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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차버린 소꿉친구와 전 여친이 같은 반이라 곤란하다-170화 (170/201)

〈 170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29)

* * *

#52

나베리우스는 제물을 바치지 않았다. 그럼에도 마신을 강림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악마화를 했다곤 하나 본질은 인간인 몸이다. 하물며 그 어떤 대악마도 마신의 본체를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마신의 의식──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라곤 해도, 아무런 후환이 없을 턱이 없었다. 일찍이 제물을 바치지 않았음에, 나베리우스의 육신은 실시간으로 붕괴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모두 계획된 일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준비한 제물들은 모두 극진히 바쳐질 것이었고. 그들을 마신께서 죄 먹어 치운 뒤엔 그 영향을 함께 받아 육신의 붕괴도 자연히 멈출 것이었기에.

「이역만리에서 바쁜 몸을 부르기에 응해보았더니…… 제법 흥미로운 판을 잘도 벌여 놓았지 않는가.」

모든 사물이 강제로 침묵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적막이 공동 내부를 가득 채웠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 속에서 질식할 듯 억눌린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삐져나왔다. 에지오의 것이었다.

「……흐음.」

나베리우스, 아니, 마신은 턱을 어루만졌다.

「너……」

피처럼 붉은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그 까마득한 동공을 마주하자, 에지오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심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등줄기에 소름이 우수수 돋는다.

반대로 잠재된 신성이 들불처럼 날뛰었다. 치밀어 오르는 적대심에 몸을 부술 듯 비튼다. 옅은 빛이 신체의 외곽선을 따라 명멸했다. 그러나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내는 일은 없었다.

「대체 무얼 만들어 놓은 것인지.」

마신의 음색은 그 자체로 무거웠다.

한 글자 한 글자 들릴 때마다 육중한 무게추에 깔려 전신이 짓눌리는 것처럼, 지면 아래로 파고들 것만 같았다.

「웬 폭탄을 만들어 놓았구나……. 그것도 아주 강력한 시한폭탄이야. 구태여 건드리지 않아도, 적절한 시일이 지난 뒤엔 스스로 터질 테지.」

도화선에 불은 이미 붙었다.

폭발의 여파가 보인다.

세상에서 달은 영원히 사라지게 되리라.

「무얼 위한 안배인가……」

그쯤.

마신은 탄식하는 듯했다.

「이번으로 종지부를 찍으려 하는구나.」

마신은 턱 끝을 위로 당겼다.

핏빛 동공이 공동의 천장을 향했다. 어딘가 애처로운 듯한 음색에 담긴 무게감은 이전보다 조금 덜어져 있었다.

“헥, 헤엑, 헥……”

“콜록, 콜록……”

그 덕분에 루비아 등의 일행은 잠시나마 정상적으로 호흡할 수 있었다. 제각기 들숨과 날숨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목울대를 비롯해 사지를 압박하는 중압감은 일말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별 쓸모도 없는 영()과 육(?)이로다. 이리 부실하고 나약한 것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굴레가 아닐진대. 어찌저찌 굴러가고 있긴 하는구나. 참으로 신기한 일이로다……」

뚜벅, 뚜벅.

마신은 에지오의 지근거리에 멈춰 섰다.

고개가 까닥이며 아래를 보았다.

「진즉 붕괴했음에 마땅한 영()이 버티고 있는 것은 으레 칭찬할 만하다. 허나…… 그마저도 이십 년이 한계일 터. 이대로면 십 년. 한계선이 그 정도일 뿐…… 얼마든지 앞당겨질 수 있느니라. 한데 본인의 말뜻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표정이구나.」

마신은 친히 알려주었다.

「네 남은 수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천치 같은 아이야.」

“!”

유리, 뮤, 루비아, 스텔라.

너나할 것 없이 몸을 들썩였다.

「그러고 보니.」

끝없는 어둠에 삼켜진 공간 속.

서서히 잠식되어 가던 이들을, 마신은 그제야 돌아보았다.

「……제물, 이라?」

나베리우스의 육신은 시시각각 붕괴하고 있다. 손끝부터 바스라지고 있다. 제물의 신성을 어서 흡수하지 않으면 영영 늦어버릴 터.

하지만 마신은 그리 하지 않았다.

잠재된 나베리우스의 의식이 열렬히 부르짖는 말들을 가만 듣고 있었다.

얼마 뒤, 나베리우스의 얼굴을 한 마신이 눈썹을 비스듬히 치켰다.

「이들을 제물로 삼아, 마계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라…… 이 말인가. 나베리우스.」

패전 이후 모습을 감추었던 마신.

아니, 처음부터 직접 참전하지도 않았으나…… 마신의 열렬한 추종자들은 마계가 인간의 손에 넘어가고 있는 도중에도 여전히 남아, 저들의 유일한 주신을 각지에서 떠받들고 있었다.

나베리우스도 그중 한 명이었다.

마신교(??)의 충실한 일원.

제 주신에게 버림받은 뒤 다시금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과 동시에, 훗날 큰 방해가 될 만한 요소들을 미리 제거함으로 마계 부흥과 재건에 무던히 이바지하고자 했다.

「참으로……」

일순, 마신은 동공 속에 어떠한 색채를 드러냈다.

그것은── 무색(無色).

무생물처럼 무기질적인 시선이 허공을 꿰뚫었다. 지독한 권태감에 찌든 눈. 살짝 벌려진 입술 틈새로 목소리가 빠져나온다.

「참으로…… 쓸데없는 짓을 벌였구나.」

그 순간.

잠재된 나베리우스의 의식이 펄펄 날뛰었고.

마신의 등장으로 모든 게 끝났음을 직감했던 스텔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본인이 너를 끝내 인정하지 않은 이유를, 아직도 깨닫지 못한 모양이구나, 나베리우스. ──이 무지몽매한 놈.」

어째서, 어째서입니까── 절박한 외침이 내부를 쿵쿵 울리지만 마신은 일말의 미동도 없이 말을 이었다.

「네가 간과한 점은 무수하나, 가장 어리석디 어리석었던 점을 딱 한 가지 꼽아 보자면……」

마신이 고개를 꺾는다.

다시금 에지오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이들의 신성은 본인이 취할 수 없다.」

한 칸 건너 뮤를 내려다본다. 제 힘이 다할 때까지 저항하려는 듯, 동공을 위로 치뜨며 마신을 노려보는 모습이 썩 매서웠다.

「폭탄이라고 말했지 않느냐. 건드리는 즉시 터질 것이니라. 그것이야말로 히페리온이 진정 의도하던 바일 테지. 그러니 본인은 너희의 명(?)을 거두지 않을 것이고, 거둘 수도 없느니라……」

밝은 불을 좇는 벌레처럼 무수히 꼬이고 꼬여서.

자진하여 불타 버리게 만든다.

누구보다 찬연한 빛깔을 뽐내는 먹잇감에 이끌리도록 하여, 인세(人世)에 암약하고 있던 마족들을 모조리 끌어낸다.

그리하면 비록 불길은 차츰 사그라드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타오르며 주위의 모든 것들을 불사르겠지만, 결국 언젠가는 불씨가 꺼지고 말 것이었다.

「반대로 일컫자면 나베리우스, 너는 본인을 죽이려 든 셈이다. 태양의 뜻대로 움직인 것이다. 이는 본인의 뜻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느니라.」

가당치도 않습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나베리우스의 의식이 애걸복걸하지만, 마신은 눈곱만큼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시끄럽다.」

냉정히 판단을 마쳤다.

어느새 모래알 같은 부스러기로 화해 떨어지며 무너지기 시작한 육신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이만 닥쳐라. 쓸모없는 것.」

주신이시여──

그것이 나베리우스의 마지막 외침이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구나.」

손가락으로 개미를 꾹 누르는 것처럼.

의식을 짓눌러 터트려 버렸다.

──그렇게, 나베리우스는 죽었다.

스텔라의 원수가 말끔히 사라졌다. 세상에서 영영 모습을 감추었다. 복수는 절반 이루어졌다. 그녀의 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못했기에, 결코 완벽한 복수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이야기나 해볼까.」

마신은 손발이 부스러기가 되어가는 와중에도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제 몸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더 머무를 생각 따위 전혀 하고 있지 않았음에.

「아, 그렇지.」

안색이 다들 허여멀건하다.

마신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허억, 헉. 허어억.”

“컥, 컥. 콜록, 콜록……”

루비아는 땅을 짚고 헛구역질을 했다. 뮤는 입가로부터 침을 질질 흘리며 표표한 눈빛을 내보였다. 에지오는 몸을 급히 뒤로 빼면서, 모두를 보호하려 들며 초월자를 경계했다. 유리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은 누군가의 사체를 향해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마신이 떡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스텔라는……

“저희를… 어떻게 할 생각이신가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나.

언뜻 우호적으로 보이는 마신에게 존대를 붙여가며, 그러나 한편으론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조심스레 물었다.

「음─? 방금 말했지 않느냐. 죽이지 않는다. 죽이지 못한다. 그렇다면…… 단지 이야기를 나눌 뿐이니라.」

마신은 그리 대꾸했으나.

「그것보다…… 너는.」

창졸간.

마신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갑작스런 일변에 스텔라가 잠시 뒷걸음질 쳤다.

“스텔라. 물러나.”

“……에지오.”

도를 넘어선 마기가 오히려 제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던 걸까. 아니면, 제멋대로 폭주하던 신성마저 끝끝내 잠재워 버린 것이었을까. 가증스러운 악마의 모습을 한 마신의 앞에서도 에지오는 이성을 유지하며 스텔라를 보호하듯 제 팔로 가리고 우뚝 섰다.

아티팩트가 작동할지 어떨진 잘 모른다. 물론, 이지스의 방패가 전개된다고 한들 마신의 일격을 상대로 버틸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다만, 마신은 에지오 자신의 목숨을 거두는 걸 꺼려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육탄을 내세워 막아서는 건 충분한 억제 수단이 될 것이다.

“유리, 너도.”

“……”

유리는 이 모든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 같았다. 나베리우스의 의식이 소멸하자 아이델의 시체도 자연히 동작을 정지했다. 그것은 단어 그대로의 시체가 되었다. 유리는 그 모습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며 입술을 가만 깨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유리의 어깨를 에지오가 잡아끌었다.

유리의 몸이 힘없이 비틀거렸다.

“……”

별안간 마주친 붉은 동공에 맺힌 색채는 옅고 혼탁했다. 너무 큰 충격과 혼란을 동시에 겪어 넋이 나간 사람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는 건 의미가 없을 듯했다.

“……”

“……”

루비아와 뮤도 각자 일어서서, 경계 태세를 취했다. 뮤는 이전처럼 무턱대고 튀어 나가지 않았다. 마신의 저력을 확실히 인지한 까닭이다. 헛짓거리를 하는 순간…… 죽음이다. 오로지 그 미래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쯤 마신은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기이한 조합이구나. 별과 태양이 함께 있다니. 무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별 상관은 없겠지마는……」

이곳에서 마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건 에지오와 스텔라뿐이었다. 루비아와 뮤, 유리는 그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당연하다. 악마들 중에서도 마신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이 더러 존재하기에.

그럼에도 모든 악마들은 마신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 모든 마(?)는 마신에 의해 탄생했기 때문이다.

“……”

에지오는 목울대에 고저를 그리며.

눈앞의 마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모든 마족과 악마들의 지배자.

누군가가 이르길……

최초로 신을 배신한 역천자.

“당신이…… 마신입니까?”

재확인 차 물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마신은 고개를 느릿하게 내저었다.

「본인은 신(?) 같은 게 아니다. 마신이라는 건 본인을 떠받드는 녀석들이 멋대로 갖다 붙인 호칭일 뿐이니라.」

쿠구구구구──

나베리우스의 죽음에 따라, 원주인을 잃은 공간은 서서히 무너질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분열된 미궁은 홀연히 사라질 것이고.

공동은 폐허 속에 묻힐 것이다.

아직 실습이 채 끝나지 않았기에 남은 2학년과 3학년 학생들은 자연히 바깥으로 쫓겨날 터. 깨어진 허상 속에 발을 들이기 직전의 위치로 추방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 공동의 인원만큼은 달랐다. 이곳은 엄연한 현실. 드넓은 공동이 사막의 모래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그들도 같이 묻히게 될 것이었다.

그러기 전에 탈출해야 했다.

다만 마신은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본인을 셀레네라 부르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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