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24)
* * *
#45
─부우우웅!
직선으로 쭉 나아간 뮤의 검 끝이 허공을 갈랐다.
“크윽…!”
분명 방금까지 이 자리에 서 있었는데─ 나베리우스는 어느샌가 바닥 아래로 그림자처럼 스며들더니, 곧 뮤의 뒤에 나타나 그 불길한 손을 내뻗었다.
“어딜…!”
뮤가 허리를 비틀었다. 횡으로 크게 반월을 그리며 베어내니, 나베리우스의 신형도 반으로 갈라졌다. 하지만 모두 허상이었다. 검날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실체감이 없다. 속았다.
후속 공격이 곧바로 들어올 줄 알았지만, 들어오지 않았다. 뮤는 짓쳐오는 존재감을 직감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
저만치 떨어져 있는 나베리우스를 죽일 듯 노려본다. 가면이 깨부숴진 이후, 나베리우스는 제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나머지 한 손으로만 싸우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강하구나, 강해! 이런 네가 만일 주신께 은총을 받는다면, 틀림없이──”
“닥치라고 했지!”
─ 콰앙!
단단한 지면이 움푹 파였다. 작았던 나베리우스의 실루엣이 크기를 단숨에 불린다. 눈앞까지 당도한 나베리우스의 면전에서 검을 휘두른다. 짙은 미소가 입가에 걸린 그 기분 나쁜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단숨에 올려 베었다.
─ 부우우웅!
“소용없다!”
이번에도, 당연히.
─ 퍼어어엉!
“?!”
그때.
나베리우스가 높이 튀어 오르려던 바로 그곳에서, 짧고 굵은 폭발음이 일었다. 화끈한 열기와 불씨가 그 주위를 뒤덮는다.
4위계 폭발 마법의 발현.
시전자는…
뮤가 상념을 지운 채 곧바로 바닥을 박찼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나베리우스는 몸을 급히 날릴 수밖에 없었다. 더 지체할 것 없이 추격한다. 뮤의 신형이 바람을 갈랐다.
“유리!”
“알았어!”
루비아의 부름에 따라 유리가 머리칼을 붕 띄워 올렸다. 피처럼 붉은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형형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 우우우우웅!
불가해한 이능(??)이 최대 출력으로 방출되고, 파직거리는 스파크마저 튀겼다. 어지럼증 내지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리던 유리가 이를 악물었다. 손바닥을 쫙 펼치고, 팔을 크게 휘두른다.
“이 쓰레기 새끼! 죽어어어엇!”
─ 쐐액! 쐐액! 쐐액!
루비아가 소환해 놓은 화염구를,
무더기로 집어 던진다.
목적지는 방금 나베리우스가 회피를 시도한 위치. 저 구석으로 이동할 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루비아의 예측이자 계산이었다. 유리의 염력으로 쏘아진 수 개의 화염구가 나베리우스를 향해 빛살 같이 쇄도한다.
“…이런!”
─ 콰아아아앙!
나베리우스가 급히 펼친 어둠의 장막과 화염구가 충돌한다. 거대한 충격파가 일대에 뻗어 나가고, 불길이 치솟았다.
하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진 못했다. 그렇듯 나베리우스가 간단히 막아낼 거라곤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아주 약간의 틈을 만들기 위한 수작일 뿐.
─ 부우웅!
매캐하게 피어오른 먼지구름 사이로, 뮤가 잿빛 연기를 가르며 번개처럼 뛰어들었다.
“하아아앗!”
마력을 더욱 힘껏 불어넣자, 검신이 길쭉하게 늘어난다. 온전히 마력으로만 이루어진 검이기에 가능한 기예였다. 사거리를 한껏 늘린 검으로 연기를 베어내며 그 뒤의 것까지 함께 베어낸다.
강대한 마력의 영향을 받아 주변의 기(?)가 진동했다. 검세는 더없이 날카롭고, 타점까지 완벽하다. 뮤의 검이 사선을 그렸다.
─ 카아아앙!
손이 찌르르 울린다. 풍압에 의해 연기가 걷히고 나니, 나베리우스가 검은 장막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 뮤의 눈에 들어왔다. 멈추지 않고 검을 빼들어 다시금 내리친다. 카아아아앙! 더 큰 소음이 폭발하며 귀청을 저릿하게 울린다. 하지만 장막에는 실금이 그어질 뿐, 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크윽…!”
강도가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이제 슬슬 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뮤의 이가 바득 갈렸다.
“일어나라!”
장막 뒤에 숨은 나베리우스가 크게 외쳤다.
그러자.
─ 우득, 우드득.
불길하게 진동하던 공동의 바닥으로부터, 죽은 시체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미궁이 그러하듯 이곳 역시 나베리우스의 보물창고였다. 이 공동의 바닥에는 셀 수 없는 시체들이 잠들어 있었다.
─ 그으으으으으.
─ 그으아아아.
─ 달그락달그락.
썩은내가 진동한다. 언제 맡아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 인상을 찌푸리며 뮤가 주위를 황급히 둘러보았다.
수가 많다. 무척. 어림잡아도 오십은 족히 넘어 보인다. 저것들을 일일이 상대하며 나베리우스의 공격까지 성공적으로 방어해 내기엔 다소 무리가 있을 듯했다.
─ 그으으아아아!
되살아난 언데드들은 턱주가리를 벌리다 못해 뚝 떨구며 살아 있는 존재들을 습격하기 위해 손발을 휘적였다. 그 끔찍한 모습들을 혐오 가득한 눈빛으로 노려보던 뮤가, 검을 크게 휘둘러 단숨에 세 마리 정도를 베어냈을 때.
─ 쐐애애애액! 써걱!
날카로운 바람의 파동이 공기를 가르고 나아가, 그 뒤의 시체들까지 반으로 썰었다. 스텔라의 마법이었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루비아의 마법과 유리의 염력까지 합세하여 공격을 개시한다. 폭발하고, 터지고, 불타고, 찢어지고, 비명이 울린다. 대체로 마물들의 것이었다.
“하하, 하하하하!”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폭음과 소음들 속에서, 나베리우스의 미친 듯한 웃음 소리가 공동을 쩌렁쩌렁히 울렸다. 기쁨 혹은 환희, 어쩌면 광기에 겨운 음성이 모두의 귀청을 파고든다.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너희들의 수준을 맞춰 잠시 즐길거리를 만들고 있을 뿐! 주신께서 오고 계신다! 그리하면──”
“누가 온다고?”
“마아아아신! 너희들의 소망을 이루어주실 단 한 명의……!”
“미안한데, 그 새끼 이제 여기 못 와.”
“……뭐라?”
나베리우스가 그제야 뒤를 돌아본 찰나.
“흐읍.”
잿빛 머리의 청년이 어깨를 비틀었다. 직후, 빛을 머금은 정권이 작렬한다. 사이한 마기로 이루어진 연기에 둥그런 구멍을 뚫었다.
본래라면 저 검고 불길한 기운이 일차적인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을 터. 에지오는 아무런 방해 없이 연기를 꿰뚫고 제단에 주먹을 내뻗었다.
있는 힘껏, 풀파워로.
─ 콰아아아아앙!
“…무, 무슨 짓을!!”
폭음이 일었다. 그 광경에 네비로스의 낯빛이 잠깐 창백해졌지만, 곧 아무런 영향도 없을 거란 사실을 상기하곤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기는.’
에지오가 제아무리 강대한 신성을 품고 있다고 한들, 모든 신성의 시초로부터 불러온 힘을 뚫을 순 없을 터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조소와 함께 나베리우스가 큰 비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소용없다! 절대 부술 수 없을 테니! 주신께서 곧 오시기 전에 당장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반항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
“그래?”
에지오는 멈추지 않고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앙! 다시금 폭발음이 치솟았다. 나베리우스는 제단이 파괴될 걱정 따위 하나도 하지 않았지만, 그 소리는 정말로 무시무시했기 때문에, 눈썹을 살짝 비틀어 치켜올릴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에지오의 주먹이 한 번 더 포탄처럼 쏘아졌다.
방금 전, 이 공동의 한가운데 위치한 제단이 나베리우스의 힘의 원천이 된다는 스텔라의 말을 듣고, 그럼 제단을 파괴하면 약화된 나베리우스를 우리 힘으로 죽일 수 있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무엇보다 나베리우스가 강신(??)하는 틈을 타 습격하는 것에 실패하는 순간, 그땐 남은 기회가 더 이상 없다는 걸로 봐도 무방했고. 그럼, 일단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봐야 했다.
─ 콰앙!
“…소용없다고 했을 텐데!”
“알아.”
부술 수 없다면.
부술 때까지 해보는 수밖에.
파아아아앗!
빛을 더 강하게. 짙고 짙은 마기와 가까이 접할수록 정신은 더욱 불안하게 흔들린다. 파괴적인 충동이 온몸을 뒤덮는다. 그럼에도 이성을 가까스로 유지한 채, 내재된 무언가를 쥐어 짜내며 주먹을 연거푸 휘둘렀다. 콰앙, 콰아아앙! 한 번, 두 번, 다섯 번, 열 번─
아직도 부족하다.
작은 실금조차 가지 않는다.
그래도, 다시 한번.
콰아아앙!
“에지오! 계속해!”
─ 그으으으아아아아!
─ 끼에에에엑……
저 멀리에 위치한 루비아와 유리, 스텔라는 나베리우스의 회피를 방해하면서 뮤를 돕고, 에지오에게 달려드는 언데드들을 처리한다.
‘…한계까지 발악해라! 그리고, 절망해라!’
당연하게도, 나베리우스가 진심을 다한다면 이런 조잡한 진형 따위 언제든 붕괴시킬 수 있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흥미로웠기 때문에, 나베리우스는 유흥 아닌 유흥을 쉽사리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타격을 받아 가면이 부서지긴 했지만, 그것조차도 넓은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었다. 너무 흥분해서 녀석들을 죄 죽여 버렸다간, 주신께서 실망하실 테니까.
그렇다.
모든 건 마신(??)을 위해.
이 많은 제물들을 온전하게 바치면, 주신께서도 다시금 자신을 돌아봐 주실 것이다…!
쏟아져 내리는 화염구의 비를 검은 가시들로 요격하여 허공에서 폭발시키고, 장막을 드리워 뮤의 검격을 막아내며, 양옆으로 쇄도하는 루비아와 스텔라의 마법들을 단숨에 쥐어 잡아 무력화한다.
그러면서도 초 단위로 픽픽 죽어 나가는 언데드의 군세를 다시금 일으켜, 한 번 전멸할 때마다 그 수를 점점 불려 나갔다.
그렇게 적잖은 시간이 흐르고, 거의 백 마리에 달하는 시체들이 그들을 둘러쌌을 때, 마침내 제단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나베리우스가 화색을 띠었다.
“오오, 오오오오! 드디어!”
주신께서 오신다!
나베리우스는 열렬한 추종자로서 자신의 유일한 신을 경건히 맞이할 준비를 했다. 모든 공격을 일제히 존재하지 않는 공간 너머로 보내어 흘려 버리고, 한 손을 꽉 쥐어 모두의 몸을 단숨에 속박했다.
“꺄아아악!”
“으으윽!”
“으, 윽, 으윽…”
“크윽…”
루비아와 유리, 스텔라 그리고 뮤마저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대로 목을 비틀면 금방 죽여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나베리우스는 가급적 산제물을 바치길 원했기 때문에─ 잠깐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 놓았을 뿐이었다.
“…저 녀석.”
그러나, 다음 순간.
나베리우스의 미간이 팔자로 좁혀졌다.
“흐읍.”
분명 에지오 크라닐까지 대상에 포함했을 텐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멀쩡하게 움직이며 제단을 타격하고 있었다. 그럴 린 없겠지만 실수한 건가 싶어 다시 손을 꽉 쥐어 보아도, 에지오의 주먹질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로 말미암아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사실.
에지오 크라닐은 이 공간의 지배를 완벽히 벗어났다.
…어떻게?
답은, 저 빛에 있는 것 같았다.
점차 그 크기와 눈부심을 눈덩이처럼 불려 나가, 이제는 광휘(光?)라 불러도 될 정도로 찬란히 빛나며, 주먹뿐만이 아닌 온몸을 휘감고 있을 정도로─ 빛의 화신 같은 모습이 된 에지오.
‘예상보다 훨씬……’
가치가 높다.
나베리우스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저 정도의 막대한 신성이라면, 지금의 자신도 살짝 경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곤 해도 여전히 제단을 부술 순 없을 터다. 결국 빛은 어둠을 몰아낼 수 없으니까. 무슨 수를 써도 좁힐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의 차이가 존재…
─ 콰아아앙!
─ 콰아아아앙!
─ 콰아아아아아아앙──!!
그리고.
─ 쩌적.
“!”
─ 쩌적, 쩌저적.
“…무슨.”
제단을 칭칭 둘러싼, 절대 깨부술 수 없다 했던 결계에 서서히 금이 가는 것을 보곤, 나베리우스의 안색이 급격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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