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8)
* * *
#14
눈이, 감긴다.
“……아, 안 돼. 정신 차려…”
축축하고, 춥고, 배고프다. 사방에서 악취가 난다. 냄새는 오래 맡다 보면 자연스레 적응된다고 하나, 시체 썩는 냄새는 도저히 익숙해질 것 같지가 않았다.
덕분에 식욕도 왕창 떨어졌다. 분명 허기는 지는데,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맛대가리 하나 없는 건량의 부스러기를 깨작거리며 혀로 감싼다. 토할 것 같았다.
‘맛없어…’
이렇게 맛없는 음식은 여기 와서 처음 먹어본다. 아니, 이걸 음식이라고 부를 수 있긴 할까? 절대 아닐 것 같았다. 손으로 흙을 퍼먹는 것과 다름없는 짓거리다. 그걸 자신의 의지로 행하고 있다는 생각에, 뼛속 깊이 사무치는 비참함을 느끼고 말았다.
“우욱…”
주르륵─. 벽에 미끄러지듯 등을 기대고, 그대로 주저앉아 침음성을 토했다. 투명한 액체가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여기서 허리를 꺾으면 필시 토악질을 할 거다. 그렇게 둘 순 없었다.
무척이나 쓰고 역겨운 울컥거림을 도로 삼키며, 동시에 눈물이 삐져나오려던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이를 부딪치고 입술을 콱 깨물었다.
“우윽… 우으으윽……”
집에…
돌아가고 싶어…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틸 만큼 버틴 것 같은데. 손가락으로 눈가를 비빈 뒤, 구석탱이에서 처연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처음 입장했을 때 시각은 밤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밤이었다.
시간의 흐름은 멈추었고, 고정되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옥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정말 실습이 끝나기는 하는 걸까? 지금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못한 걸 봐선, 정말로 자기 혼자 이 미궁 속에 홀로 갇힌 게 아닐까? 그럼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죽는 건가?
“시, 싫어……”
유리가 새하얗게 질린 채 고개를 내저었다.
모든 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환경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린 채, 숨이 턱 막힐 듯 옥죄이는 현장감과 공포감에 사로잡혀 점차 심신미약 상태로 빠져든 것이었다.
유리는 당연히 모르지만, 지금은 실습 시작으로부터 열세 시간 정도 흐른 시점이었다. 오후 11시를 조금 넘은 시각. 이른 아침부터 기상했던 육체가 슬슬 피로해질 참이었다. 아니, 어떤 이들은 이미 잠에 들었을 시각이다. 그렇게 늦은 밤이다.
유리의 경우, 상당한 정신력을 소모하는 염력을 남발한 것도 모자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닥쳐올 위험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 항시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있어야만 했다.
그러니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지끈거리는 두통이 좁은 간격으로 찾아왔다. 염력을 과도하게 쓴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숱한 위기로 인해 정신이 바짝 몰렸던 게 가장 컸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상보다 훨씬.
자기도 꽤 싸울 줄 알았고, 능력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알았으며, 자신감이 붙었을 즈음엔 슬그머니 웃음을 짓기까지 했다.
물론 반쯤 공포를 억지로 이겨내기 위한 것에 가까웠으나, 공포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발전이고 성과였다.
그랬던 유리가 급격하게 쇠약해지기 시작했던 건, 지금으로부터 조금 전의 일이었다.
현실을 깨닫기 전에는 누구나 환상에 잠겨 살아간다. 유리도 마찬가지였다.
결코 방심하지 않을 거라 다짐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아예 실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아무렴 조난 상황 혹은 마물과의 전투라는 것과 일평생 연이 없었던 사람이다. 변변찮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기적이다.
간단한 일이다.
마물의 습성을 잘 알지 못했던 까닭에, 분명 확실히 죽였다고 생각한 마물이 되살아나 유리를 습격했다.
부서진 뼛조각들로 이루어진 스켈레톤이 유리의 뒤를 덮쳤다. 급히 뒤를 돌며 반응했지만, 너무 늦었다.
더럽고 흉측한 마물의 손톱이 복부를 할퀴었다. 새빨간 선혈의 줄기가 쭉 그어지고, 피가 튀었다. 먼지 묻은 새하얀 볼에 핏방울이 얼룩처럼 남았다.
음의 높낮이가 어긋나고.
찢어질 듯한 비명이 이어졌다.
피, 피. 피가. 피가 나고 있어. 살이 익는 듯 뜨거운 고통. 생전 처음 느껴보는 아픔에 컥컥거리는 신음이 삐져나왔다. 쓰라린 정도는 실수로 넘어졌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유리는 딱딱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고, 염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런 뒤, 자길 덮쳐오는 스켈레톤을 그야말로 해체시켰다. 폭발하듯 산산이 분해된 스켈레톤의 뼈가 다시 붙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상황이 종식되고 난 다음, 유리는 덜덜 떨며 복부를 움켜쥐었다. 쭉 찢어진 옷가지 안에서 새하얀 살갗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갈라진 틈새에서 피를 울컥 토해냈다. 마물이 할퀸 상처는 조금 깊었다.
순간 머리가 핑 하고 도는 듯한 어지럼증이 느껴진 것도 잠시, 유리는 복부를 움켜쥐었던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빨간 물감이 담긴 통에 푹 담그기라도 한 듯 온통 새빨갛게 젖어 있었다.
아, 아.
순간, 파악─. 거나한 패닉에 빠져 등에 메었던 배낭을 던지고 급히 입구를 뒤적였다.
배낭을 던졌다는 사실을 후회하기도 잠시, 유리병의 아랫부분이 깨져 졸졸 새기 시작하는 힐링 포션을 쥐어 잡고 역으로 뒤집어 부었다. 옅은 보랏빛을 띠는 액체가 콸콸 흘러내렸다.
상처의 정도에 비해 과도한 처사였지만, 유리는 그걸 판단할 새가 없었다.
치료가 끝나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테지만, 치료하는 과정이 너무나 끔찍했다. 그 고통을 뭐라 표현할 길이 없었다. 안 그래도 감각이 민감한 편인데, 격통에는 특히나 연약함을 보였던 유리다.
굳이 비유하자면 손톱이 아작난 뒤 강제로 뽑히고, 드러난 생살에 물을 콸콸 붓는 듯한 느낌. 포션으로 상처를 치유하며 유리는 죽음이란 게 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단 느낌을 받았다.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삼십 초간 가냘픈 비명이 쭉 이어지다가, 그것은 곧 갈수록 크기가 작아져, 종래에는 비에 젖은 어린 강아지의 울음소리 같은 처연한 음성으로 바뀌었다.
─쨍그랑.
유리는 다 부어버린 포션병을 저 멀리 던졌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이 지나고, 유리의 복부에 남겨졌던 상처는 거의 아물었다.
약간의 흉이 지긴 했으나, 그것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하게 사라질 것이었다.
하지만 흔적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찢어진 옷. 그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솔솔 들어오자, 유리는 약간의 따끔함과 오한을 느껴야만 했다.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고 받아들이기엔 너무 큰 충격이었다. 사실은 이미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공들여 쌓은 정신력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던 자신감도 일시에 사라졌다.
무력함과 탈력감을 동시에 느끼며 유리는 일어섰다.
힘이 풀려 질질 끌리는 다리를 어떻게든 붙잡고 일어나서, 배낭을 등에 업은 채 구석탱이로 기어가듯 걸음을 옮겼다.
음울한 마물들의 울음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가운데, 유리는 아연한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 이후의 일이 바로 지금이었다.
“응… 으응……”
눈이 자꾸 감긴다.
피곤해서.
이제 더는 버틸 수 없어서.
너무 졸려서.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니까.
차라리 그게 나았다.
……이대로, 전부 포기하고.
“……으으윽.”
싶지 않아.
“……윽, 끅, 으윽. 으으으윽.”
여기까지 와서 포기란 단어를 입에 올릴 뻔한 자신에게 깊은 혐오감을 느끼며, 유리는 무릎을 끌어안고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고작 이 정도가 자신의 한계라는 걸.
자기는 아직 어리다는 걸.
그뿐만 아니라, 어리고 나약하다는 것도.
실은 강한 척하지만.
그 강한 척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는 걸 안다.
남들이 자길 무시하고, 비웃고, 만만하게 보고, 제 입맛대로 이용하려고 하는 꼴을, 언제나 보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마땅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얇은 껍질이 한 꺼풀 벗겨지듯, 유리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조금씩 나약한 속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실은 말이다.
어른이 되는 법 따위, 하나도 모른다.
어설픈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유리가 아는바, 어른이란.
혼자서도 잘 해내는 사람.
누군가에게 기대는 일 없이.
무거운 왕관의 무게를 견디듯.
그렇게 자신이 벌인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사람. 오롯하게 자립할 수 있는 사람. 뒤를 보지 않고 앞을 볼 수 있는 사람. 지나간 일과 추억 따위에 연연하는 일 없이, 현재와 미래만을 보고 사리를 판별할 수 있는 사람.
가끔은 사무치게 외로워도.
이미 없어진 이를 그리워해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도.
끝끝내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
그런 믿음직한 어른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유리는 알고 있었다.
이건 흉내조차도 못 된다는 것을.
방법이 틀려도 완전히 틀려먹었다는 것을.
그냥, 이제는.
어린애의 떼쓰기밖에 더 되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 더 한심하게 보인다는 걸.
……유리는 자기 주제를 안다. 어리고 나약한 자신의 본모습을 안다.
사실은 어린 시절로부터 무엇도 바뀌지 않은 채, 겉모습만 아주 조금 성장했을 뿐이라는 걸, 자기 자신만큼은 알고 있었다. 정말로 다 알고 있는데, 단지 인정하기 싫을 뿐이었다.
내가 그렇게 약한 사람이라는 걸.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인정하기 싫어서, 억지로 강한 척을 해왔다.
“끅, 히끄윽, 끄으으윽……”
무엇을 위해 이런 먼 곳까지 왔나.
마땅히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어머님 아버님에게, 오라버니를 잃은 내가 혼자서도 일어설 수 있다는 걸, 증명하려고.
어머님 아버님에게 불필요한 근심을 더 얹어주고 싶지 않아서.
언젠가 같은 일을 되풀이할까봐 두려워, 과보호를 하면서도 전혀 안심하지 못했던 부모님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주고 싶어서.
당신들의 딸이, 훌륭하게 성장했다는 걸.
아이델 폰 아르티나는 이제 없지만, 대신 유리 폰 아르티나가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부디 알아주길 바라서.
모두에게 떠받들어지는 안온한 생활을 죄 버리고 제국의 중심부까지 날아온 게 아니었던가.
……물론 답답함에서 해방되고 싶었던 마음도 물론 있었지만, 결국 자립을 원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유리는 울지 않았다. 반쯤 울고 있었지만, 기어코 참아냈다. 주먹을 꾹 쥐고 벽을 세게 치며 그 격통으로 정신을 일깨웠다.
제 오라버니는 오랜 세월 전장을 누볐다. 마물들이 날뛰는 한가운데서 칼을 빼 들고 피를 철철 흘렸다. 용맹하게 싸워 끝끝내 승리를 쟁취하곤, 유리에게 활짝 웃으며 돌아오곤 했다.
반면 이건 실습에 불과하다. 실전이지만, 실전이 아니다. 마물들도 실제에 비해 훨씬 약한 수준일 거다.
이렇게 죽을 것 같아도, 정말로 죽진 않겠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지만. 사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그래도 말이다.
지금 유리 정도의 나이에, 제 오라버니는 위기에 빠진 왕국을 구해냈다.
그러니까.
이 정도 두려움에.
고작 이 정도 아픔에.
꺾여서야 되겠는가.
……포기하지 않아.
유리는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어깨를 감싸고 있던 케이프를 벗겨내곤 허리 부근에 두르고, 복부의 상처를 감추었다. 출혈은 더 이어지지 않았으니 지혈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손을 들어 뒷머리를 매만져 보았다.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다시 묶으면 될 일이다. 머리끈을 풀고 손바닥 위에 놓았다.
“……”
유리는 잠자코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이것만큼은 지켜낼 수 있었어서… 다행이었다.
──파앙. 머리끈을 당겨 팽팽히 묶은 다음, 어두컴컴한 미궁 너머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무섭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이 자리에서 조금 더 쉬고 움직일 생각도 하고 있었다. 유리는 무슨 수를 써서든 살아남으라는 감독관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중심부까지 나아가는 건 주제넘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감독관이 첫 번째로 제시한 이틀 간의 생존 목표가 가장 최선이지 않을까, 하고.
그렇다면 유리는 버틸 뿐이다. 존재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안전한 장소를 찾거나, 아니면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곁잠으로 피로를 회복한 뒤 사력을 다해 생존을 도모하거나.
유리는 배낭 속에서 횃불을 꺼내 들었다. 화르르륵─. 아주 기초적인 화염 마법을 길게 영창하여 겨우 불을 붙인 뒤, 막연한 어둠 속을 똑바로 직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좋아.”
어느 쪽이든.
절대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는다.
반드시.
라고 결심한 지 두어 시간 만에.
유리는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다.
#15
째깍.
어느덧 시각은 자정에 이르고.
4월 23일의 하루가 끝났다.
날짜가 넘어가자,
미궁은 몸을 뒤틀었다.
─ 쿠구구구구구구……
통로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외벽이 아래로 무겁게 가라앉는다. 반대로 새로이 틀어막힌 곳도 있었다. 광활한 미궁의 구조가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한다.
두 개의 달이 옅고 붉은 색깔을 머금었다.
마물들은 전날보다 더 빠르고 강해졌다. 희미한 형체를 갖춘 어둠이 곳곳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그것은 곧 일반적인 방법으론 해치울 수 없는 마물 레이스(Wraith)가 되었다.
─ 우우우우우……
고요한 울림이 사방에 퍼져 나간다.
멀리서 그 소리를 들은 이들이 전부 동작을 정지했다. 귀를 막아도 파고드는 기이한 울음소리. 아녀자의 구슬픈 비명 같기도, 아기울음 같기도 한 소리였다. 실체 없는 유령들이 활동을 개시했다.
어느덧 자정이 지나 2일 차에 이르고.
마침내,
1차 실습이 종막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유리는 도망치고 있었다.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면서 열심히 달리고 있었다. 체력이 많이 떨어져 속도는 전보다 훨씬 느려졌는데, 마물들은 더 빨라졌다.
─ 우우우우우……
따돌리는 것도 쉽지 않다. 벽이 대다수 허물어지면서 몸을 숨길 공간이 적어진 것도 있었지만, 레이스들은 기본적으로 움직임이 구조물 따위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 저리 가!”
우우우웅─! 염력을 있는 대로 퍼부어보지만 일절 먹히지 않는다. 잠깐 흩어지기는 하는데, 다시 원래대로 합쳐져서 자신을 추격한다. 정말로 끔찍했다. 저런 걸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뒤가 잡혔을 때의 미래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악, 하악, 학……”
탁탁탁탁─.
달리고 달리자 눈앞에 갈림길이 나왔다. 아무 생각도 거치지 않고 오른쪽을 택했다.
그대로 직선으로 쭉 나아가, 정면에 위치한 벽에서부터 레이스가 고개를 내밀자 이번에는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쭉 달리자, 그곳에도 마물이 있었다.
세 방향이 틀어막혔다.
“아, 아아…”
우우우우우……
그으으으아아아……
귓전이 마물의 울음소리로 꽉 들어찼다. 유리는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높고 단단한 벽이 우뚝 서 있었다.
…끝이다.
포위됐다.
남은 방법은 하나.
눈앞의 구울을 뚫고 나가야 한다.
입술을 짓씹고, 정신을 집중했다.
“──윽!”
비틀.
순간, 유리의 머릿속에 현기증이 일었다. 정신력에 슬슬 한계가 온 것이다. 결국 염력은 손가락 끝에서 발현되지 못하고 흩어졌다.
위험하다. 빨리 피해야 하는데,
꽈당.
유리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넘어진 찰나.
“꺄, 꺄아아아아아악──!!”
콰지직.
시뻘건 안광을 번쩍이던 구울이, 유리의 가늘고 허연 발목을 게걸스럽게 콱 깨물었다.
핏물이 왈칵 터지고, 발목이 그대로 잘려 나가는 건 아닌지 싶을 정도의 거대한 격통이 둑 터진 듯 밀려들었다.
“악, 아윽, 윽, 끅, 이, 아윽, 씨……!”
입을 도저히 다물 수가 없었다. 하얀 눈처럼 새하얗게 물든 머리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끈적한 침과 눈물이 줄줄 흘렀다.
우우우우우……
뒤편에서 레이스가 날아오고 있다.
콰악. 살점이 일부 뜯긴 걸까. 발목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웠다. 솟구치는 격통에 유리가 거의 흰자를 드러내기 직전, 구울이 다른 한쪽의 발목을 붙잡고 너덜거리는 턱주가리를 들이밀자.
“끄으윽, 윽, 아윽, 저리, 가라고……!”
마지막 한 줌의 정신력을 짜내어, 유리는 염력으로 구울을 공중에 띄운 뒤 반대쪽 벽으로 강하게 날려 보냈다.
콰앙! 콰지지직!
어찌나 위력이 강했는지, 구울은 벽에 몸을 부딪치자마자 곤죽이 되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정면을 향한 길은 열렸다.
“아, 아윽, 아… 아아… 바, 발이… 아…”
그러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 상태론 일어서는 것조차 무리였다. 유리가 웅크려 제 발목을 손으로 감싸 보지만, 더 고통스럽기만 하고 지혈 같은 건 전혀 되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우……
레이스가 쫓아오고 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떻게든 일어서야 하는데, 유리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찔거리며 신음을 토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정말로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피부 위로 느꼈다.
질… 질…
다리를 끌고 기듯 바닥을 긁었다.
“끅, 끄윽, 으으윽……”
울퉁불퉁한 바닥 위로 핏자국이 쭉 이어졌다. 눈물과 신음을 꾹 눌러담고 엉금엉금 기어보지만, 그 속도는 거북이처럼 너무나도 느렸다.
돌연 유리의 고개가 뒤를 향했다. 실체 없는 유령들이 소슬한 바람을 타고 머지 않은 거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체면도 잊고 실금을 할 뻔했다.
우우우우… 공허한 울림이 유리의 귀를 파고들었다. 바닥을 기어야 했기에 귀를 틀어막을 수 없었다. 어떻게든 그 작은 몸을 이끌고 통로를 기어가 보지만, 결국 유령들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아, 아…”
유리는 몸을 돌렸다. 레이스와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했다. 심장 박동이 터질 듯 빨라졌다가, 곧 천천히 느려지기 시작했다.
귓전에는 삐이이이 끝없이 이명이 울리고, 발목에서 느껴지던 고통도 어느덧 차갑게 식어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하게 되었다.
점차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다. 유리의 고개가 간신히 들렸다가, 곧 아래로 떨어졌다. 넓은 하늘이 보였다.
아…
끝이구나.
포기하지 않기로 했는데…
우우우우우……
레이스가 울음을 토했다. 장막 같은 어둠을 넓게 펼치고, 거의 실신에 이른 유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끼에에에엑……
다음 순간.
레이스의 울음소리가 기형적으로 변화했다.
──퍼엉, 퍼어엉……
현실감은 멀어져만 가는데, 자꾸만 이명 속으로 커다란 폭발음 같은 것이 섞여 들어왔다. 유리는 바닥에 널브러진 채 가슴을 들어 올리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을 호흡했을까.
끼에에에에엑……
하늘이 새하얀 빛깔로 물들고, 일순간 눈앞이 점멸했다. 한 세 번 정도.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유리는 멍해진 상태로 생각했다.
왜 죽지 않지.
왜 끝나지 않지.
왜……
이유는 간단했다.
──저벅.
발소리가 들렸다.
이명은 점차 멎었고, 대신 뜨거운 격통이 다시금 발목 부근에서 후욱 밀려오기 시작했다.
“윽, 아윽.”
“움직이지 마. 그대로 있어.”
큰 그림자가 드리웠다.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뚜껑을 열었다. 그런 다음 그 안에 든 보랏빛 액체를 유리의 발목에 붓기 시작한다. 아낌없이.
콸콸콸.
“꺄악… 악… 악……”
“아파도 참아.”
이제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지, 새된 소리만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입가에서 새어 나왔다. 그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 유리의 발목에 포션을 부어주고, 등허리에 손을 넣어 상체를 약간 일으켰다.
땀에 젖은 유리의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자, 그 아래 낮게 깔린 붉은빛 눈동자가 슬며시 위를 향했다.
출혈이 심했던 탓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 올려다보는 눈빛이 흐리멍덩했다. 메마른 입술은 작게 벌려진 채, 얕은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어라……’
유리가 제 눈에 비친 이의 얼굴을 바라보자, 일순간 여기가 꿈인지 현실인지 환상처럼 분간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얼굴.
항상 너무나 그리고 있던 얼굴.
세상에서 가장 좋아했던 사람의 얼굴.
‘아……’
유리의 손이 힘없이 들렸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얼굴을 만져보고 싶었지만, 괜찮았다.
이제야,
이제야 나타나 주었으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미웠던 만큼,
더 기뻤으니까……
“오… 빠……”
“……”
그러고 정신을 잃은 듯 눈꺼풀을 감은 유리를 조용히 내려다보면서, 에지오는 복잡한 눈빛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