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11)
* * *
#19
“…야.”
“……음.”
“야?”
“……으음.”
“……자는 거야?”
“……”
“……하아, 이걸 어떻게 해야…”
“!”
“꺄악!”
꾸벅거리던 고개가 아래로 확 꺾인 찰나, 번쩍 하고 눈을 뜬 내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 어!”
급히 주먹을 들고 익숙한 마물의 향을 탐색하는데, 내가 엉덩이를 깔고 앉은 바닥이 미약한 빛으로 물든 것을 알아채곤 멍하니 한숨을 흘렸다.
“맞다, 여기 안전 지대였지.”
“……”
그러고 보니.
뭔가 우당탕, 하는 소리가 난 것도 같았는데.
“너 거기서 뭐 하냐?”
“……아냐, 신경 꺼.”
어쩐지 자기 가슴에 손을 대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듯, 바닥에 널브러진 채 차분히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미안, 깜빡 졸았네…”
“아냐, 괜찮아. 계속 자면 널 버리고 갈 생각이었으니까.”
“……뭐 임마? 그 말은 내가 없어도 괜찮다는 거지? 꽤 훌륭하게 성장한 것 같은데, 우리 이제 각자 갈 길을 가보는 게 어때?”
“……무, 문제없거든? 누가 못할 줄 알고?”
얼씨구.
자존심은……
“그래, 너는 그럼 여기서 체력 좀 비축하고 있어. 난 여기 앉아 있으니까 계속 졸립다. 먼저 갈게. 꼭 살아서 다시 보자, 우리.”
“…어?”
끄으응, 하고 기지개를 켜며 벌떡 일어섰다.
잠깐 정비를 위해 유리와 함께 안전 지대를 찾아 들어왔었다. 남은 식량도 거의 다 털어먹고, 물도 마시고. 여전히 용도를 알 수 없는 로프 등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배낭에 도로 집어넣곤 벽에 등을 기댄 채 아주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이다.
하마터면 수마에 완전히 빠져들 뻔했다.
그간 날밤을 샌 전적은 꽤 많았으니까 이 정도에 폭삭 무너지진 않는다. 약골 시절에도 무리를 하면 3일 정돈 끄떡없었으니, 지금은 훨씬 더 피곤에 대항할 수 없게 될 역치가 높아졌을 거다.
어깨를 빙빙 돌리고, 목도 뿌득이고, 그렇게 원래의 컨디션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마친 뒤 배낭을 멘 채 무기를 집어 들었다. 멀리서 적을 향해 투척도 가능한 손도끼였다.
유리가 목소리를 더듬거리며 내뱉는다.
“…어? 지, 진짜 가…?”
“그럼 가짜로 가냐?”
“아니, 어……”
한숨과 함께 대답하자, 유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너는 딱히 특별 과제 달성 필요 없다고 했었나? 난 이번 시험 성적 망친 거 커버하려면 그건 좀 달성할 필요가 있거든.”
사실 교육 과정을 1년 더 밟을 정도로 무참히 망친 건 아니었다만…… 내가 프론티어에 들어올 때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입학했는지를 상기해 보면, 지금의 내 성적은 반드시 이대로 놔두어선 안 되는 종류의 것이었다.
턱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음, 여기서 한 반나절 정도만 더 생존하면 아마 실습은 끝날 것 같으니까,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안전 지대 찾아다니면서 움직여 봐. 넌 몸도 작고 날쌔니까 어렵지 않게 생존할 수 있을 거야. 내가 말한 거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마물들의 약점이라든가.”
“기, 기억하고 있긴 한데… 아니, 잠깐, 그게…”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유리를 혼자 두고 나갈 것 같은 스탠스를 취하자, 반쯤 농담으로 말을 던져왔던 유리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 흐뭇한 모습을 나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씩 올리곤 가볍게 손뼉을 쳤다. 짝─.
“좋아, 그 정도면 충분해. 아카데미에선 너랑 얘기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오랜만에 둘이서 얘기 나누니까 재밌었다. 그럼 파이팅하고. 나중에 살아서 다시 만나자.”
“야, 야. 자, 잠깐……”
이쯤에서 유리는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급기야 안전 지대와 바깥의 경계선 바로 앞에 내가 발자국을 가져다 대자, 내가 성큼 나가 버리면 혼자 남겨질 공간을 쭉 돌아본 뒤, 명백한 두려움이 어린 기색을 표정으로 드러냈다.
거기서, 나는.
별 의미도 없을 기싸움의 승리를 확신했지만.
“너, 너한테 계속 손 빌리는 것도 좀 그랬고… 응… 그, 그래. 알았어. 나, 나중에… 봐. …나도 너, 너한테, 절대 안 질 거니까……”
어깨를 떨고 있는 유리로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 돌아오자, 되레 당황하는 건 내 쪽이 되어 버렸다.
입장상 나와의 협동을 거부할 수 없을 터인 유리가 당연히 어느 정도 선에서 스스로 패배 선언을 해올 줄 알았더니,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라고 보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대답을 해온 것이었다.
반쯤 진심이 담긴, 그러면서도 더 이상 나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나아가겠단 의지가 엿보이는 언행이었다.
“……아, 안 가고 뭐 해…?”
“……”
뭐지.
알고 보니 놀림당하는 건 나였던 건가?
도대체 언제부터……?
왠지 유리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듯한 께름칙한 기분이 들어, 그로부터 한참이나 입을 다문 채 유리의 모습을 지그시 응시하다가.
“……?”
의문 섞인 시선이 날 향하고 있음에도 꿋꿋하게 배낭을 내려놓은 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같은 낯빛을 띠고 있던 유리의 옆에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야, 너……!”
그제야 내게 놀림 받았단 확신이 든 건지, 점차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얼굴로 무어라 입을 여는 유리.
“진짜 가려고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너한테 꼭 말해줘야만 하는 게 있었더라고.”
사실 장난이었다고 말하면 한동안 심술이 나서 나랑 말도 안 붙이려 할 것 같았기에, 반쯤 진담이었단 투로 말했다.
그러자 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해줘야 하는 거?”
“어, 되게 중요한 건데. 타이밍이 좀 안 맞았네.”
갈팡질팡하느라 말을 미룬 거긴 했지만.
“그게… 뭔데?”
“일단 실습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네 옆에서 절대 못 떨어져. 차라리 만나지 않았었다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행동을 같이 하게 된 이상 널 절대로 혼자 둘 수 없어. 그게 옳아.”
“……머, 머머, 뭐? 무슨”
듣기에 따라 해석이 다르게 될 여지가 다분한 말이었으나, 유리가 목소리를 더듬든 말든 나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운명이 뒤바뀌어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이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야. 하지만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어. 예지(??) 속에서 이번 실습의 테마까지 예측했던 걸 보면,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그것과 연관된 일이 발생하게 되어 있을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대체?”
여전히 유리는 아리송한 얼굴이다.
옆을 돌아보자, 은근히 가까운 거리에 주춤거리며 어깨를 살짝 뒤로 뺀다.
“스텔라의 능력, 넌 알고 있어?”
그리 묻자.
유리는 눈빛을 침잠하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긴 했지.”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어디까지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이야기의 진실성만큼은 보장될 것이다.
“스텔라가 말하기를.”
나는 조용히 왼손을 들었다.
손가락을 딱 붙인 채 쭉 펴서 만들어진 손날로, 잠자코 내 얘기를 듣고 있던 유리의 목덜미에 슬며시 가져갔다.
“뭐, 뭐 하는……”
“사악.”
“……?”
목을 베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고.
손날을 도로 거둔 뒤, 당황스런 기색이 어린 유리의 붉은 눈동자와 직선으로 마주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네가 나한테 죽을 거래.”
#20
이어진 얘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내가…… 너한테 죽는다고?”
스텔라가 장막을 들추고 미래를 엿봤던 일. 지극히 단편적인 장면 속에 섞여든 유리와 나의 모습. 둘 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대치하다가, 결국──
“그래, 그렇게 된다나 봐.”
“그게 무슨……”
유리는 못 믿는 눈치였다.
그런 다음 슬금슬금 나에게서 멀어지며.
“너, 너… 처, 처음부터 날 죽일 생각이었어……? 나랑 같이 다니려고 한 이유도, 설마 가장 가까이서 날 죽이려고……”
“그럴 리가 없잖아.”
한숨을 폭 쉬었다.
“그랬으면 실습 시작 전부터 내 옆에서 떨어져 있으라고 말하지도 않았겠지.”
“아.”
그제야 내 이상했던 말과 행동의 진의를 깨달은 듯,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난 일국의 왕녀인 널 죽이러 온 암살자 같은 것도 아니고, 딱히 널 해코지할 생각도 전혀 없는 그냥 같은 반 친구야. 스텔라의 예언이 이해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내가 널 진심으로 죽일 이유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건지……”
“……”
“……뭐 찔리는 건 있구나?”
“아, 아니거든?”
유리가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렴 업보라 칭할 만한 게 적잖았을 테니……
“아무튼 그 때문에 이번 실습에서 가급적 너랑 마주치지 않으려 했었고, 혹여나 만난다고 해도 곧바로 협동할 생각까진 없었는데…… 하필이면 네가 위기에 처한 모습을 딱 맞닥뜨린 탓에 널 도와주게 되면서 자연스레 너랑 얽힌 거지. …더군다나 너랑 나 둘 다 미궁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서로였다는 점을 볼 때, 스텔라가 말했던 내용이 정말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
“이렇게 된 이상 너랑 따로 행동을 하게 되면 어딘가에서 다시 마주칠 것 같고, 그때 그 미래가 현실이 될 것 같고, 그럼 차라리 내가 네 옆에 있으면서 그런 미래가 될 만한 징조들을 미리 제거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급적 너랑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거고…… 지금까지의 상황을 대충 정리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으으음.”
유리는 깊은 상념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때 만약 내가 유리를 구하지 않았다면, 탈락 처리가 되어 미궁 바깥으로 나가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럼 스텔라의 미래 예지가 실현될 가능성이 절반 이상 사라졌을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위기에 빠진 사람을 충분히 구할 수 있는데 구하지 않는단 것은, 내 경우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다른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유리가 진즉 포기하지 않고 그때까지 쭉 살아남는 것에 성공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유리는 정말 진심을 다해 이 실습에 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까닭에.
유리를 버리지 않고 구하기로 결심했던 거다.
“무엇보다, 가장 불안한 건 이거야.”
“……뭔데?”
유리가 침을 꿀꺽 삼킨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널 죽인다는 거.”
“…이미 말했던 거잖아.”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 포인트를 다른 데 둬야지. 너와 내가 대상이라는 게 핵심이 아니라, 누군가 ‘죽는다’ 라는 그 자체가 가장 문제인 거야.”
“……!”
스텔라가 자세히 묘사하기를, 그건 도저히 두 눈 뜨고 보지 못할 것 같은 끔찍한 광경이라고 했다.
어디까지나 인공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실습이다. 아무리 실전과 최대한 유사하게 만들어진 환경이라곤 하나, 프론티어의 보호를 받는 학생을 그 지경까지 몰고 갈 리가 없다.
그러다 만일 학생의 정신에 큰일이라도 생기게 되면, 그로부터 비롯되기 시작할 문제들은 비단 프론티어 내부에서만 점화되지 않을 게 분명할 터였으니까.
애초에 실습에서 다치는 건 있어도, 죽는 일은 절대 없다. 그런데도 스텔라는 유리가 내 손에 죽을 거란 말을 했다. 몇 번이고 재확인을 했지만, 스텔라가 일부러 거짓을 고한 건 아니었다.
장소는 미궁으로 동일하다.
실습 종료까지도 머지않았다.
그렇게 멀지 않은 미래에,
나는 유리를 죽이게 된다.
……그것이 정말 예정된 미래라고 했을 때.
더 큰 문제가 생겨 버린다.
“어쩌면…… 우린 여기서 나가지 못할지도 몰라.”
더 이상 학생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여기서 죽으면,
진짜로 죽게 될 수 있다는 것.
……실습이 정말로 안전한가, 안전하지 않은가에 대해선 감독관에게 이미 몇 번이고 재확인을 받아낸 다음이었다.
그러나 미궁에 입장했을 때부터 나는 내가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감독관도 모르는 장치가 미궁 속에 숨겨져 있다면, 그 장치를 설계할 만한 인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미궁의 제작자일 거라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었다.
어차피 네비로스와 접견을 시도한들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진 않았겠지만, 다소 후회스런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유리는 내 말에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여긴 프론티어라구? 대륙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라구? 그 프론티어의 보호를 받는 우리들이 실습 도중에 죽는다니…… 그, 그런 게 현실이 될 리 없잖아.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설마 프론티어가 그 정도로 꼼꼼하지 못할까.
지난번 사건의 후폭풍으로 말미암아 한층 안전에 대한 방비를 확실하게 했을 텐데, 또 비슷한 실수를 저지를까.
이번엔 단순히 누군가 다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에픽 클래스의 학생이 사망하는 사고가 벌어진다는데, 일이 그렇게 진행되도록 허술히 놔둘까……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해.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스텔라가 미래를 잘못 봤을 거란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어.”
“여, 역시 그렇지? 그럼……”
“하지만 스텔라가 틀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뭐?”
“스텔라가 지금까지 봐왔던 미래들은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는 거야. …이 얘기 스텔라한테 들은 적 없었어?”
“……거기까지는, 잘.”
“그러냐… 아무튼, 예정된 미래로 향하는 과정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단다. 어떤 식으로든 우린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거라는 거지.”
“……”
유리는 눈을 내리깔며 어깨를 손으로 감싼다.
예언 속의 자신이 끔찍한 몰골이라 하였기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벌써부터 두려움을 느끼는 듯싶었다.
“…그보다 이걸 왜 이제야 말해주는 건데? 나한테 미리 말해줬다면 나도 같이 너희들이랑 의논해볼 수 있었을 거잖아…”
나지막한 중얼거림.
살짝 풀이 죽은 듯한 모습에 내가 말했다.
“아니, 뭐…… 지금 네 모습처럼 지레 겁먹고 실습에 지장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나, 싶었지.”
“거, 겁먹은 거 아니거든?!”
그야말로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는 속언의 전형적인 표본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장난이고, 너한테 미리 말해주지 않은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그땐 경황도 없었을뿐더러, 너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진 않았거든. 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됐네. 그냥 시험도 망친 겸 깔끔히 실습을 포기할 걸 그랬나 봐. 갑자기 좀 후회스럽네.”
허탈히 하늘을 올려다보자, 바로 옆에서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이미 일어난 일이야. 후회 같은 건 내다 버려. 스텔라의 말로는 어차피 그렇게 될 거였다며? 그럼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만 생각해야지. 뒤를 보지 말고 앞을 보란 말이야. 바보야.”
언제 겁먹고 움츠러들었냐는 듯, 꽤 당당한 음성이었다. 설마 유리한테 썩 올바른 훈계를 받을 줄은 몰랐는데.
“……뭐, 뭘 그렇게 봐?”
유리가 눈썹을 꿈틀거린다.
“아냐,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아서. 고맙다.”
“……흥.”
딱히 할 말이 없는 듯, 앉은 채로 팔짱을 낀다.
“그래, 앞을 봐야지. 앞을……”
머리를 주억이던 내가, 잠자코 입을 열었다.
“아예 희망이 없는 건 아냐.”
스윽.
내 말에 유리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결과만큼은 어떻게 될지 모른대.”
“……결과?”
“그래, 정확히 무슨 뜻인진 나도 잘 몰라. 스텔라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고 했거든. 그래도 일단 뭔가 바꿀 수 있다는 건 확실해 보여.”
“난 잘…… 모르겠는데.”
“음……”
턱을 어루만지면서.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리다가.
“너와 내가 만신창이가 되는 것까진 예정된 미래일 수 있겠지만, 그런 뒤 내가 널 ‘죽인다’ 라는 미래까진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말, 아닐까?”
막연히 그렇지 않을까, 라고.
어렴풋이 추측할 뿐이다.
“글쎄, 역시 잘 모르겠는데……”
유리가 입술을 깨물다 말을 잇는다.
“애초에 네가 날 죽인다니? 그럼 네가 날 죽일 마음이 있었다는 거잖아? 너랑 내가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 한들 서로 목숨을 건 전투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어?”
“아니, 잠깐만, 야. 뭔 소리야? 내가 널 왜 죽이고 싶어 한다는 건데? 아까도 말했지만 난 딱히 암살자 같은 게 아니라니까?”
“그건…… 말이야 누구나 할 수 있는 거고.”
“……”
“무, 무엇보다.”
날 정말 신뢰하지 못하는 거냐, 같은 시선으로 지그시 바라보자, 유리는 그런 게 아니라는 듯 내 눈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나, 난 일단 널 죽이고 싶진 않은 건 확실한데,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진…… 솔직히 잘…… 모르겠으니까……”
아
그러니까.
자긴 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정작 내 진짜 속마음이 뭔진 아무래도 알 수 없으니, 거기에 초점을 두고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 대충 무슨 뜻인진 이해했다.
어이가 없어 픽 웃으며 말했다.
“나한테 못살게 굴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으면, 조금은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은데.”
“시, 시끄러워… 애초에 네 잘못이잖아. 네가 자꾸 내 쪽에서 싫어할 만한 짓을 하니까 비호감이 계속 쌓이는 거 아냐?”
“그래서 내가 죽을 만큼 싫다고?”
“자꾸 없는 말 지어내지 말아줄래?!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잖아!”
“아, 알았어. 뭔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이렇게까지 격하게 부정해 버리면 더 놀리기도 힘들다.
“…아무튼 난 널 오히려 지키고 싶어하는 입장이야. 널 죽이고 싶어했다면 그때 거기서 널 구하지도 않았겠지.”
유리는 씩씩거리며 한참 분을 삭이다가, 내가 자길 구해준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는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내가 방금 말했듯.
나는 유리를 죽일 마음도,
그래야 할 이유도 무엇 하나 없다.
만일 그런 내가 유리를 죽이게 된다고 하면, 누군가 내 행동을 억지로 강제한다는 건데.
‘……어?’
……강제한다고?
일순── 얼마 전, 고위 마수의 환영과 싸워 승리해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는 함정에 빠졌을 때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때 난 내 몸의 통제권을 잃었었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고, 마물의 피륙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그러고 나서도 계속, 계속 마물의 사체를 터트렸다.
만일 내가 또 다시 그런 폭주 상태가 되어서, 이번에는 마물이 아닌 유리를 공격하게 된다면……
그 미래가 현실이 되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덜컥,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리.”
“……?“
“잠깐 테스트해 볼 게 있어.”
“뭐, 뭔데?”
“손 좀 내밀어 볼래?”
“……손?”
내가 심각한 얼굴로 말문을 열자, 유리는 침을 꿀꺽이며 순순히 손을 내놓는가 싶다가.
홱 하고 도로 거두었다.
“시, 싫어! 뭐 하려고 그러는 건데!”
“이상한 거 아냐. 진짜 잠깐이면 되니까.”
“그게 더 의심스러운 거 알아……?”
“됐고, 빨리. 잠깐만 내밀어 봐.”
“……”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입술을 질근 깨물다가.
“……이상한 거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스윽…
내 손바닥 위에 자기 손을 살포시 얹었다.
서늘하고, 부드럽다.
유리의 볼과 귓불이 발갛게 물든다.
부끄러움으로 손가락 끝이 떨리는 건 알겠는데, 놀린답시고 그쪽에 신경을 기울일 여유가 달리 없었다.
정신을 집중하고, 능력을 발동했다.
이건 아직 추측에 가깝지만.
내가 새로 깨우친 능력의 영향이 닿는 범위는, 어디까지나 인간이 아닌 존재에 한하고 있었다.
언데드, 유령, 마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마족(??).
파아아앗─
“윽……”
밝은 빛이 터져 나오자,
유리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내 능력에 데미지를 입은 건 아니었다.
단지 눈이 부셨던 까닭이다.
다행이다.
“하아…… 역시.”
안도하는 느낌으로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본 거지만.
유리는 마족 같은 게 아니었다.
“……그, 그래서 지금 뭘 한 건데?”
이제 됐다는 의미로 손을 거두자, 아리송한 얼굴의 유리가 넌지시 물어왔다.
“아군 테스트.”
“…뭔 테스트?”
“별거 아냐. 실패했으니 의미도 없어.”
“……?”
여전히 의문 가득한 시선이었다.
“유리.”
그런 유리에게 다시금 말했다.
“이번에는 또 뭐……”
“만약에.”
“?”
“만약에, 악마가 나타난다면.”
그리 운을 띄우자 고개를 갸웃한다.
“……악마? 마물? 마물이라면 지금도……”
“아니, 그런 가짜들 말고.”
“뭐?”
마기(??)의 수준부터 차원이 다른 것들.
“날개 달린 것들 말이야. 진짜 악마.”
사실 마족이니 뭐니, 유리가 그런 것들과 얽히게 만들고 싶진 않았지만, 미리 언질을 주어서 나쁠 건 무엇 하나 없을 것이었다.
“알고 있지? 악마.”
“그야 당연히 알긴 하는데, 갑자기 그건 왜……”
“아무튼, 만약에 악마가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면.”
“……?”
절대로.
그럴 일이 없길 바라야겠지만.
누구도 휘말리게 하진 않을 테지만.
지금으로선,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그땐 내 옆에서 최대한 빨리 떨어져.”
역시나.
“……얘 왜 이래, 진짜?”
유리는 머리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21
미궁의 최중심부.
육중하고 거대한 문 앞에 결국 도달하고야 만── 첫 번째 손님의 존재를 눈치챈 네비로스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씰룩였다.
‘드디어 시작됐군요.’
테이블 위에 걸터앉아 와인잔을 찰랑였다.
선혈처럼 붉은 액체.
맛대가리 하나 없는 인간의 피 따위 구태여 마실 필요도 없고 즐기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네비로스의 와인잔 속에 채워져 있는 것은 단순한 고급 와인이었다.
“흠, 흠.”
탁, 와인잔을 내려놓고.
어둠에 잠긴 주변을 돌아보며, 중얼거린다.
“그럼, 편안히들 주무시길.”
지지지직… 지지직……
스크린은 모두 시꺼멓게 물들어 있었다.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저벅, 저벅.
문을 열 필요도 없다.
어둠 속의 실루엣은 한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속으로 말을 읊었다.
‘그쪽 상황은 어떤가요?’
곧 대답이 들려왔다.
‘작업을 모두 끝냈습니다. 주인님. 송출을 전원 차단했고, 원상태로 복구되려면 최소 10시간 이상 걸린다는 공지를 해놓았습니다.’
‘좋아요, 어차피 대부분 자고 있겠지만.’
시간이 한참 늦었다. 새벽이다.
깨어 있는 학생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계속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나머지는 시킨 대로 쭉 진행하세요.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주인님.’
로베르는 곧 흙으로 돌아갈 시체였다.
그러니 수고했단 말조차 하지 않았다.
“……”
최종적으로 주변을 다시 훑어보고.
만족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띤 뒤──
네비로스가 손을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균열이 일더니, 새까만 어둠 속으로의 포탈이 만들어졌다. 네비로스가 사뿐한 걸음을 내디뎠다.
보물들을 맞이하러 갈 차례였다.
만들어진 환상 속의 공간을 통과할 때 느껴지던 감각은 존재하지 않고, 살짝 마기(??)가 짙을 뿐인 현실이 펼쳐졌다.
곧 이곳에 도착할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들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두었던 말들을 입속에서 굴려대다가.
흐음 하고, 턱을 어루만졌다.
‘뭐, 어떻게 말해도 괜찮겠죠.’
저마다의 소원(??)이 있는 한.
절대 거부할 수 없을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