙 앓는 테트라의 곁을 웬만해선 절대 떠나지 않는 마루다.
“마루? 나 일어났……”
그렇기에, 테트라는 의문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린 채 천천히 소파로부터 상체를 일으켰다.
“……아. 주인님.”
마루는 어디 가지 않았다.
저기에 있었다.
바로 맞은편 소파에서,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올린 채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음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신이 좀… 드세요?”
테트라는 눈을 끔뻑였다.
“어, 어. 드는데…… 뭐야, 왜 그러고 있어? 에지오는? 내가 준 물건 제대로 다 썼어?”
“……네. 썼어요.”
마루가 고개를 끄덕이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상하다.
뭔가……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낀 테트라가 낯빛을 어둡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대마법사의 직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푹 쉬었던 덕분에 마력도 꽤 회복된 참이고. 손가락을 튕겨 남은 노폐물 등을 깔끔하게 씻어내린 테트라가 마루 쪽을 보았다.
정확히는 그 너머를.
‘……어?’
다음 순간.
테트라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설명해봐.”
“……”
마루의 이마가 아래로 기울었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제 책임이에요.”
“설명 먼저 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빠르게 조치를 취하려고 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죄송합니다. 주인님.”
자신의 능력 부족을 탓하는 건지. 아니면 제 주인의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서 그랬던 것인지. 마루는 비참한 심정인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조용히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실패... 했어요.”
“……”
실패했다.
그 말은, 무슨 뜻일까.
테트라의 원래 의도는 그거였다. 넥타르를 통해 에지오의 신성을 개방, 모든 봉인을 일시에 풀고, 에지오가 그 과정에서 풀려난 기억들을 전부 되찾은 뒤, 에지오의 몸에 흡수된 글레이프니르가 신성 개방의 후폭풍을 억제한다.
그리고는 글레이프니르가 가장 위험한 부분들만 먼저 잠재운 다음, 천천히 기억의 적응을 도와준다. 한번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그래야 영혼이 붕괴하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그게 실패했다는 건.
거기서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안 될 과정에, 구멍이 뚫려 버렸다는 건……
“글레이프니르가… 파괴됐어요.”
“……뭐?”
믿을 수 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건 절대로 지금 파괴되어선 안 되는 물건이다. 종래에 모든 역할을 마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소멸해야 하는 팔찌였다.
그렇지 않으면……
“설마.”
“……죄송합니다. 주인님.”
이것으로 세 번째 사과.
‘아냐… 안 돼.’
머리를 흔들던 테트라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잠깐 발을 헛디디기도 했지만, 일단 밸런스를 유지했다. 마루가 급히 일어나려고 했으나 테트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마루를 무시한 채 그 너머로 다급히 걸어간다. 걸음에는 곧 가속이 붙었다.
“아, 아……”
마침내.
테트라는 에지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예상과 달리 에지오는 깨어 있었다.
눈도 뜨고 있고, 확실하게 호흡도 하고 있다. 혈색도 괜찮다. 모든 게 정상이다.
그렇지만.
딱 하나가 정상이 아니었다.
“……글레이프니르의 레플리카로는, 500년 이상의 고행에서 비롯된 결과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많아 봐야 백 년 언저리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정 외의 아득한 숫자였다.
믿을 수 없는 말이 들려오는 것도 잠시.
테트라는 에지오를 바라보았다.
“아.”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눈이 붉었다.
그것은 피였다.
에지오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에지오.”
“……”
“……너, 내 말 들리니?”
에지오가 고개를 들어 테트라를 본다.
적어도 들린단 의미였다.
만일 마루의 설명이 진실이라면, 에지오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는 질문을 꺼낸다.
“……몇 번 죽었니.”
“……”
입가에서 침을 흘리던 에지오가 중얼거린다.
“……1042번.”
옆에서 상태를 지켜본 마루가 이르기를.
풀려난 봉인의 일부만을 제어하는 것으로 한계에 달해, 결국 글레이프니르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니.
지금 에지오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고행의 일부에 불과하다.
팔찌가 단숨에 부서질 정도라면 족히 500년 이상의 고행을 겪었다는 뜻이기에, 그것의 절반을 도로 봉인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봤자 무려 250년이란 기간이 남는다.
얼만큼의 기억을 분할하여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지금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족히 천 번이 넘는 죽음을 경험한 에지오다.
까마득한 나락으로 떨어져서, 아득바득 기어나온 횟수만 그 정도다.
그렇다면, 원래는 대체 몇 번이었을까.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죽고 다시 시작해야 하는 연옥(??)에서, 에지오는 5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얼마나 죽어왔던 걸까……
테트라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저리 침묵하고 있는 에지오가 속에서 어떠한 고통을 겪고 있을진, 테트라의 입장에서도 무척이나 공감할 수 있는 바가 많았기에.
“미안해… 내가…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
부서지지 않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결국 감당할 수 없이 마모되어버린 안타까운 영혼에게, 조심스레 다가가 말없이 무릎을 꿇고 끌어안았다.
테트라가 울먹이며 자신을 끌어안고 있을 때.
에지오는 텅 빈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찾지 말걸.’
모든 게, 부질없어졌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