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7)
* * *
#12
─ 츠즈즈즛, 츠즈즛.
─ 스팟!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 일그러지더니, 곧 누군가의 실루엣이 일그러진 공간으로부터 차츰 모습을 드러냈다.
“……카학!”
바닥에 엎드린 남학생이 마른기침을 토했다.
“켁, 콜록, 컥, 케흑, 흐윽……”
핏대를 세운 채 목을 붙잡는다. 고통스러운 신음에 한참을 이리저리 구르다가, 이내 제정신을 차리고 숨을 가다듬는다.
“컥, 커억……? 어, 어라?”
남학생이 미간을 좁혔다. 연신 켈록였지만 핏덩이가 섞여 나오지 않는다. 파들파들 떨리던 손을 들어 얼굴을 매만져본다.
‘머, 멀쩡해……?’
분명히 깨졌던 안경이 그대로 콧잔등에 걸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칼날에 의해 두 쪽으로 쩌억 갈라졌던 얼굴이 멀쩡하게 붙어 있었다.
즉,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이게…… 어, 어떻게 된……”
그때였다.
“10번, 하티 유레시안. 탈락이다.”
“……가, 감독관님?”
미궁 속 마물에게 ‘죽음에 가까운 일격’을 당해 결국 탈락한 하티 유레시안이, 의자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로베르 교수를 마주하곤 어벙한 목소리를 흘렸다.
천장 아래로 내려온 샹들리에가 인상적인 넓은 로비. 이어진 복도 양옆에 딸린 특실들. 로베르와 자신을 제외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하티는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저는……”
“그래. 네가 1학년 중에서 첫 번째 탈락자다.”
“……그렇군요. 하아…”
이곳은 탈락자와 완주자를 위한 공간이었다.
하티가 깊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 널브러졌다. 바닥을 딛고 일어날 힘이 없었다.
첫 번째라는 말에 살짝 기운도 빠지고 자존심도 꽤 상처를 입었긴 했지만, 그것보다도 멀쩡히 살아 있단 사실이 그렇게나 반가울 수가 없었다. 정말로 죽었다고 생각했다. 너무 현장감이 생생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대로 명을 달리하는 줄만 알았다.
로베르는 냉정히 평가를 시작했다.
“태도 관련 점수 총점 10점 중 3점. 자질 관련 점수 총점 30점 중 9점. 수행능력 관련 점수 총점 40점 중 12점. 정확성, 효율성, 협동성 등 기타 점수 총점 20점 중 7점. 특별 과제 미달성. 종합 점수 100점 중 31점. 지금까지 평가된 네 점수를 보았을 때……”
슥, 슥.
로베르 교수가 펜을 휘갈기고.
“10번 하티 유레시안, 네 1차 실습 결과는 ‘F’ 다. 이의 있나?”
“……없습니다.”
돌이켜 보아도 참 꼴사나운 짓만 골라 했던 것 같았기에, 하티는 일말의 부정도 없이 결과에 순순히 승복했다.
부모님을 비롯한 가문의 사람들에겐 면목이 없긴 했지만, 솔직히 미궁의 난이도가 너무 괴랄했기에 어느 정도 참작의 여지가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결과가 어떻든 수고했다. 아직 1차 실습이 종료되지 않았으니, 여기 열쇠에 적힌 호수의 방으로 들어가 쉬어라. 그리고 방 안쪽에서 아직 탈락하지 않은 네 친구들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거다. 그걸 보면서 네가 실수했거나 부족했던 점이 뭔지 스스로 반추하고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감사합니다. 감독관님.”
하티는 자리에서 겨우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인 뒤, 로베르가 건네준 열쇠를 받고 지정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털썩 누웠다.
로베르의 말대로 방 한쪽 벽면에 수정구를 통해 투사되고 있는 스크린이 보였다. 하티는 말없이 그것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하티가 멍을 때리며 그러고 있는 동안, 로비의 한가운데서 로베르는 의자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속으로 중얼거렸다.
‘첫 번째 탈락자가 발생했습니다. 주인님.’
곧 대답이 돌아왔다.
‘알고 있습니다.’
‘방으로 들어가 쉬게 했습니다. 지금 혼자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아무것도 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그대로 감독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으시길. 반드시 의심받지 않도록 하고요.’
‘알겠습니다.‘
‘아니, 조금은 티를 내는 것도 괜찮겠군요. 어차피 당신이 모든 뒷감당을 해야 할 테니까.’
‘개입할까요?’
‘으음, 생각해 보니 지금 당장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습니다. 아직 누구 한 명이 탈락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으니까요. 생각 외로 아주 잘해주고 있답니다, 다들. 이대로면 순조롭게 제단이 있는 곳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예, 주인님.’
‘한 명 더, 예의주시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느 학생을 말입니까?’
‘산뜻한 금발의 귀여운 여자아이.’
‘……금발이라 하심은.’
‘유리 폰 아르티나, 라는 이름이었을 겁니다.’
로베르는 눈동자를 굴려 유리의 실루엣을 찾았다.
그녀는 걷잡을 수 없는 공포에 질린 채 선뜻 나아가길 주저했던 초기의 모습과 달리, 마물을 염력으로 움직여 벽에 박게 한 뒤 죽이거나, 마물의 무기를 염력으로 빼앗고 조종하여 원거리에서 요격하는 등, 꽤 선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찾았습니다. 개입할까요?’
‘아뇨, 아닙니다. 그냥 지켜만 보세요. 말 그대로 예의주시만 하란 얘깁니다. 저 조그만 아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지. 두려움에 맞서 얼마나 열심히 발버둥을 치고 있는지. 가만 보고 있으면 괜스레 저도 아이를 갖고 싶어진답니다. 저도 모르게 나쁜 마음이 들어버릴 것 같아요. 후후.’
‘……’
로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명령을 따르는 것 이외에 개인적인 감상을 내뱉는 일 따위, 무엇도 허락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럼, 부분대로 저는 계속……’
‘아, 그전에 잠깐.’
‘예, 주인님.’
‘샤워는 제대로 하고 있나요?’
‘……예?’
‘냄새나잖아요. 썩은내.’
‘아직은… 의심받고 있지 않습니다.’
‘대답을 하세요, 대답을.’
‘씻고… 있습니다.’
‘하루에 몇 번? 마지막으로 씻은 건 언제죠?’
‘한 번 정도… 오늘은 아직입니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씻고 안 씻었단 얘깁니까?’
‘……씻고 올까요?’
‘당장.’
‘……’
‘더러워 죽겠어요, 아주.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시체도 관리를 하는 시대라고요.’
‘……’
네비로스가 말한 얘기의 진실 여부는 뒤로하고, 로베르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슬그머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었다.
#13
1학년 10번 하티 유레시안이 첫 번째로 탈락한 이후, 시간이 점점 흐름에 따라 하나둘씩 탈락자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11번 자스칼 폰 매그나스. 대체적으로 강인한 육체를 가졌지만 그만큼 민첩하지 못하다. 방패를 구비하지 못했기에 화살 함정에 팔뚝이나 다리를 꿰뚫리기 일쑤였고, 제 능력의 일부인 ‘재생력’으로 대부분의 상처를 메꾸긴 했으나 급소는 보호하지 못했다. 결국 실습 시작 일곱 시간 만에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12번 가일 웨하드. 아카데미 내부에서의 존재감처럼 특출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허망히 탈락.
6번 알드리에 캄비온. 향하는 길목마다 손쉽게 함정 파훼, 마물 ‘암살’ 등 묵묵히 우수한 기량을 보이며 선전하는 데 성공했으나, 에지오 크라닐이 당했던 함정에 빠지고, 암살이 불가능한 고위 마수의 환영을 감당하지 못한 채 그대로 탈락. 로비로 소환된 뒤 평소답지 않게 격한 아쉬움이 드러나는 얼굴을 보였다.
9번 카닐라 아메틴트. ‘주술’을 펼치기에 무척이나 적합한 환경을 맞이하곤 광인처럼 미궁을 활개하다, 눈먼 함정에 걸려 탈락. 직후 로비로 돌아와 음침하고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무언가 수확이 있긴 했던 듯, 점수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4번 루크 데 엔듀레스. 명망 높은 제국 엔듀레스 후작가의 장남으로써 실습 참관인들의 뭇 기대를 받았지만, 그만큼 잘 해내야 한다는 의식에 부담을 느낀 나머지 과잉된 행동력을 보이다 치명적인 실수 한 번을 저질렀고, 그대로 탈락했다. 실습 시작 이후로 열두 시간 만의 일이었다.
7번 사샤 엘네. 실습 시작부터 비명과 함께 민첩한 몸으로 도망을 다니다 벽에 가로막혔고, 겨우 빠져나간 뒤 마물을 몰고 다니며 안전한 장소를 찾다가 고위 마수의 환영이 위치한 함정에 빠졌다. 그 뒤 알드리에 캄비온과 동일한 방식으로 탈락. 로비에 소환된 직후 울음을 터트리며 한동안 벌벌 떨다 방으로 돌아가 그대로 취침에 이르렀다.
실습의 중간 점검 결과는 이 정도였다.
어느덧 날짜가 바뀔 즈음의 늦은 시각이 다가오자, 실습 참관인들의 구성이 바뀐 것은 물론이고 예정이 있는 이들은 미리 자리를 떠난 채였다.
그 결과 서른 명 정도였던 사람들의 숫자는 삼분지 일 이하로 줄어 있었다.
개중에는 아르티나 국왕과 왕후도 있었지만,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변경까지 이어지는 게이트를 향해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네비로스 공. 혹시나 내 딸아이에게 이번 실습에서 무슨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단 소식이 내 귀에 들려오기라도 하면……”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전하.”
“……프론티어에 있는 동안은 자네도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부디 알고 있길 바라네.”
“물론입니다. 후후.”
“……쯧.”
그들은 그렇게 떠났다.
남은 건 네비로스와, 일부 귀족들뿐.
그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것은 대체로 이랬다.
끝도 없이 거대한 미궁을 순조롭게 돌파해 나가는 에픽 클래스 학생들. 1학년과 2학년은 아직이었으나, 3학년 학생 중에는 벌써 ‘제단’에 도달한 학생도 나왔다. 언제나 수석의 자리를 놓치지 않는 학생이었다. 세이라 데 바이에른. 스크린 속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귀족들의 시선에는 늘 경이로움이 섞여 있었다.
세이라는 특별 과제를 3학년 학생들 중에서 가장 먼저 클리어했다. 그러니 만점을 받고 완주자를 위한 층의 로비로 소환되었다. 1학년들이 있을 장소와는 다른 층이었다. 먼저 탈락했던 3학년 학생들은 세이라가 당연히 탈락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에, 로비에 나타난 그녀를 보고선 하나같이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네비로스는 다시 1학년 학생들의 스크린을 본다.
그리고 약간의 웃음과 함께 와인잔을 홀짝였다.
너무 크게 일을 벌이는 것도 곤란하니, 네비로스는 딱 정해진 인원만 건드리길 원했다. 때문에 2학년과 3학년들은 대상에서 모두 제외되었다.
그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루트로 실습을 진행했다. 그러니 지금까진 아무도 이 실습의 문제를 지적할 수 없었다. 네비로스의 안배는 오로지 1학년 학생들이 배치된 공간에만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쯤, 네비로스는 눈을 어딘가로 돌렸다. 거기에는 연분홍빛과 흑빛의 컬러가 일부분 섞여 있었다.
─ 좀 떨어져서 걸어.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 가, 갑자기 너랑 나 가운데에서 벽이라도 솟으면 어떻게 해. 그럼 갈라지게 되잖아. 그리고 전에도 말했듯이…… 아, 알았어. 조용히 하고 있을게.
1학년들이 실습을 진행하는 도중, 루비아와 뮤라는 의외의 듀오가 결성되었다. 협동을 중시하는 듀오라기보단, 정말 필요에 의해 서로를 써먹는 비즈니스적 관계라고 보아야 더 정확하겠지만.
─ 너, 너 걸음이 너무 빨라서 쫓아가기 힘들거든? 조금만 천천히 걸으면 안 될까……? 위치 계산도 해야 하는데……
─ 아, 진짜. 불만 있으면 각자 행동하든가.
─ 우, 우으으……
혹자는 마법의 귀재인 루비아가 텔레포트를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 의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미궁 내에서 공간 계열 마법은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규칙상으로 금지된 게 아니라, 실제로 써보면 마법이 무용지물로 돌아가는 걸 알 수 있다. 자칫 공간이 뒤엉켜 어그러질 수 있었기 때문에, 네비로스는 공간 계열 마법 발동에 제한을 걸었다.
네비로스가 예상하기에, 저들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미궁 중심부에 도달할 것이다.
물론 날짜가 넘어간 뒤, 미궁 속에서 벌어질 위기에 적절히 대응했을 때의 미래였지만 말이다.
사실 저 둘이라면 딱히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때까지 위태위태한 협력 관계가 무너지지 않고 잘 버티고만 있는다면.
다음으론, 무쇠와 같은 생존력으로 능숙하게 미궁을 돌파하는 가브리엘 라마니카의 모습이나, ‘무형검’을 손에 쥔 채 마물을 죄 썰고 다니는 아이리스 폰 헤가르데의 모습, 절제된 동작과 극한으로 효율적인 움직임을 통해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마물을 죽이는 헥토르 드 알칸트라, 그리고…
‘저 아이는…… 꽤 익숙해 보이는구나.’
마물을 손쉽게 해치운 뒤, 피를 닦으며 어딘가 불안한 얼굴로 자꾸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스텔라 데 펠트라인의 모습까지.
전부 제 시야에 담으며, 네비로스는 마지막으로 스크린의 한구석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호오라.’
일순, 네비로스의 눈이 빛났다.
어느새 다 비운 와인잔을 흔들었다.
대신 입가를 혀끝으로 핥으며, 메마른 입술에 촉촉함을 더했다. 이내 진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과연, 너는 거기서 어떻게 행동할까?’
네비로스가 바라본 스크린 속에는, 에지오 크라닐과 유리 폰 아르티나의 실루엣이 함께 비춰지고 있었다.
==================
제작중인 '스텔라 데 펠트라인' 일러스트 러프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