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 정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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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귀 떨어지는 줄 알았네. 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안다. 아는 사람이 본다면 더 놀랄 것이다. 루비아는 지금 화를 내고 있었다.
참다 참다 결국 폭발해 버린 것처럼, 숨을 몰아쉬면서 주먹을 꾹 쥐고 있었다. 눈썹이 일그러진 채 중앙으로 모였다. 작은 어깨는 얕게 떨리는 중이다.
“너라고, 부르지, 마. 너보다 내가 한 살 많은 거 몰라?”
확실히, 뮤가 루비아를 처음 만났을 때 언니랑 호칭을 입에 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프론티어 바깥에서의 일. 본래 나이에 관계없이 평등한 위치로 재정립되는 프론티어에서, 뮤는 굳이 루비아를 언니라 부를 필요가 없었다.
뮤는 픽 웃으며 검을 빙그르르 돌렸다.
“언니 대접을 받고 싶으면 존경할 만한 모습을 보여주던가. 네 행동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
“……너만 마음에 안 드는 줄 알아?”
“네가 나한테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건 나도 알고 있어.”
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는데?”
“……”
“좋아, 저번에 의료원에서 나누던 얘기도 다 못했었고. 이참에 시원하게 다 까놓고 얘기해 보자.”
팍, 하고 연무장 바닥에 검 끝을 박아 넣는다.
“솔직히 내 말 다 맞잖아. 너도 아예 멍청한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 거 아냐? 네 생각이나 행동이 보는 입장에서 정말 답답함을 불러일으킨다는 거.”
“시끄러워…! 네가 뭘 안다고 나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거야? 너는 내가 아니야. 너는 아무것도 몰라.”
“그래, 모를 수도 있지. 네 말대로 나는 네가 아니니까. 그럼 내 궁금증 좀 해결해줘 봐. 지금까지 에지오한테 대체 왜 그랬는지. 넌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길래 보는 사람을 참 답답하게 만드는 건지……”
그때.
“나도.”
“뭐?”
“나도…… 노력을 안 한 줄 알아?”
루비아는 이어 울분을 토해내듯, 천천히 입을 연다.
“에지오와 떨어져서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동안 어떤 고민을 했는지, 에지오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에지오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고, 에지오를 지금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조차, 너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모르면 제발 그런 말 좀 함부로 하지 마. 나 정말 화나려고 해.”
“화는 지금 내고 계시고…… 그래, 네 말처럼 모를 수도 있다니까? 그러니까 내 의문 좀 해결해달라고 내가 방금 말했잖아?”
“……그걸 너한테 알려줄 의무는 없어.”
루비아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장내를 울리는 목소리 사이사이에 잦은 떨림이 깃들었다.
“그래? 그럼 나도 생각을 바꿀 용의는 없어. 난 널 계속 싫어할 거야, 루비아. 고작 한 살 더 많다고 해서 언니라 부르지도 않을 거고.”
“상관없어. 나도 널 싫어할 테니까.”
“흐응, 에지오가 말하길 웬만해선 절대로 화를 안 내는 타입의 사람이라고 했는데…… 혹시 이렇게 화내본 건 처음이야? 호흡이 과하게 떨리고 있는 것 같은걸.”
“……”
그 말대로였다. 루비아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채였다. 주인의 격렬한 감정에 따라 넘실거리는 마력의 기류 또한 몸의 외곽선을 겉돌며 이따금 파직거리고 있었다.
“……날 더 건드리지 마, 뮤. 난 항상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내 말은, 남들이 보기에 그렇게 안 보인다는 거지. 네 의지가 실은 어쨌느냐, 그건 관심이 없어. 에지오를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느니, 에지오한테 꼭 용서를 구하겠느니 뭐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널 위해 헌신했던 에지오처럼 모든 걸 버릴 각오는 되어 있지 않는다는 점이 괘씸한 거지.”
“너는.”
“뭐?”
“너는 에지오를 위해서라면…… 당장 목숨을 잃는다 해도 상관없다는 거야?”
마력의 파동이 섞여나올 만큼 거친 호흡을 찬찬히 가다듬으며, 루비아가 뮤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이 돌아온 간격은 아주 좁았다.
“기분 나쁜 질문이네. 내 경우에는 당연한 건데, 너는 꼭 그렇지 않다는 것 같아서.”
“……”
“에지오를 살리는 대신 내가 죽을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선 절대로 안 되겠지. 에지오도 슬퍼할 테고, 나는 아직 죽음으로 속죄하기엔 해결하지 못한 일이 너무나도 많으니까. 그러니 앞으로 남은 나의 모든 삶을 에지오에게 바칠 거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리 말하는 뮤의 자줏빛 눈동자를, 루비아는 입술을 짓씹으며 바라보았다.
구태여 진실 여부를 판단할 필요도 없다. 뮤는 자신의 오롯한 진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나 올곧기에 오히려 차가운 싸늘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저 정도로 진심이었으니까.
첫사랑과의 실연 이후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 버렸던 에지오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거다.
그랬었겠지.
그렇지만.
“나도 마찬가지야.”
“……흐응.”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변함없이 에지오야. 나의 가족이나 에지오의 가족도 물론 소중하지만…… 전부 지키고 싶지만. 딱 한 명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반드시 에지오를 고르겠어.”
그러니 뮤처럼 에지오를 위해서라면 목숨마저 불사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 루비아는 고개를 들며 나직이 말한다.
루비아 자신도 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 원하는 것을 전부 가질 순 없다는 것. 무언가를 얻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대가로 내놓아야만 한다는 것.
전부 알고 있다.
더 이상 막연한 이상만 뒤쫓을 게 아니라,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에지오의 전 여자친구인 뮤를 볼 때마다 왜 이렇게 거무죽죽한 감정이 솟아나는 건지.
에지오의 곁에 이성 친구가 있는 모습을 보면 어째서 도망을 가고 싶어지는 건지. 그러면서 왜 정작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건지……
얼마 전 오두막에서의 일을.
전부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심신이 피폐했던 탓에 그만 실수를 해버린 거라고, 에지오는 그렇게 말했지만.
그로 인해 되레 마음의 벽이 한없이 허물어졌던 탓에,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던 진심이 그만 바깥에 노출되었던 거라고.
하나, 그냥 흘려넘기지 않으면 에지오와 자신 사이에 생길 무언가가 너무나 두려워서. 에지오의 말대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 간절한 마음이 대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어느 누구의 미소가 그렇게도 보고 싶은 건지.
루비아는 알고 있다.
다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탓에, 결국 그 마음은 닿지 못한 채 허무히 끝나 버릴 거라는 사실 또한.
루비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울러, 그것은 자신의 앞에서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다.
“나도 널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아. 뮤.”
루비아는 차가운 적의를 삼킨 채 말한다.
두 사람 간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어림잡아 삼 미터 정도. 연무장 바닥에 박혔던 검을 뮤가 뽑아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의 훈련은 여기까지인 듯했다. 서슬 퍼런 검명을 울리며 허리춤에 찬 검집에 날을 집어넣던 순간에.
“네가, 그리고 에지오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너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몰라. 모르는 일에 대해선 함부로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 그렇지만 이거 하나는 알 것 같아.지금의 너는, 에지오에게 절대 떳떳하지 못하다는 거.”
“……”
잠시간의 적막 이후.
철컥 하는 소리가 울렸다.
“……계속해 봐.”
뮤는 잠자코 루비아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최근 너희들의 모습을 지켜봤어. 왠지 많이 친해진 것 같더라. 물론 원래도 친했을 테니, 서서히 돌아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으려나.”
글쎄, 이제 와서 돌아가기에는 너무 먼 길을 지나오지 않았나 싶은 뮤였다. 옛날 생각이 종종 들긴 하지만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는 건 역시 불가능해 보였다.
전부 과거의 일이다. 에지오는 절대 평범한 친구 사이의 일선을 넘도록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다.
짧은 포옹이나, 어깨에 슬며시 머리를 기대는 등의 가벼운 스킨십마저 허용되지 않는다.
아예 뮤와 에지오 사이에 접점이 없었다면 또 모른다. 새로운 관계를 착실히 쌓아 나가는 것이었다면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깨진 연인의 관계.
함께 경험했던 과거의 기억이 있기에, 그런 행동은 필연적으로 쓸데없는 의식과 불편함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러니까, 뮤와 에지오가 서서히 돌아가고 있다는 루비아의 발언은 결론적으로 틀린 말이었다.
그건, 절대로 성립할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그 모습이 조금 위험해 보인단 생각이 들었어.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바닥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아. 너희들.”
“흐음.”
“그 변화는 분명 에지오가 기억을 잃은 것과 연관되어 있겠지. 다르게 말하면 에지오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순간, 너희들의 관계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는 거야.”
서로 말은 꺼내고 있지 않았지만, 어렴풋이 예견하고 있던 미래의 일. 루비아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뮤의 표정이 아니꼬운 듯 점점 일그러졌다. 여기서 저 가증스러운 입을 다물게 해야 할지,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건 우리들 사이의 문제야. 네가 끼어들 게 아니……”
“그게 정말 맞는 거라고 생각해? 문제는 전부 해결하고서 에지오의 곁에 있는 거야?”
“……”
그런 진중한 눈으로 물어오면, 거짓말을 잘 하지 못하는 뮤로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애당초 할 말도 없다.
애석하게도,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나는… 솔직히 아직 무엇도 해결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에지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어. 내가 지금껏 너희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든… 난 그냥 지켜보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어. 에지오를 더 이상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주었다 생각해서, 이보다 더한 상처를 주는 것을 극히 꺼렸다. 멀지 않은 과거 에지오가 자신을 보며 느꼈을 감정을, 이제는 루비아 본인이 느끼고 있었다. 에지오의 오랜 인연이자 소꿉친구로서. 루비아는 그의 곁에 있을 순 있겠으나, 결코 그 이상의 관계가 되지는 못할 것이었다.
……누군가의 말처럼, 너무 늦어버린 탓이다.
“그런데 너는 뭐야?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하아.”
찰나의 순간.
뮤는 루비아의 말을 자르며 한숨을 쉬었다.
“됐어. 그만하자.”
“……그만하자고? 네가 먼저 시작해놓고?”
“그래, 그러니까 그만하자고. 네가 이겼어. 서로 말하는 거 들어보니 이 이상은 의미가 없을 것 같네. 나도 너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고, 너도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아. 그걸 친절하게 다 알려주고 얘기하기엔 우리가 그렇게 밀접한 사이도 아니잖아?”
여기서 더 들을 필요가 없다. 쓸데없는 감정 낭비도 하기 싫었다. 무엇을 더 얘기한들 평행선을 달리기만 할 것 같았다.
여전히 루비아는 얕은 분노를 털어내지 못한 듯했지만, 뮤의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생각도 없다. 가치관의 차이는 쉽게 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뮤와 루비아는 성향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다만 그 중심에 얽힌 인물이 동일할 뿐.
뮤는 자켓 지퍼를 천천히 잠궈 올리며 연무장 밖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아무튼, 알았으면 에지오를 찾는 데 집중해. 다른 곳에 괜한 신경 쓰지 말고.”
그런 말과 함께 딱딱히 굳어 있는 루비아의 어깨 위로 자신의 손을 가져간다.
그러자.
“내 몸에 손대지……”
“!”
팍, 하고 가볍게 밀쳐내는 손길이 뮤의 무게중심을 흔들었다. 다만 적의와 분노가 어렸던 탓일까. 뮤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지고, 무게추가 기울듯 옆으로 쏠리더니 이내 연무장 바닥에 넘어지고야 만다.
탁, 댕그르르.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루비아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기에 썩 당황한 눈치로 입을 열었다.
“……아, 미, 미안해. 괜찮아?”
“……”
뮤는 처음에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멀뚱멀뚱히 있었다가, 이내 어이를 상실한 듯한 얼굴을 했다. 일단 루비아에게 밀쳐졌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저런 연약한 손길에 쉬이 넘어졌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황당함이 도를 넘으니 화도 나지 않았다. 트레이닝복 군데군데 묻은 먼지를 털면서 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나 참, 한판 해보자는 건 줄 알았네.”
“아, 아냐. 그럴 의도는 절대……”
“알아.”
그러시겠지. 그럴 의도는 없으셨겠지. 하지만 그런 루비아의 말과 행동 같은 게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루비아와 절대로 친해질 수 없겠다고 생각하는 뮤였다.
“하아…아무튼 뭐라도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난 최대한 빨리 거기 가볼 거야. 너도 정말 에지오를 생각한다면 그 선배인지 뭔지한테 빨리 편지나 써보는 게 좋을걸.”
바닥을 딛고 선 뮤가 재차 한숨을 쉬며, 연무장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을 때.
“잠깐만.”
“왜, 또. 뭔데. 진짜 한판 벌이자고?”
“아니, 그게 아니라……”
뮤가 막 고개를 뒤로 돌렸다. 조금 짜증이 묻어나는 듯한 얼굴. 뮤의 시선이 루비아를 향했다.
다음 순간.
뮤는 하마터면 검집에 손을 가져갈 뻔했다.
루비아는 뮤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방금 뮤가 넘어지면서 떨어뜨린 의문의 물건을 주워든 채,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건, 뭐야?”
연무장의 조명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빛의 무언가. 영롱한 디테일을 살피던 루비아의 눈은 곧 반지 바깥에 새겨진 글귀를 발견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게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 큰 의심은 없었건만.
‘어라.’
마침내.
반지의 정체를 목격한 루비아의 눈빛이 툭 꺼졌다.
바로 그때.
“만지지 마!”
벼락같은 외침이 울리고, 당황한 뮤가 루비아를 향해 삽시간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다가오지 마.”
“꺄악!”
사용자를 보호하는 마법에 튕겨나간 뮤가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워낙 격한 돌진이었던 탓에 충격은 배가 되었다. 자세를 다잡고 입가에 묻은 먼지를 손등으로 훔치던 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거 당장 내놔. 네가 만져도 될 물건이 아냐.”
“……”
루비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걸.”
여전히 생기가 사라진 눈동자와 함께.
“이런 걸……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너네는 이미 끝났잖아. 그런데 도대체 왜……”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루비아는 입술을 깨무는 뮤를 돌아보며 스산한 물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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