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30)
* * *
#53
“셀레, 네?”
「이 또한 진명(名)은 아니다만, 너희 인간들이 떠받드는 주신 중 하나…… 히페리온과 동일한 개념이니라. 무얼, 신좌에 오르지 않더라도 세상의 이치로부터 한 꺼풀 벗어난 존재의 이름을 너희들이 함부로 담을 수는 없는 법이니.」
“당신이 마신이라는 건 틀림없군요.”
「신 같은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당신이 태초에 마계의 악마들을 탄생시켰다고 들었습니다. 순리와 법칙을 초월한 신(?)이 아니라면 새로운 생명의 창조 같은 건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인가요.”
「셀레네.」
거룩한 음색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본인을 규명할 수 있는 건 그뿐이다.」
마신── 셀레네는 인류의 적이다.
만마(??)의 정점에 선 이라면, 인류가 궁극적으로 처단해야 할 주적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나긴 전쟁 속에 바스라진 생명들은 한낱 줄글로 남아 역사서에 기록되었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가득 메우고도 범람하여 출렁일 정도의 무수한 피를 흘리게 만든 주범.
셀레네가 죽지 않는다면, 마족과 인간 사이의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마족은 마신의 손끝에서 탄생했나니. 태초의 악마 셀레네가 존재하는 한─ 마(?)의 씨앗은 절대로 뿌리 뽑히지 않을 것이었다.
「한데, 너……」
쿠구구구구구─
무너지는 어둠의 공동 속.
형형히 빛나는 셀레네의 눈빛이 에지오를 향한다.
「본인을 뼛속 깊이 증오하고 있구나.」
──셀레네가 존재하기에,
에지오는 그 많은 일들을 몸소 겪었다.
루비아가 가증스러운 악마에게 납치당한 일.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쳐 몸을 내던진 일.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은 수백 년의 고행. 그로 처참히 망가진 영과 육. 세상에 남은 마(?)를 뿌리 뽑기 위해 부여받은 억지스런 운명. 비참한 최후가 예정된 삶. 그 모든 걸 감내하고서도, 반드시 이 악물고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
그것은……
「억울하느냐?」
다만 아무런 재능도 없이 태어나.
몰락한 귀족가의 외동 아들에 불과했던 자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하디 거대한 흐름에 휘말려 버린 것.
그 자체였다.
「어째서 너야만 했는지, 억울하고 또 억울해서…… 도저히 격정을 토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느냐?」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다.
그러니 별 의미도 없이 죽을 수는 없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을 제거하여 다시 일상 속의 평온을 되찾기 전까진, 에지오 크라닐은 돌을 씹으며 살아가는 걸 멈출 수 없다.
「본인을 죽이고.」
그냥, 행복하고 싶었을 뿐인데.
평온한 시골 마을에서.
소중한 친구와 같이…… 오두막의 다락방 창문 너머로 동트는 새벽녘을 바라보며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으냐?」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건지.
울컥한 억하심정이 들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느껴야 할 감정을 서서히 잃어가면서까지, 세상을 구원하는 영웅 따위가 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무섭고 두려웠다. 점점 이상해져 가는 걸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 이상 상처 같은 것도 주고 싶지 않다.
그저……
“전쟁은 다 끝났지 않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변변찮은 재능도 하나 없고, 한없이 꼴사납기만 했던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에지오 크라닐은 안온한 평화를 바랐다.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 목소리는 소음에 파묻혀 먹먹하게만 울렸다.
하지만 그 자리의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절절한 울림. 무어라 발언할 기회나 생각이 없었던 루비아는 다만 에지오의 손을 뒤에서 잡아주었다. 그의 몸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만, 할 때라……」
십 년 전의 인마대전은 인간의 대대적인 승리로 끝났다.
마계는 인간의 손에 떨어졌으며, 마소(??)가 가득한 일부 토양은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환경으로 재구축되었다.
뿔과 날개가 달린 악마들의 태반은 단두대에 매달려 처형되거나, 뿔이 꺾여 부러진 채 인간의 한낱 유흥거리로 전락했다. 혹은 어두캄캄한 지하실의 노예가 되었다.
제국의 뒷면, 암흑가의 경매장에선 이따금 지나치게 어린 마족이 올라오기도 했다. 강제로 교배시킨 마족들 사이에서 잉태된 마족이었다. 날 때부터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만들어 완전한 사육을 원하는 대륙의 부호들이 주로 선호하는 경매품이었다.
한편, 전쟁에서 운이 좋게 살아남거나, 전쟁에서 도망친 이들── 일부의 대악마들은 인세(人世)에 잠입하여 저들의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며 살아갔다. 태곳적 유흥의 일환으로 미리 만들어 놓았던 내세의 신분은 매우 큰 도움이 되었다.
일부 머저리들이 마계 재건이라는 명목하에 불을 지르고 때아닌 살육을 벌이며 난동을 피우는 것과 달리, 태반의 대악마들은 역모와 반역 따위 꿈꾸지도 않았다.
한층 전력이 강화된 인간 측에 발각되는 순간 죽음 혹은 더없이 비참한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말 테니.
무엇보다, 그들은 대개 마계 따위보다 자신의 안위가 더 중요하였음에. 그러니 전쟁에서도 패전(?戰)의 낌새를 눈치채고 미리 도망친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경계’ 밖의 마계는 재건이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의 이례적인 피해를 입었다.
인류 역사상 몇 차례나 이어져 온 인마대전의 종지부를 찍었다 일컬어도 이견이 없을 대전쟁이었다.
말인즉 마계는 두 번 다시 재건되지 못한다. 전쟁을 여기서 더 이어 나갈 전력도 가능성도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는다.
파스스스스……
활짝 펼쳐진 채 펄럭거리던 날갯죽지가 차츰 먼지 부스러기로 화해 바스라진다. 뿔은 천천히 두개골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찢어졌던 핏빛 동공이 원래의 색을 되찾는다.
시간이 충분히 흘렀음에 따라 악마화가 풀리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셀레네는 곧 나베리우스의 육신으로부터 떠나가게 될 것이었다.
「……」
셀레네는 눈꺼풀을 느지막이 닫았다 열면서.
「본인은 지금 이곳에 존재하노라.」
재전(?戰)의 가능성을 말했다.
셀레네── 마신은 버젓이 살아 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러니, 언젠가.
알티마 대륙의 푸른 하늘은 또 다시 어둠에 잠길 것이다.
“……무엇을 위한 전쟁이었습니까.”
하여, 에지오 크라닐은 묻는다.
그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셀레네는 잠자코 답한다.
「본인은 거짓을 하나 고할 것이다.」
이어서.
「평화를 바랐느니라.」
거짓이 아닐 수가 없는 말을 했다.
#54
“평화라니……”
말도 안 된다.
그랬다면 전쟁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
신을 배신하고, 악마를 탄생시켜, 경계 밖 마계의 지배자가 되어 인류를 위협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셀레네는 그것이 거짓이라 스스로 말했다.
그렇다면, 마신은 평화를 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거짓을 고하겠다는 그 말 자체가 거짓인지.
평화를 원했다는 말이 거짓인지.
그 자리에 있던 모두는 알 수 없었다.
에지오 크라닐이 셀레네를 향해 말했다.
“하늘 위의 신께서는 당신을 죽이려 합니다. 당신의 존재가 사라져야만 이 모든 굴레의 연쇄가 끊어질 것이라 말합니다.”
「그렇겠지.」
“그 이유가…… 당신이 신을 최초로 배신했기 때문입니까? 그렇기에 신께서 당신을 죽이려 하는 겁니까?”
「……」
쿠르르르릉.
돌연 공동의 천장에 금이 가며 돌덩이가 떨어졌다.
“!”
“어”
“피해!”
그것은 한 개가 아니었다.
여러 개의 운석이 되어 일행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썩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구나.」
셀레네가 무심히 팔목을 들자.
장내를 쿵쿵 진동시키던 지진도, 천장으로부터 떨구어진 묵직한 돌덩이도, 모두 그 자리에서 멈춰 버렸다.
작은 돌조각이 허공에 멈추어 있다.
루비아는 그것을 멍하니 건드려 보았다.
시공간이 그대로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정녕 그리 생각하느냐.」
아까부터 넋이 나가 있던 유리를 황급히 끌어안아 대피시키려던 에지오의 자세가 잠깐 무안해졌으나, 그 위대한 마법과도 같은 기이한 현상에 모두가 압도되어 숨을 가만 들이마실 뿐이었다.
「배신은 믿음이 있었기에 성립하는 것이지.」
고고한 셀레네의 울림.
그것만이 공동을 가득 메웠다.
「그러니, 네 말은 진실에 닿지 못하느니라.」
진실에 닿지 못한다니.
그럼…… 배신하지 않았다는 건가?
“제 말이 틀렸다는 겁니까?”
「무얼, 대답해 줄 성싶으냐. 무지몽매한 놈.」
“……”
저리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면.
점점 뭐가 뭔지 더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린다.
테트라와 엘레나.
에지오 크라닐과 같은 화신들.
그들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아예 전제부터 그릇되었을 수도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우둔하고, 가여우니. 너를 보면 꼭 그 아이가 생각나는구나.」
잠시 뒤.
셀레네는 낮게 탄식하며 말했다.
「시아인. 그 아이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는가……」
누군가를 깊이 그리는 것처럼 읊조리지만.
정작 셀레네의 눈은 너무나도 무채색이었다.
그 즈음.
“에지오, 너 대체……”
에지오의 손을 잡아주고 있던 루비아가, 슬며시 그를 올려다보며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눈빛을 띠었다.
지금 가장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건, 신성이니 신이니 운명이니…… 그런 것들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루비아와 뮤, 그리고 유리였다.
스텔라와 마찬가지로 에지오 역시 그들의 가까운 이들에게 숨기는 것이 많았다. 비록 최근에 맞닥뜨리게 되어 본인마저 잘 정리가 되지 않았기에 남에게 함부로 털어놓을 수도 없었던 것이긴 하나… 이제부터 알 만한 이들에겐 전부 내막을 알려줘야 할 것이었다.
“나중에 얘기해줄게. 지금은…”
“으응… 알고 있어.”
루비아가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나는… 에지오를 믿으니까…”
그러면서 꾸욱.
붙잡은 손에 힘이 살짝 더해졌다.
“……”
스텔라와 유리, 루비아까지 전부 에지오의 뒤편에 있었다. 그러나 단 한 명만큼은 에지오의 곁에 자리하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그쪽을 바라보다가, 셀레네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흐음.」
시공간이 멈춰 있어도.
셀레네는 차츰 바스라져 가는 중이었다.
그가 떠나기 전에, 에지오는 물었다.
“마신. 궁금한 게 있습니다.”
「너는 지금 두 가지 우를 범했느니라. 첫째는 본인을 마신이라 부른 것. 둘째는 님 자를 붙이지 않은 것. 그런 네게 친히 대답해 줄 성싶으냐?」
“제 수명에 대한 이야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감히 무시를 하다니. 배짱도 좋구나.」
셀레네가 피식 하는 소리를 내었다.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말 그대로이니라.」
이어서.
「이대로면 십 년을 넘기지 못할 터. 영이 붕괴하는 순간 육도 자연히 붕괴하게 될 테지. 너는 십 년 언저리에 죽고 말 것이니라.」
“……”
거짓일 수도 있다.
그 누구도 아닌 마신이 하는 말이니까.
하지만, 에지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없다.」
셀레네가 짧게 일축하자.
에지오를 비롯하여, 남은 이들── 특히나, 에지오에게서 떨어져 있던 뮤의 가슴은 순간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러나, 직후.
「네가 굴레에서 해방되지 않는 한.」
셀레네가 무심히 말을 던졌다.
「너는 십 년을 채 넘기지 못할 것이니라.」
셀레네는 조건 하나를 제시했다.
굴레의 해방.
그걸 위해서는……
“당신을 죽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다.
그의 본체를 찾아낸다고 한들.
이 몸으로, 이 힘으로.
마신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절망하고 있구나.」
“……”
「너뿐만이 아니라, 네 주변의 빛들까지 모두 명멸하고 있느니라. 적잖은 인연이 얽혀 있는 모양이구나.」
“……”
「살고 싶으냐…… 라고 묻는 것은 그릇된 일일 테지. 뜻을 가진 인간이 삶을 포기할 리가 없으니.」
셀레네의 팔 한쪽이 전부 바스라졌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때가 오면.」
셀레네가 이어 말했다.
「너는 선택하게 될 것이니라.」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알려줄 수는 없다.
셀레네는 그리 시사하는 듯했다.
“……그 몸의 주인은, 당신이 우리의 소망을 들어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잠시 뒤.
거만하게도, 셀레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다면?」
에지오 크라닐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제 몸과 정신을…… 예전으로 돌려줄 수 있겠습니까.”
「……」
그 말에 반응한 건 셀레네뿐만이 아니었다.
에지오의 예전 모습을 알고 있는 루비아와 뮤, 스텔라─예닐곱 살 때의 어린 시절이긴 했지만─를 포함하여, 넋이 나가 있던 유리마저 살짝 의문이 들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말이었으므로.
“만일 가능하다면,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
셀레네는 잠시 침묵하다가.
「때가 오지 않았다. 네 소망은 들어줄 수 없느니라.」
단지 그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다음 순간.
“마신 님.”
「……으음? 마신이 아니라니까.」
마신에게 존칭을 붙여가며,
스텔라가 입을 열었다.
「너는……」
마신의 얼굴이 순간 와락 구겨졌지만.
곧 원래대로 무표정하게 펴졌다.
「……그래, 에오스의 대리자구나. 너에게는 잘못이 없지. 말하거라.」
에오스?
에지오가 스텔라를 돌아본 찰나.
“나베리우스는, 어떻게 된 건가요.”
스텔라가 잠잠한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
「죽었다.」
“……”
「리치가 될 연구를 하고 있던 모양이다만. 라이프 베슬을 따로 만들어둔 것도 아니었으니, 영영 되살아날 일은 없을 것이니라.」
정말로, 완벽한 죽음을 맞이했다.
너무나 쉽고 간단하며.
허무하게.
“……그런가요.”
스텔라는 말없이 목걸이의 장식을 꾹 쥐었다.
그걸 본 셀레네가 나지막이 말했다.
「기원이 스며든 물건이구나. 그러니 작디 미약한 힘이 깃든 아티팩트가 되었고. 누군가의 유품이라도 되는 것이냐.」
“……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목걸이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었다.
분명 평범한 목걸이였지만, 어느 계기를 통해 마력이 담긴 아티팩트가 되었다.
“…”
에지오는 조심스레 스텔라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스텔라는 그 손길에 아주 작은 위안을 느꼈다.
「본인도 태곳적에 상실이란 걸 경험한 적이 있었지. 오갈 데 없는 복수심이라는 건 결국 허무로 끝을 맺기 마련이고.」
문득 셀레네가 입을 열었다.
「윤회의 개념을 들먹이기엔 너무 먼 이야기일 테지. 네 원수는 죽었느니라. 다신 살아나지 않아. 네 어미와 아비도 마찬가지고. …다만 업(?)이 없는 영혼들의 내세(世)는 평안하다. 그곳에 전쟁 따위는 없을 테니 괜찮지 않겠느냐.」
셀 수도 없는 살육을 무자비하게 벌였을 마신은, 전쟁에서 희생된 인간의 부모를 향해 나름대로 애도의 말을 건네는 듯했다.
기실 스텔라의 부모님이 죽은 건 궁극적으론 마신의 탓이었다. 마신이 없었다면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스텔라의 갈 길 잃은 증오와 복수심은 이제 셀레네를 향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 가요.”
아니, 아니었다.
스텔라는 이미 허무의 상태에 빠져들었기에.
그 무엇에도 복수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
셀레네가 턱을 어루만지며── 그러려다 손이 없다는 걸 깨닫곤, 제각기 침묵에 감싸인 주변을 둘러보다가.
문득 무릎 꿇은 시체에 눈길이 닿았다.
이건 또 무얼까.
이 아래 잠든 이들과 달리,
미약하나마 느껴지는 게 있긴 하다만……
「본인이 떠나면 너희는 죄 깔려 죽을 테지.」
셀레네는 일행을 살려둘 이유가 전혀 없다.
그들은 분명 훗날 만마(??)를 위협할 큰 방해물이 될 것이었음에. 그때를 위해서라도 지금 죽여두는 편이 좋았다.
「여기서 이만 내려가도록 하자꾸나. 이 하찮은 육체의 기억에 따르면 이 아래에 쓸만한 것이 있으니.」
하지만 마신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일행들의 살 길을 열어주었다.
우우우웅……
한쪽 팔과 다리가 사라졌지만 바닥을 미끄러져 유영하는 것처럼 셀레네는 공동 한가운데 제단 쪽으로 이동했다.
쿠구구구……
손발의 움직임 하나 없이 제단을 움직여 뒤로 밀어내고,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문을 열어 지하 계단으로의 통로를 개방했다.
“저건……”
스텔라가 말했던 나베리우스의 게이트.
대륙 어느 곳으로든 향할 수 있다는 궁극의 포탈이 바로 저 지하에 있는 것이었다.
……곧 폭삭 무너져 붕괴하겠지만.
궁극의 게이트가 가진 학술적, 금전적 가치를 아는 루비아로선 이 많은 일이 있었음에도 살짝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거기서 죽을 셈이냐? 무얼, 말리진 않겠다만.」
뮤, 루비아, 그리고 스텔라.
마지막으로 에지오 역시.
어느 한쪽을 돌아보며 걸음을 주저하고 있었다.
“유리, 이제 가야 해.”
“……”
에지오는 조용히 말했다.
“……”
“유리. 네 마음은 알겠지만……”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
셀레네가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른다.
어차피 아이델의 시체는 회수해야 한다. 지금 아르티나 왕국에 있을 아이델의 무덤에는 본인이 잠들어 있지 않을 것이었으므로.
그리하면 왕국은 물론이고 프론티어와 제국마저 왈칵 뒤집어지겠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었다.
우선 여길 빠져나가야 했다.
“……”
“유리.”
무릎 꿇은 아이델의 시체 앞에서.
유리는 한참 고개 숙여 침묵하다가.
“셀레네 님.”
머리를 들어, 그렁그렁한 눈망울을 빛냈다.
「이제야 마신이라 부르지 않는구나. 네가 최초이니라. 썩 마음에 들었으니, 말하거라.」
“……안 되는 걸 알고 있지만.”
어느새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상체만 남은 셀레네를 향해, 유리는 기어코 그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제 오빠를, 살려주실 수 있으신가요.”
에지오로선, 유리 폰 아르티나란 일국의 왕녀가 그렇게 정중히 말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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