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낙인 (9)
* * *
#20
에지오의 상태는 심각했다.
둑 터진 듯 홍수처럼 밀려든 기억들이 에지오의 영혼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아직 준비되지 못한 육체가 이러한 충격을 감당할 수 있을 리 없다. 그 결과 에지오의 영혼은 거친 파도에 무너지는 모래성처럼 맥없이 허물어졌다.
‘이대로 놔두면… 붕괴할 거야.’
완전히 상정 외의 결과. 모든 책임은 테트라 자신에게 있었다. 테트라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은 채 이를 악물었다.
뚝, 뚝.
어깨가 축축하다. 철분 섞인 피비린내가 난다. 에지오가 흘리는 피눈물 탓이었다.
원래라면 되찾지 않았어야 할 기억들. 지금 정신을 차린 순간 그 끔찍한 기억들은 전부 잊어야만 했을 텐데, 과부하를 버티지 못한 글레이프니르의 레플리카가 파괴되면서 미처 억제할 수 없었던 시련의 기억이 에지오에게 흘러들어간 것이었다.
그건 평범한 인간이 감당할 만한 게 아니다. 진즉 혼이 찢기고 무너져서 피를 토하고 죽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에지오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테트라도 고작 이백 년 가까이 버텼을 뿐인 고행을 무려 오백 년 이상이나 버텨낸 에지오다.
감히 수치로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었던 까닭에, 이리 정신을 붙들고서 간신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살아도 살아있는 게 아닐 터.
에지오는 이미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천천히, 하루마다 조금씩 본래의 기억을 되찾았어야만 한다. 그것이 테트라의 초기 의도였다.
그러나 중간 과정이 모조리 스킵되어 버렸다.
에지오는 본인이 원하던 모든 기억을 되찾는 데 성공했지만, 결코 원하지 않았던 기억마저 떠올려 버렸다.
이러한 결과를 미리 알았더라면 테트라는 무슨 일이 있어도—’계약’을 위반할 생각까지 해가면서—에지오의 부탁을 결사코 반대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에지오의 상태는 더 심각해질 거다. 인간의 뇌가 수용할 수 있는 기억량에는 한계가 있다. 지금의 에지오는 그걸 아득히 초월한 상태다.
무엇보다 수백 년의 아득한 고행.
그리고 천 번이 넘는 죽음.
에지오는 기나긴 고행을 겪으며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스럽게 죽었을 거다. 그걸 직접 경험한 인간은 미치지 않고서야 버틸 수가 없다. 정확히는, 그 기억을 완전히 떠올린 인간에 한해서.
‘미치지 않았어.’
놀라운 일이나, 에지오는 아직 제정신이다.
그러니까.
아직, 아직은… 기회가 있다.
“에지오. 잘 들어. 내가 반드시 해결법을……”
“……저는.”
테트라의 에지오의 어깨를 붙들고 천천히 마법을 이용하여 에지오를 잠재우려고 했을 때.
에지오의 갈라진 목소리가 주륵 흘렀다.
“왜… 저인 건가요.”
“……”
“제가… 그렇게, 잘못을…… 했나요?”
“……아냐. 에지오. 너의 잘못이……”
잘못이 있다면 그건 전부 하늘의 잘못이다. 너는 단순한 피해자일 뿐이라고, 테트라는 그렇게 말하려 했다.
“저는… 그냥, 살고 싶었을 뿐인데…”
“……”
모든 화신들이 그랬다. 고행을 겪는 이유는 오로지 살고 싶기 때문에. 생을 바랐기 때문에. 그 대가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다.
메마른 입술이 무서운 말을 연거푸 토해냈다.
“…거기서 사지가 찢기고, 토막나고, 불에 타고, 뽑히고, 떨어지고, 뭉개지고, 먹히고, 뜯기고, 부러지고, 얼어죽고, 아사?死, 분사?死, 익사?死, 갈사?死, 압사?死…… 너무, 너무 아팠어요…”
영혼의 시련이라곤 하나 그렇기에 더욱 직접적인 타격을 준다. 인간의 오감은 물론이고 배고픔마저 구현되어 있다.
삶과 죽음을 뒤집는다니.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려 한 대가는 결코 작지 않다. 너무나 거대했다. 차라리, 인간에게 끝없는 고통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천상의 지옥이라 함이 옳을까.
구현된 육체는 셀 수도 없는 죽음을 겪지만, 정작 영혼은 죽지 않기에. 그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뿐이다. 닳고 닳아 결국 마모될 때까지. 먼지 한 줌 남지 않게 될 때까지.
죽지 않기 위해서 골백번 죽는다니.
이보다 역설적인 일도 없었다.
“떠올리지 마. 다 잊어 버려. 내가, 내가 잊게 해줄게.”
“이런 걸, 어떻게 잊어요……”
짙은 절망감 어린 눈에 또 다시 핏방울이 맺힌다.
어릴 때 죽을 뻔한 경험은 종종 강한 트라우마로 남는다. 죽을 뻔한 일. 고작 그 정도의 일로 취급될 정도였다. 실제로 죽는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단 한 번의 죽음에 대한 경험조차 사람을 평생 폐인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죽는 것이 무서워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죽음이었다. 하여, 에지오가 경험한 횟수는.
천 번. 혹은 그 이상.
이럴 거면 도대체 왜 생을 간절히도 원했는가. 무참히 후회스럽다. 차라리,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는 게 좋았다.
모든 게… 부질없다.
엘레나의 경고는 이것이었을까. 망가진 인격마저 돌아올 수도 있다고. 아니. 그렇지 않다. 망가지다 못해 뭉개진 에지오의 영혼은 이미 수복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 버렸다.
온몸에 벌레가 기는 듯 소름이 끼친다. 살아 있는 게 무서운 나머지 제 살갗을 전부 긁어 떼어내고 싶었다. 고통. 끝없는 고통. 왜 죽지 않는 거야. 어차피 또 죽을 텐데. 그럼 지금 죽는 게 낫잖아. 나는 지금 너무 고통스러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비록 눈을 뜨고 있지만 사방이 암막에 휩싸인 듯 새까맣고, 귓가에서는 테트라의 목소리와 섞여 자신의 끔찍한 비명이 연속으로 재생된다. 에지오가 그간 살아온 연월의 다섯 배가 넘는 무수한 기억들이 그의 인격을 서서히 깎아 먹고 있었다.
지금껏 정신을 차리고 있는 게 기적이었다.
이제는, 편해지고 싶다.
“그리고…”
에지오의 눈가 아래 다시금.
망울진 핏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결국… 저한테는 아무도 없었던 거네요.”
그렇게 되찾고 싶었던 기억은,
모든 걸 후회스럽게 만들었다.
……깊게 따지고 들어가면,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에지오는 모든 게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참 열심히도 살았다. 순수하게 그녀들이 좋았다. 때문에 뼈를 깎으며 노력했다.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갔다. 절대 멈추지 않고 계속 정진하고자 했으며, 그 어떤 위기가 도래해도 극복하고자… 사력을 다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후회스런 과거를 보내주고, 중등부 학생이란 그 어린 나이에 겪은 좌절심, 절망감, 회한들을 전부 집어삼켜, 끝끝내 묻어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랬는데.
—……슈리엘, 선, 배님…?
—선배는, 선배는 정말……
거기서, 그만 꺾여버린 거다.
달이 환한 밤. 투명한 호숫가. 악마는 셋.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부딪혀,
그녀를 구해낸 결과.
——모든 걸 잃었다.
또 다른 그녀와의 약속을 포기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해서. 그때의 너는 살아있되 죽어 있었단 슈리엘의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된 에지오는……
당장 죽지 않는 게 이상할 상태로도, 온몸이 구겨지고 바스라진 채, 그럼에도 핏물을 삼키고 다리를 절뚝이며.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소중한 약속을 깨뜨리지 않기 위해 죽음마저 각오했으나, 마침내 돌아오는 것은 존재를 부정당하는 일이었다.
더 이상 설 곳이 없었다.
그때, 에지오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죽자.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더 이상 살 의미가 없다.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자신의 탓이다.
재능 하나 없었던 쓰레기. 자신에게도 재능이랄 게 있었다면, 모든 일이 이리 흘러가진 않았을 텐데. 루비아의 곁에서도 당당히 설 수 있었을 텐데. 그녀와 멀어지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최소한의 노력에 대한 보상 정도는 받아서, 그럭저럭 살만했을 텐데.
접점 하나 없었던 뮤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게 될 일도, 그로 인해 뮤가 슬퍼할 일도, 뮤와 연인이 되고, 그녀를 위해 노력하고, 마음을 버리고, 약속해서, 그 약속이 결국 무참히 깨져버릴 일도.
전부 없었을 텐데.
자신만 아니었다면.
재능이 없기에 뭐라도 해보려던 에지오다. 무엇도 하지 못했던 에지오다.
그녀들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
너무 큰 상처를 받았다.
이렇게 살 거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뭉치고 뭉쳐 결국 자기를 향한 끝없는 비난의 화살이 되었다. 전부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부족해서. 나만 좀 더 잘났더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여기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현실은 변하지 않을 거라면. 그럴 거라면. 그럼 죽는 게 낫잖아.
에지오는 그쯤에서.
삶의 의지를 완전히 잃었다.
그러나 에지오는 이곳에 살아 있었다. 하늘의 이치를 거슬렀다.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바랐지만, 직후 그 누구보다 간절히 생을 원했기 때문에. 에지오는 오백 년의 고행을 거쳐 새로운 힘을 얻었다. 과거의 껍데기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처음에는 무엇을 해도 바뀔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해서, 평생을 불구로 살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원했다.
—기회를 원하나.. 소년이여.
그러나,
재능을 주겠다고 한다.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것이다.
—여(?)는 네게 다시 물을 것이다.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겠다고 한다.
—기회를, 원하나.
모든 걸 바로잡을 기회를.
주겠다고 한다.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에지오는 새로이 태어났다.
다만, 날 때부터 가진 신성과 육체가 너무나도 보잘것없었던 탓에, 그러나 지극히 공평하게도 영혼의 강도만큼은 평균을 아득히 초월했기에.
가히 불굴(?)이라 칭할 수 있었음에.
그 단단한 정신마저 결국 무너질 때까지 죽고 또 죽어서, 마침내 죽음을 극복하는 것에 성공했다.
그토록 원하던 걸 얻었다.
비록 모든 걸 잃어버렸지만, 다시 시작할 기회는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내면에 잠재된 기억이 에지오의 평소 인격을 아주 약간 마모시켰다곤 하나, 정상적으로 생활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되레 긍정적인 변화였을 터.
폐쇄적이고 음침했던 성격이 좀 더 쾌활하고 활동적으로 바뀌었다. 열등했던 모든 신체적 조건이 역전되었다. 에지오는 자신이 바라던 이상(理?)의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이제 무슨 소용이 있는 걸까.
부질없다.
여기서도 또 끔찍한 일들을 겪었다. 이제는 겨우 평화로운 일상을 영위하나 싶었는데, 불시에 악마란 것에게 습격을 당했다.
그러자 에지오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것으로 끝이 아닐 거다.
테트라와 엘레나에게 들은 얘기가 있다. 마족들은 에지오를 노릴 거다. 앞으로도 계속.
그럼 필연적으로 주변인들이 휘말리겠지. 이곳의 친구들이 생명의 위험에 노출된다. 에지오 자신 때문에.
그게 자신의 운명이란다.
모든 추악한 진실을 깨닫고, 에지오는 절망했다.
세상을 향한 끝없는 원망과 증오는 결국 빛바랜 재가 되었다. 격렬한 분노도, 원통한 슬픔도 전부 의미가 없다.
에지오의 영혼이 시시각각 붕괴되고 있었다. 한계를 넘은 고통스런 기억들이 뇌를 지배한 채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버티는 게 용한 수준. 에지오의 눈동자가 점차 빛을 잃었다.
이미 다 타고 남은 재처럼.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에지오는 잿빛의 머리칼을 아래로 힘없이 늘어뜨렸다.
그가 혀를 깨물려는 것을 알아채고서, 테트라는 에지오의 목덜미에 손을 얹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편히 쉬렴.”
순간, 따스한 빛이 일었고.
에지오는 피로 얼룩진 눈꺼풀을 스르르 닫았다.
#21
에지오와 테트라의 손등에 각인된 낙인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계약이 이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계약은 성공적으로 이행되었다.
에지오는 자신의 잃어버린 것을 모두 되찾고 싶다고 말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기원대로 이루어졌다. 테트라는 에지오의 바람에 최대한 협조했으며, 하늘의 눈을 피해 천상의 금고를 열어젖히기까지 했다. 그의 부탁을 성실하게 완수한 것이다.
그 결과로, 테트라와 에지오의 손등에 새겨졌던 낙인은 에지오가 잠든 사이 강렬한 빛을 흩뿌렸고, 직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테트라는 에지오를 도울 필요가 없다.
냉철한 말이지만, 계약은 끝났다.
아울러 테트라는 시간이 별로 없다. 마탑에서 아직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았다. 에지오 한 명에게 온 신경을 붙들고 있을 여유가 없다.
놔두면 죽지는 않을 거다. 곧 정신을 차리긴 하겠지. 지금까지 버텨낸 에지오를 보아할 때, 어쩌면 감당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겠지만, 시간을 들여 천천히……
아니.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더 늦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주인님.”
“네 잘못이 아니라고 했잖아.”
일련의 과정에서 마루가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모든 과정은 에지오 본인이 부담해야 했던 까닭이다. 그런데도 마루는 제 주인을 고생하게 했다는 생각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났다.
아직은 주말이다. 일요일. 테트라 정도라면 에지오가 원치 않는 결석을 하게 된다 한들, 출석을 인정케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냐는 거다.
에지오의 혼이 붕괴하는 걸 막기 위해 일시적으로 잠재운 상태. 그냥 수면에 빠진 건 아니다. 좀 더 특별한 마법을 사용했다. 그 상태에서 테트라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다.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온전한 상태로 되돌릴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네…마루.”
“네, 주인님.”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에지오는 이곳에 좀 더 있어야만 했다.
의식을 잃은 채 침대에 누워 있을 뿐인 에지오를 내려다보며, 테트라는 그의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내림과 함께 입을 열었다.
“슬슬 준비하자. 꽤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에지오가 이렇게 된 것이 전부 테트라 본인의 탓이라면.
끝까지 책임은 져야 한다.
그것이 평생의 약속이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