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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41화 (141/201)

〈 141화 〉 시험 (10)

* * *

#28

─끼이이익.

“기, 기다렸지…?”

수건으로 머리칼에 묻은 물을 짜내며 등장한 스텔라가, 몽실몽실한 수증기와 함께 불그스름해진 얼굴로 내게 말해왔다.

화장실 안에서 물기를 전부 닦고 나오긴 했으나 아직 군데군데가 촉촉해 보인다. 대리석 바닥에 물방울 섞인 발자국이 남았다.

“아냐, 다 씻었어?”

“으, 응……”

스텔라는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급히 할 얘기가 있는데, 비를 맞은 터라 계속 이 추운 밖에 있다간 감기가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라 실내로 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이미 자정이 훌쩍 지나버린 시각. 젖은 몸을 깨끗이 씻을 수 있고, 마음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장소가 마땅히 없었다.

그래서 결국 스텔라는 내 제안에 따라 본인의 방으로 날 이끌었다.

이미 한 번 와본 전적이 있다고 해서 이리 쉽게 들어가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저번 스텔라의 방에서 탈출을 감행했던 루트로 이번에는 잠입을 했던 것이다. 주변에 인적도 드물긴 했으나 혹시 모를 일. 최대한 조심한 채 소리소문없이 테라스 난간을 뛰어넘으며 겨우 스텔라의 방 안에 들어서는 데 성공했다.

“물이라도 한잔 마실래?”

“나야 좋지. 고마워.”

그렇게까지 낯부끄러운 생각이 들진 않았다. 워낙 스텔라의 분위기가 심각했던 것도 있고, 지금은 순수하게 이야기를 나누러 온 것뿐이니까.

“여기.”

“아, 고마워.”

스텔라는 실크 원피스 차림이었다. 원래 자긴 괜찮다고 했지만 내가 급구 부탁해서 씻고 온 것이다. 나 이번에 쓰러진 거 못 봤냐고. 너도 몸 관리 제대로 안 하면 나처럼 된다고. 내 경우에는 탈진이었지만 아무튼 컨디션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푸우우우.”

스텔라가 건네준 물을 받아 마시고 나서, 시원한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자 스텔라는 내가 앉은 침대 끄트머리 옆에 조심스레 착석한 뒤, 힐긋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을 텐데. 몸은 좀 괜찮아?”

“……아, 들었어?”

“으응, 들었다기보단 알아낸 거에 가깝지만……”

“그렇구나. 뭐… 괜찮아. 보다시피 멀쩡해. 푹 자니까 훨씬 낫네. ……아, 그리고 가브리엘이랑 의무실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웠어.”

“고맙기는. 당연한 일이었는걸.”

스텔라는 그리 말한 뒤 검지 손가락을 들었다.

“다음부턴 무리하지 마. 시험도 중요하지만 네 건강이 훨씬 더 중요하니까. 그러다 한번 제대로 망가지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괜찮다니까. 워낙 튼튼해서 이런 걸로 쉽게 몸 상하진 않아. 이번 일도 가벼운 탈진이었을 뿐이고.”

냉수를 한 잔 더 들이켰을 때, 대답이 들려오지 않고 조용해지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뭔가 불만 가득한 얼굴의 스텔라가 있었다.

“……알았어. 앞으론 조심할게.”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됐잖아.”

머쓱함에 목덜미를 매만지고 있는데, 스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달린 화장대 앞으로 이동하여 의자에 폭 앉았다.

“뭐 하려고?”

“피부 관리. 씻었으면 해야 하잖아.”

“……그런가?”

“그런 거야.”

그리고는 앞에 놓인 화장품들을 사용해서 뭘 칙칙 뿌리고, 하얀 크림 같은 걸 콕 찍어낸 뒤 바르고, 톡톡 두드리고, 마사지하듯 얼굴 여기저기를 문지르면서 “으으음.” 같은 소리를 흘렸다.

“예전에는 이런 거 하나도 안 했었는데.”

스텔라의 중얼거림.

“지금도 안 하면 되잖아?”

“안 돼.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것도 있지만, 규칙적인 관리는 정말 중요하다는 걸 매번 느끼고 있거든.”

톡톡톡.

중지와 약지만 사용해서 얼굴을 두드린다.

“에지오 너는 뭐 바르는 거 없어?”

“나? 나는 뭐…… 딱히?”

“진짜?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근데 피부는 말도 안 되게 좋네. 어떻게 나보다 좋은 것 같아.”

“말이 되는 소리를. 안 그래도 요새 통 잠을 못 자서 푸석푸석해진 참인데. 여기 부어오른 데도 몇 군데 있고.”

“그거야 네 말처럼 잠을 못 자서 그렇지. 일반적인 사람들에 비하면 넌 정말 축복받은 거야. 게다가 넌 남자애잖아. 진짜 부럽다니까, 가끔.”

“그런가? ……난 잘 모르겠네. 흐음.”

몸이 바뀌기 전에도 확실히 피부 같은 부분에서 트러블을 겪었던 기억은 별로 없다. 가끔 스트레스가 도를 지나칠 때 빼고는 뭐……

“근데 너도 예전에는 안 했다고 했잖아? 내 기억으론 그때도 딱히 나쁜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엄청 말랑말랑했지 않나?”

“말랑말랑……”

거기서 무슨 포인트에 터진 건지, 잠깐 쿡쿡거리던 스텔라가 거울을 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어릴 때잖아. 애기 때 피부는 다들 좋아.”

“지금은?”

“……사실 기초만 해도 괜찮긴 한데, 습관이 되어버린 것도 있지만 이러는 편이 뭔가 더 착실하게 살고 있는 것 같구. 그래서 본가에 있을 때도 시녀들 도움 안 받고 나 혼자 했어.”

그렇구나. 나는 머리를 주억였다.

“그렇다고 이쪽 너무 보지는 마.”

“응? 왜?”

“……생각해 보니 너한테는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았긴 했는데, 화장 안 한 얼굴 보여주기 싫었단 말야.”

“……아하.”

막 씻고 나온 스텔라는 뭐랄까, 축복 속에서 방금 태어난 은하수의 요정 같은…… 무슨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더없이 신비롭고 순수해 보였다. 그런 감상을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만.

평소의 스텔라가 우아함의 극치였다면, 지금의 스텔라는 한 꺼풀 벗겨진 우아함의 민낯이라고 할까. 솔직하게 말하면 둘 다 각자의 매력이 있고 무엇보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건 어느 쪽이든 불변이었다.

“글쎄, 평소랑 다른 건 잘 모르겠는데.”

“……그건 그거대로 조금 문제가 될 수 있는 발언인 건 알고 있을까?”

거울 저편의 스텔라가 눈을 가늘이며 말했다.

“치, 칭찬이었는데…… 둘 다 예쁘다고.”

“흐응.”

내 입장에선 조금 낯부끄러운 말에 해당했으나, 스텔라는 오묘한 미소로 받아칠 뿐이었다.

그러더니 어느샌가 촉촉한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채 손으로 조심스레 빗질하고 있었다.

─사락, 사락.

조명 아래서 반짝반짝 빛을 내는 백은빛 머리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홀린 듯 내가 입을 열었다.

“스텔라.”

“……왜?”

“너, 진짜 여자애구나.”

그러자, 잠시 뒤.

“……이상해?”

이번에도 조금 뿔이 난 투로 대답할 줄 알았더니, 썩 의외의 반응을 내보였다.

“내가 사실은 남자였던 편이…… 더 좋았어?”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니었다.

“아니, 그냥…… 볼 때마다 신기해서. 정말 내가 알던 그 친구가 맞나 싶고. 지금까지는 좀 각각 별개의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던 경향이 있었는데, 슬슬 네가 예전의 알프렌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는 것 같달까…… 그래서 요즘은 더 새롭게 보이네. 뭔가.”

“그래서 싫다는 거야, 좋다는 거야……”

“싫을 리가 없잖아. 당연히 후자지.”

“……그래?”

“무엇보다.”

“……응?”

별을 좋아하던 친구의 모습을 떠올리며, 나는 정말 오랜만에 순수한 동심에 젖어 들어 그런 말을 내뱉었다.

“난 네가 여자든 남자든 전혀 상관없어. 처음부터 여자인 걸 알았다고 한들, 분명 친하게 지내려고 했을 거야.”

둘 다 어리기도 했고. 정말로 상관없었을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 나는 스텔라의 고운 인품이나 성격에 어떻게든 이끌렸을 거다.

“그럼, 지금도 날 좋아해?”

나는 잠시 멈칫했지만 자연스레 대답했다.

“그야…… 좋아하지. 당연한 거 아냐? 내가 너랑 얼마나 재밌게 놀았었는데. 그 어릴 때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걸 보면, 내가 널 친구로서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나 스스로도 알 것 같달까……”

“……굳이 친구를 강조할 필요까지야.”

“응?”

“아냐, 됐어.”

스텔라는 그로부터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덕분에 나만 머쓱해져서 뒷목을 긁어댔다. 잠시 뒤, 스텔라가 차례대로 화장품 뚜껑을 덮고 이번에는 빗으로 빗질을 하는 사이에.

“있잖아.”

“응.”

“날 아직 좋아한다고 했지?”

“그렇지.”

“내가 숨기고 있는 게 아직 많다고 해도?”

“……응?”

작은 목소리였지만 의미는 흩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되묻는 나에게, 스텔라는 고개를 저으며 툭 떨어뜨린 말을 주워 담았다.

“아무것도 아냐.”

단순히 내 추측일 뿐이었지만.

오늘의 스텔라는, 평소와 조금 달라 보였다.

#29

머리를 깔끔하게 말린 스텔라는 뽀송뽀송한 피부로 내 옆에 살포시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그런 스텔라에게 내가 말했다.

“아까는 되게 급해 보인다 싶었더니, 지금은 많이 차분해졌네.”

“서로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대화하면 제대로 소통이 안 될 게 뻔하니까. 이쪽이 좀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기도 하고.”

기숙사 앞에선 나한테 폭 안겨 횡설수설하는 스텔라를 진정시키느라 오 분 정도 진땀을 빼야 했다.

“그 말은, 확실하게 진정했단 뜻이지?”

“……응. 이제 괜찮은 것 같아.”

부끄러웠던 자태를 떠올린 것인지 뺨이 살짝 발갛게 물들어 있다. 그냥 씻고 나온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걸 수도 있고.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었는데?”

“음……”

스텔라는 손을 꼬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우선,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러내서 미안해. 하지만 가급적 너한테 빨리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더 늦으면 확실하게 대처할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질 수 있었으니까.”

“괜찮아. 편하게 말해봐.”

“응, 그게……”

무어라 운을 띄워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잠시 뒤.

“내가 저번에 말했었잖아? 난 정해진 기간마다 딱 한 번, 별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그래서 아주 조금이나마 미래를 볼 수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텔라가 말을 이었다.

“저번에는 내가 너의 운명을 봐주기로 했었지?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었고. 결국 너의 미래는 봐주지 못했고.”

“그랬지.”

넓은 대해(大?), 불타오르는 저녁 하늘. 태양 같은 빛덩이 하나.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다.

많은 걸 알게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정체가 무엇인지 대략적으로 짐작이 가긴 하지만……

“그런데, 이번에는 목소리가 닿았어.”

“……별에게?”

“응. 확실히 전해졌고, 대답도 들려주셨어.”

스텔라가 확고한 투로 말을 이었다.

“비가 내리기 전에 직감이 왔어. 오늘 반드시 별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날 거라고. 그치만 이번에는 널 부르지 않았어. 저번처럼 기회를 날리게 되면 아무래도 소용이 없어지니까. 그래서 나 혼자 별을 보러 갔었어.”

“응, 그랬는데?”

“그랬는데…… 봐버렸어.”

“그러니까, 뭘?”

“며칠 뒤의 네 운명을, 봐버렸어.”

스텔라가 날 붙잡은 채 하던 말이 떠오른다.

­ 이번 실습에서, 너는 반드시 빠져야 해.

“그건 혹시……”

“그뿐만이 아니야. 어쩌면 네 운명을 볼 수 있었던 건, 거기 얽힌 사람이 너 한 명뿐이 아니었던 까닭일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야?”

“실습이야. 이번 모의 실습에서……”

“진정해.”

“응, 잠깐만. 잠깐만……”

자기가 본 기억을 떠올리려는지, 점차 숨이 가빠지는 스텔라의 어깨를 차분하게 감싸고 천천히 진정시켜 주었다.

“내가 처음에 봤던 건, 너의 얼굴이었어.”

“얼굴?”

“응. 무척이나 어두운 공간이야. 주위에는 아무도 없고, 빛도 들어오지 않아. 아마 이번 실습을 진행하는 장소인 것 같아. 거기서 네가 보였어. 유니폼은 죄다 찢어지고 불타서 어디 갔는지도 보이지 않고, 넝마가 된 몸으로 너는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어.”

“……”

꽤나 살벌한 예언이다. 그러나 내 안에 묻혀 있는 기억으로부터 떠오르는 장면들이 하나둘씩 오버랩된다. 전혀 현실감 없는 소리는 아니라고,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실습에서 무언가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건가? 거기서 대체 무슨 일이 생기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목에 찬 팔찌를 매만졌다. 이걸 차고 있는데도 그렇게 된단 말인가. 결코 좋지 않은 미래였다.

“그리고, 그리고……”

스텔라는 어깨를 잘게 떨며 말을 이었다.

“거기엔 너만 있는 게 아니었어. 너만큼은 아니지만 조금 많이 다친 것 같은 친구가 한 명 쓰러져 있었어. 너는 그 친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다음 순간에 벌어진 일이 난 정말 이해가 안 돼서.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이렇게 널 찾아왔던 거야.”

“그래, 알았으니까 계속 말해봐.”

“에지오, 에지오…… 네가 있잖아. 네가, 이번 실습에서……”

두려움. 불신.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얼굴로, 스텔라는 새파랗게 질린 채 벌벌 떨면서,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 백은빛 눈동자가 날 똑바로 직시하고──

“유리를 죽였어.”

직후.

“내가 본 건… 그게 끝이야.”

사고가 정지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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