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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54화 (154/201)

〈 154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13)

* * *

#25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중도 포기 선언이 반려되었다.

아니면, 들었는데 무시한 것일 수도 있다.

이건 정말로 큰일이다.

프론티어의 감독관이 직무유기를 하고 있을 리도 없고. 나 역시 무조건 밖으로 꺼내질 줄 알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면, 스텔라의 예언이 정말 현실이 되고 있다는 걸 피부 위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갇힌 거야?”

“글쎄.”

자의로 미궁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었단 현실에 맞닥뜨리자, 유리와 나는 급격히 심각해진 얼굴로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애써 태연하려던 유리는 결국 참지 못했는지.

“가, 갇힌 게 아니면 뭔데…? 감독관이 우리 말을 안 듣고 있는 거 아냐? 밖에 무슨 일 생긴 거 아니냐구!”

“침착해 봐. 흥분해 봤자 좋을 거 없어.”

“이, 이걸 어떻게… 하아아… 아니, 말도 안 돼. 진짜로? 진짜로, 우리…… 여기 갇힌 거야? 스텔라가 말했던 게 진짜라고? 나, 나 죽어? 죽는 거야? 너한테?”

“침착하라니까.”

내심 믿고 있지 않던 걸까.

닥쳐오는 현실감에 점점 혼란을 덧씌워가는 유리의 어깨를 손으로 꾹 눌러준 뒤, 바닥을 내려다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뭔가 조작이 가해진 건 확실한 것 같아. 일단 우리 스스로 탈출은 불가능해. 이건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실습이 아니야.”

지금으로서 추측 가능한 루트는 세 가지였다.

함정이나 마물에게 당하기.

포기를 선언하기.

미궁의 중심부에 도달하기.

원래라면 이 셋 중 하나를 통해 미궁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을 텐데, 지금 두 번째 루트는 원천봉쇄가 되어 버렸다.

그럼 남은 건 두 가지인데.

그중 하나, 함정이나 마물에게 죽음에 가까운 피격을 당해서 탈락하는 것……

이건 솔직히 시도해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당장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마당에, 여기서 이루어지는 죽음이 실제 죽음으로 이어질지 어느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모른다.

재빠른 판단을 마쳤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빨리 움직여야 해. 아니면, 지금까지 살아남은 다른 애들을 찾아야 해.”

왼쪽 팔을 부여잡고 일어섰다.

“여, 역시 착오가 있던 거 아닐까? 잠깐 기다린 다음에 다시 시도해 보면……”

“유리. 부정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지금은 현실 도피를 할 시간이 없어. 그리고 프론티어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완벽하게 안전한 장소가 아냐.”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니?”

유리가 가슴께에 손을 모은 채 떨리는 눈으로 그리 물어왔다. 괜한 불안감을 더 심어주게 되려나. 마족의 소행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목구멍 너머로 도로 삼킨 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이지. 지금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걸 보면. …아무튼 이러고 있을 시간에 빨리 다른 애들을 찾거나, 여기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해.”

“너, 너무 심각하게 얘기하지 마… 무서워지잖아.”

“심각한 일이 맞는데 어떻게 하냐.”

한숨을 폭 내쉬었다. 또 이런 일에 휘말린 건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어째.

“일단 움직…… 윽!”

“─! 야!”

갑자기 지끈거리는 격통에, 내가 휘청였다.

옆에서 유리가 달려와 날 부축한다. 체격이라든지 나보다 한참 작아서 이걸 부축이라 해야 할진 잘 모르겠다만. 성의가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됐어, 괜찮아. 잠깐 어지러웠던 거야.”

“괜찮긴 뭐가…!”

내가 끔찍하게 싫다니, 남자 몸에 닿는 건 손가락만이라도 혐오한다니 뭐니, 그랬으면서 먼저 이렇게 다급히 달려와 허리를 부축해주며 하는 말은, 꽤 감동스런 울림을 담고 있었다.

저벅… 저벅…

유리의 부축 아닌 부축을 받으며 통로를 걷는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 음울해진 것 같은 미궁의 분위기. 어디선가 슬금슬금 들려오기 시작하는 마물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내 허리를 팔로 감싼 유리가 패닉에 빠진 채 아무 말이나 내뱉기 시작한다.

“나, 나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여기서 뭘 해야, 어, 나… 나 계속, 짐만, 짐만 될 거 같은데… 아까 실수도 했고, 그거 때문에 너 다치고, 아, 아… 음… 어…… 이제, 어떻게 해……?”

“어떻게 하긴.”

내가 말했다.

“살아야지.”

여기서 내가 당황하면 안 된다. 한쪽이 패닉에 빠진 지금, 다른 한쪽은 정신적 버팀목이 되어줘야 한다. 무엇보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 같은 건 숱하게 겪어보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가 의외로 의식이 차갑다. 평소보다 더 이성적인 것 같았다. 자기 목숨이 경각에 달하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는 게 틀린 말도 아닌 듯했다.

“진짜, 어떻……”

“많이 무섭냐?”

“……뭐?”

“내 손이라도 잡을래?”

일부러 픽 웃으며 말했다.

“지금 이럴 때 장난 같은 건……!”

“장난 아냐.”

“……”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 서로를 놓치지 말아야지. 어느 한쪽이 홀랑 사라져 버리면 안 되잖아. 무엇보다 손을 잡으면 옆에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안심되기도 하고. 안 그래?”

“……”

“진짜 잡게? 귀엽네.”

“아, 아직 아무것도 안 했거든?!”

그래, 아직이겠지.

손가락 꿈틀거리는 거 다 봤다.

확 내빼길래, 웃음기를 유지한 채 말했다.

“걱정 마. 난 네 옆에서 절대 안 떨어져.”

“……”

유리는 반응하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내리깔고, 날 부축하길 거둔 팔을 의미 없이 가슴께에 모으고 있을 뿐.

걸음걸이에 따라 한데 묶은 머리가 흔들린다.

역시나 안색은 좋지 않다.

흐음.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야, 뭐…!”

스윽, 스윽.

이걸로 기운이 날진 모르겠지만.

일부러 싫어할 만한 행동을 한다.

하루 정도 씻지 않았을 텐데, 윤기인지 기름인지 알 수 없을 무언가로 반짝이는 유리의 정수리 위에 손바닥을 얹곤, 그대로 거칠게 몇 번 흔들어주고 난 뒤, 즉각 성을 내며 반응하는 유리를 바라보면서 허실한 웃음을 흘려댔다.

“이, 이거 치워…!”

탁, 하고 내 손을 쳐낸다.

도도하게 좁힌 미간. 어린애 취급을 싫어하는 만큼 불만 가득한 표정. 내가 아는 유리의 모습이 잠깐이나마 돌아와 있었다.

유리가 입을 삐죽이며 중얼거린다.

“네가 뭘 어떻게 한다는 건데……”

“말했잖아, 어떻게든.”

“그게 말이 되냐고……”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던 유리의 얼굴은, 전보단 확실히 본래의 기운을 차린 것처럼 보였다.

그런 유리를 잠자코 바라보다가.

“──?!”

덥석.

왼손을 내 손으로 붙잡았다.

말랑하고, 따뜻하고, 부드럽다.

놀라서 말도 안 나오는지, 눈만 동그랗게 뜬 채로 날 올려다본다.

“므, 뭐──”

“네가 그렇게 어두워져 있으면 나까지 위험할 수 있잖아. 이러는 편이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기운 차려야지.”

“아니, 그…!”

당연히 놀라 내빼려고 한다.

하지만 놓치지 않는다.

꾸욱─.

더 세게 감싸 쥔다.

“이익…! 이, 이거…”

“정말 놓아도 돼? 이거 한번 놓으면 다신 안 잡아줄 건데? 다음에 잡고 싶으면 네 쪽에서 먼저 잡아야 한다?”

“그런 거 알 바야?!”

유리가 바락 소리친다.

마물들 다 끌어모으겠네 이거.

“쉿, 목소리 낮춰.”

“……”

유리는 순순히 내 말을 들었다.

“……내, 내가 무슨 어린애냐고…! 남의 손 잡았다고 안심하게…! 됐으니까 이거 놓기나 해……!”

“흐음, 나 지금 힘 엄청 빼고 있는데. 네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놓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빼긴 무슨, 더럽게 세기만 한데……!”

얼굴이 발갛다. 화가 나서 그런 걸까.

“맞아, 힘 세게 주고 있어. 빼보려면 빼보든가.”

“이익……!”

사실 유리의 반응을 보는 것도 재밌긴 했지만, 이쯤에서 더 부끄럽게 만들긴 그만두기로 했다. 유리는 자기가 먼저 원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합리화를 시켜줘야 내 말에 따르는 경향이 있으니까. 내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거다­ 라는 인식을 심어줘야 한다.

“하아…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진짜 오랜만이야…”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던 유리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고, 이내 우리 사이엔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 내 손에 잡혀 있다. 거기에 온 감각과 신경이 쏠려 있는 듯 예민하다. 손바닥에 땀도 나는 것 같고. 누구 땀인진 모르겠다만. 그래도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온기가 따뜻하다는 사실.

결국 손을 놓는 걸 포기한 유리의 옆에서, 마력으로 불을 피운 채 어두캄캄한 길목을 밝히며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아직까지 마물이 등장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인기척을 살피는 걸 멈추지 않은 채,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리.”

“…뭐.”

“역시 너, 내 여동생 하지 않을래?”

반쯤 농담.

반쯤 진담으로 한 말이었다.

물론 진담이라 해봤자, 그냥 유리가 내 여동생이라면 상당히 귀엽게 아껴줄 수 있을 것 같아서 해본 농담에 가까웠고……

당연히 유리도 농담으로 취급하고 바락 성을 낼 줄 알았다만.

“…내 오빠는 한 명 뿐이야.”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러니까, 너 같은 게 내 오빠가 될 수 있을 리 없어…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마. 날 화나게 하고 싶지 않다면.”

“알았어, 미안해.”

“……흥.”

정말 화났을까.

일단 손은 놓지 않고 있는데.

“……”

“……”

그렇게 묘한 침묵에 감싸인 채 유리와 통로를 걸어 다니며, 슬슬 분위기 환기도 되었겠다 싶어, 본격적으로 탈출 방법을 찾기 위해 움직이려 했던 찰나──

저벅.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인기척이 났다.

“!”

“뒤로 물……!”

맞잡았던 손이 빠르게 풀렸다.

둘 다 급히 태세를 정비할 시간도 없이, 통로의 모퉁이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형체를 갖추곤,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각자 마력과 염력을 끌어올리고.

맞은편에선 시뻘건 화염구가 소환되고.

“……?”

“……에?”

“……어, 어라? 너희들……?”

그 불빛으로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통로를 감싸고 있던 긴장감과 세찬 기류들은 일시에 팍 사그라들고 말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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