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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60화 (160/201)

〈 160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19)

* * *

#38

“내 말은… 논리적으로 따질 게 아니야. 나 때문에 네가 다칠 수도 있을 거란 사실이 가장 중요한 거라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루비아와 이 이상 대화를 해봐야 진전이 없을 것 같다. 여기서 더 의미도 없는 말싸움의 끝을 내기 위해 그만하잔 말을 입에 올리려던 순간.

“에지오!”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동시에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이쪽을 향해 헐떡거리며 뛰어오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스텔라.”

“어, 어떻게 된 거야…? 얘네는 또 왜 여기 있는 거고. 저 남자랑 너희가 같이 나온 이유는 뭔데?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그건 내가 물을 말이야.”

무릎에 손을 짚으며 숨을 고르는 스텔라의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궁금한 게 많아 보였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매한가지였다.

“여기서 넌 뭐 하고 있던 거야? 여긴 또 어디고? 뮤는…… 왜 너랑 같이 있는 건데?”

“여긴… 미궁의 끝이야. 가장 깊은 곳. 지하. 그리고 아마… 환상이 아닌 현실.”

“…미궁의 끝? 현실이라고?”

내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던 컨셉도 잊어버린 스텔라가, 핏방울이 맺히도록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길 혼란한 낯빛으로 바라보는 유리와 루비아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실습 시작 전에 들었었지? 미궁의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제단이 있다고. …저게 바로 그 제단이야.”

스텔라가 향하고 있는 시선의 끝에 걸린, 검고 불길한 구조물. 확실히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용도는… 제단 안에 잠들어 있는 고위 마수─ 벨카로스의 본체를 소환시키는 것. 원래는 그 고위 마수를 처치하면 그 즉시 처치한 사람의 실습은 끝이 나게 되어 있어. 특별 과제를 달성하고 수석으로 끝마치는 거지.”

“원래는, 이라면……”

“지금은 달라.”

스텔라가 뒤를 돌아봤다.

손가락을 리드미컬하게 튕기며 걸음을 뚜벅거리는 장발의 남성. 그 뒷모습을 지그시 노려보다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저 남자는… 지금부터 저 제단과 우리를 이용해서 아주 위험한 존재에게 공물을 바치도록 만들 거야.”

“……뭐?”

“그러기 전에 저 남자를 죽이거나, 여기서 탈출해야 해.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에지오. 이제 네가 나한테 설명해 줄 차례야.”

“잠깐만, 잠깐. 스텔라. 너무 비약이 심해. 이해가 전혀 안 돼. 일단 지금 네가 이러고 있는 건… 미래를 봤기 때문인 거지?”

“……”

확실히, 스텔라의 언행은 다소 이상했다. 이 장소에 먼저 도착한 사람이 수집할 수 있었던 정보라기보단, 조금 더 구체적이고 비밀스러운 정보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어째서였을까.

그건 아마 스텔라의 미래시(???) 와 연관이 없진 않을 거라고,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사실이라면, 어딘가 정황에서 어긋나는 부분이 생겨 버린다.

이를테면 스텔라가 나한테 해줬던 말이라든가. 내가 유리를 죽였고, 자기는 그게 자신이 본 미래의 전부였다는……

“비슷해.”

스텔라는 작게 긍정했다.

“비슷하다니, 그게 정확히 무슨──”

“미안해, 에지오.”

스텔라는 대답 대신 사과의 말을 건네왔다.

“…너랑 유리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었어. 나중에 제대로 사과할게. 너희를 휘말리게 하지 않고 나 혼자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지금은 일이 완전히 잘못됐고. 전부 내 실수야. 자세한 건 여기서 나간 뒤에 설명할 테니까……”

“스텔라.”

나는 그녀의 이름을 조곤히 불렀다.

“…아.”

그러자 스텔라가 불현듯 흠칫하며 날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가녀린 어깨와 손은 미약하게 떨리는 채. 호흡도 살짝 불안정해 보인다. 평소의 스텔라에게선 썩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 조심스레 두 손을 올려놓은 뒤, 스텔라의 은백색 눈동자를 직선으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유리와는 도중에 합류했어. 마물한테 붙잡혀 탈락할 뻔했던 걸 내가 구해줬고, 그 뒤로 같이 다니게 된 거야. 네가 말했던 걸 잊은 건 아냐. 유리한테 다 얘기했고, 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찾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아, 아. 응.”

“그러다, 중도 포기 선언이 안 된다는 걸 확인하곤 밖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됐지. 그 이후로 여기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다니다가 루비아를 우연히 만나게 됐고. 그렇게 루비아랑 합류하게 된 다음에 곧바로…… 저 사람, 네비로스가 우리 앞에 나타난 거야.”

“네비로스……”

스텔라는 그리 중얼거렸다.

직후 눈을 빛내며.

“…저 남자가, 너희한테 무슨 말을 했어?”

내 대답은 늦지 않았다.

“우리를 해치지 않을 거라고 그랬는데.”

“…믿지 마. 전부 거짓말이야.”

“자기는 그저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라고.”

“대화…? 정말 대화를 원했으면 그 자리에서 해도 되는 일이잖아. 여기까지 너흴 끌고 왔다는 건, 전부 다 시커먼 속셈이 있다는 걸 스스로 증명하는 셈이 아니야?”

“…우리의 소망을 들어준다고도 했지.”

“그거 참…… 믿는 게 더 신기한 말이네.”

“알아, 나도 그래서 믿지 않았어.”

“그럼, 여길 왜……”

“나 하나로 만족하고 남은 친구들은 전부 풀어준다고 했으니까.”

“……뭐?”

스텔라는 나와 루비아 사이에 잠시 이루어졌던 말다툼을 듣지 못했던 걸까.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저 녀석은 나한테 큰 관심을 보였어.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나 했지. 날 데려가고 그 대신 남은 애들을 여기서 꺼내 달라고. 그랬더니 자기도 큰일을 벌이고 싶지 않다면서 흔쾌히 수락하는가 싶었는데……”

“……그렇구나. 그렇게 된 거구나.”

스텔라가 멍하니 고개를 주억인다.

그러더니.

“…아냐, 차라리 잘된 거야. 일이 그렇게 됐다면 에지오 너는 너대로 끌려가고, 나를 비롯한 나머지 애들도 여기서 한 발자국도 빠져나가지 못했을걸… 응, 대충 상황은 알겠어.”

“그리고 하나 더.”

“…어, 뭐라고?”

“하나 더, 저 남자가 얘기했던 거.”

붉은 비단 위에 놓인 성배 같은 물건을 들어 올리더니, 이모저모 살펴보며 흐뭇하게 머리를 끄덕이고 있는 네비로스.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리자, 스텔라 역시 나를 따라 네비로스를 보았다.

“자기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본능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킬 정도로 짙고 사이한 마기(??). 그건 이 공동에도 더없이 만연한 채였다.

우리를 여기로 데려온 시점에서, 나는 네비로스가 인간이 아닌 마족이라 반쯤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건…… 그것만큼은, 아마.”

그러나,

스텔라는.

“거짓말이 아냐.”

듣는 입장에선 상당히 믿지 못할 대답을 내놓았다.

“…오히려 그렇기에 더 위험한 존재가, 바로 저 나베──”

“이러어어언!”

그때.

꽤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서 바락 소리를 치는 것처럼, 귀청을 찌르르 울리는 네비로스의 목소리가 우리의 뇌를 진탕 헤집어 놓았다.

“남이 대신 해주는 자기 소개만큼 보람 없는 일이 또 없지요! 그쯤 하도록 하십시오! 거기서 더 쓸데없는 말을 한다면 당신에겐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겁니다!”

“무시해. 미쳐 버린 광인(?人)이니까.”

스텔라는 시니컬하게 혀를 차며, 네비로스의 말을 못 들은 체했다.

우아한 귀족 영애 그 자체였던 스텔라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볼 터인 루비아와 유리는, 현재의 스텔라가 전혀 익숙하지 않은 듯 우리 사이의 대화에 끼어들 여지조차 내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터벅, 터벅.

그러던 어느 순간.

잠깐 대화가 끊긴 사이에, 이곳으로 걸어오는 발소리가 선명히 들려왔다.

“……”

눈길을 돌려 네비로스 쪽을 한 번 보고, 이어 우리의 모습을 제 눈에 담는다. 루비아, 나, 스텔라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유리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뮤!”

유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을 때, 뮤는 언뜻 유리가 아닌 내 쪽을 본 것도 같았다. 다만 그렇게 느껴졌다, 수준에 그쳤을 정도로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었……”

“인사 같은 거 나눌 여유는 없어.”

유리의 반가움을 칼같이 잘라낸 뒤, 우리 곁으로 지근거리까지 다가와 슬쩍 스텔라를 돌아보며.

“나는 얘가 가장 수상해.”

갑자기 그런 말을 불쑥 해오는 것이었다.

“쓸데없이 아는 것도 많고, 미래를 볼 수 있다느니 뭐니… 그러면서 나보다 먼저 이 공간에 들어와 있었고.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서 첫 번째로 여기 들어온 사람은 얘야.”

“……”

입을 다물고 있는 스텔라를 향해 턱짓한다.

“그런데 지하로 내려온 흔적 같은 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 분명 정상적인 루트로 내려온 게 아니겠지. 우연히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했다기엔…… 수상쩍은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다 뭐가 뭔지 모르는 와중에 혼자만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도 그렇고.”

확실히.

여기서 나가면 전부 설명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상황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직은 스텔라의 언행에 대한 의문이 일부 남아 있는 채였다. 단지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설명할 수 있으면 해봐. 여긴 어떻게 내려왔던 건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너도 나처럼 회랑 끝에 배치된 포탈로 이동한 걸까?”

“그야, 당연히……”

스텔라가 긍정하려던 찰나.

“거짓말인데.”

“──!”

뮤는 싸늘히 스텔라의 말을 잘라냈다.

“……어, 어?”

“거짓말이라고. 회랑 끝엔 포탈 같은 게 아니라, 비석과 문이 있었어. 난 그 문을 통해 밧줄을 타고 내려왔던 거고.”

“……”

“다들 들었지?”

뮤가 무심히 스텔라를 바라본다.

“이걸로 확실해졌네.”

그리고는,

툭 던지듯 넌지시 물었다.

“너, 여기 와본 적 있었지.”

#39

“와본 적이 있다고……?”

그 중얼거림은, 루비아의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냐. 내가 보기엔… 저 미친놈의 정체도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

뮤의 눈길 끝에서 고개를 차츰 숙여가던 스텔라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내놓지 못했다.

루비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묻는다.

“스, 스텔라. 그게… 정말이야?”

“……”

“뭐라고 말 좀 해봐……”

“……”

“스텔라……”

루비아의 물기 어린 재촉에도, 스텔라는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 봐, 수상해도 너무 수상하잖아. 이해도 전혀 안 돼. 네가 정말 미래를 볼 수 있고, 일이 이렇게 될 줄 전부 알고 있었다면, 왜 진작에 실습을 중지시키지 않은 거야?”

“……”

“네 재량으론 불가능했단 말은 하지 마. 네 능력이 뭔지는 프론티어도 알고 있을 거잖아. 전면 신뢰는 하지 못하더라도, 조사 정도는 들어갈 수 있었을 텐데.”

“……”

“……이래서야, 결론이 나질 않겠네.”

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앞에서, 내가 입을 열었다.

“나도… 뮤랑 같은 생각이야.”

“……”

일순, 뮤가 힐긋 나를 보았다.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건, 썩 오랜만이었다.

“네가 나한테 말해줬던 미래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거란 얘기가 하나도 없었잖아. 하지만 너는 이 모든 미래를 예측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고…… 그러고 보니 아까 나랑 유리한테 말해주지 않은 게 있었다고 했지.”

“……”

“그게… 뭐야?”

“……”

“스텔라.”

“……”

“조금이라도 괜찮으니 대답을……”

그때.

“후우우우…… 알았어. 얘기해줄게.”

한참 침묵하던 스텔라가, 고개를 들고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어쩐지 후련한 듯한 얼굴로, 방금 자길 추궁했던 뮤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와본 적 있냐고 물었지?”

그 직후.

“맞아. 와본 적 있어. 그것도 십 년 전에.”

“……!”

“……!”

“……!”

“……!”

순순히 긍정하는 스텔라에게, 넷에 달하는 놀라움의 시선들이 꽂혀 들었다.

정작 뮤는 자기가 질문하긴 했지만 정말로 실토할 줄은 몰랐다는 듯, 아주 약간 눈이 커져 있는 채였다.

'십 년 전? 그때라면……'

스텔라를 처음 만났을 시기와 비슷하게 겹친다.

…그 시절의 스텔라가 이런 깊고 어두운 미궁에 방문한 적이 있다고? 아니, 그전에도 이 미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건가? 네비로스가 말하기를,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들었다고 했으니 아예 불가능한 일도 아닌……

“그럼, 다른 얘기도 전부… 사실이라는 거야?”

루비아가 처연히 중얼거린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실습을 적극적으로 중지시키지 않은 건, 나 역시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거기엔…… 스텔라의 의견도 일부 들어가 있었다.

“이게 최선이었어.”

“무슨……”

유리가 숨을 삼킨다.

“운명은 거스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만일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려고 했다면, 더욱 큰일이 밀어닥쳤을 거야.”

“그 말은…… 우리가 실습을 어떻게든 중지시키려고 했다면, 지금 이 상황보다 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거라는 얘기지?”

“정확해.”

비슷해, 도 아니고.

정확해, 였다.

“나와 유리가 여기까지 오는 건 전부 정해진 운명이었어. 그리고 유리…… 네가 결과적으로 다치게 되는 것도, 아마 피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거야.”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유리는 두려움에 잠긴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리고.

스텔라는 돌연 나를 바라보면서.

“하지만…… 그러지 않게 될 수도 있어.”

차분히 말을 이었다.

“에지오… 별이 관측할 수 있는 운명에서 완벽히 벗어난 네 존재로 인해, 이제부터 운명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거야.”

과정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결과는 바꿀 수 있다.

그 아리송한 말의 진의를, 나는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널 이용한 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 …미안해, 에지오. 이 일은 나중에 정식으로 사과할게.”

“잠깐만, 스텔라. 전에는 내 운명을 봤다고 했잖아? 완벽히 관측할 수 없다는 건 또 무슨……”

스텔라가 나의 운명을 엿보았고, 그로 인해 내가 유리를 죽인다는 미래를 예측했으며, 일이 그렇게 흘러가는 걸 피하기 위해 여태 난리를 피웠던 게 아닌가.

“그건… 일부러 거짓말을 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나는 정말로 네 운명을 본 줄 알았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고.”

“그럼……”

“별님이 변덕을 부린 거지. 네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보여준 거야. 그건 아마도, 네 운명이 아니라……”

그쯤에서.

스텔라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나?”

그곳엔 손가락으로 자길 가리키며,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는 유리가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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