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시험 (1)
* * *
#1
“……너, 뭔 짓을 한 거야?”
가장 먼저 기시감이 들었다.
대망의 시험 기간을 맞이하여 평소보다 유니폼을 입은 학생의 숫자가 월등히 많아진 도서관 1층, 누군가를 쏘아붙이는 듯 카랑카랑한 음성은 모두의 귓전에 가차없이 닿았다.
햇빛을 받지 않아도 찬란하게 제 색깔을 뽐내는 금빛의 머리칼. 한쪽 허리에 손을 얹고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눈썹을 치켠 소녀가 제법 큰 목소리를 내자, 소녀의 앞에서 가만히 교과서를 들여다보던 청년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푸른 눈과 붉은 눈이 마침내 마주한 순간.
“뭔 짓을 했으면 루……”
“뭘 묻기 전에 기본적인 매너부터 지켜. 여기가 지금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성적인 한마디에 유리는 “읏.” 하는 소리를 내며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숙(??)이 규칙인 도서관에서 시끄러운 소란을 피우는 그들을 지긋이 바라보는 선배들, 혹은 동급생들.
유리는 본인이 흥분한 걸 인정했다. 찾던 사람을 발견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크게 낸 경향이 있긴 했다. 여기서 자존심을 세우겠답시고 되레 톤을 올릴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는지라, 잠깐 주춤거리곤 이번엔 목소리를 낮추어 청년에게 속삭이듯 입을 연다.
“따라 나와. 잠깐 할 얘기 있으니까.”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험 기간인데, 내가 공부하는 거 보고도 굳이 지금 해야 할까? 나중에 하면 안 돼?”
“나중이 없으니까 이러는 거 아냐.”
에지오가 펜을 빙빙 돌리며 그리 대답하지만, 유리는 절대 물러설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서 빤히 쳐다보는 걸 알고 있는 건지, 얼굴이 살짝 붉어져 있지만 다리는 전혀 요지부동이다.
아무래도 여기서 대놓고 창피를 주지 않는 이상 떠나갈 일은 없을 것 같았기에, 어떤 방식으로 쫓아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네 시험만 잘 보면 끝이야?”
“……”
이건 또 무슨 말인지.
시험은 당연히 잘 봐야 하는 거고, 불상사가 생겨 남들보다 한참 늦은 만큼 더 열심히 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당장 유리도 실종되었던 에지오가 복귀한 걸 확인했을 때 그의 상태를 걱정—물론 일반적인 사람의 걱정하는 반응이 아니긴 했지만—하지 않았는가.
에지오가 공부하는 걸 굳이 방해할 이유가 없었다. 훼방을 놓기 위해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온 건 아닐 터다. 아무렴 유리 역시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방금도 기숙사에서 책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결국 머리를 부여잡고 한숨을 쉰 뒤 밖으로 막 나왔던 참이다.
“……”
“……”
유리의 미간은 가운데로 좁혀져 있었다. 명백히 짜증이 어린 듯한 얼굴. 이 상태로 놔두면 더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여기서 긁어부스럼을 추가로 만드는 것보단 밖에서 빠르게 처리하고 오는 편이 좋을 듯했다.
한편, 이런저런 식으로 문제가 생길 거라는 건 진즉에 예측하고 있던 바이기도 했으니까.
턱.
에지오는 책을 덮고 의자에 가방을 놓았다.
“알았어. 밖으로 나가자.”
“……흥.”
유리는 등을 돌리기 전, 에지오의 맞은편에서 유리와 에지오를 곤란한 눈으로 살피던 사람에게 불현듯 눈길을 주더니.
‘딱히 잘못인 건 아니니까.’
곧 관심 없다는 듯 도서관 문을 열고 나섰다.
잠시간의 침묵 이후.
“잠깐 얘기하고 올게. 공부하고 있어.”
“아, 네에…”
의자를 끌고 일어서서, 한숨을 쉰다.
방금 유리가 떠나간 장소와 에지오를 번갈아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던 스텔라가, 옆머리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반응을 보였다.
수요일에 마법 전공 시험을 보는 관계로, 이미 지나간 수업 내용이라든지…… 벼락치기라도 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한 것이, 바로 어젯밤.
이미 한번 도움을 받았던 전적이 있기도 했고, 언제나와 같이 밤하늘을 구경하던 스텔라를 찾아간 에지오는 부탁을 청했다.
일단 기본적인 이론 공부들은 도서관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실전 마법의 적용 같은 건 다른 장소에서 진행해야 하겠으나… 우선은 그랬다. 때문에 둘 다 비교적 시간이 널널한 월요일 아침부터 스텔라는 에지오의 공부를 도와주고 있었다.
유리를 따라 도서관 밖으로 나선 에지오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고, 스텔라가 다시 교과서의 글자에 눈을 돌렸다.
당연히.
‘……집중 안 되네.’
잘 해결했으면 좋겠는데.
스텔라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2
“빨리 얘기해, 나 시간 없어.”
“시끄러워. 어설프게 끝낼 얘기 아냐.”
비가 내린 뒤의 하늘은 맑게 개었다.
유리는 도서관 옆 나무 그늘 아래로 에지오를 데려왔다. 벤치 따위는 없었기 때문에, 둘은 바닥을 딛고 선 채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내가 못 들은 수업의 공백 기간을 생각하면 지금 1분 1초가 아깝거든? 5분 더 공부 못 해서 미처 기억 못한 내용이 시험에 나오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아, 진짜. 그래! 누가 너 바쁜 거 몰라? 내가 책임질게! 책임질 테니까, 얌전히 묻는 거에나 대답해.”
도서관과 달리 빼액 하고 소리를 질러도 별로 상관이 없다. 잠시 허공에 머무르던 유리의 음성을 듣고는 에지오가 뒷목을 긁었다.
‘예상은 했는데, 정말 찾아올 줄이야.’
그 이후의 모습은 아직 본 적 없지만, 유리가 이렇게 따지러 찾아올 정도면… 에지오는 잠시 상념을 거두곤 제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유리를 내려다보았다.
“아까도 말한 건데, 네 시험만 잘 보면 끝인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남의 시험은 잘도 망쳐놓고서?”
“남의 시험이라니, 오늘 월요일이고. 아침이고. 현재까지 진행한 시험은 아직 하나도 없지 않아?”
“지금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잖아.”
유리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너 때문에 시험 준비도 제대로 못 하고, 당장 돌아와서도 곧 치를 시험에 영향 생길 정도로 방해나 하고, 뭔가 할 게 있었다면 적어도 시험은 끝나고 했어야지. 아니, 아예 그러면 안 됐지, 너는.”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는데.”
엄연히 말하면 시험 준비를 제대로 못 한 건 에지오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디까지나 짧은 생각으로 남길 뿐이었다.
뒷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이리저리 꺾는 에지오의 태도를 보곤 더 악에 받친 건지, 잠시 어깨를 부들거리던 유리는 한번 숨을 크게 몰아쉰 뒤, 차분하게, 그러나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루비아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너.”
“……”
본론이 왔다.
에지오는 이번엔 고개를 위로 꺾었다.
푸른 하늘이 나뭇잎 사이로 보였다.
“네가 없어져서 그렇게나 걱정하고, 밥도 안 먹고, 울고, 그랬던 애한테…… 어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물었어.”
“……”
“오늘 조식도 안 먹었어. 방에는 있는 것 같은데 문도 안 열어주더라. 자는 것 같아서 문을 두드려봐도 반응 하나 없더라. 그리고, 나 전부 다 봤거든. 어제 루비아가 기숙사 돌아왔을 때… 얼굴이 엉망으로 됐던 거. 그런데도 나한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서 웃고 있는 거. 그런 표정을 보면… 친구인 내 입장에서 어떤 마음이 들겠어?”
“……”
“네가 어제 루비아를 데려갔잖아. 그러고 나서 그렇게 된 거잖아. 대체 거기서 무슨 짓을 했으면… 네가 돌아와서 안심하고 웃고 있어야 할 애가, 울고 있는 거냐고. 이해가 안 돼. 도저히.”
에지오가 돌아옴에 따라 루비아의 상태도 원래대로 돌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괜찮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그러자 유리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어젯밤, 뭔가 일이 있었다고.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정말, 그냥, 이해가 안 돼. 왜… 울린 거야? 무슨 일 때문에? 무슨 사정이 있어서? 사실 무슨 사정이 있다고 해도, 절대 납득을 못 할 것 같아. 이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친구가 날이 지나갈 때마다 피폐해져 가는 모습을 옆에서 다 지켜봤는데, 괜찮다고 필사적으로 웃어넘기는 걸 차마 보기가 힘들 지경이었는데, 정말 위험해질 때쯤에 마침 네가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유리가 말한 다행의 의미는, 루비아의 상태 완화를 시사하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유리는 그동안 불안에 떠는 루비아를 안심시키는 역할을 하긴 했지만, 모두가 잠에 들었을 시간이 다가오면, 넓은 침대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머리끈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 반대의 결과가 나왔어. 이게 말이 돼…?”
“……”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는 에지오를 올려다보면서, 유리는 속으로 기가 찬 나머지 헛웃음까지 섞어가며 말을 흘렸다.
“루비아는… 무지 좋은 애잖아. 무엇보다 네 가까운 친구잖아. 그런 친구를 왜 그렇게 괴롭히는 건데…”
치를 떨었다. 진심으로 정색했다. 눈앞의 남자가 정말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좀,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번 일로 호감도가 확 깎일 것 같았다. 그런 게 애초에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은 둘의 사정에 깊숙이 관여하려 하지 않았다. 루비아도, 에지오도. 둘은 항상 마주칠 때 복잡한 표정을 가장 먼저 띄웠으니까. 누구 한 명이 매달리고, 누구 한 명이 떨쳐내는 그런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것 같았으니까. 때문에 유리는 루비아한테도 묻지 않았다. 언젠가 의지하고 싶다면 의지해도 된다고, 그리 말했을 뿐이다.
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루비아와 더 친해지고, 그녀가 정말 좋은 친구라는 것을 느끼고, 루비아를 더 좋아하게 된 유리로선 소중히 여기는 친구를… 사실상 처음 사귄 또래 친구나 다름없는 루비아를, 이렇게나 힘들게 만드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느 남자의 얘기를 해주면서 웃다가도 우는 루비아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유리는 싸움을 중재하는 심판 따위가 아니었다. 오로지 루비아의 편을 들어주는 친구였다. 보는 입장에서 눈물이 나올 정도로 슬픈 표정을 짓고 방에 틀어박힌 루비아를,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그래서 에지오를 찾아왔다. 결국 자신은 루비아를 달래줄 수 없었으니까. 이렇게 상황을 몰고 간 장본인이 직접 해결해야만 효과가 있었으니까.
“너만 괜찮으면 끝이야? 루비아가 너 때문에 얼마나 슬퍼하고 있었는지 알아…? 사람을 그 지경으로 만들었으면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적어도 안심은 시켜줘야 할 거 아니야. 그러지도 못하고, 너랑 엮이면 계속 루비아가 힘들어지기만 하는데… 정말 친구 맞는 거야? 너희?”
자길 걱정해서 밥도 걸렀을 정도로 마음씨 고운 친구한테 그리도 깊은 상처를 남겨놓고, 자기는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모습이… 유리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험 공부, 중요하지. 중요한데… 너만 중요한 건 아니란 말야. 이대로라면 루비아는 시험을 망치게 생겼어. 너 때문에.”
“……”
“그래, 내가 뭐 더 관여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건 나도 알아. 근데 이건 아니라는 거지. 무슨 일을 저질렀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 루비아를 어떻게든 챙겨주란 말야. 내 친구고, 네 친구잖아. 너희 서로한테 소중한 친구였다며. 근데 이게 정상적인 친구 관계인지, 난 잘 모르겠어.”
“……”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대답할 수 없다면… 후.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루비아 좀 어떻게든 해봐. 걔 그러고 있는 거 너무 마음 아프단 말야. 오늘 내로 얘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나 정말 너한테 실망……”
“야.”
일순, 몸이 굳는 듯했다.
사아아아……
스산한 바람이 나뭇잎을 쓸며 지나가고, 그 속에 담긴 차가움이 유리의 팔과 다리를 날카롭게 훑었다.
온몸의 솜털이 쭉 곤두섰다.
고로, 싸늘했다.
…말을 멈추고, 점차 수그러졌던 고개를 들어보면,
“적당히 해라.”
처음 보는 얼굴의 에지오가 있었다.
#3
“나도 네 친구인데 왜 나한테만 지랄인 거냐는 등, 그딴 말 같지도 않은 건 하지 않을게. 근데 달리 할 말은 해야겠다.”
“어, 어……”
주머니에 담배라도 들어 있었으면 당장 꼬나물었을 것 같은 표정으로, 에지오는 한숨도 없이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시릴 듯한 차가움을 담은 기세.
어릴 적 딱 세 번 정도 유리를 엄하게 다그쳤던 오라버니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라, 유리의 숨을 옥죄이는 것도 잠시.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끝났어. 내가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냐. 허울 좋은 거짓말로 위로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 근데, 난 거짓말로 위기를 넘기다 보면 언젠간 제대로 좆될 거라고 보거든.”
“조, 뭐……?”
처음부터 끝까지 거짓말로 쌓은 관계는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 쌓이고 쌓인 거짓말들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가 되어, 죄인의 모든 것이 바스라져 없어질 때까지 죄인을 짓누르게 될 뿐이었다.
유리가 멍해지든 말든 에지오는 말을 잇는다.
“여기서 내가 뭘 더 한다고 되는 상황이 아냐. 내가 뭘 더 할수록 네 말처럼 루비아만 더 힘들어져. 스스로 극복해야 할 문제고, 극복이 불가능하다면 한동안 그 상태로 있어야겠지.”
“너, 너… 어떻게 그런 무책임한……”
“무책임?”
“하.” 에지오는 입꼬리를 씰룩였다.
“이미 누구의 책임인지 따질 시기는 한참 지났어.”
“……”
고작 어젯밤의 일을 언급하는 것치고, 에지오는 매우 먼 시간대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굳이 시험 전에 얘기를 나눈 게 잘못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그때 얘기를 안 했으면 루비아는 분명 더 불안해했을걸. 죽을 정도로 신경 쓰여서 공부에는 전혀 집중도 못 했을걸. 아니, 그렇다기보다도…… 이젠 둘 다 한계였어. 슬슬.”
여전히 유리는 에지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른다. 무엇이 한계였다는 걸까.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올 게 왔고, 우리는 제대로 마주한 것뿐이야. 지금이야 방에 틀어박혔다곤 했지만 내 경험상 그렇게 오래 가진 않을 거고. 루비아는 분명히 여리지만 약한 녀석은 아니니까.”
비단 성실함 탓뿐만 아니더라도, 자길 걱정하는 친구들 때문이라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나게 될 거다. 그건 주변에서 보기에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그렇게라도 일어서야 했다. 지금은.
“그걸…… 네가 어떻게 확신해? 이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밖으로 더 나오지 않게 되면?”
“그때는 뭐… 내가 나서야겠지.”
“……! 그럼 그냥 지금 나서도 되는 거잖아!”
“내가 왜?”
에지오는 눈을 반쯤 감으며 유리를 내려다본다.
역시나, 처음 보는 얼굴.
“읏…”
싸늘하게 추궁하는 시선이 짓쳐온 탓에 어깨를 잠시 움츠렸던 유리가, 곧바로 가슴을 펴고서 바락 소리친다.
“나서겠다는 건 해결할 방법이 있다는 거잖아. 방법이 있으면서도 저렇게 내버려 두다니, 그게 정말 맞는 거라고 생각해?!”
“세상에는.”
“……뭐?”
“세상에는, 노력으로 안 되는 게 참 많아.”
에지오가 말을 이었다.
“뭐든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도 않고, 마찬가지로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서 곧바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
“그때는 내가 나서겠다고 했잖아. 꽤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야. 나도, 루비아도, 지금은 아무것도 못 해. 어젯밤의 일을 오늘 아침에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알량한 일이었다면 이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이미 말했지만 난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 지금은.”
“……그럼”
물러서지 않고 한마디 더 하려던 순간.
“당장 루비아가 틀어박혔다고 해서, 나한테 모든 책임을 묻지 마. …겨우 일어나서 공부하러 온 나는 뭐가 되는 건데.”
날이 섰던 기세가 차츰 풀린다.
그에 따라 억눌려 있었던 유리의 페이스도 본래의 상태를 찾아가지만, 이전처럼 소리를 지르며 열을 낼 수는 없었다.
“너……”
이제야, 조금 익숙한 얼굴.
연회장의 뒤편에서 마주쳤을 때가 겹쳐 보였다.
울 것 같기도, 그러나 울지는 않고, 입을 다문 채 코를 찡그리고, 풀었다가, 눈빛을 침잠한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한다.
“있잖아, 유리.”
분명 유리를 향해 말하고 있지만, 유리를 보지 않으면서 목소리에 힘을 빼곤 멍하니 중얼거린다.
“네가 루비아를 소중히 여기는 건 나도 알아.”
“그런데 너, 한 달밖에 안 됐잖아.”
“난 9년이야.”
“9년이라고. 거기서 3년을 빼도… 6년이야.”
“……멋대로 판단하곤 나한테 루비아랑 친구가 맞냐니 뭐니, 그딴 말 같지도 않은 질문 좀 던지지 마라. 정말 들어주기 힘들고, 일일이 대꾸하기도 힘들어.”
“걱정이 안 될 리가 있겠냐고. 신경 안 쓰일 리가 있겠냐고. 안 그래도 복잡한데 날 더 복잡하게 만들 필요까지 있었냐고, 너.”
“나만 괜찮으면 끝이냐고? 내가 누굴 괴롭힌다고? 루비아를? 내가? 네 말처럼 그렇게 좋은 녀석을, 내가 왜 괴롭혀야 하는데?”
“나는 말야, 루비아를 위해서 여태…… 아니다.”
“유리, 너.”
“루비아를 많이 걱정해주는 건 알겠는데, 어제 네가 본 건 루비아의 모습뿐이잖아. 내가 어제 어땠는지, 넌 하나도 모르잖아.”
“너도 내가 괜찮아 보였으니까 이렇게 말을 걸어온 거겠지만, 그거 아니니까.”
“이젠 나도 지쳤으니까.”
“……그냥, 나 좀 놔뒀으면 좋겠다.”
에지오가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터벅터벅 도서관으로 돌아갈 때까지, 유리는 뒤돌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친구를 위해서, 라는 명목으로 찾아왔건만.
결국 누구도 위하지 못했다.
“……대체 뭔데, 그래서.”
유리는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