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31화 (131/201)

〈 131화 〉 정리 (10)

* * *

#21

달리 양해를 구할 것도 없이, 나와 루비아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알아서 자리를 피한 스텔라와 유리 덕분에, 오늘 한 끼도 먹지 못한 것 같았던 루비아와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식욕이 별로 없는 것 같던 루비아는, 자기가 얼마 먹지 못할 걸 알았는지 애초부터 접시에 음식을 아주 조금만 담았다.

창가 구석 자리에 앉아 깨작거리며 밥을 먹는 루비아를 맞은편에서 바라본다. 종일 돌아다닌 탓에 피곤으로 어깨는 축 늘어져 있고, 눈빛도 멍하다. 그러나 가끔씩은 눈동자를 위로 굴려 내 눈치를 살피고 있다. 입안에 든 음식을 씹을 생각도 없는지 볼이 볼록한 상태였다.

“일단 먹어. 먹어야 힘도 나고 얘기도 하지.”

“…먹고 있어.”

“아까부터 입에 넣기만 하고 있잖아.”

정작 삼키지는 않는다.

“오늘은 별로 생각 없었는데…”

“오늘은, 이 아니잖아. 내가 사라진 뒤로 쭉 식사 걸렀다면서.”

“그건… 제대로 먹고 있었어. 식당에서 먹지 않았을 뿐이지.”

“그래? 구체적으로 뭘 먹었는데?”

“…사과라든가.”

“그것뿐?”

“삶은 계란이나, 젤리도 가끔……”

무슨 다이어트라도 하는 거니.

젤리는 식사의 범주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음, 음. 그렇구나. 자, 여기.”

이럴 줄 알고 평소 내 몫보다 더 담았던 접시의 일부분을 덜어내어, 루비아의 접시 위에 성큼 올려놓는다.

“아, 잠깐…”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음식을 내려다본 루비아가 아랫입술을 부루퉁하게 끌어올렸다.

“다 못 먹을 텐데.”

“억지로라도 먹어. 다 못 먹어도 괜찮으니까.”

“…꼭 먹어야 해?”

“응. 안 먹으면 너랑 아무 얘기도 안 할 거야.”

“그건…… 너무해. 에지오.”

루비아가 울상을 짓는다. 포크를 손에 들고 날 힐끔 바라보지만, 나는 말 없이 루비아에게 눈짓하고 있을 뿐이었다. 빨리 먹기나 하라고. 그럼 루비아는 하는 수 없이 내가 건네준 소시지 등의 음식을 포크로 푹 찍곤 입에 가져가기 시작한다.

우물.. 우물…

원체 소식(小)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던 루비아다. 지금처럼 접시 위에 꼴랑 밀로 만들어진 식빵 몇 개만 두는 모습은 익숙지 않다. 또래 아이랑 비교하자면 오히려 더 많이 먹는 편이었다. 물론 지금은 내가 더 많이 먹지만, 예전에는 루비아가 항상 나보다 빨리 그릇을 비웠었다. 그런데도 살이 전혀 찌지 않는 게 신기했지.

‘흐음.’

절반 이상은 깨물 생각도 못 하고 머리 끝부분만 넣듯이 깨작거리는 루비아를 보면서, 나는 이 다음의 대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제의 일에도 문득 생각이 닿았다.

‘외출한 건… 아닐 텐데.’

뮤와는 오늘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껄끄러운 마음을 안고서 검술 훈련을 위해 잠시 들렸던 연무장에도, 뮤의 모습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같은 생활권에서 활동하고 있다곤 하지만 워낙 넓은 곳이다. 하루 정도야 충분히 못 볼 수 있었다. 어차피 주중 강의 시간이 돌아오면 같이 듣는 수업 시간에 서로 얼굴을 보게 될 거다. 지금 당장 뮤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신경 쓸 이유는 딱히 없었다.

어쩌면… 나를 일부러 피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나라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지우지 못한 채, 항상 그랬듯 조리된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큼지막하게 잘라 입안에 욱여넣는다.

그러던 사이에.

“에지오.”

“…우음?”

“소스, 흘렸어.”

정신을 차리니 턱에 무언가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잠깐 그대로 있어­.”

루비아가 제 입가를 두드리며 그렇게 말한 뒤, 내가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내기도 전에 테이블 위의 휴지로 내 입을 닦아주었다.

어린애한테나 해줄 법한 행동이었기에 잠시 거부하려 했었지만, 오늘 루비아의 상태를 떠올린 나는 괜히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여러모로 완벽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부분은 여전하구나. 에지오.”

소스가 묻은 휴지를 접어 왼쪽에 내려놓은 루비아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예전에도 딱히 흘리고 먹진 않았던 것 같은데…”

“글쎄, 어떠려나?”

루비아는 묘한 미소와 함께 쿡쿡거렸다.

“항상 어느 순간에 갑자기 멍해져서 다른 생각을 할 때 그러니까, 에지오 너는 몰랐을 수도 있겠지.”

확실히 잠깐 상념에 빠지긴 했다.

“그것도 그렇네.”

나는 픽 웃으며 그리 말했고.

“그렇지.”

루비아도 기운 빠지는 웃음을 내보였다.

직후.

“……”

“……”

다시 평소로 돌아와서, 소시지를 깨작거리는 루비아와 스테이크를 썰어 입안에 집어넣는 걸 반복할 뿐인 나.

“방금.”

“……응?”

나는 이후의 대화를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루비아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이러저러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 듯한 얼굴로, 서로 말 없이 식사하길 십 분 정도가 흘렀을 즈음.

“방금, 에지오의 입을 만졌을 때 확실히 깨달았어.”

“……뭐를?”

그래도 내 말을 어떻게든 들으려는 건지, 어느덧 접시 위를 깔끔하게 비워가기 시작하던 루비아가 말을 잇는다.

“내 앞에 있는 에지오는 진짜가 맞구나. 여긴 현실이구나, 하고……”

“……”

“아까까지는 멍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으니까. 현실감이 전혀 없었어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했는데, 아니었어.”

“……”

“나, 이제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

“네가 정말로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다시 평범하게 얘기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마음 놓고 안심해도 되는 거구나……”

“……”

눈물과 뒤섞인 소스는 과연 무슨 맛이 날까.

먹어보지 못한 나는 알 수가 없다.

루비아도 결국 그 마지막 큐브스테이크 한 점을 마저 먹지 못한 까닭에, 누구에게서도 감상은 듣지 못하게 되었다.

#22

“춥네.”

“그러게…”

저녁이 지나고 땅거미가 짙어질 무렵, 바람은 그 세기를 더해가며 미약한 차가움마저 실은 채 천천히 불어오기 시작했다.

“옷 가져다 줄까?”

“아냐, 됐어. 이걸로 충분하니까.”

그리 말한 루비아는 어깨를 쓸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다.

—화르륵!

그렇게 큰 추위도 아니었던 까닭에, 단순한 불씨를 피우는 것으로도 주변의 공기는 금세 따스한 온기를 품었다.

추위를 극복하기 위한 생활마법 정도야, 루비아 수준이라면 밥 먹듯 쉬운 일이었다. 아니, 오늘만 보면 그건 올바른 비유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어때? 이제 좀 따뜻하려나?”

“외투 벗고 셔츠만 입고 있어도 되겠네.”

“에헤헤…”

손바닥 위에 자그마한 불길을 동동 띄운 채, 우리는 식당을 떠나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생활 마법 쓸 때도 영창을 하던데… 루비아 너는 영창을 외는 모습을 본 적이 없네.”

“아, 나는 약식으로 쓰고 있는 거라서.”

“약식?”

“응. 시전에 필요한 주문을 생략하고 오로지 정신의 집중만을 통해서 마법을 시전하는 거야.”

“……그게 왜 약식이야? 그냥 무영창 아니야?”

“음, 완전한 무영창이랑은 좀 성질이 달라. 이론상 무영창은 시전자의 내부에서 어떠한 과정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회로에서 마력을 뽑아내어 마법을 시전하는 거고, 내가 주로 쓰는 건 입밖으로만 내지 않을 뿐이지 머릿속에서 똑같은 주문을 외는 거나 다름없어.”

“그것도 좀 놀라운데…”

“영창은 원래 시전자의 집중력을 높여서 구체적인 이미지를 형상하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니까. 고대 룬어의 개념으로 다가서면 입밖으로 내뱉는 언어 그 자체에 힘이 깃들기도 하겠지만…… 일반적인 마법은 대부분 그런 식이니까. 게다가 같은 마법을 반복해서 사용하다 보면 매직­메모리(Magic­Memory)라는 게 마력 회로에 생성이 되거든. 그걸 잘 이용하면 낮은 위계의 마법들은 대부분 약식으로 주문을 생략할 수 있어.”

입으로 말하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다. 시전에 필요한 주문을 의념으로 대신하면 사고의 속도와 비례하여 시전 속도가 월등히 빨라진다. 주문을 의념화하는 과정의 처리 속도가 얼마나 빠르냐에 따라서 무영창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만, 루비아가 설명한 방법에는 머릿속으로 떠올린 이미지가 끊어지지 않고 쭉 이어질 수 있을 만큼의 대단한 집중력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영창을 비롯하여 술식과 연산 등 한 번에 세 가지 사고를 동시에 처리해야 할 정도로 높은 지능을 요구하는 일이었기에, 그럴 바엔 차라리 입으로 주문을 외고 나머지 두 가지를 머릿속에서 진행하는 편이 더 쉬울 것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 매직­메모리인지 뭔지를 이용하면 연산 등의 귀찮은 과정 없이도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모양이지만… 지금의 내가 관심을 기울일 만한 기술은 아니었다. 아무렴, 당장 뭘 새로 배우기가 빠듯했으니까.

“역시 천재구나, 루비아. 대단하네.”

“아냐, 천재는 무슨…”

“주변에서 다 널 그렇게 부르는데, 너도 자기가 유별난 존재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지 않아?”

“그거야… 에헤헤, 잘 모르겠네. 그렇지만 내 입으로 그걸 인정하는 것도 모양새가 좀 별로지 않을까…?”

“하긴, 뭐.”

정도 이상의 겸손은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킨단 사실을 알고 있는 건지, 막상 부정하지는 않고 어설프게 웃어 보일 뿐이다.

그런 면모가 의외의 매력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건 마법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기술인걸. 조금만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해. 당연히 처음부터 높은 위계의 마법을 약식으로 시전하는 건 무리겠지만…”

그러니까 머리 좋은 나라면 엄청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루비아는 짤막이 덧붙였다.

“한번 도전해보고 싶긴 하네.”

“그래?”

“응.”

시원스레 부는 바람이 내 머리칼과 루비아의 손바닥 위에 띄워진 작은 불씨를 천천히 흔들었다.

“예전이었으면 절대로 불가능했을 테니까.”

“……”

재능 없던 시절의 나를 기억하는 건지, 루비아는 무어라 대꾸를 해야 할지 모르는 게 분명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뒤 그 입이 열렸을 때.

“나는, 예전에도 에지오 네가 똑똑하다는 거 알고 있었……”

“그런 얘기가 아니야. 그리고.”

루비아의 옆을 걸으며, 나는 문득 내뱉는다.

“그랬으면 남들보다 잘하는 거 하나쯤은 있었겠지.”

“……”

모든 방면에서 열등했다.

놀라울 만큼.

필기 점수 조금 높은 게 뭐 자랑이라고. 아카데미에서 중요시하는 과목들에 비하면 전부 다 쓸데없는 것들인데. 게다가 주변에 나만큼 했던 학생들도 산더미였다. 어느 부분에서도 결코 잘나지 못했다. 그게 나였다. 아카데미 열등생 에지오 크라닐.

“……있었어.”

“응?”

그런 열등생이었던 나에게, 과거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불세출의 천재라 칭송받는 루비아가 말한다.

“남들보다 잘하는 거, 있었어.”

“……”

힐긋 옆을 돌아봤다.

입술을 꾹 깨물곤 무어라 말하려 하는 루비아가 있었다.

“너는…”

“꾸준히 노력한 걸 칭찬하려 하는 거라면, 그만둬.”

“……”

정곡을 찔린 건지, 한숨 섞인 내 목소리에 그만 기세가 팍 꺾인 건지 모르겠지만.

침묵하는 루비아의 옆에서 나는 입을 연다.

“딱히 잘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던 거야. 남들은 나만큼 시간을 들여 노력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굳이 나만큼 할 필요도 없었겠지. 그냥 그랬던 거야.”

노력이라도 안 하면.

나한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나에게도 목적이 있었으니까.

반드시 노력하고 노력한 뒤 보란 듯이 성공해서…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곁에 당당히 서고 싶다는, 그런 결심이 있었으니까,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것도 전부 과거의 일이었다.

지금 내가 노력하는 건, 순전히 제 욕심이다.

새로이 얻게 된 기회를 망치고 싶지 않다. 그 끝에 이미 예정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나는 성실하게 사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결국, 모든 게 끝났을 때 후회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딱히 칭찬 같은 건 의미가……”

“남들보다 잘하는 거라면 몰라도.”

“……응?”

행선지에 대해 자세히 논의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자연스럽게 향하는 발걸음이, 우리가 현재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여실히 알려주었다.

“남들보다 좋은 점이라면, 잔뜩 알고 있었는걸.”

오두막으로 향하는 산책로의 입구에서,

한 걸음 앞서 나간 루비아가 나를 돌아보며 말한다.

“좋은 점이라……”

그리 중얼거리다가.

구체적으로 뭔지 묻지도 않은 채.

“그러니까, 의미 없대도.”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루비아의 옆을 지나친 뒤 한발 앞서 안쪽을 향해 걷는다.

“나랑 네가 떨어져 지낸 세월이 얼만데. 네가 좋은 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나한테서 이미 없어져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루비아는 그때의 나를 잘 모른다.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만큼 곤란한 일도 달리 없다. 아마도 루비아가 알고 있는 좋은 점이란, 대개 그녀와 친하게 지냈던 날들의 에지오 크라닐이 보였던 모습들.

나는 변했다. 여러가지로.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을 때에, 날 자세히 알고 있던 것처럼 말하지 않아 줬으면 했다.

“뭐 하고 있어, 루비아? 빨리 따라와. 너한테 해줄 얘기는 많지만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아.”

“아, 응……”

역시나.

이제 와서, 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니까.

#23

이곳의 오두막을 이용하는 사람은 정말로 몇 없다.

그렇기에 이전번 우리가 드나들었던 때의 풍경과 비교하여 전혀 달라진 곳 없는 오두막의 내부에서, 나와 루비아는 익숙한 듯 푹신한 소파와 흔들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이가 썩을 정도로 달달한 차를 우려내고, 대체 누가 넣어두는 건지 항상 빼곡하게 충전되어 있는 쿠키를 집어 쟁반 위에 올려놓고.

그렇게 좋은 기억만 있는 장소는 아니었지만, 여기가 그 어느 장소보다도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기에.

각자 차를 홀짝이며 잠깐의 여유를 가진다.

“음, 으음……”

원래 배도 적당히 부르고 몸도 따스하고 자리도 편하고 그러면 불현듯 수마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루비아는 내가 억지로 먹인 성과가 있는지, 그도 아니면 밖에서 꽤나 고생을 한 건지, 피곤한 얼굴을 하다가 이윽고 머리를 꾸벅이기 시작했지만, 어떻게든 정신을 차리려 하는 것 같았다.

“있잖아, 루비아.”

“…응, 응.”

“내가 실종됐던 거 말인데.”

“…아, 앗. 응!”

그러다 내 쪽에서 중심 화제를 꺼내자, 루비아는 퍼뜩 눈꺼풀을 열고 순식간에 정신을 차린다.

“미, 미안해. 중요한 얘기 하는 건데…”

“아냐, 네 상태 보면 사실 나도 그냥 재우고 싶어. 근데 오늘 아니면 내일부터 당장 시험 기간이니까, 말할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아, 응. 그렇지. 시험…”

순간, 루비아의 눈동자에도 불안의 기색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으나, 그쯤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시험 준비 별로 못했지?”

“……으, 응. 미안해.”

“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

내일부터 시작인데도 바깥에 외출해있던 루비아다. 공부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 이쪽이 걱정을 시켰으니까 괜히 미안해지기도 한다.

“아무튼, 가급적 빨리 끝낼게. 압축하면 그렇게 긴 얘기도 아니니까.”

“아, 아냐. 여유롭게 해도 돼.”

“여유는 무슨. 너도 공부해야 하잖아. 나도… 솔직히 말하면 이미 글렀지만, 오늘 밤을 새서라도 공부해놓는 게 좋고.”

“그, 그렇지. 응…”

루비아도 결국 작은 한숨을 내쉰다. 처참한 성적표를 받을 때의 순간이 꽤나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내가 실종됐던 거 말인데.”

그리 운을 띄우자, 루비아는 언제 졸았냐는 듯 눈을 똘망히 뜨고 내가 하는 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관자놀이 부근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기억을 찾으러 갔었어. 아카샤의 별에.”

“……!”

루비아가 숨을 집어삼켰다.

루비아에게 해준 얘기는 뮤에게 해준 얘기와 대충 엇비슷했다. 실종된 이유. 그동안 있었던 일. 밖에 연락하지 못했던 이유 등.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부분은 그냥 넘어가고, 간략히 축약하여 2주 동안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이후로는 어느 정도 예상된 반응이 이어졌다.

자기는 거기서 못 찾았다느니. 아카샤의 별에 안쪽까지 들어가 봤는데 네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느니. 정말로 마탑주를 만나고 왔다는 말에는 다분한 관심을 보였지만, 결국 그 관심을 직접 드러내지는 못한 채 내가 하는 말을 꿋꿋하게 다 들었다.

“그랬, 었구나… 그럼, 지금은 정말 괜찮은 거지…?”

“그래, 못 믿겠으면 만져봐도 좋아.”

“아, 아냐. 그런 짓을 어떻게 해.”

“처음 나 봤을 땐 만져봐도 되냐고 물었으면서.”

“읏, 그건……”

“장난이야. 아무튼 멀쩡해. 네 생각보다 훨씬.”

“으, 응… 믿을게.”

그렇게 되어 각자 찻잔의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을 무렵, 나는 쿠키를 하나 집어 베어물으며 말문을 새로이 열었다.

“나 있잖아.”

“응.”

밤은 점점 깊어져 간다.

완전히 깊어지기 전에, 정리를 끝낼 필요가 있었다.

“네가 나한테 뭘 사과하려는 건지… 이제 알게 됐어.”

“……”

잃어버렸던 기억을 되찾았으니까.

모든 걸 되돌려 놓을 차례였다.

“……”

“……”

그리고 나는 오늘, 전부 없었던 일로 하고 그만 잊고자 했던 일을 굳이 끄집어내어, 단 하나의 물음을 루비아에게 던지고자 했다.

아닌 거라면 확실하게.

맞다면…

……

그 뒤는 아무도 모른다.

알고 싶지 않다는 게 정론이겠지만, 그럴 수는 없었으니까. 이렇게 계속 묻고 갔다가는… 루비아를 한없이 의심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날 차버린 소꿉친구가 날 좋아하게 돼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 곁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없게 될 테니까.

아무렴,

루비아는 나의… 소중한 친구였으니까.

“루비아, 너──.”

한마디를 더 꺼내려던 바로 그 순간.

—툭, 툭.

—툭.

“……”

“……돌아갈 때, 조금 젖겠네.”

기어코, 창문에 물방울이 맺혔다.

전혀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는데, 어둑어둑한 하늘은 갑작스레 터져 나온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비가 내린다.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 빗줄기가 창문을 두들기며 강타하고, 그렇게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는 한동안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부딪힐 때마다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는 빗소리에 묻혀 누군가의 흐느낌도, 나지막한 한숨도, 전부 다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비는…계속해서 내렸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