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9)
* * *
#16
유리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실컷 놀고 난 뒤 지친 몸으로 오라버니의 넓은 등에 업혀서, 봄철 꽃내음 가득한 왕궁의 정원을 노니는 꿈.
고요한 방 안, 앞머리를 쓸어주는 기분 좋은 편안함을 느끼며, 오라버니의 허벅지를 베개처럼 베고 곤히 눈을 감은 채 피로를 녹이는 꿈.
다섯 살이었을까. 여섯 살이었을까. 영원히 깨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유리는 한동안 행복감을 만끽했다.
“으음…”
하지만 어느 순간, 하늘이 뒤집히고 노을빛이 거뭇하게 물든다. 그것은 곧 차가운 현실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전조였다.
꿈속의 오라버니에게 작별 인사를 나눌 여유도 없이, 점점 수렁 아래로 떨어지던 유리는 마침내 눈을 뜨고 몽롱한 목소리를 흘렸다.
“어…?”
깜빡, 깜빡.
하늘이 보였다. 어둡고 푸른 하늘. 그 옆에는 이질적인 붉은 빛으로 물든 두 개의 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리는 슬그머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이불처럼 상체를 덮고 있는 케이프. 쭉 뻗은 자신의 다리가 보였다.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로 누워 있던 것이다.
점차 밀려드는 현실감에 혼란해진 것도 잠시, 불분명한 장소에서 깨어나기 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곤 발목 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깨끗했다. 상처 하나 없이.
……그것도 꿈이었나?
그때.
“일어났냐.”
바로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살짝 까딱이자,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잿빛 머리. 푸른 눈동자. 어딘가 익숙한 얼굴.
방금까지 꾸고 있었던 꿈과 혼동하여 하마터면 잘못된 호칭을 입 밖으로 낼 뻔한 유리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 두어 번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스윽.
눈을 왼쪽으로 돌리면 남자의 배가 코앞에 놓인 것을 확인하고, 자신이 지금까지 무엇을 베고 누워 있었는지 마침내 깨달은 뒤.
“──기야아악!”
“악!”
벌떡, 상체를 일으켜 남자의 턱을 제 이마로 가격했다.
#17
“아파아아아……”
“맞은 건 나인데 왜 네가 더 아파하냐…?”
유리가 약간 빨개진 이마를 쓰다듬으며 울상을 지었다. 어떻게 되먹은 골격인지, 먼저 부딪친 쪽이 더 고통스러웠다.
유리는 눈물을 찔끔 흘리며 주변을 살폈다.
일반적인 통로에 비해 다소 넓은 공간이었다. 세 방향이 벽으로 막혀 있고, 한쪽 벽만 열려 있는 형태였다. 어쩐지 작은 쉼터 같은 모양새. 만약 혼자 있었다면 마물한테 포위당해 죽기 딱 좋은 곳이다.
그러나 유리의 주위에는 마물 대신 사람이 있었다. 눈동자만 힐긋 굴려서 남자를 바라본다.
절대 인정하긴 싫었지만, 지금 자신의 곁에 저 남자가 있다는 게 조금 안심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내심 자기 혼자 남겨진 게 아닐까 싶은 불안감이 계속 마음속 한켠에 숨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깨어나기 전 자신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곤, 유리가 인상을 찡그렸다가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
뭔가…
뭔가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은데…
일단 모르는 척하며 중얼거렸다.
“여긴…”
“안전 지대.”
“……안전 지대?”
“임시로 붙인 이름이긴 하지만.”
유리가 갸웃하자, 에지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 유지 시간에 제한도 있고 안전 지대가 있는 위치도 시시각각 변하지만, 일단 여기 있으면 마물은 못 들어오는 것 같더라. 미궁의 구조가 변했을 때부터 새로 생긴 구역 같아.”
그리 말하며 저 바깥으로 턱짓을 했다.
유리가 에지오를 따라 밖을 보았다.
“히, 히익……”
우우우우우……
그으으아아아아……
달그락달그락……
마물들이 비척거리며 활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리와 에지오가 있는 이곳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마치 그들의 존재를 아예 발견하지 못한 것처럼. 보통은 살아 있는 생명체의 냄새만 맡고도 정확히 위치를 알아내어 쫓아오는데 말이다.
“바닥에서 나는 빛이 완전히 꺼지면 그 즉시 결계도 사라져. 지금이 아마 여기로 옮긴 지 체감상 이십 분 조금 넘었으니까…… 앞으로 십 분 정도 남았을 거야. 안전 지대의 유지 시간은 아마 삼십 분으로 추측하고 있어. 그렇게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게 설정한 모양이더라고.”
이미 파악을 마친 모양인지, 에지오가 안전 지대에 관련한 정보를 술술 내뱉었다.
“슬슬 움직여야 해.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까.”
그리고는 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좀 움직일 수 있겠어?”
“……”
유리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유리의 베개 역할을 하고 있던 탓에 허벅지가 저린 듯 주먹으로 두드리던 에지오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여 자신의 몸 상태를 살펴보았다.
“뭐 한 거 없으니까 안심해.”
“……말은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거든.”
“믿지 말려면 믿지 말든가.”
에지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구울한테 물려서 다 죽어가던 걸 겨우 살려줬더니, 감사 인사는 듣지 못할망정 의심부터 받고 있네. 이래서야 보람도 뭣도 없구만. 내 기구한 신세가 안타깝……”
“아, 안 고맙다고 한 적 없어…”
그 작은 목소리에, 에지오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상황이었는지 기억은 나냐?”
“……대충은.”
입술을 질근 깨문 채 옷자락을 붙잡곤 에지오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뭐라뭐라 반박할 줄 알았더니, 꽤 의외의 반응을 보여주는 유리.
“포션… 써줬잖아.”
“뭐야, 진짜 기억하고 있네?”
“……”
아직도 그때의 감각이 생생한데, 정작 흉터 하나 없이 말끔한 자신의 발목을 매만지던 유리는 묘한 생각에 잠겼다.
힐링 포션은 개인당 하나만 지급된 물건이다. 에지오가 포션을 부었다는 건 그때까지 포션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고, 유리의 발목 상처를 치료함으로 에지오의 몫은 사라지게 된 것이었다.
힐링 포션이 하급이라곤 하나 웬만한 상처는 거의 다 치료할 수 있다. 단 한 번뿐이지만. 그 하나의 기회를 바로 자신에게 사용한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아무런 고민도 없이.
이번 실습은 영락없이 개인전이었다. 조를 짜서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협동 점수도 물론 있긴 하지만, 비중은 그렇게까지 크지 않다.
게다가 남들보다 먼저 달성할수록 고득점인 특별 과제 역시 존재한다.
만약 에지오가 유리를 구하지 않고 계속해서 움직였다면, 아마 지금쯤 특별 과제 달성 직전까지 이르렀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때의 상황에서 유리를 내버려 두고 간다는 선택지가, 에지오의 머릿속에는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다른 건 기억 안 나냐?”
“……뭐, 뭘?”
유리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답을 얻어낸 에지오는, 귓불이 살짝 빨개진 상태의 유리를 여기서 더 추궁하길 그만두었다.
“별건 아니고… 네가 너 업고 뛴 것까지 기억나나 싶었지. 그땐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당연히 기억 안 나겠지만.”
“모, 몰라…… 그런 거.”
순간 꿈에서 본 장면이 언뜻 스쳐 지나가는 듯싶었으나, 유리는 머리를 흔들곤 온갖 상념을 말끔히 지워냈다. 자신의 밝은 금발이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어?”
머리가…
“내, 내 머리끈…”
“여기 있어.”
일어나서부터 그걸 찾을 줄 알았다는 듯, 에지오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은 리본을 유리에게 건네듯 스윽 내밀었다.
“누워 있을 때 불편할까봐 잠깐 풀었는데, 네 머리 진짜 신기하더라. 그렇게 오래 묶고 있었는데도──”
“누가.”
“……?”
“누가… 멋대로…”
아니다. 머리를 푼 건 상관이 없다. 아니, 자신의 머리가 남자 손에 닿은 만큼 상관있을지도 모르지만, 에지오는 그렇게까지 거부감이 들지 않았으니 상관 없… 이게 아니라, 누가 됐든 자신의 머리끈을 멋대로 만지고 다루었단 사실이… 심각하게 거슬렸다.
“…뭐야, 왜 그래?”
“……”
어깨를 부들거리며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잠시 분을 토하려던 유리가, 금세 차가워진 이성으로 겨우 판단을 마쳤다.
남들이 보기엔 고작 머리끈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자신의 반응은 무척 이상한 편에 속한다.
더군다나 에지오는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그랬던 게 아닌가. 에지오가 힐난 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구해줬다.
한마디로, 은인이었다.
아예 상도덕을 모르는 사람까진 아니었는지라, 에지오와 자신의 입장 차이를 인지한 유리가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르고 손을 내밀었다.
“그거…”
“소중한 물건인 거지?”
들려오는 말에, 유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네 반응 보니까 맞는 거 같은데. 편하게 해준답시고 멋대로 만져서 미안했다. 다음부턴 함부로 안 만질게. 자, 여기.”
“어, 어……”
유리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머리끈을 돌려받았다. 제 손바닥 위에 놓인 리본을 가만 내려다보던 유리가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딱히 특별한 건 아니……”
“뭘 또 아닌 척을 하고 그래. 네 표정 보면 답 나오는데. 정말 너한테 아무런 의미도 없는 물건이야, 그거?”
“……”
유리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까지 이 머리끈을 딱히 특별한 물건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혹여나 끊어지기라도 하면 대충 시장에서 비슷한 거 하나 찾아서 대신해도 될 정도의 흔한 리본이 달린 머리끈일 뿐이고, 실제로도 별반 다를 게 없었으니까.
한편, 에지오는 유리가 입을 꾹 다문 것을 보곤 저 리본 달린 머리끈에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숨겨져 있음을 은연중에 깨달았다.
딱히 아티팩트도 아닌 흔한 장신구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면, 분명 남한테서 선물 받은 물건이기에 그런 것이리라.
아마도, 유리에게 있어 더없이 소중했던……
─파앙.
끈이 팽팽하게 당겨졌다가, 다시 놓였다.
평소대로 머리를 묶은 유리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꼬리처럼 살랑거리는 금빛 머리칼. 긴 장발의 유리도 나름 신선했지만, 아직까지는 저렇게 머리를 묶고 있는 유리의 모습이 더 친근해 보인다고, 에지오는 지나가듯 생각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슬슬 움직여야 해. 체감상 두 시간 정도 지난 것 같긴 한데… 아직 실습 종료까진 한참 남았을 거야. 내 생각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중심부에 도달할 수 있을 거 같……”
“…근데, 너.”
“응?”
“……나랑 같이 움직일 생각이야?”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에지오가 대답했다.
“혼자보단 둘이 낫지. 특히나 이런 곳에서는.”
“그게 아니라…”
“그럼?”
“……”
잠시 뒤 유리가 입술을 달싹였다.
“전에 네가 나한테 막 떨어져 있으라고 그랬잖아. 그래놓곤 됐다며 자기가 날 피해 다니겠다고 하질 않나… 왜냐고 물어봤더니, 거, 걱정된다는 이상한 소리나 하고…… 그땐 그랬으면서 지금은 같이 움직이자니, 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건데…?”
“아, 그거야 뭐……”
에지오는 뒷말을 흐렸다. 이걸 여기서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나 얘기를 늘어놓기엔 당장 시간이 별로 없다. 안전 지대의 결계는 곧 해제될 거고, 그럼 다음 안전 지대를 향하거나 계속 움직이며 생존을 도모 혹은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나중에 말해줄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사실 계속 고민 중이긴 하다. ‘미래’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만큼, 유리와 따로 다녀야 할지.
처음부터 아예 유리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그런 상황에서 덜컥 만나버렸으니, 이대로 각자 행동하자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역시 내가 걸리적거린다고 생각하는 거지?”
“아니, 야… 뭔 말을 그렇게 해. 절대 그렇지 않아. 그랬으면 혼자보다 둘이 낫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지. 게다가 넌 지금까지 살아 남았잖아. 나한테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가 될 일이 뭐가 있겠냐?”
에지오의 생각으론, 솔직히 말해서 진작 탈락했을 줄 알았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더 안심이기도 했고. 그러나 유리는 이렇게 험난한 미궁 속에서 탈락하지 않고 버젓이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능력의 증명은 된 셈이다. 과연 에픽 클래스 2번이라는 건가.
유리는 영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사정을 전부 설명할 순 없었으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에지오가 입을 열었다.
“식량 상태는?”
“거의… 다.”
“의외로 많이 먹었네? 왕녀님이시라 입맛 되게 까다로울 줄 알았더니.”
“…먹을 게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하긴.”
살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하겠는가.
“물은?”
“……한 방울도 안 남았어.”
“목 말라?”
“…조금.”
“그럼 내 거 마셔.”
“…어?”
에지오가 배낭에서 수통을 꺼내 들었다. 실습 시작 이후로 몇 모금 마셨을 뿐,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식수. 그걸 본 유리의 목울대가 잠시 고저를 그렸지만, 이내 고개를 내젓고는 중얼거렸다.
“그건… 네 거잖아.”
그 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네가 입에 댄 수통이라 마시기 싫다. 네 몫인데 왜 나한테 주는 거냐. 등등.
“괜찮아. 난 이거 필요 없거든.”
“뭐? 왜……”
“일단 받아.”
“앗.”
에지오가 수통을 짧은 거리에서 던지자, 유리가 허둥거리며 그것을 겨우 잡았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에지오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하는가 싶더니.
“──. ───. ─.”
유리에겐 익숙하지 않은 영창이 들려오고.
에지오는 손바닥 위에 조금 큰 물(?)의 구슬을 만들어서, 그대로 입속에 퐁 하고 집어넣었다.
갈증을 해결한 에지오가 유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렇게 맛이 좋은 편은 아닌데, 그럭저럭 먹을만 해.”
“마법……”
유리는 배운 적 없는, 아니, 왕국에서 개인교사에게 배운 적은 있지만 결국 숙달하지 못한 마법으로 갈증을 해결하고 있던 것이었다.
“뭐, 계속 이런 데 마력을 소비하다간 언젠가 중요할 때 마력이 동나서 위험해질 수도 있겠지만……”
식수가 멀쩡히 남아 있는데도 굳이 마법을 쓴다는 건, 마력이 아주 넘쳐나다 못해 범람할 지경이거나, 아니면 마법으로 마물을 격퇴할 생각이 전혀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난 문제 없어. 일단 그거라도 마셔.”
“……”
왠지 이럴 때를 대비해 기초적인 마법이라도 배워야겠단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흐름일까. 유리가 복잡한 심경으로 에지오가 건넨 수통을 내려다보다가, 하는 수 없이 가급적 입에 대지 않은 채 입속으로 물을 졸졸 흘려 마셨다.
“……여기.”
푸으으. 다 마신 수통을 유리가 도로 건넸다. 목이 무척 타긴 했지만, 최소한의 양심이 있어서 전부 마시지는 않았다. 그리고, 수통을 건네주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할까 고민하며 그 말을 입속에서 굴려대다가, 결국 내뱉지 못하고 삼킬 수밖에 없었다.
에지오는 배낭에 수통을 집어넣은 뒤, 벽에 기대어 있던 또 하나의 배낭을 유리가 챙긴 것을 보자마자 통로 너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움직이자. 곧 결계가……”
사아아아아──
공간의 바닥을 감싸고 있던 빛이 일시에 사그라들고, 안전 지대가 해제되면서 그들의 존재가 마물에게 노출되기 시작했다.
우우우우우……
에지오와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가장 먼저 에지오가 앞장을 서고, 유리가 그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숨을 죽인 채 주변을 살피던 에지오가 고개를 돌리고 유리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혹시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레이스의 약점은 불이야. 횃불 같은 걸론 쫓아내기밖에 안 되겠지만…… 화염 계열 마법을 쓰면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어. 마법은 좀 쓸 줄 알아?”
유리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1위계 정도라면. 몇 번 정도.”
“흐음.”
“무, 문제 있어? 난 초능력 특성 때문에 마법을 배우기가 곤란한 타입이라구…”
“아냐, 별로 널 깔보는 게 아니라. 그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아서──”
바로 그때였다.
끼에에에엑……
“히얏?!”
몇 걸음 걷지 않아서 오른쪽 외벽으로부터 검은 장막을 두른 레이스가 튀어나오자, 유리는 깜짝 놀라 비명을 내질렀다.
“뒤로 물러나!”
적은 아직 한 마리뿐이었다. 에지오가 유리를 감싸듯 막아선 뒤, 재빨리 주먹을 쥔 채 어깨 뒤로 쭉 당겼다.
레이스의 갑작스런 등장에 순간 겁을 먹은 유리였지만, 지금 유리의 눈에 보이는 것은 에지오의 뒷모습뿐이었다.
파아아앗─!
불이 약점이라고 했으면서, 에지오는 화염 계열 마법을 쓰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자 그 틈새로 새하얀 빛이 스며 나온다.
“흐읍!”
──부우웅!
일순, 강풍이 일었다.
그리고.
퍼엉──
끼에에에엑……
정면을 향해 뻗은 정권이 레이스를 타격하자, 분명 체술 따위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터인 레이스가 불에 타는 듯 고통스런 비명을 내지르다가, 곧 먼지로 화해 공중으로 흩어졌다.
“후우… 깜짝 놀랐네.”
단 한 방이었다.
어떻게 해도 해치울 수 없을 것 같았던 유령이, 그렇게 허무히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선 유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것도 마법이야?”
그리 물어보면서도 부정의 대답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 척 봐도 마법은 아닌 것 같다. 빛으로 강타한다. 약간 그런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에지오가 말했다.
“아니, 내 능력.”
“……그게 네 능력이라고?”
“아마도.”
“아마도는 또 뭐야, 네 능력이잖아. 바보야.”
“바보라고 할 것까지야……”
에지오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정말 콕 집어 설명하기가 좀 그런 것이, 자기도 이 불분명한 능력의 정체를 도통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깨우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한 번 사용할 때마다 약간의 어지럼증이 느껴지긴 하는데,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일 땐 어쩔 수 없이 능력을 써야만 했다.
“레이스는 전적으로 내가 맡을 테니까, 다른 마물들은 네가 같이 죽여줘라. 지금까지 많이 죽여봤지?”
“그렇긴 한데…… 염동력이 제대로 발현될지 어떨지는 잘 몰라. 정신력에 구애를 많이 받는 능력이라……”
유리가 그동안 쉬었다고 해봐야 두 시간 정도다. 정신력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진 못했다. 안색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에지오가, 턱을 어루만지다 입을 열었다.
“그럼 서포트하는 느낌으로 움직여 줘. 염동력이면…… 마물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나?”
“가능은… 해.”
“좋아. 그거면 됐어.”
그 정도면 충분하다며 고개를 작게 끄덕인 뒤, 다시금 앞장 서며 마법으로 손바닥 위에 불을 피운 채 나아가기 시작한다.
유리는 에지오의 널찍한 등짝을 보면서 뒤를 졸졸 따라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잠깐 입을 다물었다.
자정이 넘어가고, 안전 지대가 활성화된 것은 불과 조금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은 어디서 마땅히 쉴 만한 곳이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에지오는 안전 지대가 활성화된 이후 유리를 구해낸 뒤 장소를 옮겨가며 유리의 신병을 보호했고, 그러기 위해선 짧은 곁잠조차 들지 못했을 것이었다. 깜빡 잠이라도 깊게 들었다간 안전 지대가 해제된 뒤 무방비 상태에 놓여 둘 다 위험에 빠질 수 있었으니까.
기초적인 체력의 차이는 고사하고서라도, 에지오도 분명 적잖게 피곤할 것이었다. 하나, 그런 상태에서 오로지 유리 자신만을 위해 행동했다. 보기에 에지오는 지금까지 혼자서도 잘만 해왔고, 따라서 자기를 굳이 구해낼 필요도 없었으며, 자기를 구해냄으로 두 시간씩이나 행동력을 낭비할 이유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유리 본인이 그간 에지오에게 일삼았던 언행을 돌이켜 보면, 사실 에지오가 진즉 자신을 좋게 보지 않고도 남았어야 하는 편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에지오는 늘 유리와 친해지려 했고, 나쁘게 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귀엽다고…… 아무튼 이상한 말만 자주 했다.
역시, 영 껄끄러운 남자다.
저번에 있었던 일은 그렇다 치고, 루비아한테서 들은 얘기가 여러 가지로 유리에게 있어선 큰 충격이었다고나 할까……
“……”
유리는 말없이 에지오의 등을 바라보았다.
에지오는 힘든 내색 하나 없이 유리를 이끌고 미궁 속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강인한 뒷모습이, 아주 약간 살짝 조금은 믿음직스럽다고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건…… 역시 인정하기 싫은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피곤해서 정신을 놓았나.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저벅… 저벅…
발소리에 묻힐 만큼,
너무나도 작은 목소리였다.
“……고마워.”
그래서,
듣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앞에서 반응이 전혀 없었으니까.
이쪽은 귓불이 빨개져만 가는데, 멈추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기고만 있었으니까.
정말 듣지 못한 거라고.
그리 생각했는데.
흘러가듯, 에지오는 넌지시 웃으며 말한다.
“너무 늦은 거 아냐?”
“……시끄러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