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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46화 (146/201)

〈 146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5)

* * *

#9

─ 그으으윽……

쭉 찢어진 입가에서 피가래가 끓는다.

화염구를 몇 번이나 얻어맞고 완전히 불에 타버린 채, 잿더미가 되어 검게 그을린 몸을 지면으로 털썩 떨어뜨린다.

“…흐으으.”

마력의 흐름을 읽었을 때 마물이 소환될 거라고 진즉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혐오스러운 흉물이 모습을 드러내자 냅다 화염구를 갈겨버린 것이었다.

결국 구울은 등장한 지 삼 초 만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기껏해야 뭉개진 손가락을 한번 까딱였던 게 전부였다. 다만, 그 마지막 몸짓만큼은 루비아의 뇌리에 선명히 각인되어 있었다.

“으… 으으……”

마물의 입장에서 보면 문답무용으로 화염구를 갈겨버리는 루비아가 공포의 대상이겠지만, 정작 루비아는 참을 수 없는 두려움에 눈물을 찔끔 흘릴 것만 같았다.

구태여 횃불에 불을 붙일 필요도 없이 마법으로 길을 밝히며 나아가고 있긴 하지만, 분위기가 너무 무섭다…

어깨가 와들와들 떨린다. 오싹함 내지 추위가 루비아의 전신을 슬금슬금 휘감았다. 당장 귀를 틀어막고 쪼그려 앉아 눈을 꼭 감고 싶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게 무섭고, 뒤로 물러나는 것도 무섭다. 그냥 이대로 이 자리에서 제한 시간이 다 될 때까지 버티고 있으면 안 될까. 아니면 어디 안전한 장소라도 찾고 싶은데. 추측건대 아마 그런 장소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우… 우우우……”

어딘가에 눌러앉아 비겁하게 시간을 죽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겠으나, 별로 추천하지 않는다던 감독관의 말이 떠오른다.

그렇게 말한 이유가 반드시 있겠지. 분명 한 자리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무슨 패널티가 생긴다거나, 마물이 그 주위로 몰려든다거나. 좌우간 올바른 선택이 아니라는 것쯤은 루비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계속 전진해야 한다는 건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닌걸……

스윽…

축축하고 서늘한 외벽에 손을 얹고, 마력의 흐름을 읽는다. 탐지할 수 있는 최대 범위까지 넓혀서, 구조를 약간이나마 파악한다.

루비아의 머릿속에 둥그런 지도가 떠오른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지도다. 하지만, 조금씩 공간을 채워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길이 막혀. 오른쪽…… 도 길이 막혀 있어. 어라. 어떻게 된 거지? 둘 다 막혀 있다고? 그럼 내가 길을 잘못 들었던 건가? 다시 뒤로 돌아가야 하나……?’

이상하다. 여기서 막히면 안 되는데. 잘못 파악했을 리가 없는데. 그럼 기껏 만들고 있던 지도에 심각한 오류가 생겨 버린다. 전부 갈아엎고 처음부터 수정을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닥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에 순간 루비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루비아가 지금 이렇게 겁을 먹고 있긴 하지만, 사실 미궁의 돌파 속도는 매우 빠른 편이었다.

마물이 나타나면 비명을 삼키며 빠르게 태워버리고, 함정에 걸렸을 때는 상시 발동하고 있는 실드로 가볍게 튕겨내니, 상처 하나 없이 중심부를 향해 순조로이 걸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미 꽤 많은 길을 지나왔던 참이다. 여기서 길이 막혀 버리면,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 잘 모르게 된다.

킁, 하고 코를 들이키며 루비아는 결심을 굳게 다졌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다. 뭐든 해야 한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터벅…

조심히 주변을 살피고, 루비아는 다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그 가운데 길로 향한다.

아득히 높고 단단한 외벽. 루비아가 모든 마력을 소진한들 이 외벽만큼은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할 것처럼 무척이나 강도가 높다.

벽을 부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벽을 타고 올라갈 수도 없다. 물론 바람 계열 마법을 이용한다면 높이 떠오를 수는 있겠으나.

─ 파지지지직.

이렇게 마력의 덩어리를 하늘을 향해 쏘아 올려보면, 딱 외벽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력이 소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결계라는 것이다.

결국 천장이 뻥 뚫려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막혀 있다. 그러니 높은 곳에 올라가 미궁의 구조를 단번에 파악한다는 발상의 실천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어떻게 하지……’

루비아는 한쪽 손을 가슴에 얹은 채 외벽에 손을 대어봤다.

양쪽 길이 전부 막혀 있다면, 남은 건 여기밖에 없는데. 루비아 본인이 파악한 루트가 틀리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정말로 실수한 걸까. 이대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그건 진짜로 싫은데. 어쩌지. 어떻게 하지. 조금 더 생각해보자. 천천히, 침착하게.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루비아는 눈을 감고 흐름을 읽었다.

무수한 정보가 범람하며 쏟아진다. 함정의 위치. 소환진의 개수. 소환진에 담긴 마력량. 밟아서는 안 될 발판 등등. 루비아는 그것들을 전부 파악하고, 뇌내 지도에 촘촘히 그려 넣었다.

그리고 일시에 분석한다. 어디로 향하는 게 올바를지. 지금 본인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실로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마나 감응력이 빛을 발한다. 1학년 학생들 중에서 오직 루비아만이 가능한 기예였다. 말인즉 루비아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우우우웅……

이질적인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무언가,

숨겨져 있다.

‘찾았다.’

오른쪽 외벽의 어느 구석, 자기 혼자 외벽을 구성하고 있는 마력의 성질이 다른 부분이 있었다. 자칫하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너무 꼭꼭 잘 숨겨놔서. 하지만 결국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그렇구나. 내가 틀리지 않았던 거구나. 걸음을 헛되이 하지 않아도 되는 거구나. 루비아는 그 사실이 마냥 기쁠 뿐이었다.

‘대, 대충 저쯤인가…?’

숨겨진 장치를 가동시키는 방법은 아마 저 이질적인 부분을 꾹 누르는 것일 터다. 일종의 스위치인 셈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긴 하지만, 까치발을 들면 간신히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우…”

다행이다. 이제──

─ 쿠구구구……

‘어라?’

으에? 하고 루비아가 입을 작게 벌렸다.

아직 자기는 두 발짝 정도밖에 움직이지 않았는데, 눈앞의 외벽이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아래로 움푹 꺼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야?

“어? 어?”

슬그머니 뒷걸음질마저 친다.

뭐야, 난 아무것도 안 건드렸는데? 이게 왜 혼자 열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치를 건드렸나? 그럴 리가 없는데? 어라?

─ 쿠구구구구……

루비아는 일단 육중한 철문이 내려앉듯 좁은 간격으로 생겨나기 시작하는 통로의 주변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났다.

맹세컨대 루비아 자신이 장치를 가동한 건 아니었다. 그럼 대체 누구란 말인가. 여기엔 자기 말고 아무도 없는데. 순간 오싹한 소름이 루비아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루비아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히 손을 들었다.

─ 우우우웅…!

손끝에서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한다.

저 안에서 갑자기 뭐가 나올지 모르니까──

“!”

마침내 통로가 완전히 열리고.

─ 콰아앙!

먼지구름이 완전히 걷히기도 전, 새로이 개방된 길로부터 검은 신형이 포탄처럼 쏘아져 루비아에게로 달려들었다.

“───?!!”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였다.

먼지구름을 뚫고 나타난 존재가 루비아의 실드를 강타했다. 쿠우우웅─!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뻗어 나가고, 일대가 무겁게 진동했다. 가속까지 받은 탓에 한층 강화된 괴력이 루비아를 덮쳤다.

영창을 미리 외고 있어서 망정이지.

조금만 더 늦었다면……

─ 쩌적, 쩌저저적!

실드가 깨지려고 한다.

루비아는 경악을 삼켰다.

‘뭐, 뭐 이런 마물이 다 있어­?!’

어쩐지 그동안 너무 쉽게 처리한다 했다. 갑자기 난이도가 확 올라갔다. 그래도 이건 좀 너무 갔지 않나 싶을 정도였다. 실드가 깨져 버리면 일시적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질 거다. 그틈에 마물이 확 치고 들어오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당해야만 할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다. 한 가지 마법은 약식을 사용하고, 이중 영창을 준비하는 수밖에. 루비아는 급히 다음 마법을 준비하려다가──

‘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실드는 그대로 유지한 뒤, 잽싸게 외쳤다.

“자, 자자자자잠깐만­!”

“……?”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사위를 뒤덮었던 먼지구름이 그제야 사라지고, 루비아와 마물은 마침내 서로를 마주했다.

파캉─!

가까스로 유지하던 루비아의 실드가 마침내 유리처럼 깨졌다. 그러나 마물로부터 후속타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

“지, 진짜, 진짜 깜짝 놀랐네……”

후우, 후우… 히끅.

루비아는 딸꾹질까지 하며 숨을 골랐다.

“너, 너, 날 죽일 셈이었어……?”

당연히 마물인가 싶었더니,

사람이었다.

“……쯧.”

“쯧?!”

순간, 아쉬운 기색이 언뜻 눈동자에 스쳐 지나가는 것도 같았다. 마물의 피인지 자신의 피인지 모를 액체가 의복 여기저기에 묻어 있다.

새하얗고 창백한 뺨을 손등으로 슥­ 훔치더니, 무기질적인 눈으로 반쯤 주저앉은 루비아를 내려다본다.

한쪽 손에는 길쭉한 창대가 들려 있었다. 낡고 부식된 나무 창. 원래 마물의 것이었던 무기를 빼앗아 쓰고 있었다. 창끝은 썩은 살점과 마물의 피 등으로 질척거리며 범벅이 된 채였다. 꽤 악취가 심한 물건이었지만, 소유주는 그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없는 듯했다.

달빛을 등에 업은 채 아무 말도 없이 자길 내려다보는 뮤를 마주하고 나서야, 루비아는 비로소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새로운 길을 연 것은 루비아가 아니라 뮤였다. 반대쪽에도 장치가 있었고, 뮤가 그 장치를 가동한 것이었다. 그러니 자기가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길이 열렸다. 그런 흐름이었다.

어떤 방식으로 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제 와서 그건 딱히 상관이 없었다.

‘뭔가 반가운데, 반갑지 않아……’

일단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어서 되게 화색이 돌긴 하지만, 막상 그 대상이 뮤라는 사실에 그렇게 기쁘지도 않았다. 아직 둘 사이에 자리한 감정의 골은 그다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연무장에서의 싸움 이후로 일시적인 협력 관계도 해제하고, 둘은 각자의 방식으로 에지오를 찾아다녔었다.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한참 침묵하던 뮤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이 길은 어떻게 찾고 연 거야?”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정말이었다. 되는대로 쑤시고 다니다가 우연히 스위치를 눌렀을 뿐이다. 뮤는 굳이 그 사실까지 언급하진 않았다. 말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까닭이다.

“뭐, 됐고. 열긴 열었는데 네가 있을 줄은 몰랐네. 그 뒤에서 뭐 알아낸 거 있었어?”

“어? 어…… 글쎄, 일단 내가 지나왔던 길은 계속 따라가다 보면 어딘가에서 막히게 되어 있고, 그래서 아마 지금 네가 나왔던 길이 제대로 된 루트라고 생각하는데……”

“흐음.”

그럼 여긴 맞는 길이 아닌가. 뮤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루비아를 놔두고 무심하게 등을 돌렸다.

“……!”

그러자.

“자, 잠깐만!”

“……”

우뚝.

뮤가 돌연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 잠깐 기다려 봐.”

“……뭔데.”

“너,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거야?”

“아니.”

칼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는 너는 알고 있는 거냐는 듯, 그제야 뮤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완전히 뒤돌아보지는 않은 채로.

루비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난… 조금 알아. 범위가 그렇게 넓진 않지만 벽이나 함정의 구조를 살짝 읽을 수 있거든.”

“……그래서, 뭐?”

이게 참 스스로도 꺼려지는 말과 행동이긴 했지만, 아무렴 위기 상황에 자존심을 지키는 것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 어차피 우린 이틀 동안 여기 있어야 하잖아…? 와중에 하룻밤도 지새워야 하고, 컨디션 생각하면 잠을 자야 하는데 잘 때는 당연히 무방비 상태에 놓일 거고. 자다가 마물한테 습격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고. 아직 안전한 장소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

“그동안 어디서 무슨 위험이 생길지도 모르는데다가, 지금까지야 너 혼자서도 잘해왔을 수도 있겠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마물들도 강해질 거야. …너도 느꼈지? 중심부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조금씩 난이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거.”

“……”

글쎄. 뮤는 잘 몰랐다. 그냥 눈에 보이면 죄 죽이고 봤으니까. 루비아의 말처럼 돌이켜 보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큰 공감까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뭐.”

때문에 시큰둥한 반응을 내보일 뿐이었다.

스윽…

루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을 딛고 선 뒤에, 배낭을 고쳐 맸다. 그리고는 개미 기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가, 같이 가……”

“……”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뮤의 얼굴에, 비로소 한심하단 기색이 역력해지는 순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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