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56화 (156/201)

〈 156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15)

* * *

#28

무슨──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도 동일했다.

어둠 속에 길쭉한 신형이 우뚝 서 있다.

분명 우리 앞에 있는데, 없는 것처럼, 존재감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똑똑히 그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손을 뻗으면 그대로 투과될 것 같다. 실체가 아닌 유령을 보는 듯 오싹한 기분.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지?

우리는 단체로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렇다고 자리에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발이 바닥에 박혀 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의 존재감은 없다. 테트라나 엘레나 같은 초인(?人)들이 내뿜는 강렬한 압박감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째서 발가락 하나 꿈틀거릴 수조차 없는 걸까.

새하얗고 기괴한 가면을 쓴 장발의 남성이, 우아하게 팔을 접어, 귀족의 예를 갖추어 인사하듯 천천히 허리를 굽힌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러분.”

주위가 조용한 만큼 더욱 선명한 목소리.

처음엔 분명 남성이라고 생각했지만, 음색이 중성적인 탓에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지금 와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닐 터다.

뻣뻣하게 굳어 뒷걸음질도 차마 치지 못하는 루비아와 유리를 인지하고, 가장 앞쪽에 선 내가 입을 움직였다.

그러나, 접착제라도 발라 딱 붙여 놓은 듯 쉽게 떨어지지 않는 입술.

턱관절을 부술 생각으로 힘껏 입을 벌리니, 그제야 얇게 벌려진 틈새로부터 깊고 낮은 음성을 낼 수 있었다.

“…당신, 누구야.”

“……오­?”

남성 혹은 여성이 고개를 아주 살짝 기울였다.

“지배를 벗어났다…? 으음, 당신이라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겠죠. 제 자존심이 일부 상처를 입긴 했지만, 오히려 좋아요. 당신은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는 뜻이니까.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방증이 되어주니까. 이거 참 기쁘군요, 기뻐요. 으후후.”

무척 기분 나쁜 사람이다. 영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릴뿐더러, 얼굴에 덧씌운가면을 손으로 붙들고 음산하게 웃고 있다.

평소였다면 자기만의 세상에 몰입한 미친 사람인가 하고 피했겠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미친 사람이란 전제는 빗나가지 않을 것 같았으나, 되레 그렇기에 더 위험하다.

머릿속으로 무수한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감독관도 아니고 같은 반 학생도 아니다. 그렇다면 외부인이다. 허락 받지 않은 외부인이 실습 도중에 마음대로 난입할 수 있던가?

아니,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럼 자기 멋대로 출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교수와 감독관을 제외하면── 단 한 명밖에 없겠지.

확신하기 전에, 나는 조용히 물었다.

“누구냐고 물었어.”

스윽.

가면을 붙들고 있던 남자의 손이 우뚝 멈춘다.

순간적으로 주춤거렸지만.

“제가 무서운가요?”

“……”

“일단 뒤의 두 분께선 많이 무서워하시는 것 같군요. 운명적인 만남의 첫인상이 이래서야……”

남자는 웃음기를 담은 채 목소리를 낸다.

“겁먹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해치러 온 게 아니니까요.”

“…해치러 온 게 아니라면, 우릴 이렇게 묶어 놓을 이유가 대체 뭐지?”

“그거야, 여러분들이 절 공격하거나 혹은 멀리 도망가실 수도 있기 때문이죠. 저는 몸의 대화보다는 말로 하는 대화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면, 마음을 나누기에도 훨씬 더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남성은 제 가슴께에 부드러이 손을 얹었다.

“믿지 못하신다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도 제가 수상하게 보인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런 곳에 있으면 안 될 사람이 눈앞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다…… 흐음, 세상은 늘 예외로 가득 차 있는 법이지만, 제 생각에도 조금 문제가 있는 상황이라 판단됩니다. 여러분들의 심정을 백분 십분 이해하고 있습니다.”

“알면, 이거 풀어.”

“……”

백색 가면에 뚫린 눈구멍으로부터, 무언가 빛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는 처음부터 여러분들에 대한 존중을 담아 꼬박꼬박 존대를 써가며 친절히 얘기를 해드리고 있는데, 에지오 크라닐, 당신은 어째서 절 사납게 적대하고 있는 거죠? 혹시나 제가 다른 마음을 품어 여러분들을 전부…… 으음, 아니죠. 그럴 일은 절대 없으니까요.”

“내 이름은 어떻게……”

“관심을 가진 상대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이상한가요? 더군다나. 당신도 제 이름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의심은 곧 확신이 된다. 남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본다.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에 인상을 팍 찡그리며, 내가 입을 열었다.

“…네비로스.”

그러자.

“아니─! 틀렸습니다─!”

네비로스는 크게 부정하며 소리쳤다.

“네비로스! 그건 제 이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과 평범한 장소에서 만났다면 저를 그리 부르셔도 좋지만, 오늘같이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서 여러분들과 기적적인 만남을 가지게 된 지금, 저는 여러분들께 조금 더 진정성 있게 다가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네비로스가 아닙니다. …저를 그리 부르지 말아 주시길.”

그의 목소리는 분출하는 화산처럼 격정적으로 높아졌다가, 다시 낮아지는가 하면, 종래에는 속삭이는 듯한 음색으로 바뀌었다. 우스꽝스런 연극이라도 하듯 한껏 과장된 몸짓은 덤이었다.

한편, 내 추측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네비로스였다.

드넓은 미궁의 주인. 이 모든 사태의 원흉으로 추정되는 대마법사. 그러나 자기 이름을 부정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네비로스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에지오 크라닐, 그리고 저 뒤쪽은, 루비아. 유리 폰 아르티나. 다들 정말 예쁜 눈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마치 보석 같아요.”

나뿐만 아니라 루비아와 유리까지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들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빨리 찾아올 거라곤, 예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가면의 콧잔등을 손으로 툭툭 두드리다가.

“그런데, 자기소개는 조금 나중으로 미루도록 할까요? 이런 퀘퀘한 장소는 별로 특별하지 않으니까요. 더 의미 있는 곳에서, 서로의 마음을 활짝 열고, 같이 진솔한 대화를 나눠보도록 합시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

“……”

“……”

우리 셋의 대답이 없자, 네비로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곧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이런, 제가 실수했군요! 동의를 얻기 위해 잠시 입을 풀어드리겠습니다.”

허어억……

뒤편에서 숨이 터져 나온다.

“자, 이제 말하실 수 있겠죠?”

“……정말 네비로스, 님이신가요?”

겨우 목소리를 쥐어 짜낼 수 있게 되자마자 루비아가 그리 물었다. 네비로스는 루비아의 질문에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지만, 저는 네비로스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뜻은 알 것도 같군요. 예, 맞다고 하면─?”

“정말로 네비로스 님이시라면.”

“예─.”

“어째서, 이런 짓을……”

“……이런 짓?”

순간.

네비로스는 화를 내는 듯 보였다.

“제가 도대체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시는 거죠?”

그에 답하는 건 나였다.

“……우리 앞에 불쑥 나타나 우리를 강제로 속박하고 있다는 건, 미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당신의 소행이라는 걸 입증하는 꼴이 아닌가?”

“그러니까, 제가 정확히 뭘 했죠?”

“그건──”

“저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을 일부러 다치게 하지도 않았고, 장치 같은 것에 손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건 정해진 일정대로 흘러갔죠.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해왔던 실습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단 말입니다. 제가 직접적으로 개입한 부분은 단언컨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아직은──!”

네비로스가 쩌렁쩌렁히 소리쳤다.

“…계속해서 강조하지만, 여러분들을 해칠 생각으로 온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 저는 그냥, 여러분들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소망을 이루어주고 싶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소망?”

“그래요, 소망.”

네비로스가 진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것은 곧 싸늘히 굳어 버렸다.

“……이제야 뜻이 통하려 하는데, 주변에서 방해꾼들이 들어오는 것 같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길목 모퉁이에서 소리를 듣고 찾아온 마물들.

그들을 돌아본 네비로스는 느릿하게 손을 들고, 찍어 누르듯 아래로 내렸다.

풀썩, 사르르르르.

뼈와 피부가 녹아내리고, 모래처럼 부서지기 시작한 마물들은 곧 미궁 바닥에 물처럼 흡수되고 말았다.

“살아 있는 것이라면 전부 물어뜯으려 하죠. 저도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에 구별 없이 공격하려 한다는 점이, 어찌 보면 참으로 안쓰럽습니다. 물론 제가 그리 행동하길 의도하긴 했습니다만.”

“…미궁의 마물들은 모두 당신이 만든 건가?”

“만들었다, 라…… 글쎄요. 그건 좀 어긋난 표현입니다. 저는 단지 흙으로부터 일으켜 세워줬을 뿐. 저는 창조주가 아니기에, 없는 걸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한낱 피조물 따위가 아닌 신의 영역이니까요.”

흙으로부터 일으켜 세운다.

마물들, 언데드(Undead)를 다룰 수 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내가 중얼거렸다.

“…네크로맨서(Necromancer).”

“그렇게도 부르던가요. 좋은 울림입니다.”

공간 계열 마법의 대가라 불리는 대마법사이자 시체들의 군주, 네크로맨서. 사령과 강령을 다루는 흑마법사. 점점 눈앞의 존재가 더없이 께름칙해지기 시작했다. 네비로스가 부정을 하지 않자 내 뒤에 있던 루비아 역시 흠칫하며 불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루비아는 네비로스를 목표로 삼으며 공간 마법 연마를 하고 있었다. 그랬던 목표 대상이 인륜을 배반한 타락한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기분을 느꼈을까.

“혹자는 제가 이 미궁을 단시간에 만들어 냈다, 그러니 정말 대단한 마도(??)가 아닐 수가 없다, 라고 하더군요.”

네비로스가 말을 잇는다. 비웃는 듯하며.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검은 기운이 휘감긴 손바닥을 위로 향한다.

지면으로부터 꿈틀거리며 솟기 시작하는 뼈와 살점들. 인공적으로 배치된 소환진으로부터 소환되는 게 아니라, 바닥 깊숙이 잠들어 있던 시체들을 거짓된 생명으로 다시금 일깨운다.

우리가 위치한 곳을 제외하고 앞뒤를 꽉 틀어막은 시체들의 무리를 바라보면서, 네비로스가 재차 입을 연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찬찬히 공들여 만든 저만의 보물고. 그런 귀한 공간을…… 여러분들을 위해 친히 제공해드린 겁니다. 제겐 더 이상 의미도 없는 재화 따위를 받고. 이런 무상의 친절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물론, 원하는 게 아예 없던 것도 아니지만요.”

“……우리한테 원하는 게 뭐야.”

“그걸 말씀드리기 위해서, 잠깐 장소를 옮기자고 한 겁니다. 정식으로 자기소개도 할 겸.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비로스가 우리들을 빤히 바라본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표정은 알 수 없다. 주위에선 네비로스가 일으킨 시체들이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분위기에 질려 유리도 루비아도 선뜻 입을 열지 못하는 와중, 나는 여차하면 곧바로 움직일 생각에 말을 꺼내었다.

“우리를 해치지 않을 생각이라면, 어째서 우릴 미궁 밖으로 꺼내주지 않는 거지?”

“대화가 끝나면 꺼내 드릴 겁니다. 안전하게.”

“그 대화라는 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럴 일은 없을 텐데요?”

“……어째서지?”

내 질문에 네비로스는 순순히 답한다.

“저는 여러분들의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온 것이니까요. 딱히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답니다? 유혈을 즐기는 취미는 없어서요.”

“……”

“제 말을 들어서 여러분들에게 손해가 생길까…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정말로, 그냥, 단순하게, 대화를 나누고, 여러분들이 바라는 걸 이루어드리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그리하면, 저 또한 제가 바라는 것을 이룰 수가 있기에. 아무도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같이 행복합니다. 이렇게나 좋은 엔딩을 도대체 왜 거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비열한 사기꾼의 농간 같아서? 계약이라도 해드리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의 태도에 진심으로 실망했다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가면을 움켜쥐고 물어온다.

“제가─ 마족이라 생각하니까?”

“……”

정말로 무슨 꿍꿍이인지 모르겠다.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다. 네비로스는 터무니없이 강하다. 그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확실히 깨닫고 있는 사실이다. 함부로 덤볐다간 저 시체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니 다짜고짜 속박을 풀고 주먹을 쥔 채 달려들 순 없었다.

네비로스의 말과 행동만 보면, 아직까지 우릴 해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자세한 이유는 모른다. 우리한테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눈앞의 상황만 따졌을 때 네비로스의 말을 듣는 게 최선이다. 일단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괜히 반발심을 사봐야 좋을 거 하나 없던 까닭이다.

그런데도 의심을 거두지 못하는 마지막 이유를.

“오해라고 말했지 않습니까. 저는 여러분들과 같은 인간입니다.”

네비로스는 너무나 가볍게 부정해 버렸다.

말만으로는 믿을 수 없다.

네비로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 이제 대충 설명이 되었다면……”

“소망을 이루어준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이지?”

내가 묻자, 루비아가 나를 말린다.

“에지오…!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

“확실하게 해두는 편이 좋아.”

무작정 따라갈 수는 없다.

“소망이란…… 말 그대로입니다.”

네비로스는 전혀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고 말을 잇는다. 가면 너머의 눈동자가 날 빤히 쳐다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유.”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었다.

내 목덜미를 훑었던 시선이 날 지나친다.

“소생.”

“……”

뒤편에서 누군가 움찔거렸다.

“혹은……”

마지막에 이르러선, 말끝을 흐린다.

“여러분들이 바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네비로스가 말을 마쳤다.

나는 짧게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아무런 대가가 없진 않을 거 아냐.”

“대가─? 그걸 대가라고 봐야 할까요?”

네비로스는 고개를 삐걱였다.

그리고.

“일단…… 다른 말씀을 드리기 전에.”

손을 아래로 내려 주위를 둘러싼 모든 시체들을 흙으로 돌려보낸 뒤, 손가락을 딱─ 가볍게 튕긴다.

우릴 감싸고 있던 속박이 일시에 풀렸다.

“루비아, 유리. 뒤로.”

“어, 어……”

자유로워진 몸으로 급히 전투 태세를 갖춘다.

네비로스는 힐긋 우리를 돌아보더니.

“먼저 도착한 손님이 계셔서, 저는 잠시 그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우릴 데려가는 거 아니었어?”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말이죠. 여기서 그렇게 먼 곳도 아니고. 방금 말했듯 먼저 도착한 손님이 계십니다. 저는 그분과 먼저 대화를 나누고 있을 테니, 여러분은 천천히 오셔도 됩니다.”

저벅, 저벅.

“그리고… 제가 여기 온 건 단순히 여러분들이 필요 이상으로 혼란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기에. 올바른 길로 인도해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부디 안심하시길. 여러분들의 걱정은 현실이 되지 않을 겁니다.”

네비로스가 말을 잇는다.

“순조롭게 미궁을 돌파하여 제단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신다면, 그때 여러분들을 이 미궁에서 꺼내드리겠습니다. 매우 유감스럽지만… 그를 제외한 다른 탈출 방법은 없습니다.”

정말로,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잠깐, 기다려.”

“……무엇인가요?”

딱 하나만큼은 알 것 같아서.

나는 네비로스를 불러 세웠다.

유리와 루비아가 불안한 눈으로 날 돌아본다.

“당신이 원하는 건, 나지?”

“……”

네비로스는 답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그런 느낌이 들었어. 무엇보다 요즘 날 노리는 녀석들이 꽤 많았거든. 앞으로도 많을 거라고 했고.”

“에, 에지오……?”

루비아가 내 팔을 붙잡는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 크게 내쉬면서.

“…날 데려가. 대신 남은 애들은 밖으로 꺼내줘.”

“에, 에지오!”

“야, 무슨……!”

루비아와 유리가 동시에 숨을 삼켰다.

#29

‘분위기 확 깨네…’

결국, 수수께끼 따위 아무것도 없었다.

뮤는 한숨을 내쉬며 기어코 열린 문 안쪽에 고개를 내밀곤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후우우우웅……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면 보통 계단이 있는 게 정상이다. 그러나 뮤가 손잡이를 위로 당겨 문을 열었을 때, 계단 같은 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로프로 내려가라고?’

설계를 어떻게 해놓은 거야.

육중한 철문을 열면, 온통 새까만 공간이었다. 몸을 밀어 넣는 순간 끝도 없이 떨어질 것만 같은 무저갱. 어둠에 잠겨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내려가도 괜찮은 걸까.

스윽.

일단 주위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그런 다음 구덩이 속에 떨어뜨리곤, 조심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

……

……탁…

“……”

바닥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러나 상당히 깊다.

‘로프를 꺼내야겠어.’

뭐가 어쨌든,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예상이 맞는다면 이 안쪽에 ‘제단’이 위치하고 있을 것이었기에.

뮤는 배낭에서 둥글게 말린 로프를 꺼내었다.

굳건히 세워진 비석에 빙 둘러 단단히 묶은 뒤, 길게 늘어진 밧줄을 어둠 속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이걸로 되었다. 이제 로프를 잡고 쭉 내려가면 될 것이다.

“후우.”

고민은 길지 않았다. 로프를 손으로 꽉 쥐고서 암흑 속으로 발을 집어넣는다.

그러자.

츠즈즈즈즛─. 손바닥이 마찰열로 인해 발갛게 물든 채, 밧줄을 타고 쭉 내려간 공간의 바닥에, 뮤는 마침내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어두워…’

불빛이 필요하다.

뮤는 배낭에 넣어 놓았던 메이스를 꺼내고, 그것에 마력을 힘껏 불어 넣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는데.

화아아악──

“……어?”

꺼져 있던 횃불에 불이 하나씩 붙고, 점차 주변이 환한 빛으로 물들기 시작하자, 마침내 마주한 광경에 뮤는 입을 작게 벌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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