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2)
* * *
#2
이미 정거장에 도착해 있는 학생들의 무리를 보면서, 나는 손목에 찬 팔찌를 조심스레 만지작거렸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우우우웅……
저 멀리서 트램이 다가온다.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스텔라는, 어딘가 걱정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면서 손을 흔들어주고 있었다.
그 옆에 루비아와 아이리스도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그 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은근한 눈길이 가고 있었다.
검은 리본과 화사한 금발.
“뭘 봐?”
“너 보는데.”
“보지 마, 그럼.”
“알았어.”
“……뭐야, 대체.”
유리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저번 도서관 앞에서의 일 때문에 좀 서먹해졌나 싶었더니, 막상 대화 분위기 자체는 평소와 같았다.
“너 있잖냐.”
“뭐.”
“되도록이면 내 옆에서 떨어져 있어라.”
“……너 뭔 소리 하는 거야? 누가 누구 옆에서 떨어지라고? 내가 여태 꺼지라고 해도 계속 들러붙는 게 누구였는데?”
“그게 아니라, 좀 이따 실습에서.”
“……하?”
유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진다.
나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내저었다.
“아냐. 됐다. 그냥 내가 알아서 피해 다닐게.”
“……그러니까, 갑자기 뭔 소린데? 내가 무슨 오물이야? 피해 다니게? 아니면 뭐 내 존재가 방해될 것 같단 소리야? 갑자기 와서 한다는 게 시비 걸기? 그리고 누군 네가 방해 아닌 줄 알아? 안 그래도 너랑 같이 있으면 화만 잔뜩……”
“오해할 소지가 다분하게 말한 건 미안한데, 전혀 그런 뜻은 아니고. 난 그냥 네가 걱정돼서 하는 소리였어.”
“머, 뭐? 거, 걱정?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
“말이 돼. 내가 널 걱정하는 건 진심이니까.”
“……허, 허. 허어. 뭐야, 진짜. 너 지금 완전 이상한 거 알아? 얘들도 다 이상한 눈으로 보고 있잖아.”
진심으로 소름 돋는다는 듯 어깨를 쓸어내린다.
아이리스도, 루비아도, 우리의 대화에 잠시 귀를 기울였던 다른 학생들도, 몇몇은 이쪽을 갸웃거리며 돌아보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명,
스텔라만큼은 침잠한 눈으로 날 보고 있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난 내가 알아서 잘 해. 어린애 취급하지 마.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거니까.”
유리가 조금 낮아진 톤으로 그리 말해왔다.
“알고 있어. 이상하게 말해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걱정하는 마음은 진심이니까 실습 힘내. 응원하고 있을게.”
내 부드러운 말에 유리는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너, 너 지금 뭔가 잘못됐다니까?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이 특히 더 소름 끼친다고. 안 그래도 저번부터 계속 이상한 말만……!”
─치이이익.
유리가 짜증을 내려는 타이밍에 맞추어 트램이 도착했다. 끝내 유리는 혀를 차며 친구들을 따라 트램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잠시 뒤.
“……너 쟤한테 관심 있냐? 저런 취향이었어?”
“……”
그들을 뒤따르면서, 한참 우울한 상태에 빠져 있던 가브리엘이 내게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물어왔다.
뭐……
결국 유리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괜히 부정적인 미래를 얘기해서 실습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가급적 사양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일단 둘 다 조심하는 편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만 주의를 기울이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무엇보다.
그런 거지 같은 운명이 나한테 필연적으로 얽혀 있는 거라면, 내가 그 운명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면.
피해자는 오로지 나 한 명으로 족하다.
모든 후폭풍은 내가 감당할 것이다.
나는 익숙한 편이고,
유리는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단지 그뿐이다.
“야, 그래서 관심 있냐고 없냐고. 쟤는 네 얼굴에도 쉽게 안 넘어가니까 무너뜨리고 싶어졌다, 뭐 이런 거야? 응?”
“가브리엘.”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까 앞뒤가 딱딱 들어맞네. 그래, 지금까지 참 이상하다 싶었어. 그쪽이 차라리 가장 가능성 있는……”
“본인이 듣고 있어.”
“……엉?”
트램 내부가 그렇게 조용하진 않았지만 가브리엘의 목소리는 같은 칸에 탑승한 유리에게도 닿았던 모양이다.
만일 유리에게 분노를 조절할 수 없는 지병이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이 트램은 전복되었을 거라고, 나는 비로소 확신했다.
#3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프론티어 본부 정문 앞.
“하나, 둘, 셋, 넷…… 열다섯 명 다 모였군. 그럼 짤막하게 소개하도록 하지. 이번 년도 에픽 클래스 1학기 모의 실습의 감독을 맡은 로베르 길라이틴 교수라고 한다. 날 부를 땐 감독관님이라고 불러라.”
가장 왼쪽에 1학년 전원이 모였고, 그 옆으로 2학년이, 그다음으로 맨 오른쪽에 3학년 전원이 집결하여 있었다.
번호 순서대로 각자 3열 횡대로 맞추어 선 1, 2, 3학년.
그 한가운데의 정면, 임시로 배치된 단상에 선 로베르 교수가 마력으로 음성을 증폭시킨 채 말한다.
“이번 실습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다들 들었겠지? 하지만 제대로 짚고 넘어가지 않은 채 들어가면 분명 큰코다칠 테니, 다시 한번 중요한 내용만 선별해서 알려주겠다.”
체격은 건장하고, 표정은 근엄했다. 다만 감독을 맡는답시고 고생을 좀 했는지, 아니면 사실 속으로 긴장하고 있는 건지 얼굴에 핏기가 살짝 가셔 있었다.
아무렴 주말이고, 인구가 꽤 밀집되어 있는 1학구의 프론티어 본부 앞이고.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바글거리기도 하고. 여러모로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을 테지.
다만, 그럼에도 로베르는 떨림 하나 없는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내뱉는다.
“실습 시작 전, 너희에게 배낭을 하나씩 나눠줄 거다. 배낭 안에는 반나절치 식량과 식수, 헝겊을 감은 횃불 하나, 이십 미터 길이의 로프와 나침반 하나, 그리고 하급 힐링 포션 하나가 들어 있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려보면, 꽤 큼지막한 배낭들이 바닥에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개인 마도구는 단 한 가지만 지참이 가능하고, 마도구의 종류는 딱히 제한하지 않는다. 어떻게 사용하든 개인의 자유다.”
나는 버릇처럼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그때─.
단상 위에 쾅─! 하고 두 손을 얹은 로베르가, 보다 진중해진 톤으로 학생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실습의 핵심은 두 가지다.”
스윽.
검지 손가락을 하나 치켜든다.
“이틀 동안 생존하는 데 성공하거나.”
이어서.
“혹은, 제단에 닿아라.”
특정 단어를 강조하며, 그리 말했다.
“제단은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있다.”
그것 말고는 더 이상의 언질을 주지 않았다.
“어떤 수를 써서든 살아남아라. 단, 어딘가에 꽁꽁 숨어서 비겁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겠으나, 그리 추천하진 않는다.”
어쩐지 불안한 낌새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번 실습이 시행되는 장소는 세 구역으로 나뉜다. 각 구역에 너희 1, 2, 3학년이 입장하게 될 테지만, 서로 만날 일은 없을 거다. 같은 공간이라곤 해도 전혀 다른 공간이나 마찬가지일 테니. 또한, 구역이 나뉨에 따라 제단 역시 각 구역에 하나씩 위치하여 있다.”
“오랜 전쟁이 끝나고 세상은 보다 평화로워졌지만, 위대한 제국을 위협하는 암운(?雲)은 언제든 다시 제국의 하늘에 드리울 수 있다. 지난 세월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니.”
“하여, 너희들은 본인들이 제국의 미래이자 운명의 한 조각임을 항상 머릿속에 자각하고, 그에 걸맞은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부디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 특히 너희 1학년은 이번 실습 장소의 제공자이신 재야의 대마법사 네비로스 님의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는 만큼, 우수한 기량을 보여주길 기대하지.”
네비로스.
그 단어에 학생들 일부가 술렁거린다.
나로선 처음 듣는 이름이다. 하지만 대체로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는 모양. 저 옆에 있는 루비아도 슬쩍 고개를 끄덕인다.
……비록 이름은 처음 듣지만, 그 사람이 이번 실습 장소를 제공했단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상. 이제부터 각 학년 학생들은 부르는 번호 순서대로 앞에 나와서 개인 배낭을 받아가라.”
로베르가 말을 마침에 따라, 우리 앞에 있는 교수가 가장 첫 번째인 1번부터 부르기 시작한다.
1학년 1번이 앞으로 걸어 나서자, 주위에서 감탄 섞인 탄성이 언뜻 들려오는 것도 같다.
나는 그 씁쓸한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팔짱을 낀 채 학생들을 둘러보고 있는 로베르 교수를 잠시 바라보았다.
저 교수와 나는 초면이 아니다.
스텔라가 내게 갑작스런 예언을 해왔을 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 이번 실습의 관계자를 다급히 찾았다.
결국 수소문 끝에 이번 실습 총괄 감독을 맡았다고 하는 로베르 길라이틴 교수를 직접 찾아갔을 때의 일을 상기했다.
— 네가 에지오 크라닐이군. 원래라면 프론티어의 명예를 심각히 모욕하는 언사였겠지만, 너라면 충분히 그런 걱정을 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프론티어는 단 한 번의 실수조차 결코 가벼이 넘기지 않으니까.
— 무엇보다 당연히 실전처럼 생각하고 실습에 임해야겠지만, 딱 하나 단언하자면 실제로 학생이 죽는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아니, 애당초 그럴 수 없도록 만들었다.
—내 입장에서 알려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니 더 이상 실습 내용에 대해 궁금해하지도, 쓸데없이 걱정하지도 말도록.
결과만 보자면 지금 이 상황이다.
나는 실습에 참가하게 됐고,
유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얼마 전 스텔라의 말로는, 자기가 들여다본 운명이 항상 퍼즐처럼 들어맞진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과정을 바꿀 순 없고, 오직 결과만 바꿀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것일진대 그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었지만, 스텔라는 그 이상 내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고 했다.
저번에는 엿보지 못했던 내 운명을, 이제서야 스텔라가 볼 수 있게 된 이유가 뭔지도 알 수 없다.
“마지막, 1학년 15번, 에지오 크라닐!”
쭉 가라앉았던 정신을 일깨우는 호명에 따라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간다.
묵직한 배낭을 건네받은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고 자기 자리로 돌아와서, 다시금 짧은 상념에 잠긴다.
그리고 그 풀리지 않는 상념에 대한 해답은, 내가 비로소 교수의 인도를 따라 게이트를 건너고, 실습 장소에 막 도착했을 때 즈음에야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탁.
분명 앞 사람을 따라 입장했을 텐데도, 내 앞번호인 가브리엘의 그림자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뒤를 돌아봤을 때 건너온 게이트의 흔적은 곧바로 사라졌고, 그러자 삽시간에 주위가 조용해지며 무거운 적막에 휘감겼다.
“……”
한 줌 빛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캄캄한 공간.
어디선가 음울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것만 같은, 그런 이질적이고도 온몸의 감각을 바짝 돋구는 어둠의 동굴 속.
후우…
축축한 습기가 질척거리며 내 피부를 적신다. 작게 호흡할 때마다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쩌적쩌적 얼어붙인다.
굴곡진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것은 식은땀이다. 영문 모를 불안감이 어깨를 타고 올라와 내 목덜미를 훑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다.
스윽…
배낭 속에서 횃불을 꺼낼 필요도 없이, 나는 숨죽인 채 소리없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력을 일으키진 않는다. 혹시 모르니까.
……
귀를 바짝 열고, 온 감각을 청각과 촉각에 집중시켜, 주위의 기척을 읽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터벅… 터벅…
동굴의 길이는 짧았다.
우측으로 방향을 돌린 뒤 몇 미터 걸어가지 않아서, 나는 기어코 동굴 밖으로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온통 푸르스름한 세상이었다.
감히 클라이밍(Climbing)은 시도도 못 할 만큼 아득한 높이의 울퉁불퉁한 외벽이 양옆으로 쭉 이어져 있고, 그 끝에는 다시 두 갈래로 나뉘는 길이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있었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던 동굴보단 아주 약간 밝다. 그러나 결코 반갑지 않았다. 이렇게나 어정쩡하게 밝다면, 어둠 속에 숨어 다른 존재의 눈을 피해 다닐 수 없을 테니까.
들썩.
배낭의 무게를 느끼며 지금 내가 현실에 있음을 체감한 뒤, 깎아지른 절벽 같은 외벽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대었다.
…스윽.
딱딱하다.
그리고 손바닥이 얼어붙을 것처럼 차갑다.
고개를 들어보면, 외벽의 끝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저 위의 푸르스름한 하늘만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
이번 실습의 테마를 알 것 같다.
끝없는 통로가 끝없이 이어지고 이어진──
‘미궁(??).’
소리내어 말하는 일 없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나는.
단순히 이 미궁을 돌파하는 것뿐이라면.
어째서 무슨 수를 써서든 살아남으라고 한 건지, 왜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제단이 있다고 한 건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으으으……
아주 멀리서.
미약하게.
울음소리가 들린다.
아울러 하나가 아니다.
여럿이다.
지옥의 밑바닥에서 올라온 악마가 목을 긁어대며 울음소리를 토해낸다면, 아마 저런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아니, 그 녀석들은, 악마들은, 짐승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저 울음소리는 절대로 악마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식은땀이 홍수처럼 난다. 정체를 확신하긴 했지만, 저 너머에 있을 괴물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세이라 선배의 조언을 떠올릴 여유도 없었다. 온몸의 핏기가 싹 가신 채로, 나는 고개를 겨우 들어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잿빛 연기 같은 구름 사이로,
둥그런 달이 떠올라 있었다.
두 개씩이나.
“……”
머릿속에 새빨간 경종이 울렸다.
실수다.
실수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러 버렸다.
이 느낌, 이 감각.
어디선가 느껴본 적이 있다.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다. 이 소름 끼치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온몸의 감각이 마비된 채 느끼는 거짓된 직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떨쳐내기도 전에 불현듯 엄습해온다.
마력의 스파크를 일으키고 일으켜, 무모하게 몸을 부딪히고, 그럼에도 연거푸 실패하자 이를 악물고 다시 피를 토하며 부딪히고, 결국 뼈를 부수는 비명과 함께 새하얀 빛을 휘감은 채, 뚫을 수 없는 벽에 실금 같은 틈을 만들고, 거기에 몸을 비집고 들어가는 데 성공했을 때의 기억이, 번갯불처럼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확히는.
그 다음 순간의 기억이.
‘결계(??).’
마족들이 구현한 결계 속에 들어갔을 당시와 너무나도 유사한 감각이, 내 목덜미를 옥죄이는 듯 꾸불거리며 휘감았다.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생각한다.
실수했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
내가 확답을 구했어야 하는 사람은, 감독관 따위가 아니라…… 이 드넓은 미궁을 직접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