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24화 (124/201)

〈 124화 〉 정리 (3)

* * *

#3

하나도 아닌 둘이다. 두 개의 반지가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이 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루비아가 아니었다. 당장 겉면에 새겨진 글귀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당신에게 사랑을, 우리에게 영원을.

커플링.

각각의 반지에는 E와 M으로 시작하는 이니셜이 각인되어 있었다.

과거 에지오와 뮤의 관계를 말로 듣는 것과 직접 보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눈앞에 내놓아지니, 루비아는 순간 눈앞이 새카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윽.”

왜 이러는지는 자신 스스로도 잘 몰랐다.

꽁꽁 숨겨놓았던 치부를 들킨 듯 입을 꾹 다문 채 루비아를 노려보기 시작한 뮤를 무시하고서, 제 손바닥에 놓인 에지오와 뮤의 커플링을 얌전히 내려다본다.

복잡한 감정이 삽시간에 루비아의 머릿속을 뒤덮었으나, 한편으로는 강한 의문이 들었기에.

“이걸……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야?”

“……”

루비아는 다시 한번 뮤에게 묻는다.

알기로는, 이미 끝난 관계였다. 뮤 본인이 루비아에게 스스로를 에지오의 전 여자친구라고 소개했던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하물며 초기엔 서로 꽤 어색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잖은가. 아직까지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보기엔 다소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런데도, 반지는 남았다.

어째서?

루비아는 커플링이란 아이템이 가져다주는 의미를 모르지 않았다. 주변의 친구들이 모종의 이유로 연인과 깨졌을 때 울분을 토하며 반지를 빼고 호숫가에 던져버리는 모습을 곧잘 보았다.

심지어는 꽤 비싼 돈을 들여 맞춘 것이라고 해도 서슴없이 버렸다. 왜 그런가 했더니.

반지는 서로가 연인임을 증명하는 물건인데, 이제 연인이 아니게 되었으니 버리는 게 맞지 않냐고.

무엇보다, 반지를 볼 때마다 헤어진 연인이 계속 생각날 텐데, 뭣하러 쓸데없이 가지고 있냐고.

사실 그들 대부분이 돈 많은 귀족가의 자제들이었기에 가차 없이 버릴 수 있었던 것이긴 하지만, 보석상에게 되파는 것조차 꺼리며 아예 과거를 단절한단 의미로 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들었다.

그랬는데.

이미 헤어진 남자친구의 몫까지 가지고 다닌다는 건, 대체 무슨 의미일까.

아무리 연애에 무지한 루비아라지만 이번만큼은 왠지 알 것 같았다.

결국, 끊어내지 못한 거다.

에지오를 잊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한데, 뮤는 계속 에지오의 옆에 붙어 있으려고 했던 거다.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노리면서 떳떳하지 않은 몸으로 재결합을 원했던 거다. 루비아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것도 동시였다.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진검은 뽑지 않는다. 검집째로 발도한 뮤가 루비아를 향해 빛살같이 달려들었다.

단순히 돌려달라고 해서 돌려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렇기도 했지만 뮤는 지금 그 반지의 존재를 누구에게도 알리기 싫었다. 루비아는 물론이고, 만일 에지오가 알게 된다면…… 상상도 하기 싫었다. 저 반지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오롯하게 자신만의 비밀로 남아야만 했다.

“배리어(Barrier).”

—카앙!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튕기듯 쇄도한 뮤의 검격을, 루비아는 힐긋 돌아보며 손을 뻗는 것으로 막아낸다.

—파지지직!

거센 마력의 파장이 사방으로 솟구친다. 구겨진 마력 결계로부터 불똥처럼 스파크가 튀었다.

“크윽!”

결국 경쟁에서 밀린 뮤가 빠르게 뒤로 도약했다.

‘생각보다…… 강해?’

루비아에게 힘도, 마력도 밀리기는커녕 철저히 압도할 것이라고 생각했건만, 너무나 쉽게 막혔다. 뮤의 경우가 그러하듯 루비아 역시 만만치 않은 천재였다. 뮤가 진검을 뽑지 않는 이상 결계를 파훼하기란 요원해 보였다.

“내놔.”

숨을 고르며 앞을 노려본다. 반면 루비아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주먹을 쥐듯 손을 꾹 말아쥔다. 입술은 굳게 다물린 채였다.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옅게 진동하고 있었다.

뮤는 천천히, 글자 하나하나를 강조하며 말했다.

“내놓으라고 했어.”

“……”

저 물건은 저 손에 있어선 안 되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비아가 저 반지를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에지오와의 단란한 추억이 저 사람에게 더럽혀지는 기분이 들어 버려서, 도저히 참기가 힘들어진다.

그때 루비아가 옆을 돌아보며 말했다.

“질문에 대답하면, 돌려줄게.”

“닥치고 내놔. 진검 뽑기 전에.”

“뽑아봐.”

“뭐?”

“뽑아보라고. 난 상관없으니까.”

그것은 절대 안 될 일이다. 연무장에는 대련을 중재할 심판도 없을뿐더러, 이것은 대련도 아니었다. 서로의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벌이는 싸움. 루비아의 허락이 떨어졌다고 해서 뮤가 진검을 뽑게 되는 순간, 상황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떨어지게 된다.

다만.

“네가 뽑으라고 한 거야.”

“응.”

뮤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스릉­ 하고 날카로운 검명을 흩뿌리며, 길쭉한 도신이 아래로 쭉 늘어졌다. 발도한 검면에 비치는 루비아의 얼굴이 묘한 낯빛으로 물들었다.

누구를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고, 다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묵은 감정을 토해낼 길이 없다.

너무나 복잡한 감정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서, 루비아는 그것을 밖으로 내보내고자 마력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이리 큰 싸움까지 번지리라 미처 예상하진 못했으나, 이것도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평소의 루비아라면 반지를 순순히 내놓고 남의 사정 따위는 캐묻지도 않은 채 돌아갔을 것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 물건과 뮤, 그리고 에지오의 관계성을 보았을 때, 루비아는 뮤에게 반지를 그냥 이대로 돌려준다는 미래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이 반지를 아직도 간직하고 있느냐에 대한 뮤의 대답을 들어야만 비로소 돌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뮤는 남에게 자신의 마음을, 그것도 루비아에게 실토할 생각은 일절 없었던 까닭에, 지금처럼 검을 뽑아 든 채 루비아와 대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언젠가는 너랑 이렇게 될 것 같았어.”

“의외네, 나도 그랬거든.”

차라리 이렇게 된 게 나았다. 어쭙잖게 말싸움을 벌이는 것보단 이 편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일단 뮤가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루비아라고 별반 다르진 않을 듯했다.

검을 한 손에 든 뮤가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둘은 대치 상태에 돌입했다. 진중한 눈빛으로 앞을 응시하는 뮤의 시야에 루비아의 모습이 들어왔다.

—우우우웅……

“네 검에 대한 건 많이 들었어. 강하고, 빠르고, 무엇보다 평범한 사람들은 벨 수 없는 걸 너는 벨 수 있다고. 네 검술에는 특별한 뭔가가 있다고……”

루비아가 작은 목소리로 그리 중얼거렸다. 두 개의 반지를 손에 꾹 쥔 채, 조용히 손을 든다.

“그럼.”

—키이이이.

녹빛 눈동자에서 스산한 반사광이 빛난다.

그림을 그리듯 허공에 유연한 곡선을 새긴다. 루비아의 손끝을 따라 파직거리는 스파크가 일었다. 이미 지나간 자리에 자그마한 구멍이 생긴다. 작은 점처럼 촘촘하게 찍혔던 그것은 곧 하나로 이어져서, 타원형의 균열을 생성했다.

“공간도 벨 수 있을까?”

5위계 공간 계열 마법의 발현.

아득한 너머의 배경은 그저 새까맣다. 어느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허무의 차원. 별이 모두 떨어진 세상의 밤하늘을 보는 것처럼 까마득한 공간이었다.

공간 계열 마법이 매우 위험한 마법으로 분류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자칫하면 시전자가 허무 차원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도 있는 까닭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존재가 소멸한다. 인간계의 저편으로 사라져서,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루비아가 이러한 마법을 시전하는 건 뮤를 진심으로 죽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생성한 공간의 균열을 이대로 조작을 가해 날려 보낸다거나, 아니면 뮤가 달려드는 타이밍을 맞추어 포탈을 생성한다면 허무 차원에 보내버릴 순 있겠으나, 그럼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질 거다.

말인즉 네 검이 공간을 벨 수 없다면 조기에 포기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그리 위협하는 용도였다.

기실 공간 계열 마법은 유지하기가 매우 힘들다. 잠시 찢어졌던 공간은 곧 파직거리며 다시 메꿔졌다.

그렇지만 다시 생성하면 될 일이다. 루비아는 언제든지 공간을 찢어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거야……”

네 검술은 공간도 벨 수 있냐는 루비아의 물음에, 뮤는 잠시 낮게 웃더니 이윽고 입을 연다.

“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일이지.”

“……”

어지간히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루비아는 부드러이 손짓했다.

그러자.

—후우우웅……

창문도 죄 닫힌 연무장에 얕은 세기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그리고.

—화르르륵!

허공에 붉은 빛으로 수놓아진 법진을 따라 이글거리는 화염이 실타래처럼 뭉치고 뭉치더니, 곧 하나의 구를 형성했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를 발갛게 달군다. 루비아의 연분홍빛 머리칼이 불꽃의 색으로 반사되며 환하게 빛났다.

다시 한번 루비아의 손짓이 허공을 유영한다.

쿠구구궁……

뮤와 루비아가 딛고 선 연무장의 바닥이 일순 미약하게 흔들렸다.

갑작스런 지진은 아니었다. 루비아의 마법이 시전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였다.

서서히 불기 시작한 바람과 함께 휘날리는 머리칼. 루비아의 몸 외곽선에서 푸른 빛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연무장 내부의 기류마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루비아의 의지를 따라 바람은 더욱 휘몰아친다. 루비아가 소환한 여럿의 화염구가 더욱 거친 불꽃을 격렬히 피워낸다.

그것은 점차 세를 불려가더니, 이윽고 다섯 개에 달하는 거대한 화염구가 루비아의 주변에 둥둥 떠다니게 되었다.

“혹시 모르니까 다시 물을게.”

휘몰아치는 바람은 루비아의 명령에 따라 언제든지 바람의 칼날이 되어 뮤를 사정없이 베어낼 것이었고, 연무장의 바닥은 불규칙하게 부서지고 솟아나며 뮤의 이동 경로를 방해하거나 단단한 방벽처럼 루비아를 보호해줄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쏘아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비단 화염구뿐만이 아니다. 전방에서는 얼음의 창이 상대방을 향해 그 끝을 뾰족이 세우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연무장의 주인은 루비아였다.

역광이 드리운 얼굴로 루비아가 손바닥을 펼쳤다. 그 위에는 예의 반지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이거, 왜 네가 아직 가지고 있는 거야? 너 사실은 에지오를 아직……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던 거야?”

뮤 스스로가 시사했듯 떳떳하지도 못한 주제에, 나와 너로 인해 몸과 마음이 상처 입었을 에지오의 옆에서 대체 무엇을 하려 했던 거냐고.

단순한 속죄뿐만이 아니라.

욕심을 내어 다른 것도 원하고 있었던 거냐고.

루비아는 그렇게 묻는다.

“……”

뮤는 가라앉은 눈으로 루비아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의 세기를 어림잡아 계산했다.

막대한 수준이었다.

부정할 수도 없이, 강하다.

과연 세기의 천재라 칭송받을 만했다.

하지만.

“……대답하면 돌려준다고 했지?”

“응.”

“대답은 해줄게. 근데, 돌려주진 마.”

“……뭐?”

누가 더 강하고 약한지는, 지금부터 판단해보면 될 일이었다.

“네가 그렇다고 냉큼 에지오한테 일러바칠 녀석도 아니겠지. 그 정도 깡은 없는 것 같으니까.”

뮤는 검 끝으로 툭, 하고 바닥을 건드렸다.

화악­

검신이 강렬한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여전히 에지오를 좋아해.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거야. 내가 사랑할 사람은 에지오 한 명밖에 없어.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고 싶어 할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겠어?”

맞는 말이다. 다만 너무나 저돌적인 표현에 루비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아예 물러날 것도 없다는 듯 겁없이 당돌하고, 당당해 보였다. 긴 흑빛의 머리칼을 휘날리며 입가를 손등으로 쓱 훔친다.

“……그래, 그렇구나. 그래서……”

루비아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동시에 많은 생각이 루비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멈출까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불은 붙었고, 뮤는 전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이참에 한 번 붙어 보기를 원했다는 듯, 호기롭게 검을 휘두르며 마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한다.

그런 뮤를 잠자코 지켜보던 루비아는.

“이건 돌려줄게.”

“……?”

손바닥을 의미 없이 쥐었다 펴면서, 그 안에 든 것을 뮤에게 가벼이 던져 주었다.

“……무슨 생각이야?”

얼떨결에 소중한 물건을 돌려받은 뮤가 의문을 삼키며 품속에 그것을 도로 넣어두는 것도 잠시.

“아니, 그냥.”

루비아는 고개를 내저으며.

“이젠… 아무래도 괜찮지 않나 싶어서.”

앞으로 손을 뻗었고.

—화르르륵!

어느새 일곱 개로 불어난 화염구가, 시뻘건 궤적을 그리며 뮤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쇄도했다.

#4

“……으응?”

복도의 형광등이 몇 번 불안정하게 깜빡이더니, 딛고 선 바닥도 얕게 흔들렸다. 안 그래도 어두컴컴한 곳에 혼자라 무서운데 괴이한 현상까지 벌어지니 지레 겁먹는 것도 당연했다.

“뭐, 뭐야……?”

볼일을 마친 뒤 3동 1층의 복도를 지나 문으로 빠져나가려던 유리는, 갑작스레 떨리는 어깨를 쓸면서 주변을 불안하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혹여나 복도 모서리 끝에서 누군가 불쑥 고개를 내밀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눈까지 가늘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

그러다가.

—쿵! 쿠구구궁!

—카앙! 카앙!

불꽃이 번쩍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지진의 원인은 바로 저기에 있는 듯했다.

조심스레 걸음을 옮겨 다가간 그곳에서, 유리는 마침내 볼 수 있었다.

—카앙! 카아앙! 후우우웅!

—쿠구구궁! 화르르르륵!

검과 마법이 부딪히고 있었다.

“아, 아니?”

바닥은 잔뜩 뒤집히고 부서져 반파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 보이는 1학년 전용 연무장. 거기에서 벌어지는 불신의 현장을 목격하고선 유리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벌컥!

“야, 야야야야! 야아아아아! 뭐, 뭐하는 거야! 너희드으으으으을! 멈춰! 멈춰! 당장 멈춰어어어어!”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