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10)
* * *
#18
그 시각.
“뭐 하고 있어! 얼려!”
“명령,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해! 라는 외침으로 대꾸한 연분홍빛 머리칼의 소녀─ 루비아가, 넓은 통로를 바글바글하게 채운 마물들의 무리를 향해 결국 손바닥을 쭉 뻗곤, 빠르게 입술을 달싹였다.
──쩌저적.
차가운 냉기가 모여든다. 루비아의 체내 마력이 훅 빠져나간다. 허공 위에 수놓아지는 마법진이 품은 한기에 반해, 루비아의 마력 회로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족히 열 마리는 넘는 마물들이 몸을 부대끼며 달려오고 있다. 시체, 해골, 유령, 너나할 것 없이 음울한 괴성과 함께 팔다리를 부수고 꺾으며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달려온다. 마물들이 모인 범위와 거리를 측정 및 계산하고, 연산을 시작한다.
“야──!”
루비아의 전방에서 낡은 검을 들고 자세를 취하던 뮤가, 한참 동안 마물들의 돌격이 저지되지 않자 뒤를 돌며 윽박을 질렀다.
시뻘건 안광을 줄줄 흘려대며 더 포악해진 마물들. 달이 붉게 물든 이후 한층 포악해지고 강화된 괴물들은, 다섯 마리를 넘어서면 뮤 혼자 상대하기에 살짝 버거워지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물론 열 마리를 동시에 상대한들 결국 끝끝내 승리하는 건 뮤가 되었겠지만, 루비아와 임시로 협력하고 있는 지금, 효율만을 따졌을 때 루비아의 서포트를 받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영창하고 있다고─!’
이미 절반 이상의 마력이 거덜 난 상태였다. 절대 마르지 않는 샘 같았던 루비아의 마력도, 이 이상 높은 위계의 마법을 연달아 사용한다면 바닥을 드러낼지도 모르게 될 일이었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루비아는 마지막 한 소절을 끝으로, 웅대한 푸른 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는 마법진을 펼치며 크게 소리쳤다.
“꿰뚫어라, 얼음이여── 아이스 필드(Ice Field)!”
쩌저저저적.
대지를 타고 기어간 냉기가, 뾰족한 결정이 되어 하늘을 향해 무더기로 솟구치기 시작한다.
꽁꽁 언 빙판 위의 마물들은 일제히 미끄러지는가 싶더니, 매섭게 치솟는 얼음 가시들에 꿰뚫리는가 하면, 팔다리를 덩굴처럼 휘감아오는 스산한 냉기에 의해 얼음처럼 쩌적 굳어 버렸다.
아니, 정말로 얼음이 되었다.
마물들은 한겨울 동상 같은 모양새가 되어, 각자 움직임을 봉해진 채 유일하게 뚫린 입으로 비명 같은 괴성만 질러댈 뿐이었다.
“이, 이제 가!”
“명령하지 마!”
네가 먼저 해놓고─. 4위계에 해당하는 마법을 펼친 탓에 잠깐 현기증이 일었던 루비아가,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봤다. 높고 가파른 벽면. 혹시나 레이스가 튀어나오진 않을까 조심하면서,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칼을 빼들고 타닥, 바닥을 박찬다.
흉포한 적의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지만, 온몸이 얼어붙어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한다. 빙상 위의 피규어처럼 세워진 마물들을 향해 뮤가 바람을 갈기갈기 찢으며 내달렸다.
──후우우웅!
칼자루를 으스러질 듯 강하게 쥔 채로, 강풍을 방출한다. 휘몰아치는 바람결에 미간을 좁힌 루비아가 손등으로 제 시야를 가린 사이에, 벽력 같이 쇄도하는 빛줄기가 직선으로 쭉 그어졌다.
찢고, 부순다.
콰가가가가각──
실로 파괴적인 검술이 펼쳐졌다.
그것은 둔기로 후려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얼음을 깨부순다. 얼어붙은 뼈와 살점들이 산산조각 난 채 폭탄 터지듯 공중으로 비산했다. 비교적 앞에 위치했던 마물들부터 울음소리가 뚝 멎기 시작한다. 뮤는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조각난 얼음 파편들이 벽면에 튕기고 부서져 쉴새없이 파각거린다. 뮤는 그 파편들을 하나도 맞지 않고 있었다.
‘진짜, 소름 돋네…’
뮤의 강함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직접 전력으로 맞붙어 본 전적도 있었기에 새삼 놀랄 것도 아니었지만, 비단 뮤의 퍼포먼스에 질겁하여 혀를 내두르는 것뿐만은 아니었다.
한때 마물이었던 것들의 잔해더미 위에서, 뮤는 칼 끝을 사선으로 비스듬히 내린 채, 후우─ 고요히 입김을 토해냈다. 주위에 냉기가 감돌고 있던 까닭이다. 그야말로 창졸간에 마물들은 모두 흙으로 돌아갔다. 이내 마물들의 머리통을 발로 짓밟고 느슨하게 선 뮤가, 고개만 까딱 돌려 이쪽을 바라본 것이었다.
불그스름함을 머금은 달빛이 내려앉는다. 어두컴컴한 통로 한복판에서 창백한 낯빛으로 자줏빛 안광을 스산히 번쩍이는 뮤의 모습은, 다르게 보면 마물들보다 더 소름 끼쳐 보이기도 했다.
“…역시 너, 마물 죽여본 적 있었지?”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넌지시 물어본 투에 뮤는 고개를 내젓곤.
“그럴 리가.”
“나랑 조우했을 때부터 전혀 겁먹지 않고 있었던 것도 그렇고, 아무리 봐도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헛소리할 시간에 빨리 탐색이나 해.”
“그러니까, 명령하지 말──”
“간다.”
“……자, 잠깐만. 나 지금 좀 어지럽단 말야.”
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등을 돌리자, 루비아는 다급히 외벽에 손을 짚으며 꼬리를 내렸다.
그 한심한 모습에 뮤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고작 그 정도로 엄살떠는 거?”
“…마법도 못 쓰면서 뭘 안다고 그래.”
“못 쓰는 게 아니라 안 쓰는 거야. 쓸 필요가 없으니까. 마법이라면, 배운 적도 있고 어느 정도는 쓸 줄도 알아.”
“어차피 기초 마법들이겠지.”
“그야, 딱 거기까지만 흥미를 가졌었으니, 뭐. 그 위의 마법들은 딱히 흥미가 안 생기더라고. 그땐 칼질이 더 재밌었으니까.”
“…해석에 따라 상당히 거만한 말로 들리는데.”
“거만해? 난 사실을 말할 뿐이야.”
뮤는 슬쩍 제 손에 붙잡힌 칼자루를 내려다보았다. 여태 들고 다니던 전용 검에 비해선 부끄러울 정도로 저급한 품질의 냉병기였지만, 뮤의 손에 들린 이상 그럭저럭 쓸만한 물건이 된다.
“너는 모르겠지만, 검술부 재학 시절 마법부 교수들이 나한테 전과(??)를 은밀히 찔러본 적도 있었어. 나한테는 검보다 마법이 더 어울린다나. 당연히 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해본 소리였겠지만.”
우우우웅─. 잠자코 마력을 불어넣었다. 웅혼한 떨림이 전해지고, 빛바랬던 길쭉한 검신은 푸른 빛으로 은은하게 감싸였다.
무기에 마력을 불어넣는단 행위는 절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재능이 없거나 숙련되지 못한 사람이 어설프게 시도해봤자, 마력이 담긴 상태의 유지는커녕 즉각 불발되기 마련이다. 즉 상당한 수준의 마나 감응력을 요구하는 기술이었다.
동시에, 루비아는 알 수 있었다. 저 검날에 맺힌 마력의 기류가 얼마나 잘 정제되어 있는지. 얼마나 순도가 높은지. 자신의 것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비슷한 수준일 수도…
“왜, 내가 마법마저 널 추월할까봐 무서워? 네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사라질까 봐?”
“…누가 그런 소리를 했다고 그래?”
뮤는 자신이 만약 검을 붙잡지 않고 마법만을 끊임없이 연마했다면, 어렵지 않게 높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듯 보였다.
마력을 거둔 뒤 부식된 검날을 툭툭 쳐보던 뮤가, 루비아를 돌아보며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과민하게 반응하지 마. 이것도 그냥 찔러봤을 뿐인데, 네가 그렇게 언짢은 티를 내면 진짜인 것 같잖아?”
“……역시, 난 네가 싫어.”
“우연이네. 나도 마찬가지야.”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이는 뮤.
자신을 제외한 타인 앞에선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아예 무시를 하던 평소의 모습과 달리, 루비아 본인 앞에만 서면 저렇게 남을 살살 긁는 언행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에지오에게는 천상 소녀처럼 어쩔 줄 몰라 하고. 그렇게 타인을 너무나 명확하게 구분 지으며 이중적으로 대하는 모습, 루비아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에지오도……
“……방금 같은 시니컬한 얼굴, 에지오한테는 보여준 적 있는지 모르겠네.”
우뚝.
숨도, 동작도 일시에 멎는다.
도발에 응한 건 아니었다. 단지,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단어가 들려왔던 탓이다.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와?”
뮤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굉장히 불쾌한 듯한 인상에 잠시 루비아가 흠칫했지만, 주도권을 잡았다는 생각에 두근거리는 심장을 감싸 안고 말을 이어갔다.
“…에지오는 너처럼 남을 쉽게 비꼬고 무시하는 사람, 별로 안 좋아해. 그런 이중적인 모습, 에지오 앞에선 별로 안 보여줬던 거지? 그러니까 네가 에지오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던 거 아니야?”
“……”
루비아는 뮤와 에지오가 어떻게 사귀었는지 하나도 모른다. 그들이 로르센 아카데미 내부에서 어떤 식으로 만남을 가지고 무슨 대화를 하며 지냈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렇지만 딱 하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뮤는 에지오의 앞에서 이중적인 얼굴로 내숭을 떨었을 거라는 거.
그러니 본디 저런 타입의 인간을 껄끄럽게 여기던 에지오가, 그녀를 받아들일 수 있었을 거라는 거.
남을 쉽게 비꼬고 무시하는 사람이란 말을 하기엔, 루비아도 방금 뮤에게 마법도 못 쓰면서 뭘 안다고 그러는 거냐며 툭 반박한 전적이 있긴 했으나, 그거야 이미 서로 적대적인 관계였기에 가능한 대화였다.
평소의 뮤처럼 일방적으로 호의를 가진 대상을 제외한 이들에게 일절 반응조차 해주지 않는 사회성 제로의 포지션 따위, 루비아는 취할 줄도 모르고 그럴 수도 없었다.
뮤는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루비아를 바라보았다. 그 자줏빛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은 헤아리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걸 지금 욕이랍시고 하는 건가……”
나지막이 토해낸 한마디는, 자신의 머리로 이해 가능한 영역을 한참이나 넘어섰다는 듯 아연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일단 네가 에지오의 전부를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게 일차적으로 역겹기 그지없고, 네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과거에 대해 아는 척하는 모양새가 이차적으로 혐오스럽고, 그렇게 에지오를 잘 안다는 사람이 어째서 지금까지 에지오와 깊고 깊은 관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건지 참 많은 의문이 들긴 하는데……”
“……읏.”
마지막 말은 루비아의 가슴에 꽤나 깊숙이 파고들었다. 처음은 뮤를 도발하기 위해 꺼낸 화제였지만, 일단 그의 이름이 언급되면 더 이상 누구 한 명 콕 집어 승리자라 부를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이걸로 너랑 나는 완전히 다르다는 걸 확신했어. …그래, 네가 계속 그런 모양이었으니까, 난 네가 진심으로 싫었던 거야.”
“……무슨 말이야?”
마물의 사체를 발로 툭툭 차며, 뮤는 픽 웃었다.
“에지오의 앞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 없을 거라고 했었나? 솔직히 말하면 그 반대야. 나는 에지오한테 내 모든 것을 보여줬어. 하나도 빠짐없이.”
과거, 현재, 미래.
태어나서부터 당신을 좋아하게 되기까지의 긴 이야기를, 그와 연인이 되어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웃는 얼굴로 말하기를, 셀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영원히 곁에 있겠노라 약속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그렇기에, 한때 영원이라 착각했던 나날의 기억을 되새기며 뮤는 말을 이었다.
“내키지 않으면 남의 말은 절대로 안 듣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골라 하고, 완전히 제멋대로였지. 에지오가 싫어하는 행동도 잔뜩 했어. 옆에서 많이도 괴롭혔고. 가끔 에지오한테 혼난 적도 많았지만, 대부분 해프닝으로 끝나거나 오히려 더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 에지오는 그럼에도 날 받아줬고.”
“……그럴, 리가.”
“네가 부정한다고 그게 현실이 되는 건 아니지.”
뮤는 루비아가 알고 있는 에지오와 정반대의 타입이었다. 그런 둘은 대체 어떻게 사귈 수 있었던 걸까.
멍하니, 뮤는 중얼거린다.
“에지오가 날 꺼려 했다는 건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긴 해. 그걸 알면서도 계속 다가갔던 게 나였으니까. 그리고 그땐…… 살짝 너한테 고맙기도 했었지.”
“뭐?”
자조적으로, 혹은 비꼬는 듯한 미소로.
어쩌면 그 둘의 의미가 모두 함축되었을지도 모르는 낯빛으로.
“네가 에지오를 시원하게 차준 덕분에, 그 빈 자리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
그건, 루비아의 후회스런 기억을 정면으로 관통하는 말이었다. 그와 그녀들 사이에 얽히고설킨 관계의 단초가 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설마 그때 받아줄 걸 그랬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혹시라도 부정할 생각은 하지 마. 너, 표정 관리 더럽게 못 하잖아.”
“……”
“너도 참…… 어지간하네. 솔직히 인간적으로 질렸어. 너처럼 멍청한 여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직설적인 비난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루비아는 입을 열지 못했다.
“너랑 나는 완전히 다르다고 했었지? 왜 그런지 알아?”
“……”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헌신적으로 잘해주겠다는데, 그걸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부터가 틀려먹은 거야.”
뮤가 검 끝으로 땅을 두드린다.
툭, 툭.
“모두에게 차별 없이 평등한 태도로 웃으며 대해준다면, 당연히 모두의 호감을 얻을 수 있겠지.”
“그런데 말야.”
“왜 그래야 하는데?”
“왜 모두의 호감을 얻어야만 하는데?”
“남이 자기를 싫어하는 게 무서워? 적으로 돌아선 타인이 날 상처 입히는 말과 행동을 할까 봐, 고작 그런 것 따위가 무서워서, 아무도 자길 싫어하지 않게 하는 거야? 도대체 왜?”
“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널 싫어할 사람은 반드시 싫어하게 되어 있어.”
“이를테면 널 시기하는 사람.”
“네가 남들한테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나날이 높아져만 가는 네 인망에 오히려 독기를 품는 사람. 너는 애써 무시하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네 주위에 있었을걸?”
“아 물론 마법부의 유명인께선 그런 사람들까지도 마음 넓게 포용하려 했겠지. 내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을 품고 다가가면, 그 사람도 진심으로 대응해줄 거란 순수한 믿음이 있었을 테니까.”
“그런 어린애 같은 생각, 난 정말로 혐오해.”
“현실을 알 만한 나이잖아? 세상이 절대 네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이미 깨달았을 거잖아? 사람이 무슨 개새끼야? 먹이를 주면 좋다고 꼬리를 흔들며 졸졸 따라다니게? …착각도 유분수지, 역겨운 비겁함을 순수로 포장하려 하지 마. 계속 말하지만 넌 순수한 게 아냐. 이쯤 말했으면 너도 알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가치관을 너한테 강요하진 않겠어. 난 네가 참 가엾고 딱한 어린애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그러니까─ 너와 나는 다르다는 거야.”
일장연설 같은 말을 끝내고 난 뒤, 뮤는 검 끝으로 바닥을 그었다.
카가가가각.
어찌나 단단한지 생채기 하나 남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선은 직선으로 쭉 그어졌다.
파캉─ 힘을 주고 지면을 꾹 누르자, 이미 실금이 그어져 있던 검날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코등이와 손잡이만 남게 된 검을 내려다보다가, 마물들의 사체더미 위에 쓰레기처럼 툭 던지고는.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특별하게 여겨주는 게, 정말로 지탄받을 만한 일인지, 난 전혀 이해를 못 하겠네.”
사회, 평판,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일까.
뮤에게 있어 진짜 행복이란……
‘이제 와서 뭘.’
“그러고 보니, 이렇게나 잘 안 맞는 우리한테도 공통점이 하나 있긴 했네.”
뮤는 고개를 들어 루비아를 바라봤다.
루비아의 표정은 썩 볼 만한 그림이 되어 있었다.
“……우리 둘 다 도저히 눈 뜨고 못 볼 만큼 역겹고 추하게, 이미 떠나간 사람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었다는 거.”
사실은.
루비아에게 한 말들의 일부가, 고스란히 자신에게 되돌아와 가시처럼 가슴을 쿡쿡 찔러대는 중이었다.
결국, 진심은 닿지 않았으니까.
“아, 공통점은 이제 아닌가.”
“……뭐?”
그제야 루비아는 반응했다.
뜸도 들이지 않고 뮤가 두루뭉술한 말을 내뱉는다.
“난 이쯤에서 포기할 생각이거든.”
등을 돌리자, 긴 장발이 휘날렸다.
저벅, 저벅……
어둠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는 뮤의 새까만 그림자를, 루비아는 결국 뒤밟지 못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