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정리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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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어느 쪽도 후회하지 않을 수 없다. 내 마음이 들어설 곳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선 안 될 말을 할 수 있는 자격 같은 게 생길 리 없다. 내 사정만 생각해서 이기적으로 몰아붙이는 일 따위, 누구에게든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만은 그래선 안 됐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뮤에게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그러니까 고작 그 정도였다.
구질구질하다.
그게,
지금의 내가 꺼낼 수 있는 표현의 한계였다.
“난 네가 나한테 매달리는 모습을… 좋게 볼 수가 없어. 전부 다 오해에서 비롯된 실수였다고 해도,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아. 내가… 지금 너에게 아무런 감정도 가지지 못하게 된 상태 역시, 아마 네가 무슨 노력을 한들… 바뀌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권유했을 뿐이야. 날 잊는 게 좋다고. 그 마음… 버리는 게 좋을 거라고.”
내 하복부에 전해지는 따뜻한 체온. 깃털 같은 무게감. 끝이 헝클어진 머리칼과, 멈추지 않고 균일하게 떨어지는 물방울.
무엇이 들리기나 할까 의문인 얼굴로, 뮤는 허망히 나를 내려다본다. 어떠한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내부가 텅 비어버린 것처럼.
그 눈동자에 아주 미약한 나머지 작은 반짝임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빛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었다.
“…거짓말, 인 거네요. 선배.”
부정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나의 속내를 꿰뚫어 본 것 같기도 한 말이었다.
“난 거짓말한 적 없어. 뮤.”
“아뇨… 거짓말이에요.”
“전부 내 진심이야.”
“제가.”
“……”
“제가 아는 선배는, 그런 말… 하지 않는걸요.”
틀렸다. 뮤는 나의 전부를 알지 못한다. 어쭙잖게 쌓아 올린 인연으로 나에 대해 아는 척을 해봤자, 제대로 통할 리가 없다. 나에 대해선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올바른 판단으로부터 비롯한 행동의 진의가 결코 거짓말이 아닌 진심이라 믿는다면, 내 안에선 어느샌가 그것이 진실로 변해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올바른 판단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제가 아는 선배’란 말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아줬으면 했다.
고작 2년 조금 안 되는 정도로…
1년도 안 되는 연인 시절의 관계 정도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모든 걸 터놓고 공유하기에 턱없이 충분했던 시간들 사이에서… 조금 인연을 쌓았을 뿐일 정도로.
그렇게 우쭐하며 잘난 척하듯이, 확신을 담고 부정하듯이 고개를 저으면… 나는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멀고도 먼 길을 걸어왔다.
나는 그냥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인데,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이러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같은 흔한 후회의 한마디조차 입속에 담지 못한 채, 모든 걸 재로 돌려버리고 만다. 아직도 날 사랑한다 외치는 소중한 후배에게, 그 마음에는 절대 보답할 수 없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처음 나에게 고백했을 때의 뮤는, 나와 어떻게든 접점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 일방적으로 부담스러운 마음을 부딪쳐 왔다. 부서지지 않는 벽이 있다면 부서질 때까지. 뚫리지 않는 구멍이 있다면 뚫릴 때까지. 계속해서 나의 곁을 맴돌며 앵무새처럼 조잘거렸다. 말의 분위기와 뉘앙스와 어투와 내용은 전부 제각기 달랐지만, 의도는 똑같았다.
나를 좋아해줘요.
“저도, 저도… 알고 있어요. 정말 꼴사납게도… 이미 없어진 정에 호소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
지금은 달랐다.
“아는데… 하면 안 되는 건가요…? 저와 선배가 보낸 시간들은…… 이젠 들먹여서도 안 될 과거가 되어버린 건가요…?”
선배를 좋아해요.
예전처럼 자길 좋아해달란 말도, 자길 도대체 언제 돌아봐 줄 거냐는 얘기도 하지 않는다.
그저 망가진 마음을 고백할 뿐이었다. 내게 용서를 바랄 뿐이었다. 어쩌면 그것도 아닐 수 있었다.
나의 보답 같은 건 애당초 바라지도 않았다. 얼마나 헌신적이면 사람이 이럴 수 있는지 순수한 의문마저 피어오르려 한다.
그럼에도 난 그 마음을 버리라고 한다.
날 여전히 좋아함으로 상처받는 건, 어디까지나 뮤 본인이 될 테니까.
계속해서 아플 바에야, 지금 한 번 아프고 마는 게 나을 테니까. 아니,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영영 사라지지 않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어중간한 그 지점에서라도 마음을 끊어주길 바랄 뿐이다. 뮤는 나에 대한 미련을 최대한 빨리 떨쳐내는 게 맞았다.
“저, 정말 후회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좋아했던, 좋아하는 선배한테 갚아야 하는 죗값이 너무 많아서… 평생을 걸쳐서 갚아도 모자라요. 그걸 전부 다 갚기 전까지는… 선배 좋아하는 거, 못 버릴 것 같아요… 절대……”
“……”
“구질구질하다고 내치셔도 괜찮아요. 전부 제가 저지른 일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할게요. 그럼, 그럼 저는… 그냥, 계속 예전처럼… 선배가 좋아서… 선배의 모든 것을 가지진 못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선배가 여전히 좋아서… 선배와 손끝만 맞닿아도 가슴이 두근거려서… 이젠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버려서… 선배가 그렇게 말하셔도, 저는 더 이상… 이게…… 아, 아윽, 아으윽… 윽, 흐윽…”
말 그대로 모든 걸 내던진 사람처럼, 뮤는 물안개처럼 흐릿한 눈가로, 울먹임의 잔향이 남은 얼굴로, 결국 애원의 목소리를 낸다.
“그냥, 그냥… 이렇게… 가끔은 울고 싶었어요… 울면서 선배한테 사과하고 싶었어요… 아직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이것도 안 된다고 하실 건가요…? 그냥, 들어주시는 것도… 안 되나요…?”
만일 지금의 내가 정상이었다면, 분명 나의 얼굴도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겠지. 그만큼 뮤가 내게 전해오는 심정이 절절했으며, 어느 정도로 진심인지 온몸의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헌신적인 사랑. 그 사랑의 방향이 바로 나를 향해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 죄악감.
정말 비현실적인 일이었다. 내가 대체 뭐라고, 나를 이 정도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사랑은 도대체 뭐길래 이리도 완벽한 여자가 스스로 무너지도록 만드는 것인가.
나는 과연 여기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좋은 걸까. 방금처럼 또 한 번 내쳐야 하는 걸까.
“너는…”
내가 서서히 상체를 일으키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도, 미동조차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을 뿐인 뮤.
“너는 왜, 날 싫어하지 않는 거야…?”
그녀에게, 나는 물었다.
눈물투성이의 뮤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처연한 표정으로 날 본다.
“못 할 짓이라면… 나도 너한테 많이 했잖아.”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지금 여기서 정을 떼고 상대방을 악착같이 거부하는 사람은 내가 아닌 뮤가 되어야 했다.
연인이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내 태도는 그렇게까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
언제나 내 부족한 애정 표현에 쓴웃음을 감추었던 것은 뮤였고, 나 역시 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그녀에게 많은 것을 해주지 못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내게 말했던 뮤였지만, 정말로 그래도 될 리가 없다.
그야 남자친구인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한테 깊은 애정을 받아서 기쁘지 않을 리가 없다. 반대로 받지 못한다면 슬플 테지. 뮤도 나와 같은 사람이었다. 애당초 나보다 더한 소유욕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날 위해 꾹꾹 눌러 참다가, 결국 터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네가 원하는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해주고, 지금까지 널 상처 입히기만 했잖아. 너한테 나와 사귐으로써 만족스러운 기분을 안겨준 것도 얼마 되지 않아.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했는데… 솔직히, 이해 안 돼. 네가 진작에 나한테 질려서 떠났어도 이상하지 않아. 그런데도 이런 날 계속 좋아해서… 대체 무슨 이득이 있는 건데?”
왜 화가 나는 걸까.
나만을 꾸준히 좋아하는 뮤가 미련해서?
이렇게 일편단심인 여자아이를 보고도 더 이상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내가 한심해서? 미워서?
모르겠다.
그렇지만 단 한 가지는 안다.
모든 원인은, 나한테 있는 게 분명했다.
몸을 일으켜 뮤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나에게서 떼어날 때까지, 뮤는 움직이지 않았다. 실 풀린 인형처럼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곧 아래로 툭 떨어져, 바닥을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 순간 뮤의 입이 움직였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건… 저뿐이니까요.”
무슨 약속인지 의문이 들기도 전에.
“영원히 선배의 편이 되어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선배를 배신하지 않기로 했었는데… 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뮤의 눈동자가 보였다.
“하지만 선배는 어떻게든 저와 약속을 지키러 와줬어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그 몸으로도… 결국 저한테… 제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해주셨어요. 그럼 지금까지의 기다림 따위 더 이상 상관이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게 뭐 어쨌던 건데요… 선배가 저한테 와줬는데. 그걸로, 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됐는데… 될 수 있었는데……”
뮤가 탁 풀린 자세로 바닥에 손을 짚은 채, 그것을 서서히 제 얼굴로 가져간 뒤 뜨거운 한숨과 함께 말을 토해냈다.
“그걸… 제 손으로 전부, 망쳐 버렸어요.”
“……”
“결국 선배를 믿지 못했어요. 제일 사랑하는 사람한테, 가장 싫어하는 사람한테나 할 법한 말들을… 했어요. 선배가 해왔던, 노력했던 모든 것들을 제가 부정했어요. 선배의 옆에 가장 가까이 있던 제가 가장 하면 안 될 말들을… 선배한테 퍼부었어요. 눈이 멀어서. 질투에 눈이 멀어서. 멋대로 있지도 않은 상황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 이입한 나머지 너무나 화가 나서… 절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어요.”
“…너는 그때 아무것도 몰랐잖아. 그러니까.”
“몰랐어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잖아요. 선배를 끝까지 믿어주고… 선배를 절대로 힘들거나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 못 지켰잖아요. 선배는 끝까지 약속을 지키러 와주셨는데… 전 그러지 못했잖아요. 그럼 제가 잘못한 거잖아요. 선배는 아무 잘못 없는 거잖아요…”
눈앞이 끝없는 죄책과 죄악으로 덕지덕지 점철되어, 그 이외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 가련한 여자가 내 앞에 무릎 꿇고 있었다.
내겐 한없이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꼴도 보기 싫으니 꺼지란 말 따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관계를 완전히 끊어낼 수도 없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마다 마주치게 될 사이니까.
퇴로조차 꽉 막혀 버린 협곡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군세를 만난 기분이다.
이런 고민을 내가 하게 될 줄 몰랐다.
날 좋아하는 여자가 나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인데, 나는 그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서 어떻게든 밀어내야만 한다는 거.
더군다나.
그 여자가, 나의 전 여자친구라는 거.
뮤의 여전히 변하지 않은 마음을 받아주진 못하더라도, 그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면.
“네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자.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난 널 원망하지 않아. 네가 했던 말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해. 오히려 네가 날 원망해야지. 그게 맞는 거잖아.”
하지만 지금 상태를 보면 뮤가 날 원망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증거로, 뮤는 천천히 고개를 내젓고 있었다. 붙잡지 않으면 픽 쓰러져 버릴 만큼 힘없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처연히 날 올려다보는 뮤와, 휴게실 벤치 아래의 구석으로 굴러간 은빛의 반지를 잠깐 시야에 담았다가.
“그러니까, 널 용서할게.”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지만.”
“아까 했던 말들은, 전부 내 진심이니까.”
“…날 이제 그만 놓아줬으면 좋겠어.”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날 붙잡으려는 듯 손을 힘없이 들던 뮤에게서 냉정히 등을 돌려.
—끼이익…
쿵.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휴게실의 문을 열고는 뮤로부터 떠나갔다.
다음 날,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돌아와 본 그때의 휴게실에는, 벤치 아래 놓여 있던 반지가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휴게실 내부를 청소하던 직원이 버렸는지, 휴게실을 이용하던 교수가 우연히 발견하여 따로 챙겼는지, 혼자 남겨진 뮤가 그것을 주섬주섬 품속에 넣었는지 나는 절대 모를 일이지만.
이제 내 앞에서 그 반지가 다시 보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20
프론티어 밖으로 외출을 나갔던 루비아가 돌아온 건, 그로부터 하루 뒤인 일요일의 저녁이었다.
“후우…”
그믐달보다도 어두워진 얼굴.
아는 선배는 정말 바쁜 모양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편지조차 답장이 돌아오는 일이 없었다.
트램에서 내린 뒤 힘없는 발걸음을 옮겼다.
날이 갈수록 시간은 촉박해져만 가는데, 흔적이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좋으련만. 어찌저찌 마탑 내부에 들어가 수소문을 해봐도 마법사들은 대개 루비아를 무시하거나 제 할 일을 하러 갈 뿐이었다.
“정말 어디 간 거야… 에지오…”
그렇게 아무 수확도 없이 돌아온 게 지금이다.
“후우우우……”
한숨이 길게 이어졌다.
터벅, 터벅.
터벅…
탁.
“으, 으.”
정거장을 지나쳐 기숙사 부지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길에, 문득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루비아는 울먹이며 말아쥔 손을 눈가에 가져갔다.
“우우… 우으으…”
또 잃어버리는 걸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곳으로 가버리는 걸까.
에지오는…
이대로 돌아오지 않는 걸까.
죽은, 걸까.
“싫어어어…”
멀리서 사람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보였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루비아는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으며.
“우에에에… 우으아아아앙……”
머리칼 끝이 바닥에 쓸리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토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읏, 흐아아아아아아……”
저 멀리 조명 아래 드리워졌던 그림자는, 루비아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감에 따라 서서히 가까워지더니.
“끅, 아으, 흐으으으…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윽고 루비아의 웅크린 몸을 집어삼킬 듯 그림자로 전부 감싼 뒤, 불길한 손을 뻗기 시작했다.
턱.
머리에 전해지는 작은 무게감.
묻었던 고개를 들어보면, 푸른 눈이 있었다.
“뭐 해, 여기서.”
눈높이를 맞추어 자세를 웅크린 익숙한 청년이, 그렇게 눈물콧물 흘리며 사방팔방 찾아 다녔던 남자가 머리에 손을 얹고 있었다.
“…으에에, 아.”
3초 뒤.
이게 지금 현실인지 꿈인지, 자신은 설마 트램을 타고 오다가 사고가 난 바람에 저승으로 와버린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만 이 순간이 절대 현실은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에지오가 손수건을 꺼내어 루비아의 얼굴을 닦아주는 와중에도, 아무런 미동 없이 온 감각이 정지한 상태였던 루비아는.
“어제 안 돌아왔길래, 계속 기다리고 있었……?”
일순간 몸이 이끌리는대로,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과감한 행동을 벌였다.
“어, 어?”
확 밀치듯 에지오를 끌어안아, 그 반동으로 에지오가 잠시 비틀거리며 천천히 뒤를 향해 쓰러지게 만든다.
복귀한 이후로 벌써 두 번이나 밀쳐져 넘어진 까닭에 기시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에지오는 자길 끌어안고 목 부근에 머리를 파묻은 루비아의 얼룩진 얼굴을 떠올렸다.
물결치는 연분홍빛의 머리칼의 윤기도, 거기에 스며든 향도 어쩐지 조금 더 짙어진 듯했지만, 기분 나쁘다고 인상을 팍 찡그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하루 정도 씻지 못한 게 분명하나, 루비아의 몸은 전혀 더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군가 본다면 상당히 곤란해질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그럼 누군가 보기 전까지는 한동안 이러고 있어도 괜찮다는 의미였기에.
“이제 어디도 가지 마… 없어지는 거, 싫어…”
일단은, 가만히 있기로 했다.
“……”
마주 안아주지는 못한 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