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 시험 (9)
* * *
#24
“정말 괜찮겠습니까? 의무실은 24시간 열려 있으니 이대로 더 누워 있다 가셔도……”
“아닙니다. 감사했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예에, 조심히 들어가시길.”
당연하지만 여기도 사람은 있었다.
몇 번 스트레칭을 거듭한 뒤 머리가 더 이상 핑 돌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싶었을 때 병상에서 발을 빼고 나왔다.
역시 참으로 사기적인 몸뚱이다. 당장 쓰러졌을 때만 해도 이틀 내지 하루 정도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제 컨디션을 되찾다니. 무척 다행인 일이지만 한편으론 신기한 기분도 든다. 슬슬 적응할 법도 한데 여전히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끄응.”
목을 뿌득거리며 건물을 나서자, 정면에 학생회관이 보였다.
밖은 여전히 어둡고 깜깜하다. 조금은 납작해진 달이 누르스름한 빛을 지면에 흩뿌리고 있었다. 가스등 곁으로 지나는 선배들의 모습. 시험이 전부 끝난 모양인지 발걸음이 언뜻 가벼워 보였다.
걸어가면서 날 발견한 선배들과 잠시 인사를 나눈 뒤, 곧바로 걸음을 3동 쪽으로 옮겼다. 길을 지나서 기숙사로 향할 예정이었다.
거기서 먼저 옷 좀 갈아입고, 오늘치 운동량을 채우기 위해 다시 3동으로 돌아와 체력단련실을 방문해야 한다.
하루라도 루틴을 거르면 기분이 영 찜찜하단 말이지. 다음 날 아침을 전혀 상쾌하지 못한 기분으로 맞이하게 된달까. 안 그래도 무려 2주라는 공백이 또 생겨서 근육이 녹지는 않았을까 매우 걱정이 되었던 참인데.
조금은 뻐근한 팔다리를 주무르면서 걸음을 계속했다. 나중에 날 의무실까지 옮겨준 가브리엘이나 스텔라를 보게 되면 고맙단 인사라도 좀 전해줘야 할 텐데.
“하아.”
이게 무슨 꼴이냐.
세상에 누가 잠도 자지 않고 날밤을 새면서 시험을 치는가. 무조건적으로 악영향이 생길 수밖에 없잖나.
지금 내 기초 체력이 상당한 수준이긴 하다만, 평범하게 날을 지새우는 거라면 모를까 종일 공부에 훈련에 운동에…… 몸이 진즉 무너지지 않은 게 용했다.
검술 시험이 끝나고 난 직후에 쓰러져서 다행이었지. 그 때문에 마지막 시험 하나는 놓치게 되긴 했지만……
전부 내 업보지, 뭘 어쩌겠나.
한숨을 삼키며 어깨를 늘어뜨리던 와중,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학생회관의 전경을 보면서 잠시 생각을 했다.
‘아직 계시려나, 레이린 선배.’
곧 있을 실습에 대비해서 선배 되는 사람의 조언을 좀 들어볼까 하다가, 별로 소용이 없겠다 싶어 고개를 내저었다.
실습의 내용은 매년 달라지니까. 두 학년 위 선배인 레이린마저도 내게 알려줄 수 있는 건 그닥 많지 않을 것이다. 뭣보다 시간도 한참 늦었고. 그렇게까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찾아갔을 때 작업 중이었거나 자고 있었으면 그건 그거대로 민폐이자 실례고. 그만두는 게 나아 보였다.
게다가, 제 스스로 학업을 내려놓았다고 말하는 레이린 쪽보다는 「엑소더스」서클의 선배들이 더 유용한 정보를 건네줄 가능성이 높…… 이런 생각은 레이린 선배한테 실례인가. 아니, 본인이 그렇게 말했는데 뭐 어때.
─우우우웅.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면서 레이린의 선물이었던 와인색 카디건을 떠올렸다. 원래 옷가지를 선물 받으면 착용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마땅한 예의일 텐데. 밤 산책을 나서며 입은 적은 있어도, 지금까지 레이린의 앞에서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보는 편이 옳은가.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며 1층에 도착했다.
희미한 등이 켜진 복도를 뚜벅거리며 거닐고, 건물 밖으로 나서기 전 잠시 1학년 전용 연무장을 둘러보았다.
누군가 있긴 했지만, 검은색 머리는 아니었다.
그럼 자연스레 내 관심도 사라진다.
—툭, 투둑. 툭.
바깥 공기는 차가웠다.
그리고 촉촉했다.
분명 여기 처음 들어올 때만 해도 하늘은 그저 거멓기만 했는데, 어느샌가 가느다란 빗줄기를 조금씩 흘려대고 있었다.
문을 연 채로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알다시피 1동, 2동, 그리고 3동은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 형태였다. 그러니까 밖에 비가 내리면 그냥 연결된 통로를 지나 기숙사로 향하면 된다. 다시 말해서 굳이 비를 맞을 필요가 없었다.
“……”
어차피 씻을 건데, 뭐.
—찰박.
봄비는 차가웠다.
#25
“……이게 뭐지?”
어깨와 머리가 조금 젖은 상태로 들어선 기숙사.
아무도 없는 로비를 지나쳐 내 방으로 향하는데, 문 앞에 놓여 있는 의문의 상자를 보곤 가벼운 의문을 표했다.
상자는 총 두 개였다. 둘 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문양이 장식처럼 새겨져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런 건 없었는데. 그새 누가 놓고 간 건가?
─스윽.
의문을 삼키며 조심스레 상자를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였다.
“흐음.”
상자 위에 붙어 있던 메시지 카드를 떼어낸 다음 뒤집어 보았다.
[ 에지오 크라닐 학생에게 ]
그 이상도 그 이하의 말도 없었다.
수취인이 나라는 사실만을 가리키고 있을 뿐.
오밀조밀 뜯어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놓고만 간 건가, 그 메이드.’
물건을 옆구리에 낀 채 머리를 가볍게 털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다음 바닥에 상자들을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옷을 벗고 가볍게 샤워를 마친 뒤, 머리를 대충 말리고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서 상자를 들어 올렸다.
이 상자의 정체가 뭔지 알 것 같다.
지금 얼마 쓰지도 못한 보상금과 더불어, 제4학구에서 벌어진 사건의 피해 보상이란 명목으로 내게 지급되는 물건일 터다.
저번에 받았던 상자보다는 크기가 확실히 크다. 게다가 두 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진 모르겠지만, 왠지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의외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랄까.
“보자……”
뭘 준비했을까.
먼저 하나의 상자를 들어서 개봉해 보았다.
─팔락.
상자를 여는 순간, 그 안에 들어 있던 메시지 카드가 팔랑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그것을 줍고 난 뒤에 적힌 글귀를 들여다 보니.
프론티어 본부장씩이나 되는 인물의 인장이 날인되어 있고, 지난 일에 대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는 내용과 함께, 동봉된 물건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 이지스의 방패(Aegis’s shield) ]
[ 측정 불가 위계의 절대 수호 마법이 각인된 아티팩트입니다. 신체 부위 어디든 착용하면 3회에 한해 치명적인 일격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충전된 마법이 모두 소진되면 본 아티팩트는 파괴됩니다. ]
[ ※ 정신 계열 마법에도 저항할 수 있습니다. ]
그것은 금속으로 만들어진 팔찌였다.
그렇게까지 우아하거나 복잡한 디자인까지는 아니었지만, 이 물건이 아티팩트라는 점에서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아티팩트를 줄 거라곤……”
그냥 우스갯소리로 넘기고 말았던 생각인데.
게다가 이거, 절대 질 낮은 아티팩트가 아니었다. 딱 봐도 안다. 묵직함은 둘째치고 팔찌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엄청난 수준이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착용자의 목숨을 보호해주는 아티팩트라니. 평범한 실드가 내장되어 있다면 모를까, 측정 불가 위계의 수호 마법이라면 대체 어느 정도의 성능을 자랑하는 걸까. 나로선 알 수 없다.
좌우간 일전의 그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내게 맞춤형으로 주어진 물건임은 분명했다.
사건의 실체를 알고 있는 본부라면 어느 정도 철저한 기준을 엄수해서 내게 보내준 걸 텐데. 대악마의 공격에도 저항이 가능한 걸까, 이거. 아마 그건 무리일 거라고 생각하긴 해. 녀석들은 정말 차원이 다른 수준의 강자들이니까……
어쨌거나 지금의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안 그래도 이것저것 이상한 일들에 휘말리고 있는 참이었고. 엘레나나 테트라의 말을 보면 결코 쉬운 인생이 될 것 같지도 않고.
게다가, 잘만 이용하면 이거 이번 실습에서도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괜찮네.”
마음에 들었다.
남 줄 것도 아니고 어디 내다 팔 것도 아니었던 까닭에, 순순히 팔찌를 살펴보다가 조심스레 손을 집어넣어 손목에 착용했다.
─쑤욱.
“…음?”
그 순간.
—지이이잉.
일전 아카샤의 별에서 테트라에게 받았던 글레이프니르처럼, 아티팩트는 크기가 줄어들어 내 손목에 딱 맞는 사이즈로 자리 잡았다.
“오, 뭐야.”
신기한 기분에 팔을 흔들어 보니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이러면 실수로 빠지거나 잃어버릴 걱정은 하나도 없겠는데.
좋은 게 좋은 거지.
나는 씩 웃어 보였다.
‘이건 이제 됐고.’
메시지 카드를 모아 상자 안에 고이 보관한 뒤, 그것을 책상 아래 구석에 놓고는 마지막으로 하나 남았던 상자를 들어 올렸다.
“흐음.”
방금 전 상자보다 크기는 더 컸다. 무게도 좀 더 무겁고. 혹시나 안에 있는 물건이 파손될까 조심스레 다루면서 상자를 천천히 개봉했다.
─똑, 똑.
“…응?”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26
─똑, 똑.
내 방 문을 누군가 노크하고 있었다.
워낙 조용했던 터라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고, 나는 상자를 열다 말고 그것을 침대에 도로 내려놓은 다음 몸을 일으켰다.
“아, 옷……”
샤워를 막 마치고 나와서 그런지 현재 나는 속옷 차림이었다. 어차피 남자 기숙사인 만큼 같은 남성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왠지 좀 그렇잖나.
—똑, 똑, 똑.
“네, 네. 나갑니다!”
옷가지를 대충 주워 입은 내가 문으로 걸어갔다.
‘누구야, 이 시간에?’
지금은 거의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누군지 몰라도 이 시간에 찾아오는 건 조금 민폐가 아닐까. 내가 깨어 있어서 다행이지, 침대 위에서 자고 있었으면 영락없이 놀라 일어나야 했을 거다. 상당히 급한 용무가 아니라면 조금 그럴 것 같은데.
끼이이익.
“네, 누구세……?”
문틈으로 고개를 쑥 내미니.
“에지오 크라닐, 맞나?”
“어……”
어딘가 익숙한 얼굴.
그렇지만 정작 몇 번 대화는 나눠보지도 못해서, 서로 일면식 정도만 있는 동급생이 내 앞에 서 있었다.
“맞는데, 너는……”
“알드리에 캄비온이다.”
“아, 그래. 알고 있어. 알드리에. 무슨 일이야?”
다소 당황스러웠다. 가브리엘도 아니고 알드리에라니. 얘가 날 개인적으로 찾아올 이유가 있었나? 그것도 이런 늦은 시간에……
“혹시, 지금 시간 여유가 있나?”
“그, 글쎄… 무슨 일인데?”
“음.”
왜, 뭐지. 영문을 모르겠다.
알드리에는 잠시 턱을 어루만지다가.
“밖에서 널 불러달라는 사람이 있다.”
“……날?”
“그래. 늦은 시간에 미안하게 됐어. 여유가 안 된다면 돌아가라고 전해주겠다.”
“아니, 괜찮은데. 그래서 누가 날 불렀다고?”
사복 차림의 알드리에는 로비 쪽을 한 번 돌아본 뒤,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스텔라 데 펠트라인… 이었을 거다.”
“…뭐?”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리 말했다.
스텔라가 나를?
……왜?
나 깨어난 거 알고 안부라고 물으려고 그런 건가? 하지만 굳이 지금? 스텔라의 평소 행실을 보면 그러려고 날 부르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래도 이유가 있으니까 불렀겠지.
“알았어. 잠깐만 기다리라고…… 아니다.”
딱히 상관없나. 옷도 제대로 입었고.
조금 후줄근하긴 해도 잠깐 이야기만 하는 거라면야, 괜찮겠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활짝 열자 알드리에가 내게 넌지시 말했다.
“그 친구는 밖에 나가면 바로 앞에 있을 거다.”
“어, 어. 전해줘서 고맙다. 잘 자고.”
“……그래.”
아무래도 밖에서 스텔라에게 부탁을 받은 뒤 날 찾아온 것 같다. 사전에 동의를 받지 않았으니까 이성 기숙사에 출입할 수 없었을 테지. 받았다고 해도 스텔라 성격으로 당당하게 들어올 수 있을진 의문이지만.
터벅, 터벅.
좌우간 알드리에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고, 나는 문을 닫은 뒤 아직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칼을 털면서 빠르게 로비 밖으로 향했다.
#27
기숙사 밖에 나오자.
알드리에가 말한 대로, 어두컴컴한 풍경 속에 환히 빛나는 백은빛 머리칼의 소녀가 보였다.
“……스텔라?”
비는 어느샌가 그쳐 있었다.
소나기였을까.
“……!”
그러나 스텔라는 조금 축축한 머리카락 끝에서 물기를 뚝뚝 흘리며, 내 목소리에 이쪽을 돌아보곤 눈을 동그랗게 만들더니.
“──에지오!”
“어, 어?”
와락, 하고 달려들었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얘……
“자, 잠깐만. 대체 무슨 일이야?”
“에지오, 나, 나……”
스텔라가 나에게 안겨들었다.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손으로 두 팔로 내 등을 감쌌다.
스텔라는 빗줄기를 맞으며 기숙사로 걸어 들어왔던 나처럼 머리와 몸이 젖어 있는 채였다. 촉촉한 습기와 뒤섞인 스텔라의 체향이 오묘하게 내 후각을 자극시켰다.
“나, 나… 나 있잖아. 나…”
“잠깐만, 진정해. 스텔라.”
“나, 나… 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일단 스텔라의 어깨를 붙잡아 떼어 놓으려는데, 스텔라가 그리 말하며 잘게 몸을 떨었다.
작은 어깨도 그렇고, 몸도 달달 떨리는 채다. 비를 쫄딱 맞아서 추운 탓에 그러는 걸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뭔가 좀 달라 보였다.
불안. 혹은 두려움.
……무엇을?
“뭘 봤다는 거야?”
“별님이, 별님이 보여줬어… 에지오.”
“별님……?”
그 단어에 스치듯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잠시 상념에 잠겨보는데, 스텔라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한참이나 날 붙잡고 같은 말을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너무 생생해서… 당장 널 찾지 않을 수 없었어.”
“그래, 알았어. 그러니까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
“응, 으응… 후우. 하아. 후우우우.”
착한 스텔라는 내 말을 착실히 들어주었다.
부끄러움보다 다른 감정이 더 앞선 건지, 누가 보고 있을지 모르는데도 날 와락 끌어안은 채 어쩐지 파들파들 떨리는 입술을 달싹인다.
“에지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어.”
달리 반문하지는 않았다. 스텔라의 분위기가 워낙 심상치 않았던 까닭이다.
덩달아 시선을 아래로 내려 스텔라의 눈과 일직선으로 마주하고, 목울대를 잠시 꿀꺽이자 내 품속의 스텔라는 입술을 질근 깨물다가
“이번 실습에서, 너는 반드시 빠져야 해.”
더없이 확고한 눈빛으로, 그리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