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 시험 (5)
* * *
#11
밤바람은 차갑지만, 몸은 전혀 춥지 않다.
레이린 디자이너의 카디건 덕분이다.
사이즈는 그렇게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다. 딱 내 신체에 맞춤형으로 제작되었다는 느낌.
딱히 어느 정도 크기의 옷을 입는지 선배한테 알려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틈만 나면 내 몸 여기저기를 만져댔던 이유가 아무래도 사이즈를 대충 가늠하려고…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다.
이런 정성 가득한 고가의 선물을 받아놓고 아예 입지도 않고 옷장 한구석에 방치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당분간은 레이린 선배의 성의를 봐서 보여주기식으로라도 입고 다니자는 생각을 했다.
뭐… 가까이서 살펴보지 않는 이상 레이린 선배의 것과 완전히 같은 옷이라 보기도 힘들고.
괜찮겠지.
“…음?”
밖에 오래 머무를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는 것보다 밖에서 정처 없이 걷는 게 더 생각을 비우기에 좋았으니까.
다들 건물 안에서 시험 공부를 하는 건지, 인적은 평소보다도 더 드물다. 적어도 지금 내 시야에는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랬는데.
…누군가, 날 쳐다보고 있다.
“!”
왠지 오싹한 느낌에 황급히 뒤를 돌아보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물을 뿜지 않는 분수대가 공터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을 뿐.
느슨했던 정신이 대번에 꽉 조인다.
심장이 잠시 맥동했다가, 곧 가라앉는다.
눈빛은 차츰 침잠한다.
그로부터 침착하게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아도, 결국 날 쳐다보던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착각했나?”
속으로 말하지 않고 입밖에 내뱉었다.
일부러 그런 거다. 이상할 정도로 싸늘하게 조용한 주변의 분위기가, 어쩐지 무섭게만 느껴졌으니까.
나 참, 무슨 번개에 쪼는 어린애도 아니고. 한밤중에 잠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고 해서 지레 겁을 먹다니.
게다가 여긴 프론티어잖아.
대륙 어디보다 안전한 요새나 다름이……
아.
“……악마.”
그 순간.
“!”
이번에는 내 등줄기를 누군가 직접 쿡 찔렀다고 생각될 만큼의 소름 끼치는 감각이, 삽시간에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누구야!”
본능적으로 큰 목소리가 발사됐다.
휙, 휙.
눈을 크게 뜨고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아무런 발견조차 하지 못했다.
……뭐지, 진짜로?
나디엘리 때의 사건을 생각하며 상념에 빠지던 새, 내 착각이라 치부하고 넘기려던 시선이 한층 더 강렬해져서 날 엄습해왔다.
그 또한 기우였을까.
결국, 제대로 된 공포심을 느끼기도 전에 허무히 사라져 버렸다.
몸이 피곤해서 그런 건가.
별 이상한 경험을 다 하겠네.
산책은 이쯤 하고 슬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또 이상한 일에 엮일까봐 괜히 피하는 건 아니고. 여기서 더 해봤자 딱히 의미가 없지 않을까 싶은……
“어?”
그때.
막 등을 돌리려던 내 시야 끄트머리에서, 누군가의 희끄무레한 인영을 기어코 발견했다.
일순 쭈뼛하고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지만, 침착하게 시선을 위로 올려, 나는 인영이 존재하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내 정면에 우뚝 선, 고풍스러운 양식의 건물.
3동, 거기서 옥상.
고개를 반쯤 위로 꺾은 내 눈동자에 상(?)이 맺힌다. 방금까지 날 쳐다보던 사람으로 추정되는 실루엣이 머리칼을 휘날리며 서 있었다.
한층 강화된 안력은 그 정체를 정확히 꿰뚫고.
나는 이내 눈을 낮게 가늘이다가, 크게 떴으며.
“……뮤?”
그 이름을, 나지막이 입에 담았다.
#12
보름달이 환하게 뜬 밤.
옥상의 난간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하염없이 먼 곳을 바라보던 소녀를 발견한 내가, 순간 멍청한 목소리를 흘린 것도 잠시.
‘……날 보던 게 아니었나?’
뮤는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내가 자길 보는 순간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린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늦은 시간에, 왜 저기에 뮤가 있는가.
뮤는 저기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동안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었는데,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던 건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점차 몰려들었다.
─휘이이이……
찬바람이 나부낀다.
그에 맞추어 뮤의 머리칼도 사뿐하게 휘날렸다.
환한 달빛을 내리받으며 어스름을 얼굴의 옆면에 품고는, 독보적인 아름다움을 늦은 밤의 신비로움으로 감춰버린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오직 뮤와 나만이 있다.
나는 뮤를 보고 있어도, 뮤는 나를 보지 않는다.
그저 도시의 전경을 자줏빛 눈동자 속에 담을 뿐.
내가 있을 아래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자세를 고치는 일도 없이 저 어둠 속 너머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자칫 감성에 젖은 이의 궁상으로 보일 수도 있는 모습이지만, 뮤는 그리 어설픈 느낌 따위를 완벽하게 배제하고 있었다.
보는 이의 넋을 놓게 만들 정도로 치명적이며, 오로지 자신 이외의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니……
그녀에게 동화되어 몰입할 수밖에 없다.
예전의 뮤는 저런 식의 얼음처럼 싸늘한 아름다움을 가지지 못했다. 이따금 사색에 빠지는 일도 잦았긴 했으나, 내가 그쪽을 돌아볼 때면 언제나 장난스러운 웃음을 곧바로 지어주곤 했으니까.
그러니, 지금 뮤의 모습은 나로선 생소하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 착각하게 될 정도로.
참 이상한 기분이었다.
일전에도 쉽게 종잡을 수 없는 인물상이긴 했지만, 재회한 이후로는 어쩐지 더욱더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 같아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게 되었다.
바로 지금처럼.
……
‘돌아갈까.’
혹시라도 나를 발견하는 순간, 이유 있는 사색에 방해가 될 거다. 그러기 전에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좋아 보였다.
나만 복잡한 게 아니었으니까.
뮤도.
그리고 루비아도.
저마다의 이유로 생각이 많을 거다.
방아쇠는 이미 당겨졌고, 남은 건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결코 약하지 않은 그녀들이 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 봐야 알 수 있을 터다.
등을 돌리기 전 마지막으로 시야에 담은 뮤의 모습은, 방금 전의 자세로부터 미동도 없는 채였다.
아까 조금 큰 소리를 내긴 했었는데.
그때 날 발견하지 못했던 걸까.
주변의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은 생각에 빠진 걸까. 뮤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아무런 생각도 하고 있지 않는 걸까.
‘내가 뭐라고.’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뒤꿈치를 반대로 돌리려던 때.
“…아.”
문득 아래를 향한 뮤의 눈동자와 내 눈이.
일직선으로 마주쳤다.
#13
라고 느꼈던 찰나에, 나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건만.
뮤가 날 내려다보려던 순간, 난간에 팔을 걸치고 있던 그녀의 옆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폴짝 뛰어올랐다.
뮤가 제 옆을 돌아본다. 곧이어 누군가를 향해 무어라 입을 달싹인다. 차갑도록 무표정했던 얼굴이 조금 언짢은 듯한 낯빛을 띤다.
조금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은데, 누군가의 모습은 정수리만 보일 정도라서 정확한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다.
아무튼.
혼자는 아니었던 건가.
…이 늦은 시간에, 누구랑?
뮤가 에픽 클래스에서 다른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징글징글하게 달라붙는 녀석이 한 명 있다면 있었지만…… 내 우연한 생각은 자연스레 그쪽으로 기울었다.
사샤인가?
그러고 보니 머리가 하늘색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째서 뮤가 사샤랑 같이 3동 옥상에 있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친구끼리 친하게 지낼 수 있다면 뭐든 좋은 거 아니겠나.
비록 사샤로 인해 뮤의 사색은 와장창 깨져버린 것 같았으나, 가끔은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것도 필요하니까.
지금의 뮤한테는 오히려 사샤 같은 친구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다. 가만 놔두면 저렇게 축 처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러니까 내가 뭐라고.’
아까부터 괜히 뮤 걱정만 하는 것 같은데.
잊으면 안 된다.
…뮤를 저런 상황에 빠뜨린 건, 나라는 사실을.
여하튼, 다행이라면 다행인 건지.
뮤는 결국 날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돌아가자, 라고 생각했다.
“……”
─끼이이익.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3동의 문을 열고 있었다.
뮤 혼자였다면 몰라도.
사샤가 있으니까.
가급적 편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가장해서, 그동안 얼굴을 맞댄 적이 없던 뮤의 반응을 살피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내 걱정이 부디 쓸데없길.
…뮤가, 조금은 나를 싫어하게 되었길.
그리 속으로 읊조리며, 건물 내부로 들어가 승강기가 아닌 계단이 있는 비상문을 향해 걸어갔다.
#14
옥상의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당연하다. 뮤랑 사샤가 열고 들어갔을 테니까.
기감을 활성화시킨 채 문에 바짝 귀를 대어보니, 저 밖에서 자그마한 말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럼, 이제……
‘여기서 뭐해, 너희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냥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옥상에 있는 너희 모습을 발견해서, 뭐 하고 있나 궁금했단 식으로. 더불어 거짓 하나 없는 진실이기도 했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긴장을 하나.
옥상 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한동안 침만 삼키고 있다가, 결국 마지 못해서 확 잡고 내려버렸다.
그대로, 밀어젖힌다.
끼이익.
─솔직히, 사샤는 별로 자신없……?
─……
문을 열 때 약간의 저항감이 느껴졌다.
열린 틈새로 찬바람이 들어오면서, 내 카디건 끝자락을 펄럭였다.
넓게 펼쳐진 옥상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이쪽을 돌아본 둘.
몸을 살짝 틀고 눈길만 힐긋 여기로 준 사람과, 양갈래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지 않게 자기 손으로 꽉 붙잡은 사람을 향해서, 방금까지 입속에서 굴려대던 말을 조심스레 꺼낸다.
“여기서 뭐해, 너희들?”
“에……”
“……”
옥상 문을 닫고, 완전히 밖으로 나온다.
“지나가다 보이길래. 시간도 늦었는데 건물 옥상 같은 곳에서 둘이 뭐 하고 있었나 싶어서.”
“아, 그게에……”
“……”
사샤는 나쁜 장난을 치다가 어른에게 딱 걸린 어린아이처럼 굳어버린 채로, 자리에 콕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반면, 뮤는.
날 봐도 딱히 큰 표정 변화 없이, 처음에 잠깐 눈썹을 치켜는 듯하다가 다시금 낮게 내리깔 뿐이었다.
“벼, 별거 아니었어! 그냥 사샤도 지나가다 봤을 뿐이거든! 사실 사샤가 뭘 잘못한 건 아닌데! 딱히 놀라서 잠깐 겁먹었던 건 아니고! 응!”
“노, 놀라게 했구나……”
왠지 미안해라.
“그래서, 그냥 단순히 얘기 중이었던 거야?”
“어, 뭐 그런 셈인데……”
“……”
사샤와 달리 뮤는 대답이 없다.
뭔가 나와 마주치는 순간 놀라거나, 아니면 시선을 피하거나. 무언가 행동을 취할 줄 알았는데, 그냥 말없이 이쪽을 보고 있을 뿐이다.
도시 너머의 풍경을 보던 눈빛 그대로.
그러니까, 별로 생각이 없는 듯한 눈으로.
저래서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대화를 나눠봐야 하려나.
“춥지 않아? 찬바람 불던데. 여기 오래 있으면 감기 걸리겠다. 외투 입었는데도 좀 춥다 난.”
전혀 춥지 않았지만 오슬오슬한 듯 어깨를 쓸면서 천천히 사샤와 뮤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중간 지점을 막 넘어섰을 때.
“…갈래.”
“어?”
사샤의 어벙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걸어가다 말고 자리에서 멈칫했으며, 옥상 난간으로부터 몸을 뗀 뮤는 일정한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어, 어디 가! 야! 잠깐만! 사샤가 너한테 부탁할 거 있었는… 데……”
내 쪽으로 빠르게 걸어오는 뮤를 쫓아서 사샤가 무어라 크게 외쳐보지만, 뮤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무심히 걷기 시작했다.
“아, 저기. 뮤……”
“……”
갑자기 떠나려고 하는 뮤에게 말을 건다.
손을 살짝 들며 뮤를 바라봤으나.
─터벅, 터벅.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흑단빛 머리칼을 들썩이며 내 어깨로부터 한 뼘 정도 떨어진 거리를 스치듯 지나친다.
─탁.
아주 짧은 순간.
뮤의 발걸음이 멈추고.
“…이럴 거면, 놓아달란 말을 하지 말던가.”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내 귀에 똑똑히 닿았다.
문이 열렸다 닫히자,
쿵 하는 소리가 울린다.
“……”
“……”
접근을 일제히 차단하는 분위기에 미처 뮤의 뒤를 쫓지 못한 사샤와, 옥상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내가 서로 마주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