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59화 (159/201)

〈 159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18)

* * *

#36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이상의 추가 인원은 필요치 않았다. 네비로스는 그리 생각했다.

따라서 미궁이 크게 뒤흔들리며 붕괴하기 시작했을 때, 공동에 있던 학생들을 제외한 모든 1학년 학생들은 일시에 허상세계로부터 강제로 방출당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건……”

“……탈락한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미궁의 끝에 거의 다다랐던 가브리엘 라마니카, 아이리스 폰 헤가르데, 헥토르 드 알칸트라── 그들이 로비 한가운데서 막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했을 즈음, 감독관인 로베르 교수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감독관실의 문을 두드려 보아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당연하다. 로베르 길라이틴 교수는 이미 네비로스의 명령을 착실히 이행한 다음 프론티어를 떠났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실시간으로 평가해야 할 감독관이 자리를 비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물론 감독관 혼자가 아니라 상층에 있을 실습 참관실로부터 전달받은 평가를 일부 반영하긴 하나, 그곳에 위치한 사람들─귀빈들부터 그들을 경호하기 위한 기사들까지─역시 누군가의 마법으로 전부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무언가 께름칙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에, 헥토르를 비롯한 그들이 감독관실의 문을 강제로 열어젖혔을 때.

“……아무도 없군.”

미궁 속의 현장을 비추고 있어야 할 수정구는 완전히 박살이 난 채 산산이 깨져 있고, 감독관이 자리하고 있어야 할 내부는 텅 비어 있었다.

감독관만이 드나들 수 있는 포탈도 말끔히 사라진 상태. 따라서, 이제 미궁의 주인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미궁에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로베르 교수는 도주하면서 실습 참관실에 들려 자신의 행적이 담긴 증거를 일부러 남겨 놓았다. 매우 강력한 수면 가루가 들어 있는 유리병. 연금학부 교수였던 로베르 길라이틴이라면 어렵지 않게 직접 제조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었다.

그 외로도, 네비로스의 명령에 따라 로베르 교수는 사건의 정황이 가리키고 있는 범인이 우선 자신을 지목하도록 하고, 곧 진상 조사가 시작되면 프론티어가 자신을 먼저 추적하도록 만들었다.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진범이 따로 있다는 걸 깨닫게 되겠지만… 그때까지의 짧은 눈속임 용도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허술한 부분도 많다. 완벽한 범죄는 아니다. 감독관의 재량으로 시간을 천천히 끌면서 학생들과 시스템을 통제하고, 네비로스의 볼일이 끝날 때까지 범행 발각 시기를 늦추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네비로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찍이 혼란을 야기하는 쪽을 택했다.그 이유는 무척이나 간단했다.

그 편이 더 흥미로우니까.

이 일을 마지막으로, 언제나 그랬듯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길 예정이었으니까.

제국의 추적자들에게 붙잡힐 염려도 없는 아주 먼 곳으로, 새로운 신자들과 함께 이주할 예정이었으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었다. 네비로스는 오로지 본인의 흥미를 위해 계약을 어기면서까지 아주 약간 큰일을 저질렀고, 그 과정에서 에픽 클래스 1학년 학생들 몇 명 정도가 휘말린 것뿐이다.

그렇다면 프론티어는 가급적 아무런 피해 없이 사건에 휘말린 학생들을 구조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고, 이후 사건의 진범인 네비로스를 추적하여 구속하면 되는 일이었다. 쉽게 잡힐진 의문이지만.

한편으론 별다른 유혈 사태 없이 그저 잠들기만 했을 뿐이라곤 해도, 제국과 타국의 높으신 분들마저 죄 연루된 일이었기에.

그 여파와 후폭풍도 결코 작진 않겠지만.

어쩌면, 프론티어의 뿌리 깊은 역사에 절대 지워지지 않을 오점으로서 길이 남을 대사건일지도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 미래의 일.

범상치 않은 상황이란 걸 깨달은 1학년 학생들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으응, 졸려어……”

“…무, 문제가 생겼다고? 뭐, 뭔 일인데 대체?”

“헥토르, 그래서 지금 몇 명이 빠진 거야?”

“세고 있으니 기다려라.”

가브리엘, 헥토르, 아이리스─ 세 명은 피로에 찌들어 곤히 잠들어 있던 동급생들을 모두 깨우고, 이 자리에 없는 인원들을 파악한 뒤 숫자를 세었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총 열 명이니, 다섯 명이 빠졌군.…너희, 각자 번호를 불러봐라. 없는 번호를 확인할 테니.”

“─으엉? 뭐야, 혹시 같은 반 친구들 번호도 모르는 거야? 헥토르 너 애들한테 너무 무관심한 거 아니냐?”

“14번 가브리엘 라마니카, 농담할 때가 아니다. 부르는 대로 받아적는 편이 더 빠르고 정확하니 그런 거다.”

“오? 내 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니 의외로 감동……”

“하나하나 시끄럽다. 좀 닥치고 있어라.”

가브리엘을 조용히 시킨 헥토르가 학생들의 번호를 세고, 빠진 번호를 빠르게 읊기 시작했다.

“4번, 6번, 7번, 8번, 9번, 10번, 11번, 12번, 13번, 14번까지… 그렇다면 여기 없는 번호는 1번과 2번, 3번, 5번, 그리고 15번인가.”

“1번! 1번은 뮤잖아!”

사샤가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2번은 유리 폰 아르티나, 3번은 스텔라 데 펠트라인. 5번은 루비아. 15번은 에지오 크라닐. 내가 기억하기론 그래.”

루크 데 엔듀레스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확실한가?”

그런 헥토르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루크의 옆에서 안경을 고쳐 쓰던 하티 유레시안이었다.

“가브리엘, 헥토르, 그리고 아이리스… 맞나? 아무튼 너희를 제외하면 스크린이 갑자기 꺼질 때까지 남아 있던 애들이 맞아. 내가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든.”

“그렇군.”

헥토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익숙한 얼굴들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어딘가에서 음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여여여여자 네넷에 나나나, 남자 한 명…… 이, 이거…조, 조금 시, 신경 쓰일지도…… 흐헷, 헷.”

“……”

“……”

“……”

검지 손가락을 맞대고 비비적거리며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흘리는 카닐라 아메틴트.

학생들은 전원 입을 다문 채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 거야, 그래서?”

웅성거림 속에 스며들어 있던 가일 웨하드가 손을 들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자, 헥토르는 묵묵히 답했다.

“감독관이 사라졌다. 감독관실도 텅 비어 있었지. 실습 장소로 들어갈 수 있는 포탈도 닫혀 있었고.”

“뭐, 뭐?”

“우리들은 실습 도중 짐작 가는 이유도 없이 강제로 추방당했고, 남은 다섯 명은 우리와 같이 소환되지 않았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해.”

“그, 그럼, 걔네들은 거기 갇힌 거야…?”

헥토르의 말을 들은 학생들은 혼란에 빠졌고.

“그게 진짜라면, 빨리 선배들이랑 교수님들한테 알려야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다들!”

오랜만에 사샤 엘네가 맞는 말을 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 실습이 종료될 때까지 우리는 여길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신속하게 행동하는 편이 좋겠군. 다섯 명씩 인원을 나눠 각각 위층으로 올라가 2학년과 3학년들의 상황을 파악하고, 나머지는 교직원들을 찾아간다.”

헥토르의 말이 이어진 직후 하티가 입을 열었다.

“아직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걸 보면, 교직원들은 지금 사건이 벌어진 걸 아예 모르고 있거나, 혹은 본부가 점거당했을 수도 있는 상태야. 후자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도 아니면 우리가 여기로 소환된 동시에 일이 시작된 것일 수도 있지. 우리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수록 안에 있는 녀석들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게 된다.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도록 하지.”

헥토르는 이성적으로 판단을 끝마친 뒤 의연히 대처했다. 평소 타학생들에게 무관심하게 굴었던 것과는 다소 상반되는 모습.

그렇게 인원을 반으로 나눔에 따라 헥토르와 같이 움직이게 된 가브리엘이 옆에서 슬쩍 중얼거렸다.

“의외로 친구들 챙길 줄도 아네. 다시 봤다.”

“……머저리처럼 멀뚱히 긴급 사태를 관망하고 있는 것이, 정말로 귀족의 품위에 맞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나?”

“허, 귀족 운운할 게 뭐가 있냐? 여긴 밖에서의 신분 같은 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곳인데.”

“……”

헥토르는 대꾸하지 않았다.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다. 교양 없는 사람의 정석인 가브리엘과 더 이상 말을 섞기가 싫었던 까닭이다.

그 뒤로 가브리엘도 딱히 헥토르를 귀찮게 하진 않았다. 이렇게 모두가 심각할 때 사고를 유연히 만들어 줄 사람이 한 명쯤은 필요하다 생각해서 능청을 부렸던 건데… 생각해 보니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선배들이 있을 위층으로 빠르게 향하며, 가브리엘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킴과 함께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또 너냐, 에지오?’

사실 만악의 근원은 그 녀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한 참이었다.

#37

“이런 상황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어쩔 수 없군요. 뭐, 차라리 잘된 일이지 않습니까? 혼자보단 여럿이 나을 테니까요.”

그리 말하는 네비로스의 어투엔 아쉬운 기색이 전혀 스며들어 있지 않았다. 방금 했던 말과는 달리 처음부터 이러한 흐름을 의도했다는 듯.

“아야야야……”

“으윽……”

뒤엉켜 넘어진 탓에 각자 부딪힌 부위를 쓰다듬는 루비아와 유리를 꾸짖을 새도 없이, 나는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주변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다.

‘여긴……’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의문의 기물을 제외하면, 한없이 넓을 뿐인 거대한 공동.

변화를 깨달은 건 그 즉시였다.

‘…어?’

팔뚝에 통증이 더 느껴지지 않았다. 붉게 물든 핏자국도 없다. 셔츠의 찢어졌던 부위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더듬거리며 몸 이곳저곳을 만져 보는데, 이상 같은 건 하나 없이 전부 말끔했다. 미궁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모두 한때의 환상이었던 것처럼.

배낭도, 무기도 어느샌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포탈을 지나며 네비로스가 우리들을 완벽하게 치유해 준 건지, 아니면…… 처음부터 다 거짓이었던 건지. 전자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렇다면 후자의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였다.

그건, 결코 좋은 해답이 아니었다.

“어떻게, 너희가…….”

아연한 얼굴의 스텔라가 저 멀리에 있었다.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크게 뜬 눈동자. 그러던 스텔라가 입술을 잘게 깨물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스텔라가… 왜 여기에 있지?’

상황을 뇌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혼란에 빠진 우리들을 놔두고, 네비로스는 발소리가 울리도록 크게 뚜벅거리며 걸음을 계속해서 옮겼다.

그러던 다음 순간,

나는 잠시 굳을 수밖에 없었다.

허리 끝에서 찰랑거리는 흑발.

스텔라의 지근거리에 우뚝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과 눈을 마주친 것이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이 넓은 공동에 우리들보다 먼저 자리하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다들 천천히 얘기를 나누셔도 좋습니다. 저는 잠시 여러분을 정식으로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테니까요.”

웃음기 어린 네비로스의 목소리가 메아리친다.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진 몰라도, 지금 당장 우리들을 해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 점이 더 수상하게 여겨지긴 했지만, 각자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할 시간이 생겼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듯했다.

뒤를 돌자, 저마다 주변을 둘러보며 이 장소에 대한 의문을 표하고 있는 루비아와 유리가 눈에 들어왔다.

“…왜 따라온 거야, 너희들.”

그런 내 질문에.

가장 먼저 한숨을 내쉰 건 유리였다.

“미안한데… 화를 내고 싶은 건 내 쪽이거든? 네 멋대로 정하고 행동하면 그게 전부 옳은 일인 줄 알아? 그리고 착각하지 마. 딱히 널 신뢰한 게 아니라 저 녀석을 신뢰하지 못한 거니까.”

유리가 네비로스의 등을 말없이 바라본다.

“말은 저렇게 하고 우리를 밖으로 꺼내주지 않으면 어쩔 건데? 당장 합쳐야 할 머리가 한 명이라도 더 부족한 상황이야. 차라리 세 명 다 뭉쳐 있는 편이 나았어. …애초에 난 저 녀석의 말 같은 건 신뢰하지도 않았고. 말하는 모양새가 꼭 사이비 교주 같잖아.”

“……”

마지막 말에는 나도 일부 동의하는 편이었다. 그런가. 끝까지 듣고 보니 맞는 말인 것도 같았다.

유리야 그렇다 치고.

“루비아, 너는……”

“나도, 유리랑 비슷한 생각이긴 했어.”

루비아가 나지막이 입을 연다. 결연한 의지로 충만한 눈이다. 어쩐지 나를 힐난하는 것처럼.

그러던 루비아의 눈빛이, 어느 순간 서글픈 기색을 띠었다.

“그리고…… 내가 정말 너를 혼자 희생하도록 놔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텀을 두고.

루비아가 뜨거운 숨을 삼킨 뒤 말을 잇는다.

“에지오 네가 내 앞에서 또 사라져 버리면… 혼자 남겨진 내가 어떤 심정이 될지 제대로 생각은 해봤어…?”

루비아의 트라우마.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내가, 루비아를 놔두고 또 다시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려 했다.

날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고 했던 루비아로선 내 멋대로 희생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못할 터였다. 그렇기에 날 따라오는 걸 택했다.

결과적으로 나 혼자만의 희생 같은 게 딱히 아니게 됐긴 했지만, 루비아는 지금 내 선택 자체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루비아의 마음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에지오, 나는……”

“나라고 해서.”

“…어?”

“나라고 해서, 너를 다치게 하고 싶은 줄 알아?”

“……”

루비아가 입을 작게 벌린다.

나는 어쩐지 미약한 짜증이 난 것처럼,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나 혼자면 될 문제인데도 굳이 나 때문에 너희들까지 같이 휘말려 버리면, 하물며 그게 나쁜 결과로 이어져 버리면, 나 하나 때문에 다치게 된 너희들을 내가 어떤 마음으로 봐야 하는 건데.”

“그건… 내 스스로가 책임질 문제야. 온전히 내 의지로 선택한 결과니까, 에지오 네가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네가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해서 내가 정말로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그치만…… 나는 정말 괜찮은걸. 앞으로 무슨 일을 당한다고 해도 에지오 널 절대 탓하지 않을 거야. 응,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어. 그도 그럴 게, 에지오 너는 나의……”

“네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아.”

“……”

루비아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에지오 네 목숨을 대가로 비겁하게 살아날 바에야, 차라리 같이 죽는 쪽을 택할 거야.“

“루비아.”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서로의 이해가 완전히 불일치한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러니 이렇게 말싸움을 하고 있을 여유도 없건만──

“지금의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에지오 네가 목숨을 바쳐 날 구해줬기 때문인 거…… 잊었어?”

그 처연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든 사고를 잠깐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네가 날 구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나를 납치한 악마들에게 무참히 죽임을 당했을 거야.”

“……”

“너는 자기 목숨을 걸면서까지 날 겨우 구해줬는데, 왜 나는 널 위해서 목숨을 바치면 안 되는 거야…?”

루비아의 연녹빛 눈동자가 호소하듯 날 본다.

“…나는 너한테 지금까지 너무 많은 빚을 졌어. 그리고… 너무 많은 잘못도 저질렀어. 그것들은 평생에 걸쳐 갚아도 한참 부족해. 내가 만일 널 살리고 죽을 수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할 거야. 지금의 이 선택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고 해도, 널 구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한 뒤에 죽을 거야.”

너무나 비장한 말이었다.

옆에서 우리의 얘기를 불안한 낯빛으로 듣고 있던 유리의 붉은 눈이 조금 커졌을 만큼.

강한 확신이 깃든 눈빛으로, 루비아는 말했다.

“…그러니까, 에지오 너한테 또 다시 빚을 지고 살아갈 순 없어. 네가 날 혼자 두고 영영 떠나 버린다면, 나는 네가 없는 세상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어딘가에서 픽 쓰러져 죽어 버릴 거야.”

“……”

안 된다. 루비아를 말릴 수가 없다.

루비아는 내가 죽을 때 같이 죽거나, 아니면 내가 모종의 이유로 인해 세상을 떠난 이후 따라 죽을 생각으로 보였다. 농담으로 여길 수준은 이미 한참 지나치고도 남았다. 옆에 있던 유리가 불신의 기색으로 루비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루비아가 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정이란… 언뜻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겁고 무거운 종류의 것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