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28화 (128/201)

〈 128화 〉 정리 (7)

* * *

#14

“어, 왔나? 마침 네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나를 보고도 안경을 그저 고쳐 쓸 뿐인 타일러와 달리, 입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한다.

사샤가 그렇게 큰 소리로 떠벌리고 다녔는데, 계속 여기에 있었던 모양인지 내 복귀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 같았다.

“돌아왔으면 이 녀석 좀 데리고 나가라. 내 주말이 벌써 한 시간도 넘게 낭비됐단 말이다. 어찌나 시끄럽게 쫑알대던지……”

그런 타일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뮤는 멍하니 날 바라볼 뿐이었다.

“어, 어……”

뻣뻣하게 굳었던 입술을 겨우 움직여, 무어라 말하려 한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무언가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는 것처럼 인중을 누그러뜨리곤 입술을 꾹 깨문다. 뮤가 내 실종 이후로 어떤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에, 에지……”

마침내,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고.

“잠깐만, 뮤.”

“……어?”

내 존재가 현실에 있음을 제 감각으로 확인하려는 듯, 얌전히 손을 뻗어오던 뮤의 행동을 제지했다.

일순, 그녀와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크게 흔들리는 자줏빛의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것은 반가움인가, 놀라움인가. 그에 대한 판단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본능적으로 손이 나갔어.’

당장 뮤를 마주한 내 모습도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없는 마당에, 누가 누구의 감정을 함부로 읽으려 드는 걸까.

들었던 손을 내리고,

뒤를 힐긋 돌아보면서 말했다.

“교수님과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먼저 나가 있을래?”

뮤가 입을 살짝 벌리더니.

역시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잠시간의 침묵 이후.

“……알았어.”

여러 감정이 담긴 듯한 얼굴로, 뮤는 내 옆을 지나쳐 갔다. 내가 열었던 문 밖으로 나서더니 조심스레 문을 닫는다. 쿵, 하는 소리가 울리자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쉰 다음 정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타일러 교수님, 저 복귀했습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일단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타일러는 탁상 위에 놓인 포션병을 흔들면서 날 바라봤다.

“알고 있다. 연락을 받았으니까.”

“……그렇습니까?”

테트라가 프론티어에 따로 연락했던 건가.

“그래, 오늘 도착할 거라고 하더군.”

“테트라 님께서 말씀해주신 겁니까?”

“그랬지.”

아무래도 맞나 보다. 타일러가 고개를 주억인다.

잠시 뒤.

“너, 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

타일러가 의자를 뒤로 꺾으며 물어왔다.

“인계에 잠입한 대악마 같은 것과 엮이질 않나, 거대 마탑의 마탑주로부터 네 신병을 보호하고 있으니 나중에 일이 해결되면 프론티어로 돌려보내겠단 서신이 오질 않나. 너 한 명 때문에 명색이 담임 교수인 내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상당히 많아졌단 말이지.”

“그게, 죄송합니다. 교수님.”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긴 해. 원해서 엮인 일들은 아닐 테니까. 그냥 그렇다고.”

마탑주를 만나러 아카샤의 별을 찾아간 건 내 의지가 맞았지만, 그걸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진 않기로 했다.

“아무튼, 네 실종 사건은 원만히 해결된 걸로 해두겠다. 그리고 네가 밖에 있는 동안 강의 출석 등의 성적 관리 문제는…… 유감스럽지만 출석밖에 인정이 안 된다. 나머지는 어쩔 수 없어. 본인이 직접 치르지도 않은 과제나 시험을 치렀다고 인정해줄 수는 없으니까.”

“……역시 그런가요.”

한숨이 푹푹 나왔다. 얼마나 점수가 까였을지. 일단 올 A+는 하늘 위로 날아간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았다.

“뭐, 일단 그렇긴 해도. 다음 주에 시행되는 모의 실습에서 분발하면 가산점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타일러는 아직 희망이 있다는 듯 그리 말했다.

다만 거기서 가산점을 받아봐야 얼마나 받겠냐는 듯 금세 주눅이 들어버린 나에게, 타일러는 포션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닌 게, 재작년 1학년 수석은 역대 최고 기록 타이를 갈아치워서 특례로 모든 과목에 최고점을 부여받았다.”

“……예? 진짜요?”

“그럼 가짜라고 해줄까? 지금으로선 네가 이번 일로 인해 조진 성적을 만회하려면 그 길밖에 없을 것 같은데.”

“아, 아뇨. 정보 감사합니다. 최고 기록…..”

모의 실습에서 역대 최고 기록을 자신의 것으로 갱신했다, 라. 그렇게 하면 특례를 받을 수 있다는 건가.

그런데 애당초 특례 받을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 지금 나처럼 성적을 조졌을까, 하는 당연한 의문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단순한 1등도 아니라 역대를 통틀어 최고 기록을 갈아치워야 그 정도 혜택이 주어진다는 거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너한테 더 물을 거나 알려줄 건 따로 없고, 돌아왔으면 이제 네 할 거 해라. 그리고 가능하면 저 문 밖에 있는 녀석이랑, 그 뭐냐. 핑크 머리. 걔네들 좀 어떻게 해봐라. 허구한 날 찾아와서 너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부 내놓으라고 달달 볶는단 말이다. 뭘 말해줄 수도 없는 입장에서 이게 얼마나 귀찮은 일이었는지 알고 있나……?”

타일러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둘한테 얼마나 시달렸는지, 안 그래도 원체 피곤한 인상에 더욱 짙은 피로감이 깃들은 채였다.

방금 여기서 벌어졌던 소동을 나 역시 일부나마 들었다. 뮤가 타일러에게 화를 내고 있었지. 뮤답지 않게 꽤나 큰 목소리여서 복도를 미약히 울릴 정도였다.

타일러의 말을 들어보면 비단 뮤만 그랬던 게 아닌 모양이다. 핑크 머리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둘이 시간 날 때마다 타일러를 찾아가서 나에 대한 정보를 요구했다는 거다.

더군다나 개인적인 조사까지 벌였다고 했을 정도니, 뮤와 루비아가 그동안 날 얼마나 찾고 있었을지 대충 예상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뮤는 그렇다 치고.

루비아는……

여기 오기 전에도, 날 한참 찾았다고 했었지.

어쩌면 좋지 않은 기억을 또 불러일으키게 만든 건 아닐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든다.

고작 반년 정도가 흐른 사이에 무척이나 헬쓱해졌던 루비아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야 좀 나아지나 싶었는데, 다시 그런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면 조금 마음이 아플 것 같긴 하다.

…………정말로?

순간 비집고 나온 생각이 뇌리를 스치는 것과 동시에, 나는 엄습해오던 상념을 떨치곤 타일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건… 제가 잘 해보겠습니다.”

어차피 내가 돌아온 이상 타일러를 더 이상 귀찮게 굴 일은 없을 것이었다. 나중에 나한테 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모를까.

어, 이거 왠지 불길한 생각 같은데.

타일러는 시큰둥하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주변 여자들 관리 잘 해라. 애정이 정도 이상을 넘어가면 감당하기 어려워질 때가 많으니까.”

“……”

“특히나 집착하는 것들은 더 위험해. 애정이 비틀려서 극단적인 성향이 될 수도 있다고. 내가 보기엔 그… 뭐냐, 핑크 머리? 걔가 살짝 가능성이 있어 보이거든? 미리 조치를 취해놓는 편이 좋을 거다. 마음 없으면 질질 끌지 말고 빨리 까버려. 그래야 나중에 후환이 없을 테니.”

“……”

“가슴 깊이 새겨들어. 어른의 조언이다.”

이걸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얼타고 있자니, 타일라는 굉장히 진지해진 어투로 내게 덧붙였다.

과연 교수는 교수라는 건지 쓸데없는 카리스마가 묻어 있던 까닭에 확실한 어른스러움이 느껴졌다. 저 어둠처럼 피폐한 눈가의 원인은 단순한 연구의 폐해가 아니었단 말인가.

여러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타일러는 젖혔던 의자 등받이를 원래대로 되돌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쯤이면 됐겠지. 이제 가라. 그러니까…… 음.”

한참 턱을 쓰다듬다가, 날 바라본다.

“엣지 크롬.”

“에지오 크라닐입니다. 교수님.”

그거나 그거나, 라며 타일러는 나를 돌려보냈다.

#15

“아.”

뭔가 생각에 잠겨 밖을 나왔는데, 잠깐 잊고 있었던 사람이 복도의 벤치에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에, 에지오……”

무릎을 붙인 채 안절부절못하는 자세다. 뭔가 할 말은 많은 것 같은데 내가 입을 열기 전까지 기다리려 하는 듯했다.

“얘기 다 끝났어.”

“으, 응.”

뮤가 얌전히 머리를 끄덕였다.

“……”

“……”

이어지는 침묵.

결국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돌아왔어, 뮤.”

“……응.”

뮤가 나직이 답했다.

“날 많이 찾았다면서?”

“그거야, 당연한걸……”

뮤는 그동안 날 걱정하며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을 불시에 전부 토해내듯, 서서히 물기가 어리기 시작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불안해서, 매일 걱정했어……”

“……”

“무슨 일…… 이었던, 거야……?”

대체 무슨 경위로 실종이 됐던 건지 궁금할 것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설명하고자 하면 굉장히 귀찮게 되거나 길어질 것이 분명해서, 그냥 개인 사정이 있었다 하고 넘어가려 했었는데.

“……일단 다른 장소로 갈까?”

뮤는, 그러면 안 되었다.

#16

주말 대낮은 화창하다.

그렇지만 햇살을 직접 쐬러 나가지는 않는다. 창틀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밟는다. 나와 뮤의 주변으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복도는 한산했다. 걸음을 하나씩 옮길 때마다 뚜벅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그 말인즉 조용하다는 뜻이었고, 따라서 나란히 복도를 걷는 뮤와 나 사이에는 대화 하나 없이 침묵만이 감도는 채였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뮤가 슬며시 날 힐끔거리고 있는 기척을 느낄 수 있었으나, 결국 텅 빈 휴게실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 둘은 말 한마디조차 꺼내지 못했다.

“저기 앉아 있어.”

“아, 응.”

문을 열고 휴게실의 불을 켜자, 환한 조명이 내부를 비추었다. 정면에 놓인 벤치를 가리킨 뒤 내가 말을 이었다.

“커피 마실래?”

“응, 마실래.”

기호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알고 있으니까.

간이 휴게실이라 그런지 썩 고급스러운 품질의 커피는 아니었다. 준비가 끝난 잔 위에 커피 포트에서 끓인 물을 부었다. 스푼으로 여러 번 저은 뒤 각설탕 통을 열어 집게로 각설탕을 집었다. 퐁, 하는 소리가 났다. 접시 위에 놓인 커피잔을 들어 뮤에게 전달했다.

“여기.”

“고마워.”

접시를 잡은 채 한 모금 마셔본다. 내가 끓인 커피의 맛이 적당한지 뮤는 자그마한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스윽.

벽에 걸린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 역시 커피잔을 손에 쥔 채 뮤의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한 잔 홀짝인 뒤, 말문을 열었다.

“아카샤의 별에 갔다 왔어.”

“……응.”

여기까지 말하면 뮤도 눈치채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일전에 뮤에게 말했던 적이 있으니까. 아카샤의 별에 가서 거기 있는 마탑주한테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어.”

내 예상과 같이 뮤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직후 말을 잇는다.

“하지만 나랑 루비아가 거기 가봤을 때, 에지오 네가 만나기로 했다던 마탑주는 자리를 비운 상태라고 했는걸.”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답했다.

“대외적으론 그렇게 알려져 있었지.”

“……그럼 실제로는 거기 있었단 거야?”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였다.

“맞아. 난 거기 가서 마탑주를 만나고 왔어. 너한테 말했던 것처럼 개인적인 도움도 받았지. 다만 그 과정에서 좀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복귀가 예상보다 늦어진 거야. 게다가 밖에 연락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거든. 아무래도 의식을 잃고 있었으니까.”

도움을 받고 왔다는 말을 하는 순간에 잠깐 움찔했던 뮤였으나, 마지막에 이르러 의식을 잃었단 얘기를 꺼내자 걱정스럽게 물어온다.

“그럼 엄청 큰일이었던 거 아냐……?”

“음, 큰일이라면 큰일이었겠지. 지금은 멀쩡하니까 괜찮아. 몸에는 전혀 이상 없어.”

별 의미 없이 소매를 걷어 올리며 그리 말했다.

실제로 멀쩡하다. 어디 심한 상처가 생긴 것도 아니었고. 글레이프니르인지 뭔지를 흡수할 때는 굉장히 고통스럽긴 했지만, 결국 흉터 하나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들까지 뮤한테 말해줄 필요도 없어 보였다.

“안 다쳤다면 다행이긴 한데…….”

뮤는 말끝을 흐렸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 비밀이니까.”

“다, 당연하지. 절대 안 말해. 응.”

“진짜로?”

“진짜로. 혹시 나 못 믿는 거야?”

“그건 아니지.”

“그럼……”

“말 안 한다면 됐어. 나한테 일어났던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매우 길어지기도 하고, 내 사정을 전부 설명해줄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니까.”

“……”

뮤는 묵묵히 내 말을 들었다. 입술을 닫은 채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있었다.

다만 중간중간 목이 타는 듯 커피를 연신 홀짝였다. 이후로 잠시간의 침묵이 지나자, 뮤의 커피잔은 절반 이상 비어 있는 채였다.

나도 목이 바싹 말라가긴 했다. 휴게실 내부는 싸늘하도록 조용하기 그지없지만, 정작 내 속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중이었던 까닭에.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운을 띄워야 할지 모르겠다. 막상 말을 꺼내려고 하면, 입이 잘 열리지가 않았다. 내가 봐왔던 게 있으니까. 뮤에게 약속했던 게 있으니까. 그렇지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뮤가 지금처럼 접시를 내려놓은 채 다리와 어깨를 살짝 떨고 있는 것 같다고 해도, 얘기해야만 했으니까.

“뮤.”

뮤도 다 알고 있을 거다.

대충 눈치채고 있을 거다.

“……………응, 에지오.”

내가,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는 걸.

“저번 주 토요일에 아카샤의 별을 찾아갔어. 제3 마탑주를 만나고 왔어. 거기서 마탑주에게 나는 상당히 어려운 부탁을 청했고, 결과적으로 아주 큰 도움을 받았어. 그 과정에서 의식이 잠깐 날아갔고, 회복하자마자 프론티어로 돌아온 거야. 그게 지금까지 2주간 실종된 걸로 알려져 있었던 나한테 일어났던 일들.”

“응, 그랬구나.”

“그랬지. 그래서……”

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경직된 근육. 뜨거운 숨결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다. 손은 점차 올라가더니 곧 앞머리를 위로 쓸었다. 의식하지 못한 새에 나지막한 한숨이 흘러나온 모양이다. 옆에서 뮤가 작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손이 다시 내려갔다. 나는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너한테 약속한 게 하나 있었지.”

“……”

“넌 아무 잘못 없다고. 더 자책하지 말라고. 나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그때 말했던 걸 기억할지 모르겠네.”

“……기억해.”

“그래? 기억하는구나. 음…”

뮤는 머리는 차츰 아래를 향했다. 옆모습이 머리카락에 가려졌다. 꾹 쥔 주먹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일전에 서클룸에서 보았던 모습과 똑같았다. 내가 알지 못했던, 그러나 이제는 알 수 있을 듯한 뮤의 깊숙한 트라우마가 밖으로 얼굴을 내밀 때의 전조였다.

서클룸에서 그랬듯 뮤의 손을 살포시 잡아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다 괜찮을 거라고. 그리 속삭여주고 싶었다.

결국, 하지 못했다.

“약속은 지킬 거야.”

“……”

또 다시 한숨.

“내가 너한테 편지를 하나 썼었지, 뮤.”

“……응.”

“아직 갖고 있어?”

“……응.”

그건 몰랐다. 계속 갖고 있었구나.

“내용, 읽어봤어?”

“……응.”

뮤는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갈수록 수면 아래로 잠기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묻어 나오는 물기. 불안정한 떨림이 깃든 호흡. 뮤는 감내하려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말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거기 적힌 말들은 전부 내 진심이었어.”

“……”

“네가 나한테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많이 깨닫는 중이야. 난 널 정말 소중히 생각했던 것 같아, 뮤.”

“……”

“네가 너한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널 원망한다거나 그러지도 않아. 우리는 그냥…… 많이, 엇나가 있었을 뿐이니까.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던 거잖아. 그렇지?”

“……윽, 으윽.”

불시에 스위치가 눌린 건지, 결국 무언가 터져버린 건지. 뮤는 소리 없이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억눌러 담고 있다. 그 모습이 썩 안쓰럽기도 했지만, 이전처럼 손을 잡아준다거나 끌어안고 다독여준다거나, 그럴 수 없었다.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뮤.”

“……”

“이건 앞으로의 너와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기도 하고. 더 늦기 전에 확실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

생각을 많이 해봤다. 매일, 매일. 내 머릿속에는 언제나 뮤와 루비아가 있었다. 어떻게든 매듭을 지어야 할 때였다. 관계를 정립할 필요성이 있었다. 잔뜩 어긋나고 비틀렸던 것들을, 비록 원래대로 되돌리지는 못하겠지만, 정리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후­.

한 호흡을 나직이 내뱉으며.

“우리는 끝났어. 뮤.”

더없이 잔인할 수도 있는 소리를 읊조렸다.

“……”

낮고 깊었던 울음소리도,

정말 한순간에 멈춰버린다.

지독하게 흐르는 적막 속에서, 나는 무거운 돌덩이 같은 결심을 씹어삼킨 뒤 기어코 한마디를 더 꺼내고 만다.

“혹시,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하는 거지만…… 뮤, 네가 아직 나한테 미련을 갖고 있는 거라면.”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버텨낸다.

“이제 그러지 말아줬으면 해. 부디.”

그 말을 꺼내고 나서, 내 안의 무언가가 훅 빠져나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시원함보다는, 이유 모를 공허함이 더 큰 감각이었다.

주변의 소리는 들리지도 않고, 들을 생각도 없었다.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들을 하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 최악이 아닌 차악의 선택. 나는 잠시 이를 악물었다가, 굳은 결심과 함께 옆을 돌아보면서,

“…나는 이제 널 친구 이상으로 생각할 수가 없어. 네가 계속 나한테 감정을 가지고 있다간 서로한테 피해가 갈 뿐이니까, 너와 날 위해서라도 그 마음은 버려줬으면 좋겠───”

다음 순간,

—쨍그랑!

벤치에 걸터앉은 내 몸이 옆으로 기울고, 커피잔이 아래로 떨어져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깨진 파편 위에 깔리진 않았다. 당연히 그럴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갑작스레 벤치로부터 떨어져서, 바닥에 몸을 부딪친 내 위로 밝은 조명을 등진 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깃털처럼 가벼운 무게감이 얹혔다. 넘어진 순간의 아픔은 싹 잊혔다. 나를 깔고 앉은 뮤의 머리칼이 내 가슴팍에 부채처럼 흐드러졌다.

당황할 새도 없이 뮤를 올려다보던 내 눈동자가, 다음 순간 크게 뜨였다가, 이윽고 낮게 침잠했다. 입술이 꾹 다물렸다.

뚝, 뚝.

물방울이 망울져 내 셔츠 위에 떨어졌다.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듯 따가운 고통이 이어지고, 뮤는 뜨거운 숨을 섞으며 간절하거나 갈라진 목소리로 조금씩, 말을 토해낸다.

“그런 말,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선배……”

숨을 들이키며 일그러진 얼굴로, 울고 있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