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33화 (133/201)

〈 133화 〉 시험 (2)

* * *

#4

에지오가 도서관으로 돌아왔을 때, 스텔라는 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말했던 대로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고개를 잠깐 끄덕인 에지오는 의자를 뒤로 끌곤 본래 자리에 착석했다.

그가 자리에 앉아 다시 교과서를 펼 때까지, 스텔라는 턱을 괸 채로 잠시 에지오의 얼굴을 빤히 지켜보다가.

사각, 사각.

스윽.

­ 무슨 얘기 했어?

“……?”

펼친 페이지의 구석에 자그맣고 동글동글한 글씨를 새겨서,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히 에지오의 앞에 내밀었다.

에지오는 눈을 깜빡였다. 무슨 얘기를 했냐니, 딱히 자세하게 알려줄 수가 없는데. 별 얘기 안 했는다는 식으로 대답하려던 찰나.

사각, 사각.

스윽.

­ 표정, 안 좋아 보이길래. 걱정돼서.

교과서를 회수하고 다시 끄적여 내보인다.

“……”

그렇게 표정 관리를 못 하고 있었나.

에지오는 제 얼굴을 얌전히 매만졌다. 정신 차리자는 생각으로 뺨을 몇 번 착착 때리고 왔었는데. 어느샌가 딱딱히 굳어 있던 모양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스텔라의 얼굴을 응시하며,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이던 에지오는 책을 펼쳐 구석에 글씨를 적었다.

­ 별 거 아냐. 걱정해줘서 고마워.

교과서를 180도 돌려서 내민 직후 고개를 들어보니, 스텔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별 거 아니긴. 밖에서 싸우기라도 한 것 같아.

­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안 싸웠어.

­ 정말?

­ 응, 정말.

결국 둘 사이에 문제가 생겨서 싸움이 일어났던 건 아니니까, 말이지.

­ 그럼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아닌지만 대답해줘.

­ 뭔데?

에지오의 답변은 살짝 늦었다.

정작 질문하기로 한 스텔라 역시 펜으로 슥슥 글씨를 적었다가, 이건 아니다 싶어 줄을 쭉쭉 그었다. 그러다 보니 공간이 없어져서 페이지를 넘긴 다음 뒷장 구석에 짤막이 글자를 새겼다.

사각, 사각.

……스윽.

­ 루비아랑 관련 있는 얘기였어?

“……”

이번엔 조금 더 진지한 얼굴. 찬란한 은빛과 푸른 빛이 직선으로 마주쳤다. 에지오는 들고 있던 펜으로 테이블을 잠시간 두드렸다.

아무렴 스텔라도 루비아와 친한 친구였다. 어제 기숙사에서 그 모습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밤하늘을 구경하러 나온 건 루비아가 기숙사로 돌아가고 난 후의 일이었던 것 같으니까.

딱히 숨길 필요도 없지, 이건.

­ 응.

이번에는 “그렇구나.” 하고, 작게 목소리를 냈다.

­ 알았어. 이제 공부하자.

­ 고마워.

스텔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을 알려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그에 에지오가 짧은 감사를 표했다.

사각, 사각.

­ 여기부터 말이야, 꽤 중요한 부분이라서. 이대로면 조금 알려주기 불편할 것 같은데.

스윽.

­ 옆에 앉아도 돼?

페이지를 짚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순수한 의도임에도 불구하고 귓불이 살짝 발개진 스텔라가 있었다.

에지오는 거침없이 답변을 적었다.

스윽.

­ 애초에 왜 처음부터 내 맞은편에 앉았나 고민하고 있던 참이야.

그러자, 온 신경을 기울여 집중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도 않을 크기의 미약한 웃음소리가 났다.

드르르륵……

잠시 뒤 볼을 긁적이던 스텔라는 최대한 조용히 일어나서 에지오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실례할게.”

“…얼마든지.”

무척 가까운 거리에 앉게 됐으니 속삭이는 것으로 필담을 대신할 수 있었고, 왠지 귓바퀴가 간지러웠던 탓에 에지오는 잠깐 몸을 우측으로 움직이며 그리 대답해야만 했다.

#5

“그럼, 복습하는 겸 질문해볼게. 여기 제시된 3위계 마법들 중에서 생활 마법으로 쓰이기도 하는 마법은 뭘까?”

“윈드­커터(Wind­cutter). 절단용으로 많이들 쓰잖아.”

“그렇지. 그럼 해당 마법의 시전에 필요한 영창은? 여기서 진짜로 시전하면 안 되니까 그냥 읊기만.”

“굽이치는 바람 · 모여들어 가르는 칼날이 되리.”

“응, 정답이야. 여기까지는 기본적인 상식 문제였고… 이제 다음으로 가보자.”

공부를 시작한 지 어느덧 두어 시간쯤.

밝게 웃은 스텔라가 속삭이며 질문을 이어 나간다.

“숙련되지 못한 마법사가 해당 마법을 잘못 시전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은 대표적으로 뭐가 있을까? 3위계 화염 계열 마법­ 플레어(Flare)랑 융합했을 때 나타나는 효과는? 윈드­커터(Wind­Cutter)의 상위 마법인 4위계 바람(風) 계열 마법­ 윈드­크레센트(Wind­Crescent)는 하위 마법에서 어떠한 술식과 연산이 추가된 걸까?”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질문의 폭격.

그렇게 심오하고 어려운 접근을 가미한 문제까진 아니었지만, 질의 문제가 아니라 양의 문제였다.

이걸로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고작 두 시간 조금 지났을 뿐인데, 새로 배운 내용이 너무 많았고, 그걸 다 기억하려면 일반인 기준에선 아주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러나.

에지오는 첫 번째 질문부터 침착하게 대답한다.

“마력이 응집되지 못하고 흩어져서 칼날이 두 개로 나뉘거나, 전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경우 시전자의 목숨을 매우 위험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숙련자만 생활용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협회에서 규정하고 있어.”

“응, 정답이야.”

“융합에 성공하면 동일 위계의 플레임­커터(Flame­Cutter)로 성질이 변화해. 실패하면 별다른 부작용은 없어. 바람은 사라지고, 불은 꺼지고. 끝이야. 마력은 그대로 소모되겠지만.”

“응, 이것도 정답.”

“음… ‘가속’, 그리고 ‘증폭’ 관련 술식이 지금 내가 그린 것처럼 총 12획 추가되었고… 연산은 윈드­커터(Wind­Cutter)의 시전에 필요한 마력량이 표준치라고 가정했을 때……”

사각, 사각.

술식의 연산 과정은 막상 적어내려고 하면 상당히 복잡해진다. 예컨대 손이 머리를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다. 마력 회로를 불태우며 술식을 계산할 때는 비교적 쉬워지는데 말이다.

“여기. 다 했어.”

어찌 됐건, 스텔라의 질문에 따라 에지오는 빈 종이에 연산식을 빼곡히 끄적였다.

관자놀이를 두드리며 적어낸 그것을 스텔라에게 내밀자, 스텔라는 진중한 눈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쭉 훑는가 싶더니.

“응, 전부 정답이야.”

“……하아.”

내심 하나쯤 실수하지 않을까 싶었던 에지오의 옆에서 빙긋 웃어 보였다.

“이걸로 지금까지 낸 30가지 문제 모두 정답. 역시 똑똑하네, 에지오는…그중에서도 암기에 굉장히 능숙한 것 같아.”

“어렸을 때부터 책만 엄청 읽어대서 그런 거 아닐까 싶네……”

습관처럼 테이블에 머리를 묻으려다 퍼뜩 고개를 든 에지오가, 뻐근한 듯 뒷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스텔라는 작은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하긴, 에지오 너 책 많이 좋아했었지. 가끔씩 밖에 들고나오기도 했고. 별장에 놀러 갔을 때도 책 엄청 많았었어. 기억난다, 그때……”

문득 어릴 적의 얘기를 꺼낸 스텔라.

그녀의 말에 잠시 기억을 더듬던 에지오는, 자신의 부모님과도 얼굴을 마주한 적 있었던 스텔라… 아니, 알프렌의 모습을 떠올렸다.

“뭐…… 심심했으니까. 사교장 같은 거 질색이었거든. 모임에 안 나갈 때면 그냥 방에서 책 읽는 게 훨씬 좋았어.”

이제는 다른 귀족의 소유가 된 별장의 방 한켠에서 창문을 조금 열어두곤, 책 페이지를 넘기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던 에지오.

그러다 불현듯 창문 바깥으로 옮긴 시선에, 작은 산봉우리 아래 위치한 수풀로 굴러떨어진 한 소년의 모습이 닿았었다.

알고 보니 소년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방에서 책이라…… 에지오 널 처음 봤을 때도 그러고 있던 것 같은데.”

“맞아. 책 읽고 있었어.”

“그럼 혹시 그때 읽었던 책, 아직 기억해?”

“글쎄……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거의 십 년 전 아냐?”

“응, 아마 그 정도 됐으려나. 귀로 들으니까 확 체감이 되네. 그렇구나, 벌써 십 년이구나……”

워낙 목소리를 낮춘 채 속삭이며 말하고 있었고, 말소리는 갈수록 작아졌던 탓에, 끝에 이르러선 잘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감상에 젖은 듯한 눈동자가 멍해진 것도 잠시.

턱을 괴곤 에지오를 돌아본 스텔라가 묻는다.

“지금도 책 좋아해?”

“……음, 어떠려나. 전보단 아니지만 가끔 읽긴 해.”

“흐응, 그렇구나……”

“너는?”

“나는…… 나도 조금? 본가에 있을 땐 교양을 쌓아야 한다고 하셔서 이것저것 되게 많이 읽긴 했거든. 그런데 여기 와선 굳이 안 읽어도 되니까, 가끔 소설 같은 것도 건드려 보고 있었어. …요즘은 공부하느라 책이라고 해봤자 교과서밖에 못 보지만 말야… 아하하.”

아무래도 성실한 학생일수록 시간이 별로 나질 않겠지. 에지오도 매한가지였다. 하루 일과가 모두 끝나고 나면 공부, 훈련, 운동, 잠의 반복이었으니까.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체로 그런 일상을 보냈다.

“하긴, 뭐……”

그래서 에지오는 스텔라를 따라 픽 웃음을 흘렸다.

예전의 알프렌은 공부 따위 거들떠도 안 볼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어느새 이런 그림을 그린 듯한 모범생이 되어서 자기 앞에 다시 나타났다.

우연한 재회 이외에도 더욱 놀라운 것은, 격변한 스텔라의 모범생 이미지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었다.

우아하며 교양 있는 귀족 아가씨, 라고 해야 할까. 지금의 스텔라를 보고서 알프렌 시절의 쾌활한 이미지를 단편적으로나마 떠올릴 사람은 단언컨대 프론티어에서 단 한 명도 없을 것이었다.

이렇게나 사람이 바뀔 수가 있나, 싶었지만.

무려 십 년이다.

충분히 바뀔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도, 사람은 본디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으니까. 인격이라든지 본질은 결국 바뀌지 않는다. 그 증거로, 스텔라도 에지오와 단 둘이서만 있을 때는 이따금 본모습을 보이지 않는가.

조숙함이랑은 백만 광년쯤 거리가 멀었던 알프렌이 누구나 인정하는 공작가의 영애가 될 때까지, 스텔라는 어떤 교육을 받아온 걸까.

하여, 잠시 그런 의문을 품던 에지오는.

본가 이야기를 잠시 꺼낼 때 눈빛이 잠깐 흐려졌다가, 직후 농을 던지며 웃음으로 자연스레 넘기는 스텔라의 모습을 보았다.

……그래.

쉽게 바뀔 수 없었을 거다.

어떤 식으로든 스텔라의 언동 교정에 관한 ‘교육’을 받았을 거고, 그렇게 십 년을 학습한 결과, 완벽한 귀족 영애가 될 수 있었다.

그 사이의 시간에 대해 에지오는 알지 못한다.

스텔라가 ‘미래시(???)’라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기왕 과거 이야기를 꺼낼 거라면.

즐거운 과거를 들먹이는 편이 좋을 테지.

“스텔라.”

“……응?”

짧은 부름에 스텔라가 눈꺼풀을 들었다. 에지오는 스텔라의 정수리를 가리키며 속삭이듯 물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는 건데…… 너 키 얼마나 큰 거야?”

“으응…?”

“어릴 땐 네가 나보다 확실히 컸는데, 지금은 나보다 한참 작아서 그런지 이게 큰 건지 안 큰 건지 잘 모르겠네.”

“커, 컸거든…? 십 센티는 넘게 컸을걸…?”

“어, 진짜? 지금 정확히 몇인데?”

잠깐 고민하던 스텔라가 입을 연다.

“음… 163, 정도?”

“……큰 건가?”

“어릴 때에 비하면 많이 큰 거지. 확실히 컸다구. 에지오 너랑 비교하면 한참 작은 수치겠지만……”

스텔라는 그리 중얼거리며 눈을 흘겼다.

“그러는 에지오는 지금 몇인데?”

“……아, 최근에 재본 적이 없네. 글쎄다.”

“마지막으로 재본 건?”

“……그것도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나.”

딱히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서.

정확히는 신장을 재본다는 행위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없었다는 게 맞겠지만.

“일단 앉은 키만 해도 이만큼 차이 나니까, 음… 대충 백 팔십 중반쯤은 충분히 넘지 않을까 싶은데.”

스텔라가 손날을 세워 자를 재듯 자신의 정수리부터 시작해 허공을 쭉 그어본다. 그 동작은 에지오의 목 중간 즈음에서 멈추었다.

“…앗.”

스텔라의 손이 에지오의 목에 닿는 순간, 무심히 옆을 돌아본 에지오와 다르게 정말로 거리가 가깝다는 사실을 자각하여, 스텔라는 일순간 튀어 오르듯 손을 뗀 다음 그것으로 제 가슴팍을 감쌌다.

새하얀 손등이 맥동하는 것처럼 살짝 떨리고 있었다. 원래 이런 스킨십에 딱히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는데, 옛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들도 있었어서…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그런가… 음, 많이 컸네 나도.”

지금 스텔라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어떤 기억을 지우려고 분투를 벌이든지 말든지, 에지오는 잠깐 눈을 깜빡이다가 그리 말했다.

확실히 많이 크긴 했다. 이런 몸이 되기 전에는 백 육십 초반대였던가. 고작 반년 사이에 머리 하나가 더 생긴 셈이다. 가히 괄목할 정도로 급격한 성장임이 분명했다.

신장의 성장은 노력 따위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진즉에 포기한 지 오래였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론 커져버린 게 나쁘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몸은 뭐든지 큰 게 좋더라고……

그래.

여러 가지로 큰 게 좋다.

스텔라도 본인이 말했듯 적잖은 성장을 이루었다. 신장이야 당연하고… 에지오는 다음에 무슨 옛날 얘기를 꺼낼까 고민하다가, 문득 어딘가에 시선이 닿았다.

어렸을 적 에지오와 같이 목욕할 때면 언제나 가려져 있던 부위를 제외하고, 당연하지만 성징이 오지 않아 남자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지금 스텔라가 손으로 감싸고 있는 부위에 눈길이 갔다.

“…커흠.”

“……”

하지만 곧바로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귓불이 붉어진 스텔라와 눈을 정확히 마주쳤던 까닭이다.

“그, 딱히 이상한 생각 같은 걸 한 게 아니라…”

“……”

왜 부끄러워지는 걸까.

따지고 보면,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어렸을 적의 이야기긴 하지만.

스텔라는 에지오의 변명 직후 이어진 침묵 속에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에지오가 왜 자길 봤는지 알 것 같았던 까닭이다. 그 이유를, 스텔라는 아까부터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하는 중이었다.

오히려 에지오보다 더 심각한 경우였다.

스텔라와 달리…

에지오는 처음부터 가린 적이 없었으니까.

“……”

“……”

둘은 그로부터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결국 몰래 떠드는 걸 들켜버린 탓에 도서관 사서로부터 쫓겨나고 말았다.

다만 그게 오히려 분위기 전환이 되어서, 어색함을 겨우 떨쳐낸 뒤 실전 연습을 하러 연무장으로 향했다는 건 조금 뒤의 이야기였다……

#6

에픽 클래스 2동 여자 기숙사.

터벅, 터벅…

3동의 승강기를 타고 내려와 마침내 도착한 그곳에서, 유리는 로비를 걸으며 아까 전의 일을 잠시 회상했다.

“……”

중간 지점에 멈추어서.

유리는 루비아의 방이 있는 복도를 돌아본다.

—이젠 나도 지쳤으니까.

— ……그냥, 나 좀 놔뒀으면 좋겠다.

그때 보였던 표정이,

머릿속을 좀처럼 떠나가질 않는다.

“뭐냐고, 대체……”

또 이어진 한숨.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유리는 잠깐 로비의 천장을 올려다본 뒤에 결연한 얼굴로 발걸음을 틀었다.

목적지는… 루비아의 방.

터벅, 터벅.

오른쪽 복도를 얼마 걷지 않아 끝에 도착했다.

“……후우.”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에, 노크를 한다.

—똑, 똑.

“루비아, 있어?”

문 안에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즉, 아무런 반응도 없다.

—똑, 똑.

“루비아! 있으면 문 열어줘!”

역시나.

반응은… 없다.

유리는 입술을 깨물고서.

—쾅, 쾅!

“루비아! 아까, 나 에지오랑 얘기하고 왔는데!”

결국, 그 이름을 언급해 버린다.

반쯤 도박수였다.

그 녀석과의 일을 여기서 꺼낸다 한들, 루비아가 굳게 닫힌 문을 열어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해봐야 했으니까.

어떻게든 루비아가 오늘 내로 다시 일어서지 못하면, 성적이라든지 여러모로 큰 영향이 있을 테니까.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몰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여기서 아무런 진전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다시 문을 두드렸다.

—쾅, 쾅, 쾅!

“루비아! 지금 안 열어주면, 나───”

끼이이익.

“……응, 무슨 일이야?”

방금 잠에서 막 깨어났다는 걸 어필하는 것처럼 졸린 듯 눈을 비비며 문을 연 루비아가, 평소처럼 느슨한 웃음을 내보이며 유리를 맞이했다.

문을, 열어줬다.

“루, 루비아……”

“으응, 미안해. 나 깨우는 소리 전혀 못 들었어. 어제… 좀 피곤했거든. 오랜만에 푹 자서 그런지 되게 개운하다. …아, 맞아. 오늘부터 시험 기간이었지? 아, 아. 나 뭐 하는 거지. 이러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너무 많이 자버렸어…!”

그런 주제에 눈물자국은 촉촉한 채 그대로고, 척 보기에도 급하게 닦은 티가 나서.

본인도 알겠지만, 너무나 슬픈 얼굴을 하고서 어설픈 연기를 하는 게 정말로…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

“루비아.”

“으, 응? 혹시 같이 공부하러 가자고 하는 거라면, 잠깐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준비하고 나올 테니까……”

“루비아.”

“……”

그런 거 못 봐주겠다는 듯, 장단을 맞춰줄 생각도 없이 유리는 딱딱하게 굳힌 목소리를 내뱉는다.

“방에 들어가도, 되는 거지?”

“……”

그로부터 십 초쯤.

“응, 들어와.”

웃음을 유지한 루비아는 등을 돌린 뒤 문을 활짝 열었고, 유리는 실례한단 말도 없이 익숙한 내부를 향해 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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