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37화 (137/201)

〈 137화 〉 시험 (6)

* * *

#15

“어이, 친구. 아침부터 왜 이렇게 죽상이야?”

“…아. 가브리엘인가.”

기숙사 방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가브리엘이 내게 선뜻 인사를 건네왔다.

“늦게까지 공부했냐? 피곤해 보이는구만.”

언제나처럼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실눈을 가늘게 뜨고, 킬킬거리는 경박한 인상의 녹빛 머리 남자.

모든 것이 새하얗게 뒤덮인 북부 출신이자, 고대 바이킹 부족의 후예… 순수 격투 무술이라든가 싸움질에는 도가 튼 녀석.

“그야 당연하지. 그동안 뒤처졌던 만큼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따라갈 수 없으니까.”

“너도 참 열심히 사네……”

“이게 일반적인 거야. 어차피 자긴 글렀다면서 빨리 해치우고 놀 생각만 하는 네가 이상한 거라는 생각은 안 드냐?”

“뭐 어때, 이제 고작 1학년 1학기인데. 올라갈수록 더 빡세질 테니까 놀 수 있을 때 놀아두는 게 좋잖아?”

“시험 기간에만 조금 집중한 다음 끝나면 노는 게 그리 어렵더냐. 참을성 없는 녀석 같으니.”

지금 성적 안 챙기면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레이린 선배 같은 사람이 되어버릴 수도…… 이건 경우가 좀 다른가.

내 힐난 섞인 눈빛에 가브리엘은 반박한다.

“야, 나도 조금 정도는 공부하긴 했다? 머리 싸잡고 하다가 도저히 못해먹겠어서 그냥 때려친 것뿐이지.”

“그래, 그래……”

“어차피 전공은 대부분 실기로 보잖냐. 오늘 너랑 같이 시험 치는 게 검술이랑 초감각특론이었나?”

“응.”

오늘은 목요일.

제국 문학과 관련된 교양 과목과, 마법 전공 시험을 전부 끝낸 시점이다.

전자는 화요일에 치렀고, 후자는 수요일.

시험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글쎄…… 내 직감으로 봤을 땐 아무래도 원하는 만큼의 성적은 무리였던 것 같다고 할까.

쉽게 말해 조졌단 소리다.

그래서 가브리엘이 말했듯 내 얼굴이 죽상인가.

그것도 좀 다르다.

아무렴, 화요일에 치러진 교양 과목 시험에선……

“역시, 검술은 걔가 1등 먹겠지?”

“……음?”

자연스레 로비로 향하는 내 발걸음 옆으로, 가브리엘이 끼어들듯 자리하여 내게 말을 걸어온다.

“1번 있잖아. 뮤. 네 친구.”

“……아. 음.”

심장을 쿡쿡 찔러오는 그 단어에, 무심코 반응해 버린다.

“항상 볼 때마다 놀랍다니까, 그 녀석은. 너 없을 때 교수님이 시켜서 잠깐 대련한 적이 있었는데, 진짜 아무 손도 못 써보고 눈 깜짝할 새에 제압당했어. 특히 그때는 평소보다도 엄청 날이 서 있었던지라…… 원래도 그랬지만 절대 봐주질 않더라고. 솔직히 지릴 뻔했다.”

“확실히 검에 있어선 인정사정없는 편이지.”

“내 가호로도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아니, 그냥 너랑 대련했을 때처럼 가호 따위 아무 소용도 없어진 듯한 기분이었지. 나도 조금 잘 싸우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재능의 격차라는 걸 느꼈달까. 굳이 검뿐만이 아니라 뭘로도 그 녀석은 못 이길 것 같더라. 평생.”

“여러 방면으로 재능 있었으니까 말이지.”

만일 활시위를 잡았다면 신궁이 됐을 거고, 마법을 연마했다면 대마법사가 되었을 거다. 딱히 검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단 사실 말고도 마법과 검술의 극의는 추구해야만 하는 방향이 다르기에, 둘은 결국 양립할 수 없었겠지만…… 왠지 뮤라면 가능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어떠냐?”

“뭐가?”

“이번 검술 시험 결과. 내기할래? 누구 등수가 더 높은지. 내기에서 진 사람은 가볍게 50만 라트 정도 내놓는 걸로.“

“…그게 정말 가벼운 액수인지는 둘째치고, 난 딱히 내기할 생각도 이길 자신도 없어. 애초에 2주 쉰 사람을 상대로 등쳐먹으려는 건 대체 무슨 심보냐.”

“에이, 그렇게 말해도 사실 에지오 너, 그러기 전까지는 나랑 거의 비등비등했지 않아? 교수한테 상당히 좋은 평가도 받았고.”

“그거야 그때 얘기지. 그동안 네가 나 없을 때 쉬고만 있었던 건 아니잖아? 아벨 교수님, 정말 교육자로서 대단하신 분이니까, 수업 한 번 빠지는 게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너도 알잖냐.”

“뭐, 그래도 대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 재미로 한 번쯤은……”

“안 해. 절대로. 다른 사람 알아봐.”

“흐음…… 어쩔 수 없네. 아쉽구만.”

전혀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지만서도.

“그래서­.”

“이번엔 또 뭐야.”

“어떻게, 지금까지 있었던 시험 결과는?”

“……아직 안 나왔어. 나도 몰라.”

“그래도 느낌상으론 뭐가 있었을 거 아냐. 아무래도 재수강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라든지, 이거 정말 제대로 큰일 났다는 생각이라든지.”

“그냥 내가 망했으면 좋겠지, 아주?”

“에이, 설마. 순수한 호기심이야.”

그런 거 아니라며 킬킬거리는 녀석의 면상을 한 대 쳐주고 싶은 마음을 고이 접어두고, 기숙사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별로 좋은 느낌은 안 들었어. 벼락치기로는 한계가 있더라. 솔직하게 말하면 A는커녕 B도 못 받을 것 같다.”

비단 공부량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내가 도통 시험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든 외부적 요인이 아예 없었다고도 말은 못 하겠지만……

역시 그런 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정직한 과정과, 정직한 결과만이 남을 뿐.

문제를 푼 건지 안 푼 건지도 모를 만큼 빠른 속도로 답안지를 제출하고 나서, 곧바로 강의실을 떠난 어느 누구 때문에 괜히 문제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됐다는 것도, 전부 다 변명이나 다름이 없는 말이다.

처음부터 제대로 집중했다면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문제를 풀 수 있었을 테니까.

결국 시험에 곧잘 몰입하지 못한 내 잘못이다.

“역시 그런가……”

“됐고, 넌 어땠는데?”

결국 다사다난했던 화요일을 넘어서서 수요일에 있었던 마법 전공 시험에서도, 또 다른 누구의 존재 때문에 다소 집중력이 흐트러졌단 생각은…… 역시 접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나?… 글쎄, 낙제점만 안 받으면 된 거 아닐까?”

“물어본 내 잘못이다. 미안.”

나와 달리 아무런 생각도 없이 유쾌하게 웃고 있을 뿐인 가브리엘을 옆에 두고, 나는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의 나도 이 녀석처럼 머리를 텅 비운 채 웃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튼 난 간다. 이제 슬슬 트램 타고 나가야 해서.”

“어, 그러냐? 시험 잘 봐라.”

“그래, 이따 보자.”

아직 목요일의 첫 시험까지는 시간이 좀 남긴 했지만, 그렇다고 여유를 부리면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때 교재를 한 번 더 정독하는 편이 좋을 거다.

가방 속에서 「마나통제학 I」 강의에 사용되는 교재를 꺼내고, 그것을 펼친 뒤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기숙사 부지를 가로지른다.

건너건너 이번 시험과 관련된 공지사항을 전달받은 바로는, 아마 필기 시험 범위가 대충 이쯤에서 이쯤이었……

“……어라.”

책을 펼친 상태 그대로,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나,

지금 뭔가 잊고 있지 않나……?

#16

그로부터 한 시간쯤 뒤.

“어, 설마…… 에지오, 너야?”

“마, 맞는 것 같은데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강의실 밖에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 공부를 하고 있는데, 시험 시작 10분 전쯤 다가온 두 개의 인영이 나를 향해 무어라 말을 걸어왔다.

몇 번의 만남이 있었기에,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진 음성들. 점차 다가오는 인기척에 나는 흠칫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맞네, 맞잖아! 에지오네! 야, 너, 지금까지 뭘 하다가 이제 나타난 거야!”

“……아, 알프리스.”

저번 조별과제에서 상당히 수고를 해주었던 조원, 알프리스 폰 체블루프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내게 뛰어왔다.

그 옆에는 레니가 보인다. 입을 손으로 가린 채로 잠시 자리에 멈춰 있다가, 알프리스를 따라서 나를 향해 천천히 다가온다.

“오, 오랜만이네…둘 다.”

“확실히 오랜만이긴 하지.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아무튼 널 다시 봐서 반갑긴 한데 말야……”

특별히 구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유들하게 넘길 것 같지도 않은 얼굴로 알프리스는 결국 내가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시켜준다.

“수업에도 결석하고, 약속에는 결국 참석도 안 하고…… 모임을 주최한 건 너였으면서 우리 둘만 남겨둔 이유가 뭐였던 거야, 대체?”

“아, 아하하……”

조별과제에서 고생한 조원들을 위해 밥이나 한 끼 먹자고 불렀던 주말의 약속. 결국 약속했던 그 날에는 주최자인 내가 참석하지 못했다.

“미안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거든.”

“에지오 씨가 안 오셔서 저희, 얼마나 어색했는지 아세요……? 약속이 있던 주의 강의에 결석하셨을 때부터 살짝 의심이 들긴 했는데…… 정말 안 오실 줄은 몰랐단 말이에요.”

레니도 입을 삐죽이며 툴툴거렸다.

헥토르도 유스필도 참석하지 않았을 터인 모임이니만큼, 레니와 알프리스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야 했을 거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시길래, 에지오 씨가 함부로 약속을 파토낼 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걸 저희도 알고 있으니까,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긴 했지만…… 그래도 곤란했다구요. 정말로 어색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런 것치곤 지금 꽤 친해 보이는데, 너희들?”

“에지오 씨. 지금 그런 농담을 할 때가 아니잖아요.”

“미, 미안……”

레니 이 녀석,

언제 이렇게 기세가 등등해졌지……

“사정은 제대로 설명해주셔야 해요?”

“…그럼, 물론이지.”

이리 묻는 걸 보아하면, 내 실종에 관한 소식이 에픽 클래스 외부로까지 퍼지진 않은 모양이다. 내가 없어진 뒤로 딱히 에픽 클래스를 찾아온 것 같지도 않고. 하긴,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진짜 미안했어. 혹시라도 그날 쓴 비용 같은 게 있으면 나한테 전부 청구해줘. 밥 사기로 한 입장에서 약속도 멋대로 깨버리고…… 면목이 없네.”

“아, 그렇게까지 할 건 아냐. 너한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던 걸 테니까. 그런 이야기는 네 말을 전부 듣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맞아요. 에지오 씨가 이유 없이 무단 결석 같은 걸 할 리가 없잖아요. 몇 번 안 봤지만 정말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걸요.”

결국 날 질타하는 분위기로 이어질 뻔했던 대화도, 그들이 날 꽤나 신뢰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대화로 변질되어 순탄히 흘러갔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아, 음……”

어느덧 시험 시작이 코앞으로 다가왔긴 했지만, 내가 그들에게 해줄 말은 그렇게 긴 이야기도 아니었던 까닭에.

시험 시작 이전 정말로 짧은 시간을 투자해서, 진실과 거짓이 반쯤 뒤섞인 이야기를 빠르게 늘어놓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매우 쉽게 납득해 주었다.

뿐만이 아니라 내 몸 상태를 걱정하며 이것저것 물어왔지만, 이제 정말로 시험이 시작할 시간이라 모두 강의실 내부로 서둘러 입장했다.

─에­ 제한 시간은 50분이고, 답안지를 완성한 학생은 먼저 제출하고 퇴실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팔락, 팔락…

배부된 문제지와 답안지에 이상이 없는지 검토하고, 교수의 사인에 맞추어 책상에 놓인 종이를 빠르게 눈으로 훑는다.

사각, 사각…

적막에 휘감긴 강의실 안에서,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종이에 적힌 문제를 하나씩 풀어나가기 시작한다.

정신을 한 점에 모아 그대로 고정시킨다.

집중해야 한다. 집중.

어제 오늘 전혀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해도, 어떻게든 집중해야만 한다.

─ …이럴 거면, 놓아달란 말을 하지 말던가.

곧 있을 검술 시험에서 다시 마주치게 될 사람의 얼굴이 갑작스레 떠올라도, 절대로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일이 있어선 안 된다.

평생, 나를 따라다닐 것 같던 사람이.

아무리 내쳐도 개의치 않고 내 옆에 거리낌 없이 다가오던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마주 볼 때는 한없이 차갑기만 했던 얼굴을, 내 앞에서는 비로소 환한 미소로 맞이해주던 그 사람이.

…내가.

나 때문에.

내가, 그리 원해서.

내게 더 이상 다가오지 않고.

날 보며 더 이상 환히 웃어주지 않고.

그녀에게 있어 특별하지 않은 다른 이들을 대하는 것과 같이, 일관되게 싸늘한 태도로 내 존재를 무시하며 완벽히 회피해 버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바랐던 대로.

내게서 점차 멀어져 가려고 하는 지금 이 상황에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뜨며 펜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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