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1)
* * *
#1
“어이, 친구. 아침부터 왜 이렇게…… 잠깐, 이거 전에도 했던 말 아닌가?”
“…아. 가브리엘인가.”
“똑같이 대답하지 말라고.”
“그래서 무슨 일인데?”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거든.”
화창한 주말의 아침. 1동 기숙사를 나설 때, 가브리엘이 포장된 간식거리 하나를 던져주며 덧붙이듯 말했다.
“저번에 그 꼴을 당해놓고 또 무리하진 마라. 너니까 어련히 잘하겠다 싶어서 이 이상 참견하진 않겠다만……”
쯧, 하면서 혀를 차기도 하는 가브리엘.
“그래, 나도 알아. 고맙다.”
“고마우면 한턱 쏘든지.”
“끝나는 거 봐서.”
가브리엘이 던져준 간식거리의 금박 포장지를 벗겨내고,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일반적인 초콜릿처럼 달다기보단 더럽게 쓰다. 가브리엘의 취향인가.
터벅, 터벅.
기숙사를 나선 다음에도 갈라지진 않는다. 가브리엘과 나는 나란히 트램 정거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겨우 시험 다 끝났다고 좋아했더니, 하필이면 주말에 끌려가네. 이래도 되는 거 맞냐? 무슨 무슨 법 조항에 위배되는 행위 아냐?”
“어쩔 수 없지. 금요일까지는 다른 강의랑 시간이 겹치면 안 되니까. 당장 다음 주 월요일부터도 정규 수업 들어가야 하고.”
“하 더럽게 빡빡하네. 쉴 틈이 없어, 쉴 틈이.”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냐?”
일주일 내리 푹 쉰 주제에.
“……뭐,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내 쪽에선 할 말이 없다. 공부하다 쓰러진 놈 앞에서 무슨 주름을 잡겠냐, 내가.”
“알면 크게 불평하진 마. 원래 주말에 하고 있는 거 너도 알고 있었잖아.”
“알지, 아는데…… 그래도 주말을 통으로 날릴 줄은 몰랐지. 이틀 동안 대체 뭘 시키려고 이러는 거야?”
가브리엘이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 한숨을 쉰다.
팔락.
그러면서 오늘 아침에서야 배부받은 종이를 한 손으로 펼친다. 그것을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던 가브리엘은 곧 크게 하품을 했다.
“4월 23일 토요일 오전 10시까지 제 1학구 프론티어 본부 정문 앞에 집결. 갈아입을 옷 정도는 챙기든지 말든지 개인의 자유. 개인 마도구는 한 가지만 지참 가능. 상기한 내용 이외의 개인 짐은 허용하지 않음. ……그럼 이것도 다 먹고 들어가야겠네. 하암.”
1학구는 각각의 클래스보단 프론티어의 주요 기관들이 밀집되어 있는 장소였다. 이를테면, 프론티어 본부도 그곳에 있다. 우리는 지금 트램을 타고 제 1학구로 건너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개인 마도구는 하나씩만 지참 가능하다는 규정에 따라, 가브리엘은 제 옆구리에 끈 달린 무언가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가브리엘. 아까부터 궁금했던 건데.”
“엉?”
“그건 대체 뭐야?”
“아, 이거?”
가브리엘은 그것을 제 손에 들었다. 척 봐도 무거워 보이는 금속제 헬멧이었다. 무슨 흉악하게 생긴 쇠뿔 장식도 양옆에 달려 있다. 더군다나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것도 아닌 듯한 게, 빗금 같은 상흔이 여기저기 그어져 있었다.
“우리 아버지가 입학 선물로 준 바이킹 헬멧. 내 특성상 머리 말고 다른 덴 흠씬 두들겨 맞아도 비교적 괜찮긴 하지만, 머리 제대로 맞으면 훅 가니까. 대가리는 반드시 지켜야지.”
“입학 선물이라고? 너 도망쳐 나왔다고 하지 않았냐?”
“아, 뭐. 그렇지. 아마 나중에 나한테 물려주시려고 가문 비전의 창고에서 꺼내놓으신 거겠지. 아버지의 마지막 호의를 아들 된 도리로서 무시할 순 없잖아?”
가문의 보물을 몰래 훔쳐 왔다는 얘기군.
“너는 뭐 가져왔는데?”
“나? 나는……”
가브리엘이 내 쪽을 힐긋 돌아본다.
나는 잠깐 고개를 숙여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그냥, 팔찌 하나.”
“……팔찌? 그게 마도구면, 설마 아티팩트냐?”
가브리엘이 부쩍 관심을 드러냈다.
마도구랑 아티팩트는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긴 하지만, 사실 둘은 포괄하는 의미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일단 시사하는 의미는 동일해도 사회적 통념상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의미가 다르다고 할까.
마도구는 제아무리 같잖고 하찮은 마법이 내장되어 있다고 해도 일단 도구에 마법이 부여되어 있으면 마도구라 부르고, 아티팩트는 좀 더 강력하거나 희귀한 마법이 부여되어 있으며 그 가치가 일반적인 마도구의 평균을 웃돌면 아티팩트라 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널리고 널린 마도구 중에서도 명품(名?)이라 불릴 만한 물건들이, 비로소 아티팩트의 자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물에 마법을 인챈트(Enchant)하는 과정에선 마법을 부여할 사물의 크기가 작을수록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장신구 형태로 제작되는 마도구는 대부분이 아티팩트였다.
그러한 맥락에 따라 가브리엘은 내 손목의 팔찌를 보고 순수한 놀라움을 드러낸 것이었다.
내가 별다른 부정을 하지 않자 은근한 투로 물어온다.
“얼마냐, 그거?”
“글쎄. 선물 받은 거라 나도 잘 모르겠는데.”
“뭐? 선물 받았다고? 아티팩트를? 설마…… 여자한테? 대체 어떤 귀족 영애가…… 아니, 너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그러겠냐고. 본부에서 나한테 준 거야.”
“본부?”
“그, 4학구에서 벌어진 일 있잖아. 그거 때문에 사건 재발 방지용으로 줬다나 뭐라나. 자세한 건 말해줄 수 없고, 안에 수호 마법 같은 게 들어있대. 웬만한 공격은 다 방어할 수 있을걸.”
“그런 귀한 걸 고작 실습 때 써도 되는 거냐?”
“고작이라니…… 이게 얼마나 중요한 평가인데.”
“아니, 그렇잖아. 위험한 일이 생겨봐야 뭐 얼마나 위험하겠어. 일단 실습이긴 하지만 결국 ‘모의’ 잖아. 실습 도중에 누구 한 명 죽기라도 하면 프론티어가 어떻게 감당할 건데? 내가 이런 말 하기도 뭣하지만 우린 귀하신 몸들이라고. 프론티어가 절대 허투루 다룰 수 없다 이 말이야. 그럼 결국 다 설계된 상황일 텐데,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실습 말고 너한테 ‘진짜 위험한 상황’ 같은 게 다시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아껴두는 편이……”
“그 상황이란 게, 언제 찾아올지 모르잖아.”
“응?”
저 멀리 보이는 트램 정거장에는 이미 많은 학생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1학년만 진행하는 게 아닌 까닭이다. 2학년부터 시작해서 3학년까지, 전부 다 이번 실습에 참여한다.
팔찌의 차가운 금속테를 계속 매만지면서, 가브리엘과 나란히 걸으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그랬어. 난 내가 그런 일에 휘말릴 줄 전혀 몰랐고, 사건은 갑작스럽게 터졌지. 게다가 내 생각에 프론티어는 이미 대륙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가 아니야. 이 팔찌를 나한테 지급하게 된 계기인 4학구에서 일어난 일만 해도, 그렇게나 쉽게 마……”
말을 하다 말고 멈칫했다. 가브리엘은 사건의 전말을 모른다. 나를 그냥 테러의 피해자라고 인식하고 있을 거다.
“마……?”
“아냐. 쓸데없는 말을 했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항상 대비책을 세워놓고 다니는 편이 훨씬 안전하단 식으로 말하려던 찰나.
“안녕, 에지오. 실습 가니?”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가브리엘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새하얀 백발의 소녀…… 아니, 내가 속한 서클 회장 선배님이 계셨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지금 막 트램 타려던 참입니다. 다른 선배님들도 안녕하세요.”
“안녕~.”
서클에서 뵌 얼굴들은 아니고, 다들 처음 보는 선배들이었다. 인사하는 날 보곤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더니 저들끼리 무언가 소곤거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세이라가 말했다.
“에지오.”
“예?”
“선배님이 아니라 회장님.”
“예?…… 아, 네. 회장님.”
“농담이야.”
입을 가리며 쿡쿡 웃는 세이라의 모습은, 누가 봐도 호리호리하고 갸날픈 여성의 그것이었다.
“옆은? 친구니?”
“아, 네. 가브리엘 라마니카라고……”
“그렇구나. 반가워, 후배님. 난 3학년 세이라 데 바이에른이야. 여행 서클 「엑소더스」의 회장직을 맡고 있어. 관심 있으면 언제든 들어와. 우리 서클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까.”
가브리엘은 선배가 앞에 있는데도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후배님?”
“……”
세이라가 인사의 의미로 손을 내밀자 그 손을 감히 잡아도 될지 고뇌하는 낯빛을 띤 채 한참이나 세이라의 손을 맞잡길 주저하고 있었다.
……가브리엘 이 녀석, 세이라 선배를 완벽하게 여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건 둘째치고, 나랑 얘기할 땐 그렇게나 여자에 관심 많아 보이더니. 막상 기회가 생기면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쪽이었던 건가?
입학 초기엔 꽤 치근덕거리는 모습을 보긴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애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하자 금세 그만두었던 것도 마찬가지의 맥락이었는가. 무엇보다 큰 포부와 달리 지금까지 제대로 된 여자 사람 친구를 만들지 못한 것도, 어쩌면……
“얌마. 기다리시잖아.”
“어, 어? 어.”
“아하하, 편하게 대해도 되는데……”
내가 대신 가브리엘의 손을 이끌어 악수를 시켜주고, 그런 뒤에 얼떨떨한 얼굴의 녀석을 내버려둔 다음 세이라와 대화했다.
“선배님도 실습 가시는 건가요?”
“응, 그치. 너희들은 실습하는 거 처음이었나?”
“네, 저희들이야 입학 이후론 처음이죠.”
“그렇구나. 선배 입장에서 뭘 조언해주고 싶어도, 내용이 매번 바뀌니까 틀에 박힌 조언밖에 해줄 말이 없네. 미안해.”
“아뇨, 선배님이 미안해하실 건……”
“으음, 그래도 공통점이 아예 없진 않으니까. 내 경험상 도움이 될 만한 것들만 조금 알려줄게.”
감사한 마음으로 경청의 자세를 취했다.
“모든 상황을 실전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할 것. 그렇다고 네 앞에 뭐가 등장하든 무조건 맞서는 게 꼭 정답은 아니라는 것. 때로는 한 차례 후퇴하고 침착하게 뒤를 돌아보는 것도 좋아.”
정석적인 조언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직후 이어지는 세이라의 말은 조금 의외성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실습마다 주어지는 특별 과제가 하나 있을 텐데, 그걸 남들보다 빨리 달성하면 고득점을 얻을 가능성이 높아.”
“특별 과제……?”
“응. 하지만 너무 욕심을 부려서도 안 돼. 분명 쉽지 않을 테니까. 트릭을 숨겨놨을 가능성도 있고. 신중을 가미할 필요가 있어. 모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이런 말은 어폐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일단, 너희들은 처음이니까.”
“아녜요,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특별 과제라. 왠지 두근거리면서도, 어딘가 불안한 울림을 가져다주는 단어였다.
“무엇보다 아마 실습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감독관 같은 분들이 밖에서 관전하고 계실 거야. 주어진 상황에 얼마나 잘 대처하는가, 이 항목이 꽤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니까,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 돼. 이번에는 이틀 동안 진행하니까, 음…… 아마 생존과 관련 있는 키워드겠지? 조가 나뉘어 있다면 협동도 중시할 거고. 그렇게 되면 주변 환경을 잘 이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무런 의도 없이 구조를 배치하진 않았을 테니까. 분명 뭐든 써먹을 데가 있을 거야.”
“조언 감사합니다, 선배님.”
피와 살이 되는 선배의 조언이다. 아직도 굳어 있는 가브리엘의 등을 툭툭 치며 머리를 주억였다.
“아무튼,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네. 너희한테 도움이 되었다면 좋겠……”
그때, 세이라 옆에 있던 선배가 불쑥 말했다.
“너 에지오라고 했나? 맞지?”
“네? 네……”
이름을 말한 적은 없는데 알고 있네.
“세이라 얘가 진짜 엘리트거든. 이렇게 말하는 데 다 이유가 있다니까? 실습에서 항상 최고득점을 차지하는 게 누구인지 알아? 게다가 재작년에 역대 최고 기록 타이를 갈아치운 것도…… 으븝.”
“얘는 후배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푸하. 후배 앞이니까 더 으스대도 되는 거 아냐? 네가 하는 말의 신뢰성도 더 올라갈 거 아냐.”
“됐거든. 지금부터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예, 예. 알겠슴다~.”
결국 선배는 입을 다물었지만, 세이라가 부정을 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나는 작게 감탄을 표하는 중이었다.
얼마 전 타일러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재작년 실습 1학년 수석이 바로 세이라 선배님이었단 말인가.
처음 뵈었을 때부터 되게 성실하고 훌륭한 선배라 생각은 하고 있었다만, 설마 그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맞아, 에지오.”
“네?”
“엄청 늦어졌지만, 신입 부원 환영회 말인데.”
“아……”
“다음 주 주말쯤에 진행할 예정인데, 그때 참가할 수 있지?”
저번 서클룸에 들렸을 때도 결론이 나지 않았던 환영회 일정. 그게 결국 구체적으로 정해진 모양이다.
“당장 예정된 일정은 없긴 한데……”
“그럼, 그때 하는 걸로?”
“……네, 뭐. 그러죠. 알겠습니다.”
“응, 응. 좋아.”
짝 하고 손뼉을 친 세이라가 말했다.
“힘내, 후배님들. 이제 곧 트램 오겠다. 얼른 가자.”
“아, 예. 선배님들도 힘내세요.”
결국 무리를 이끌고 우리보다 앞서서 정거장으로 향하는 세이라.
“……”
“……”
그들을 뒤따라 걷는데, 벙찐 상태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가브리엘이 우울한 눈으로 날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에지오, 어째서 너만…… 너만……”
“뭔진 몰라도 일단 오해야.”
사실 가브리엘의 한탄 섞인 목소리에 담긴 원한은 현재 가브리엘이 가입한 서클의 영향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가브리엘이 본질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충격적인 사실 탓도 있을 것이었다.
“저분은 내가 가입한 서클 회장님이시고, 무엇보다 남성이셔.”
“서클이고 뭐고, 왜 너만 저런 인연이 주변에 잔뜩……”
급정지.
“뭐?”
“남자라고. 세이라 저 선배.”
이번에는 홱.
무섭게 고개를 돌린다.
“……내가 여자 손 한 번 못 잡아봤다고 아주 만만하지? 남자 손 여자 손도 구분 못 할 것 같아? 엉?”
“믿기 싫으면 믿지 말든가.”
“구라치지 마! 저게 어떻게 남자인데!”
“야, 야. 큰 소리 내지 마. 들으실라.”
“너 나 무시하는 거 맞지? 엉?”
“아니라니까. 못 믿겠으면 네가 가서 직접 물어보든가. 나도 처음엔 못 믿었어. 사실인 걸 어떻게 하냐. 아까 봐라, 남학생 전용인 유니폼 바지도 입고 계셨잖아.”
“아니, 하… 허, 무슨. 허. 이게, 뭔.”
내 어깨를 아무리 쥐고 흔들어도, 진실을 말할 뿐인 내 표정과 안색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기에, 가브리엘은 점차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은 넓으니까.”
“내, 내 첫경험이, 내 설렘이, 내 첫사랑이……”
“뭘 또 처음 만난 선배한테.”
첫경험은 또 뭐야.
당연히 장난이겠지만 세이라와 처음 대면했을 때 반응을 보면, 진짜 첫눈에 반한 건 아니겠지 싶었다.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설마가 사람 잡을 때도 있는 법이었다. 예컨대 지금처럼.
“네가 그렇게 말하면, 지금 내 손에 남은 부드러움과 온기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건데……”
“소름 끼친다. 저리 가.”
진심으로 믿음에 배반당했는지 신에게 버림받은 독실한 신자와 같은 낯빛을 띠며, 손목을 붙잡고 부들부들 떠는 가브리엘.
녀석한테 내가 딱히 해줄 말은 없었다.
일단 남의 연애 사업에 참견해도 될 만한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그냥 힘내란 의미에서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는 정도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