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44화 (144/201)

〈 144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3)

* * *

#4

아직 확신하긴 이르다. 섣부른 행동은 필연적으로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좀 더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막말로 하늘에 대고 지금 날 여기서 꺼내 달라며 바락바락 소리칠 건가? 무엇 하나 사실이라 판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더군다나, 어딘가에 있을 감독관이 내 요구를 실제로 들어줄지 말지도 전혀 모른다. 크게 소리 내어 외치다가 주변에 있을 괴물들을 죄 끌어오게 되면 어쩔 건가. 나만 손해였다. 그러니 지금은 가급적 닥치고 있는 게 최선이다.

긴장을 풀면 불안한 느낌이 싹 가실지도 모른다. 외벽에 손을 짚은 채 눈을 감고 차분히 심호흡을 했다.

후우……

후우.

그러자 폭발할 듯 두근거렸던 심장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스윽…

횃불은 꺼내지 않았다. 아예 앞을 못 볼 정도는 아니었기에. 안력을 집중한 채 눈을 부릅뜨고 살금 살금 걸음을 옮긴다.

갈림길에 다다른 직후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모르고 툭 찼을 때는, 정말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뭐가 이렇게 현장감이 살벌해…

실전 같은 실습이니까. 라는 당연한 대답이 내 안에서 들려오지만, 이 분위기에 괴물과 함정까지 추가된다면, 담력 없는 학생들은 대부분 초입부터 덜덜 떨며 나자빠질 게 분명하다.

설마 미궁에 그저 구불구불한 통로와 괴물만 툭 던져놨을 리도 없고. 이런 장소에서는 보통 매우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언제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니까.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붙들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때문에 절대 방심하지 않도록 전신의 기감을 날카로이 바짝 끌어올렸다.

거의 즉발할 수 있도록 머릿속에 미리 마법의 영창을 띄워놓고, 손목의 팔찌를 매만지면서, 이번 실습의 핵심을 상기한다.

‘핵심은 두 가지.’

이틀 동안 생존하는 데 성공할 것.

그리고, 제단에 닿을 것.

생존이야 그렇다 치고…

대체 제단은 뭐지?

일단 세이라 선배가 말했던 ‘특별 과제’란, 아마도 예의 제단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특별 과제는 남들보다 빨리 달성할수록 고득점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 이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특별 과제는 한 명만 달성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가? 뒤늦게 달성할 수도 있지만, 먼저 달성한 사람보다는 점수를 덜 받게 된다는 건가?

뭐가 어찌 됐든, 확실한 정보만 골라내어 취합한다. ‘생존’. ‘선착순’. ‘특별 과제’. 이를 통해 앞으로의 방침을 정한다.

결론은 간단했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제단에 누구보다 빨리 도착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속한 행동이 필요했다.

터벅…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불안감이 부디 헛된 걱정이길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면서, 두 개의 달을 잠시 올려다보았던 내가 한 발짝을 성큼 앞으로 내디뎠다.

#5

미궁의 구조를 전부 파악할 수는 없다.

“으음……”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서 왼쪽과 오른쪽으로 갈라져 있는 길을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이 맞는 길일까. 과연 어느 쪽으로 가야 ‘제단’에 닿을 수 있을까.

결정은 길지 않았다.

판단은 신속해야 했으므로.

왼쪽으로 간다.

‘미궁을 손쉽게 돌파하는 법’ 따위가 적힌 잡서적을 언뜻 중등부 시절에 읽었던 것도 같은데, 자세한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어차피 별 도움 안 되었을 것이다. 한쪽 벽면에만 손 짚으며 쭉 따라가기, 뭐 그런 게 적혀 있었겠지.

우수법(?手?) 같은 건 하나의 면으로 이루어진 간단한 미로라면 모를까, 이 같은 미궁에서 사용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방법이다.

조금 더 어두워진 왼쪽 길을 따라 걷는다.

터벅, 터벅…

발소리가 거슬린다. 신발을 벗고 다니는 편이 좋을까. 아냐. 발바닥에 상처가 생기면 거동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같은 반의 다른 애들도 현재 나와 같은 미궁에 있는 걸까. 어쩌면 여긴 나 혼자만 떨어진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무심결에 들 정도로 완전한 고독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드넓은 미궁에 나 홀로 내던져진 거라고 생각하면, 아득한 두려움에 오금이 달달 떨리고 뇌내가 새하얗게 변해버릴 것만 같다.

예전이었다면 반드시 그랬을 거다.

다시 말해, 지금은……

그때─.

스산한 바람이 볼을 스친다. 아까부터 팽팽히 당기고 있었던 긴장의 끈. 사방으로 넓게 펼친 내 기감에 잡히는 무언가가 하나 있다.

동작을 완전히 정지한 채로 고개를 슬그머니 내린다. 시선 끝에 닿는 것. 그것은 내 발치 바로 앞에 있었다.

…큰일 날 뻔했군.

아래에서 아주 미세한 마력이 느껴진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이대로 이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순간 결코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내 불확실한 가정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조심히 뒤로 물러났다. 적어도 지금 지나온 길은 안전하니 마음 놓고 뒷걸음질 쳤다.

…스윽.

방금 전 갈림길이 나뉜 통로로 돌아가서, 벽면에 몸을 숨긴 채 발아래 놓인 작은 돌멩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대로, 고개만 슬며시 내밀고, 방금 전 마력이 느껴진 지점을 향해, 툭. 하고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나아간 돌멩이가 데구르르, 맥없이 바닥을 굴렀다.

나는 급히 벽면에 몸을 숨겼다.

그 즉시.

──피융!

구르는 돌멩이가 저런 소리를 내던가?

절대 아니다.

잔상을 남긴 한 줄기의 빛이 어둠 속에서 잠깐 반짝였다. 물체가 발사되는 소리. 찰나에 공기를 찢는 파공음. 똑똑히 들었고, 확실하게 보았다. 내 의심은 곧 확신이 되었다.

…미치겠네.

초장부터 화살 트랩인가.

저런 거, 정통으로 맞았다간 즉사다.

나의 경우에는 이 팔찌가 한 번쯤은 보호해 주겠지만, 그 소중한 기회를 고작 트랩 따위에 낭비할 수는 없었다.

미궁의 난이도가 상당히 미친 수준이다. 설마 장난감 화살 같은 걸 배치해 놓았을 리는 없을 테고. 그럼 진짜 화살을 학생의 심장부에 냅다 박아넣으려고 했다는 건가? 정말 죽는 일 없는 거 맞아? 이거 누구 한 명 잘못 걸리면 진짜 그 자리에서 훅 가겠는데?

마(?)에 대항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테스트하는 실습이라면서, 이런 트랩 따위에 볼품없이 탈락해버리면 대체 무슨 소용……

“……”

마(?)에…

마(?)…

그래─.

내가 느꼈던 감각은, 마물(?物)들의 영향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대충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미궁에 마물이 도사리고 있다면, 사이한 마기(??)가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으니까. 그런가. 그랬던 건가. 미궁에 들어왔을 때부터 계속 품고 있었던 불안감의 일부가 약간이나마 해소된 기분이 들었다.

미궁을 돌파하는 게 우선이다.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그 목표에만 집중한다면, 더 이상 내가 불안해할 이유는 없다.

깊숙한 곳으로 가다 보면 언젠간 같은 반 애들과 만나게 될 수도 있겠지만, 만일 유리와 마주치게 된다면 가급적 길을 돌아갈 거다.

일단 대략적인 지도는 머릿속에 그렸다.

좋아.

이제 진짜 간다.

──피융!

무언가 내 기감에 잡힐 때마다 조심히 즈려밟지 않고 뛰어넘어 건너가거나, 때로는 돌멩이를 던지며 트랩을 발동시킨 뒤 안전한 루트를 확보하고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이따금 마력의 실 같은 게 아닌 발판 스위치로도 발동하는 경우가 있던 까닭에, 발바닥이 아래로 꺼졌단 느낌을 받자마자 곧바로 몸을 날려 대가리에 날카로운 화살촉이 꽂히는 걸 가까스로 회피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그로부터 겨우 몇 개의 트랩을 거쳤을 뿐인데, 벌써 심력이 삼분지 일 가까이 소비된 듯한 탈력감이 몸을 적셨다.

이런 게 있다면 조잡한 방패라도 미리 지급해 주든가. 변변찮은 무기도 없고. 대체 뭐 하자고 우릴 맨몸으로 내던진 거지?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빌어먹을, 설치된 트랩 발굴에 너무 집중하느라 머리가 다 지끈거려서 괜한 신경질까지 나는 모양이다.

“후우… 쓰읍.”

서늘한 외벽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고, 바싹 메마른 입가를 침으로 적신 채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같잖은 짜증으로 지체할 시간이 없다. 이럴 시간에 한 걸음이라도 더 옮기는 게 이득이다. 이를 바득 갈면서 등허리에 매단 배낭을 고쳐 메었다.

그렇게 정확히 십 분 뒤.

쭉 이어진 통로 가운데에 뚫린 길을 돌아 들어가니, 그곳에서 분명히 느낄 수 없었던 존재감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시발.”

─그으아아아아!

이런 개 미친 새끼들.

아무것도 없는 벽에서 불쑥 소환될 거면, 내가 지금까지 뭐 하러 이렇게 공들여 탐색을 하고 있던 건데!

#6

──피융!

제 몸집 만한 배낭을 등허리에 멘 금발의 소녀는, 굼뜬 몸을 미처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

무심코 사뿐하게 밟아버린 것이다.

아주 얇은 실가닥을.

소녀의 사정은 봐주지 않는다. 외벽에 파묻힌 디스펜서에서 발사된 화살은, 공기를 가르고 찢으며 무자비하게 짓쳐들었다.

쐐애애액─!

화살촉이 소녀의 머리를 겨눈다.

그중에서도 매끈한 이마 정중앙.

이대로 꿰뚫리는 순간.

시뻘건 핏물이 부왁 솟구치고, 가냘픈 몸은 힘없이 뒤로 넘어가 고꾸라질 것이다.

그 모든 미래가 화살을 마주한 소녀의 머릿속에 번갯불처럼 스쳐 지나갔다.

홱.

굳어버린 채 결국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소녀는── 이미 늦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머리 대신 손을 내주기로 했는지, 재빠르게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보호했다.

──라고, 미궁 밖 관객들은 그리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소녀는 자신의 머리통을 보호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도. 소녀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남지 않았다.

우우우웅…

소녀가 손을 뻗은 지점으로부터 정확히 일 미터 앞, 분명히 발사되었을 화살은 허공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잠시간 그러고 있던 화살은 곧 맥없이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스윽­. 소녀도 그에 따라 들고 있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정말 찰나의 순간.

에픽 클래스 1학년 2번, 유리 폰 아르티나는 기지를 발휘해 자신의 염력으로 화살을 멈춘 것이었다.

──과연, 대단한 순발력이다, 라고 미궁 밖 관객들은 하나같이 감탄했겠지만.

‘주, 주주주주죽을 뻐뻐뻔했, 다…… 아.’

우연이다.

유리는 지금 기겁하다 못해 졸도할 지경이었다.

입장하긴 했는데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자기 혼자고, 안 그래도 무서워 죽겠는데, 방금은 서늘한 죽음이 목전까지 달려왔다.

무서움을 떨쳐내고자 명랑하게 걸음을 옮겼지만, 그 탓에 주변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자리에서 다리를 후들거리며 간신히 서 있는 것도 고작이다. 힘이 풀려 이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반쯤 오금을 접었다. 그러나 결코 무너지는 일 없이 꿋꿋하게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랬다. 유리는 장했다. 지금쯤 밖에서 유리의 모습을 보고 있을 아르티나 국왕과 왕후의 눈가에는 대견함의 눈물이 그렁거리며 차올라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배낭이 생각보다 무거워서 끙끙거리고 있는데, 염력으로 그냥 띄우고 갈까 싶어 자세를 고치는 그 사이에 트랩을 밟아버린 거다.

자비 없는 화살은 그 즉시 날아들었고, 유리는 하마터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

실습이고 뭐고 이미 유리에겐 이 모든 것이 현실이었다. 조언? 핵심?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뭔데. 그거 어떻게 써먹는 건데. 모르겠고 일단 나 좀 살려주면 안 될까…?

새파랗게 질린 안색에서 투명한 공포심이 배어 나왔다. 더불어 유리의 눈가에도 구슬 같은 물방울이 찔끔 맺혔다.

왕성의 온실 속에서 귀하게 자라온 몸으로선, 찰나의 실수가 곧 죽음으로 직결되는 냉혹한 환경에 제대로 적응할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었다.

‘이, 이런 걸 이틀 동안 하라고……?’

이제야 초입이다. 아직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안 지났다. 유리는 배낭끈을 꽉 붙잡고 아랫입술을 바짝 끌어올려야만 했다.

사무치게 춥고, 어둡고, 외롭다.

곁에 누군가라도 있었다면 그나마 안심이 되었을 텐데, 유리는 지금 완벽하게 혼자였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어른이라면 어떤 위기가 닥쳐오더라도 응당 혼자서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리였지만, 그것도 좀 경우라는 게 있지 않을까. 생존이고 제단이고 뭐고 유리는 일단 사람을 찾고 싶었다.

─ 그으으으……

응. 그래도 말야.

기왕이면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네…

‘오, 오빠아……’

두 개의 달이 떠오른 푸르스름한 하늘과, 길을 잃은 망자(?者)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어둠의 미궁 속, 유리는 턱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겨우 삼키며 본능적으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이의 존재를 간절히 찾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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