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64화 (164/201)

〈 164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23)

* * *

#44

스텔라가 비로소 눈을 떴다.

정상적으로 호흡을 하고 있다.

멈추었던 심장이 다시금 뛰기 시작한다.

즉,

살았… 다.

‘살았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불안감이 한순간에 씻겨 내려간다. 긴장이 탁 풀려 진이 빠진 탓에 뒤로 널브러졌다.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폭발할 듯 쿵쾅거리던 심장 박동을 느껴보았다.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지만 가슴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도저히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이었다……

“허억, 헉. 하으으윽. 켈록, 켈록……”

문득, 스텔라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벌떡 일으키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흉부를 위아래로 들썩이는 스텔라가 보였다.

“으윽… 아.”

내가 세게 압박했던 부근을 제 손으로 짚으며 잠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하다가,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상의가 위로 쭉 말려 올라간 것을 알아차리곤 재빠르게 원위치로 돌려놓는다.

“스텔라.”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스텔라가 고개만 돌려 이쪽을 보았다. 갓 죽은 시체처럼 창백했던 얼굴이 살짝 발갛게 물들어 있는 채였다.

곧 입가에 허탈한 미소가 지어진다.

“주마등이라는 거… 정말 오랜만에 봤어.”

그녀의 실없는 소리를 내가 받았다.

“……이제 괜찮아?”

“아직, 조금 벅차긴 한데. 괜찮아.”

다행이다.

“…움직일 수 있겠어?”

“힘이, 살짝 안 들어가긴 해. 후우… 미안한데 나 좀 일으켜 줄래?”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뒤 스텔라의 상체를 붙잡고 일으켜 주었다. 여기저기서 큰 폭발음이 치솟는 가운데, 스텔라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가까이서 울려왔다.

“……사실 죽을 뻔한 것도 죽을 뻔한 거지만, 눈을 떴을 때 네 얼굴이 너무 가까이 보였어서, 그거 때문에 더 놀랐어.”

나도 놀랐다. 갑자기 눈을 떠서.

“…고마워, 에지오. 네가 날 살려줬구나.”

“널 죽게 놔둘 순 없잖아.”

“…응. 사례는 나중에 할게. 지금은, 상황이 급하니까. 너희한테… 알려줘야 하는 것도 있고.”

스텔라가 힘없이 감사 표시를 한다. 아무래도 몸이 원상태로 돌아오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사례 같은 건 안 해도 되니까……”

“에, 에지오.”

“어?”

“너… 눈에서 피 나.”

생사의 경계에서 방금 돌아와 경황이 없던 와중 이제야 발견했다는 듯, 스텔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손가락으로 내 얼굴 부근을 가리켰다.

“아. 이거.”

눈꺼풀을 두어 번 닫았다 도로 여니, 비릿한 혈향과 함께 방울져 흘러내리는 피눈물. 눈가를 손으로 슥슥 훑자 벌겋게 묻어 나온다.

이대로 계속 흐르는 건 아닌 것 같고, 조금 있으면 아마 뚝 멈출 거다. 근거는 없지만 느낌이 그렇다. 스텔라가 내 바람대로 살아났기 때문일까.

“호, 혹시 나 때문에…”

“그런 거 아냐.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무리를 좀 하다가 그랬나 봐.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스텔라는 전혀 납득하지 못하는 표정인 듯하다가, 결국 마지못해 머리를 주억이곤.

“…입에서 피 맛 나.”

혀끝을 내밀어 손가락으로 슥 훑었다. 점처럼 찍혀 묻어 나온 그것을 고양이처럼 핥는다. 스텔라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짜고… 비리네.”

사과를 해야 할까. 왠지 그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스텔라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가락으로 입술을 톡 건드리며­ 중얼거리듯.

“네가 나한테 넘겨준 공기는… 아무 맛도 안 났는데.”

“……”

사사로운 의미 따위는 하나 없이 오직 생명을 구조하기 위한 행동에 불과했으나, 당시의 느낌을 상기하면 둘 다 서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보기가 힘들어지는 것도 사실의 일부였다.

어쩐지 머쓱해져서, 그런 말을 내뱉었다.

“…일단 허락도 없이 그런 짓을 한 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

사람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허락을 받고 자시고가 어디에 있겠냐만은, 스텔라─지금은 지체 높은 고위 귀족이자 공녀님이신─에게 있어서 이성과 입술을 맞댄다는 행위 자체가 얼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까닭에, 무작정 사과의 말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스텔라는.

“으, 으응…? 아냐. 이건 딱히 사과할 게 아닌걸. 나는 너한테 그걸로 목숨을 구해진 입장이고, 오히려……”

…오히려?

그 다음 말을 듣기 직전.

“──스텔라! 괜찮아?!”

영창을 잠시 중단하고, 우리 쪽으로 뛰어오는 루비아에게 몸이 꽉 끌려 안겼다.

“루, 루비아. 숨 막혀.”

“죽는 줄, 죽는 줄 알고…”

“괘, 괜찮아. 괜찮으니까. 일단 이거 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스텔라가 곤란한 낯빛을 띠며 자길 껴안은 루비아의 등허리를 탁탁 두드렸다.

자기 눈앞에서 친구가 죽을 뻔했으니 저리 놀라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루비아. 스텔라는 방금 일어났어.”

“……아, 응. 그렇지.”

내 말을 듣고 삼 초쯤 뒤, 루비아가 스텔라의 몸으로부터 슬며시 벗어나며 머리를 작게 주억였다.

“……”

그러더니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나를 가만 바라보다가, 다음으론 눈길을 돌려 스텔라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왜 그래?”

“아, 아냐. 아무것도…”

결국 루비아의 영문 모를 시선을 한동안 받고 있던 스텔라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의문에 대한 해답을 일축했다.

“──스텔라!”

방금은 루비아였다면, 이번에는 유리였다.

“괘, 괜찮아? 어디 아프진 않아? 저 녀석이 어디 한 군데 부러뜨린 건 아니고? 응? 전부 멀쩡해?”

“그, 그럴 리가 없잖아. 난 괜찮아. 멀쩡해…”

“네 뼈를 완전히 부술 것처럼 콱콱 눌렀다니까?! 널 살리려는 게 아니라 죽이려는 건 아닌지 착각까지 할 정도였다구!”

“그랬으면 이렇게 멀쩡히 너랑 얘기할 수도 없었겠지…”

“그건 그렇지만…!”

호들갑을 떨면서 스텔라의 몸 여기저기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만져보던 유리가, 문득 내 쪽을 복잡한 눈빛으로 곁눈질하며 말했다.

“너… 아무리 응급처치라곤 해도…”

“그럼, 다른 방법이 있었어?”

“……칫.”

불퉁스러운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책임은 나중에 묻겠어.”

“…왜 스텔라가 아니라 네가 당한 것처럼 얘기를 하냐?”

“뭐? 기, 기분 나쁜 소리 하지 마! 너한테 그, 그런 짓을 당했다면 난 아마… 으윽, 사, 상상하기도 싫어! 차라리 그대로 죽고 말겠어!”

누가 뭐라고 했나. 자기 혼자 질색하며 어깨를 쭈욱 쓸더니 토악질이라도 할 것처럼 입을 손으로 틀어막는다. 누군 해주겠단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차피 유리가 눈앞에서 스텔라와 같은 위기에 처했다면 고민도 하지 않고 동일한 행동을 취했겠지만.

“됐고… 일단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해? 스텔라.”

나는 스텔라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 네가 우리한테 제대로 말해준 건 없지만… 저 녀석이랑 과거에 악연이 있었단 것만큼은 잘 알겠어. 그렇지?”

“……응.”

내 시선의 끝에서, 뮤와 나베리우스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푸른 빛과 검은 빛이 섞여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점멸한다. 파괴와 관통을 반복하며 쉬이 난입하기도 어려운 공방을 끝없이 교환한다. 새삼 뮤의 진심이 담긴 저력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믿기 어렵게도 둘의 실력은 호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다.

뮤가 밀리고 있다. 확실하게.

뮤를, 도와야 한다.

“어째서 뮤가 나베리우스와 싸우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우리가 나베리우스를 죽여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아.”

나베리우스를…

죽여야 한다.

“…방법은?”

내가 아닌 루비아의 물음이었다.

그에 스텔라는 나에게 말했던 것과 같은 답변을 내놓았다.

“곧 제단이 완전히 활성화되면, 그때 나베리우스가 마신으로부터 강신(??)을 시도할 거야. 그 순간을 노리면 돼. 그러면… 나베리우스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 거야.”

이전보다 훨씬 불온한 기운이 넘실거리는 제단. 우리 모두는 그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텔라가 일컫는 마신이란 존재가 강신하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그 미래를 딱히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 불안감이 현실이 되기 전에 막아야 할 거다. 어떻게든.

“그러기 전에… 너희들한테 말해줘야 할 게 있어.”

스텔라가 가라앉은 눈으로 우리를 돌아본다. 짙은 죄책감이 어린 낯빛이다.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인 채였다.

나베리우스와 스텔라의 의미심장한 대화. 루비아와 유리는 몰라도, 나만큼은 그들의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까닭에─ 대화 내용의 대부분을 들을 수 있었다.

한 번 듣고 전부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었던 충격적 진실이었으나, 스텔라가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면 아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네비로스, 아니, 나베리우스는……”

스텔라가 숨을 토하며 말을 잇는다.

“……십 년 전의 전쟁에서 나의 친부모님을 죽이고, 내 눈앞에서 그들을 언데드로 되살려 날 처참히 능욕한… 내 평생의 원수야.”

“……!”

“……!”

“……뭐?!”

나는 눈을 크게 떴으며, 루비아는 숨을 들이켰다. 다음으론 유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부정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 그게. 그게… 진짜야?”

“……응.”

유리의 물음에, 스텔라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 말도 안 돼. 그런, 그런 짓을……”

인륜을 아득히 넘어선 행위에 말도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더듬거리며 입을 틀어막다가, 광분한 채 공동 곳곳을 뛰어다니던 나베리우스를 홱 돌아보곤.

“어떻게, 대체 어떻게…”

이를 빠득, 갈면서 적의를 활활 불태웠다.

루비아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입을 뻐끔거리며 놀라움을 표하는가 싶더니, 덜덜 떨릴 정도로 주먹을 우악스레 쥐었다.

“……”

나는 이성에 따라 침착한 태도를 유지한 채 스텔라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기에.

예상대로, 스텔라는 말을 이었다.

“…나는 아직도 나베리우스가 내게 보여준 광경을 잊을 수가 없어. 개인적인 복수 따위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당시의 그 모습을 절대 잊지 않았었어. 그때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도… 가면 뒤에 숨겨진 그 얼굴이 계속 떠올랐어.”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심심한 위로의 말도 불가능하다. 굳은 얼굴로 묵묵히 스텔라의 충격적인 말을 귀담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가슴에 묻고 살아갔어. 양부님의 힘을 빌린다 한들, 그때 이후로 마계에서 추방된 나베리우스의 발자국조차 찾지 못할 게 분명했으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죽이겠단 생각을 품고 있긴 했어도… 실천에 옮길 순 없었지. …네비로스란 이름으로 인계에서 버젓하게 활동하고 있는 걸 알았다면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네비로스는 엘리고스의 경우처럼 꽤 오래전부터 인간의 신분으로 인계에 녹아들어 있던 대악마 중 한 명이었다.

아니, 지금도 인간이라곤 하지만, 이미 같은 인간으로부터 상당히 멀어져 있는 인물이었다. 어린 시절의 스텔라에게 그런 짓을 한 시점에서, 나베리우스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다.

“재야의 대마법사­ 네비로스의 정체가 나베리우스였다는 건, 미래를 엿보고 나서야 알아차린 사실이야. 가면 뒤에 숨겨진 얼굴을 봤거든.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모습을… 봐버렸거든.”

지금 스텔라가 느끼고 있을 감정은 우리로선 감히 헤아릴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 수면 아래의 분노만큼은 여실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 것보다 나베리우스가 등장하는 미래를 본 시점에서 당장 눈이 돌아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평생을 찾아다녀도 한 번 마주칠까 말까 한 불구대천의 원수가 내 눈앞에 비로소 등장하는 미래를 보았다면,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을 텐데.

스텔라는 더없이 차분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지금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혹시라도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운명이 비틀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나베리우스가 제 눈앞에 도달하는 미래만을 바라보고 달려왔다. 무엇보다, 가급적 우리가 자신의 복수에 엮이지 않도록 하면서. 유리와 나를… 무척이나 걱정하면서.

그런 스텔라를, 나는 감히 지탄할 수 없었다.

“내가 엿본 운명 속에서 그 얼굴을 발견한 순간, 어떻게든… 이 손으로 나베리우스를 무참히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어. 평생을 복수에 미쳐 살아온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진… 나도 잘 모르겠어. 너희들까지 같이 위험에 처하도록 만들 생각은 절대 없었는데…… 일이 이렇게 돼서 정말 미안해. 정말.”

스텔라가 입술을 깨물곤 고개를 푹 숙였다.

“너희를 일부러 끌어들이려고 한 건… 절대로 아니었어. 이건 내 목숨을 걸고 맹세할게. 상황이 이렇게 흘러간 것부터 절대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내가 책임지고 너희를 밖으로 안전하게 돌려보내 줄게.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목걸이를 꾹 쥐며, 그리 말한다.

발언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아무도 몰라, 루비아와 유리가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차에.

“아니.”

내가 고개를 저었다.

주변의 모두가 스윽­ 날 돌아본다.

“그럴 일은 없어.”

강한 확신을 담아, 말을 잇는다.

“다 같이 살아서─ 여길 나갈 거야. 반드시.”

“에지오……”

루비아의 작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콰아아아앙!

찌르고, 막고, 쳐내고, 부수고, 달려가서, 충돌하는 뮤와 나베리우스. 육안으로도 확연한 마력의 불길이 너울거리는 가운데, 뮤는 제 마력이 텅텅 빌 때까지 총력을 쏟아부을 심산으로 보였다.

그렇게 두어선 안 된다.

마력 탈진에 이르러 행동 불능에 빠지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위험해지는 건 뮤가 될 것이었으므로.

그런 상황이 오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

“살아나가는 건 우리뿐이야.”

저 녀석을…

여기서 죽인다.

꽉 쥔 주먹의 틈으로, 옅은 빛이 새어 나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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