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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47화 (147/201)

〈 147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6)

* * *

#10

으적… 으적…

앉아서 쉬고 싶어도 그럴 틈이 없다. 벽에 등을 기댄 채로 배낭에서 꺼낸 식량 주머니를 열어서 꺼내 먹었다. 그냥저냥 먹을 만한 것들이었다.

쉽 비스킷이나, 말린 과일이나, 육포라든지.

주머니 안에 무더기로 들어 있긴 했지만 양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러니 최대한 아껴 먹어야 한다. 굶어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만 먹으면 된다. 확─. 손바닥에 남은 부스러기까지 대충 전부 털어 넣고, 으적거리며 메마른 입속을 식수로 세척했다.

“크으…”

괜찮네.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다른 애들이야 어떨진 잘 모르겠지만. 대부분 가문에서 좋은 것만 먹고 자랐을 테니까. 죄 고급으로 길들여진 탓에 입맛이 꽤 까다로울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나. 살기 위해서라면 뭐든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이 기회에 모두 확실히 깨우칠 테지.

물론 전쟁도 종식된 마당에 전투식량을 먹을 일이 뭐가 있겠냐만은. 세상사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노릇 아니겠는가.

꽈아악.

식량 주머니의 입구를 단단히 동여맨 뒤, 배낭 속에 도로 집어넣곤 벽에서 등을 떼었다.

잠깐의 휴식 이전 바닥에 내려놓았던 방패를 들고, 오른손에 칼자루를 꽉 쥔다.

몇 번 쓰고 나니 방패도 곧 부서질 기미를 보이고 있었지만, 아직은 버릴 때가 아니다. 두어 번쯤은 더 막아낼 수 있을 것 같다.

확실히 무구를 구하고 나니 미궁의 돌파 속도도 훨씬 빨라졌다. 방패의 경우에는 화살 함정을 막아낼 때도 굉장히 용이하고.

실습을 시작할 때 각자 무기를 지급해주지 않았던 이유가, 마물로부터 뺏어 쓰라는 의도였을까. 그럼 너무 악질인데. 도대체가 무슨 생각들인지……

‘이제 대충 여섯 시간쯤 흘렀나?’

시계가 없으니 시간을 확인할 수도 없다. 광활한 하늘을 올려다봤자 두 개의 달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였다.

체감상 여섯 시간 정도 흐른 것 같은데. 실제로는 세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매 순간이 전진, 전투, 휴식의 반복이다 보니 여유를 가질 틈조차 잘 생기지 않았다.

지도는 없다. 그러나 지나온 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되도록이면 헛걸음을 하지 않도록 나아가는 중이었다.

─ 파스스스슷!

갈림길에서 오른쪽을 선택한 찰나, 저 높은 곳으로부터 무언가 검고 커다란 것이 벽을 타고 내 머리 위로 내려온다.

여러 개의 다리가 무척 빠른 속도로 꾸불거리며 움직였다. 촘촘히 박힌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난다. 검은 털로 온몸이 수북하게 뒤덮인 거대 거미가, 외벽을 타고 내려오다 중간 지점에서 파악─! 하고 내게 날아들었다.

─ 찌이이익!

거대 거미가 얇고 길다란 거미줄을 뿜는다.

저 새하얀 실은 보기엔 잘라내기 쉬워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요령이 없으면 칼날조차 가볍게 튕겨내 버린다. 여기서 처음 거대 거미와 마주했을 때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인지라, 결코 허투루 상대하지 않았다.

홱─! 방패를 높이 들었다. 거미줄이 방패에 착 달라붙는다. 거대 거미가 멈추지 않고 내 머리 위로 쇄도한다. 톱니 같은 것이 달린 입에서 짙고 끈끈한 점액질마저 분비한다.

방패로 점액 분사를 막아내자 부식의 정도가 더 심해진다. 쩌저적─. 결국 내구도를 다한 방패가 반으로 쪼개져 부서지려 하는 찰나에, 그것을 옆으로 힘껏 내던졌다.

콰아앙!

벽에 부딪힌 방패는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 끄기기기긱­

방금까지 방패와 이어져 있던 거미줄과 함께 거대 거미가 옆으로 딸려 나간다. 직선이 아닌 대각선으로 하강하기 시작하는 거대 거미. 중간에 스스로 실을 잘라낸 것 같았으나,

이미 늦었다.

스걱──

─ 끄이이이이익!

곡도를 휘둘렀다. 새하얀 반월이 허공에 새겨졌다. 거미의 머리가 댕겅 잘려 나간다.

순간, 거대 거미가 듣기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뭔 놈의 마물 비명이 저런지. 내 얼굴이 작게 찌푸려졌다.

독성 있는 분비물이 후두둑 떨어지기 전에, 급히 뒤를 향해 도약하자 방금 내가 있던 자리로 푸른 피가 쏟아졌다.

일단 한 마리 해결.

“후우.”

최대한 칼날에 분비물이 묻지 않도록 했는데, 결국 몇 방울이 튀어 버리긴 했다. 이러면 날 금방 나갈 텐데. 마법으로 빠르게 씻어내긴 했지만 슬슬 이 곡도도 버릴 때가 온 것 같다. 빨리 무기를 든 마물이 나타나야 할 텐데. 어째 그 이후로 소환된 적이 없었다.

‘이제 움직일까.’

강인한 체력은 내가 여기서 지치지 않고 다음 통로로 쭉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원래 향하고 있던 오른쪽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터벅… 터벅…

이 짓도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차츰 익숙해졌다. 고독한 분위기에도 얼추 적응했고. 마물을 써는 것도 의외로 재밌었다. 정말로.

전투의 흥분에 몸이 달아올라서 잠시 실수를 할 뻔했던 적도 있었지만, 잃어버린 침착성을 되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저 막아내고, 찌르고, 베어냈다. 벌써 스물은 족히 상대한 것 같은데 말야.

어쩌면 지금 내 뇌리에 남아 있는 희미한 기억들이 은연중에 도움이 된 걸지도 모르겠다. ‘시련’의 종류는 여러 가지였으니까.

실제로 겪어보지도 않은 전투 경험이 어느샌가 내 안에 스며들어 있었다. 반쯤 본능에 따른 동작들이 대부분이긴 했었지.

며칠 전 검술 시험의 끝물에서 아벨의 공격을 감지해냈을 때처럼, 정말 뭔가 달라진 것을 느끼고 있다. 이 역시 여러 가지로.

“…뭐야.”

잡생각에 오래 빠질 여유는 없었던 까닭에, 금방 정신을 차리고 보니 탁 트인 공간이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하늘을 뚫을 듯한 외벽의 높이는 여전하지만, 이어지는 통로 없이 정사각형으로 꽉 막혀 있는 공간이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내가 벌써 미궁의 최중심부로 들어온 건 아닐 테고. 그럼 ‘제단’이 있는 곳도 아닌데. 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넓은 공간이 미궁 속에……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중얼거렸다.

“……좆됐다.”

그거야,

당연하잖아.

빨리 여기서 나가야──

─ 쿠구구구……

안 된다. 무리다. 이미 경계선을 넘어 버렸다.

정사각형으로 둘러싸인 룸에 반쯤 들어왔을 때, 내가 들어왔던 길이 단숨에 단단한 벽으로 틀어막혔다. 나갈 구멍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안에 완전히 갇혀 버린 거다.

번개 같은 소름이 등줄기를 쫙 내달리고, 미끌거리는 손바닥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함정에 빠졌다.

파아아아앗─!

발 아래 발판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반적인 마물의 소환진처럼 작은 크기가 아니었다. 그때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느껴지는 마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다. 눈앞이 아득한 절망으로 새카맣게 물드는 듯했다.

고오오오……

공기를 비롯한 일대가 무겁게 진동하고, 내가 밟고 있는 발판이 옅게 흔들렸다. 그에 따라 내 심장도 쿵쿵거리며 크게 맥동한다.

내구도가 거의 다해 쪼개지기 직전인 곡도를 덜덜 떨리는 눈으로 내려다본다. 지금까지 꽤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웠던 무기가 한없이 나약해 보인다. 이걸로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무것도 못──

『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포효가 울린다.

사위를 뒤덮었던 빛이 점차 사그라지는 시점에, 거대한 소환진의 한가운데서 태산 같은 거구가 육중한 몸을 일으킨다.

나는 말을 잃었고.

쿵──

단 한걸음에 내 다리가 흔들렸다.

푸쉬이이익─. 먼지 속에서 나타난 그것이 거칠게 콧김을 뿜었다.

불길하게 일렁거리며 번쩍이는 안광을 마주하려면, 나는 고개를 거의 직각으로 꺾어야만 했다. 그 정도로 거대하고, 또 거대했다.

저 비늘 돋은 손바닥으로 날 후려치면 벽으로 날아가 그대로 절명할 거란 확신이 들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의 마물이 내 앞에 마주 선다.

『크르르르르르…………』

어둠을 좀먹은 듯 온통 시꺼멓다. 그러나 양옆으로 박힌 눈동자만큼은 붉었다. 쩍 벌린 턱 안으로 흉악스러운 이빨들이 매섭게 돋아나 있다.

푸쉬이이익─. 마물이 다시 한번 열기 어린 콧김을 뿜는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동공이 마침내 나를 향한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바닥을 딛고 선 두 개의 다리. 세 쌍의 발톱. 몸체로부터 길게 늘어진 꼬리가 지면을 쓸고 있다. 두꺼운 핏줄이 꿈틀거리는 팔뚝 끝에, 내 몸통만 한 손바닥이 네 쌍의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갈기처럼 돋아난 뿔이 불규칙한 간격으로 마물의 등골에 박혀 있었다.

도마뱀이라 보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나 거대하다. 더없이 흉포하고, 포악하며, 흉악하다. 한낱 인간은 저 포식자의 손짓 한번에 갈기갈기 찢기고 내장이 죄 뽑혀 나갈 터다.

고위(高?) 마수.

벨카로스.

서적에서 딱 한 번 지나가듯 보았던 이름이 뇌리를 스치는 것과 동시에, 내 앞에 있는 마물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

손도, 발도, 이빨도, 어느 무엇도 거대한 크기에 비해 홀로 왜소하게 딸려 있을 뿐인 장식 같은 날개 한 쌍을 보았다.

박쥐의 모양을 닮은 날개.

마족(??)의 상징.

두근──

그걸 본 순간.

──꿈틀.

있을 수 없는 증오심이 솟구쳤다. 시야가 시뻘겋게 물들고, 곧 입이 쩌억 벌어지면서 영문 모를 괴성이 튀어나왔다.

콰앙─! 진각을 밟았다. 두려움에 잠깐 주저했던 발바닥이 너무나 쉽게 떼어지고, 내 몸은 어느샌가 허공을 날고 있었다.

날카로운 바람이 볼을 할퀸다. 이를 악물자, 꽉 쥔 칼자루가 부서질 듯 몸을 떨었다. 시꺼먼 형체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내가 나를 제어할 수 없었다.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다. 새하얗게 물든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목표만이 떠오른다.

저 마족을,

죽여야 해.

『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불빛이 반짝였다.

다음 순간, 무슨 생각인지 나는 무기를 버렸다. 땅에 내던졌다. 빛살같은 속도로 바닥을 박차고 달려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자 욱­ 하며 뇌가 진탕 흔들리고, 내부에서 무언가 훅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파아아앗─!

틈새로 새하얀 빛무리가 빠져나온다. 눈부신 빛이 내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경로는 동일하다. 오로지 직진. 직진. 내 앞에 마족이 있다. 그것만 알고 있으면 된다.

후우우웅─! 마족이 상체를 꺾는다. 비틀린 허리. 마족의 거대한 손이 나를 덮치려 든다. 피할 법도 하건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돌진했다. 팔을 들었다.

검은 손과 새하얀 주먹이 맞닿았다.

그리고.

퍼엉────!!

마족의 팔이 폭죽처럼 터졌다.

『크오오오오오오오───?!!』

검붉은 핏물이 비처럼 쏟아진다. 육중한 몸체가 뒤로 넘어간다.

쿠구구궁─.

새빨간 핏물을 온몸으로 덮어쓰며, 타악─! 마족의 다리를 밟고 올라간다. 대기를 진동시킬 만큼 쩌렁쩌렁한 포효에 귓전이 저릿했지만, 이미 나는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 상태였다. 즉, 이성을 잃었다.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후웅, 후우웅. 마족이 몸을 뒤튼다. 격한 움직임에도 내 몸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등허리를 밟고 내달려서, 첫 번째 뿔이 달려 있는 위치로 빠르게 올라갔다.

어깻죽지에 달려 있는 한 쌍의 날개.

재차 솟구치는 거뭇한 증오심에 주먹으로 후려치니, 펑── 하고 찢기며 날개가 터져 나갔다. 마족이 또 다시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부족해. 아직 부족해. 더, 더. 너희는 더 고통스러워해야 해. 마족이 더욱 격하게 몸을 뒤틀었다. 뿔을 붙잡고 균형을 유지했다.

팔을 아래로 확 당겨 순간의 반동으로 뛰어오른 뒤, 허리를 반 바퀴 비틀고 빛무리에 감싸인 주먹을 어깨 뒤로 넘겼다.

이번에는 머리였다.

───콰지지지지지직!!

새빨간 폭죽이 터졌다.

조각난 마족의 머리가 공중으로 비산했다. 핏물과 뇌수 등이 후두둑, 하고 쏟아졌다. 마족의 비명은 더 들려오지 않았다.

꽈아악.

목 위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고꾸라지기 시작하는 마족의 몸체 위에서, 나는 주먹을 거두고, 아니, 거두지 않고 연거푸 아래를 향해 내리쳤다. 콰직─ 콰지직──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비늘이 부서지고 뿔이 꺾인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콰직. 콰지직. 콰직. 콰지직. 두 번, 세 번, 다섯 번, 일곱 번, 스무 번───

그리고.

“……!”

이젠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고깃덩이처럼 뭉개진 마족의 몸뚱아리가, 어느 순간 강하게 터져 나온 빛무리에 감싸이더니.

─ 파사사사……

입자로 화해 허공에 스며들었다.

후우웅─. 마족의 등허리 부근에 있던 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타악─. 낙법으로 구르고 나서, 자세를 바르게 다잡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마족의 사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내가 만든 피웅덩이도 보이지 않는다. 시선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리니, 피에 푹 젖어 있던 내 의복도 어느샌가 입장 전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대체로 깨끗하다. 얼룩이 조금 졌을 뿐.

“……”

손을 쥐었다 펴봤다. 분명 감각은 남아 있는데, 모든 게 환상처럼 느껴졌다. 한참 멍하니 손을 내려다 보다가.

“욱. 우우욱. 으웨에에엑­.”

허리를 꺾고 바닥에 손을 짚었다. 참지 못하고 그대로 토사물을 게워냈다. 살면서 이만큼 구역질이 난 적이 없었다. 누가 뇌를 헤집어 놓은 것처럼 어지럽고, 메스껍고, 끔찍했다.

대체,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윽, 으으윽……”

그렇게 한참 토악질을 하다가, 어느 순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로 엎어졌다. 진한 탈력감이 심신을 해일처럼 덮쳤다. 허억, 허억. 맥동하는 심장에 손을 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뭐가 어떻게 됐던 거지. 도저히 정리가 안 된다. 허황된 꿈이라도 꾼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마족의 날개를 보자마자 눈이 돌아가서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뭐냐고, 대체.

쿠구구구……

그제야 닫혔던 벽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물을 처치했기 때문일까. 그건 기쁜 소식이었지만, 당장 움직일 힘이 없었다. 잔뜩 흥분한 몸을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러다 과호흡 오겠다. 아니, 이미 왔나…우선 차분하게 심호흡을 하면서 거친 숨결을 가다듬었다.

짜악.

의식이 순간 끊기듯 멀어지나 싶었지만, 뺨을 후려치며 정신을 일깨운 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배낭은 언제 내던졌는지 저 멀리 날아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식량은 쏟아지지 않은 모양이다. 냅다 주워서 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후우우우우. 턱 막혔던 호흡이 일시에 풀리고,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일단, 해결한 건가.”

지금까지 마물의 시체들은 사라지지 않고 자리에 남아 있었다. 방금처럼 입자로 화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면 무기도 구할 수 없었겠지. 뭘 제대로 싸워 보기도 전에 때려잡아 버렸다.

실로 말도 안 되게 흉악한 존재감은 진짜였지만, 어쩌면 나는 고위 마수의 열화판 환영과 싸웠던 걸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가자.’

활짝 열린 통로를 노려보며, 깊숙한 어둠 속으로 계속해서 나아갔다.

#11

“네비로스 공, 자네 제정신인가? 내 살다살다 고등부 1학년 학생이 고위 마수를 상대하게 만드는 시험은 처음……”

“진정하십시오. 저 마수는 진짜가 아닙니다.”

“……무어라?”

“제가 만든 미궁에 실제로 배치된 고위 마수는 단 한 마리뿐. 저 벨카로스는 인공으로 만들어진 환영입니다.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취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 벨카로스보단 훨씬 나약하고, 잘만 상대한다면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쉽게 쓰러뜨릴 수 있지요. 굴하지 않는 용기를 시험하기 위해 만들어진 하나의 관문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후우. 알았네.”

이번에도, 아르티나 국왕은 자리에 도로 착석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는지 모르겠다. 특히나 제 딸이 위험에 처할 것 같으면 더욱 그러한 빈도가 잦았다.

고위 마수라니. 저 흉악한 마물을 눈앞에서 마주할 제 딸의 심정이 어떠할지, 아르티나 국왕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심장마비로 목숨을 허망히 거두기라도 하면 어쩔 건가.

아르티나 국왕이 불안감을 키워나가든 말든.

고위 마수의 환영을 상대로 눈을 부릅뜨고 볼만한 광경을 연출한 에지오 크라닐에 대해서, 군중들 사이로 무수한 수군거림이 퍼져 나가는 중이었다. 확실히, 적잖게 충격적인 모습이긴 했다.

네비로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환영이라고는 해도 말이지­.’

그냥 툭 치면 쓰러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원래 저렇게 쉽게 때려잡아서는 안 될 마물이었다. 그런데도 에지오는……

‘아주 무서운 아이로구나.’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는가 싶더니, 겁내지 않고 마물에게 달려든 것도 모자라, 아예 곤죽을 만들어 놓았다. 보는 사람이 말을 잃을 정도로 잔인한 광경이 쭉 이어졌다. 살육에 미친 사람처럼, 마물이 거짓으로 죽고 나서도 계속 그 사체를 주먹으로 연거푸 터트렸다.

절대적으로 마(?)와 악(?)에 치명적인 능력. 그 찬란한 신성의 발현. 네비로스는 그 모든 걸 눈에 담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웃음기가 입을 억지로 비집고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신성이란, 어찌나 밝고 아름다운지.

동시에.

‘그것 보렴. 결국 너희들은 자유롭지 못해.’

그리 속으로 중얼거리며, 네비로스는 와인잔을 홀짝였다. 그런 다음.

아까부터 본인을 거슬리게 하는 아르티나 국왕의 중후한 옆모습을, 네비로스는 조용히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딸을 지극히 아끼는 아비와 어미라.

‘……곧 돌아가야 한다고 했었나?’

제 소중한 딸아이의 모습이 스크린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 궁금해졌다.

‘살짝 아쉬운데.’

물론,

그것은 저들이 돌아간 뒤의 일일 터였으므로.

네비로스는 아주 약간의 아쉬움을 느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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