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1학기 모의 실습_네비로스의 미궁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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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악에 받친 저주와 분노를 그저 고요히 마주하고 있던 셀레네가, 아직 의도를 헤아릴 수 없는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다만, 그리 긴 시간은 허용되지 못하느니라.」
주저앉아 오열하던 유리의 눈물이 턱 끝에 고여 뚝─ 떨어졌다. 물기에 푹 젖어 흐느끼던 목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붕 떠오른 머리카락이 사르르─ 착 가라앉고, 드드드드─ 친구들을 당황케 만들었던 염력의 폭주가 대류의 흐름을 정상으로 되돌린다.
에지오의 말에 따라 「스턴」 마법을 쓰려던 루비아의 행동도 정지했다. 약식 발동으로 영창은 필요하지 않았기에, 주저하며 내뻗은 그 손이 유리의 몸에 닿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한데, 닿지 않았다. 그대로 허공에 머물렀다.
“……히윽, 흑.”
흐으으─ 흐으으─
과열된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구겨진 철판처럼 일그러졌던 얼굴도 서서히 다림질이 되고 있건만, 엷은 딸꾹질을 비롯한 격분의 흔적은 아직 지워지지 않고 있다.
손틈 사이사이로 드러난 정경 속, 분노로 이글거리던 유리에 비해 더없이 초연한 셀레네가 말을 잇는다.
「이 열등한 육체로는 이 이상 빙의를 지속하기 어려울 것이니라. 본인의 소멸을 최대한 늦춘다 하여도, 고작해야 십 분이 한계일 터.」
파스스스─ 먼지가루로 화해 분분히 조각나던 셀레네의 빙의체는 소멸에 있어 아주 잠깐의 유예를 두었다.
그들은 모르는 사실이나, 이곳에 더 오래 머무르는 건 셀레네로선 다소 위험한 선택이었다. 「권능」의 일부를 사용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셀레네는 공연히 말한다.
「기실 네 오라비의 혼도 삼 분이면 재로 흩어질 것이니라. 부스러기로는 아무렴 한계가 있을 터이니. 끽해봐야 삼 분이고, 그보다 더 짧으면 일 분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느니라……」
이 공동이 무너지지 않게 지탱하고 있던 것은 셀레네다. 지금도 그렇다. 셀레네의 빙의체가 소멸하면, 장내가 우그러지며 결국 모래 속으로 처박힐 것이었다. 고로 소멸을 잠시 늦추고자 했다.
그리하면, 이 공간에서 오직 셀레네만이 가능한 기적을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행사할 수 있을 테니.
“……무슨, 소리야. 끅.”
하아─
뜨거운 한숨을 토해내던 유리가 표표한 눈빛을 치켰다. 꺼지지 않은 불씨처럼 옅게 타오르고 있는 감정이 동공에 어려 있다. 그러한 유리의 분노를, 주변에 자리한 이들도 이해하고 또 공감했다.
자신들의 목숨줄을 잡고 있기에 성급한 행동을 하지 못할 뿐. 그들의 눈앞에 있는 건 틀림없는 마신이었다.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대륙민들을 수백 수천─ 그 단위는 무려 만(?)에 이르는 숫자를 희생시킨 태초의 악(?).
각기 좋든 싫든 저마다의 사유로 악마와 얽혀 있던 모두에게 있어, 증오를 품지 않고 배길 수가 없는 대상이다.
그 모든 증오를 한 아름에 받아내며, 셀레네는 일전에도 그랬듯 무심히 말을 잇는다.
「저토록 뿌리 깊은 회한을 아직 풀지 못했으니, 너희 인간들의 풍습으로 장례를 치른다 한들 망령이 될 가능성도 없지 않느니라. 하물며, 회한만 남았기에 더더욱 골치 아픈 원령(?)이 될 터. 웬만한 정화 의식도 듣지 않을 것이니라. 악함으로부터 비롯된 원념이 아니기에……」
아이델에게 남은 것은 집착이다.
돌아가야 한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 돌아가야 한다…… 수도 없이 되뇌고, 그것은 결국 공허한 메아리처럼 텅 빈 육체를 떠돌아다닌다.
그리하면, 부스러기에 불과했던 혼의 조각은 그 집착을 양분 삼아 크기를 점차 불려나갈 것이며, 종래에는 강한 원념이 극대화된 원령이 되어 무덤가를 뛰쳐나와, 골백번 죽어서도 수호하고자 했던 왕국을 무시무시한 악몽으로 뒤덮을 것이었다……
“……원, 령이라니.”
수호령이라면 모를까.
그건─ 악령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런 비참하디 초라한 꼴로, 목숨을 바쳐가며 끝끝내 지켜낸 왕국을, 아이델 오빠가 제 손으로 망가뜨리게 둘 순 없었다. 아이델 이전에 동생인 유리부터 용납하지 않을 터였다.
유리는 흔들리는 눈으로 아이델의 사체를 보았다. 더없이 심한 몰골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자신의 앞에 나타난 오빠의 모습을.
장하구나, 내 동생─ 흐뭇하게 웃으며 머리칼을 쓸어주던 손은 얼어붙을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다. 살점의 일부가 도려내진 투박한 손. 툭툭 건드리다가, 이내 울먹이며 감싸쥔다.
“그럴 리 없어. 오빠는……”
작달만한 중얼거림을.
냉정한 한마디가 잘라낸다.
「그리 된다. 반드시.」
“……”
「그리 되기 전에, 성불시키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결과는 승천이 아닌 소멸이기에 경우가 다를 수도 있겠다만……」
성불.
그 단어가, 유리의 머릿속에 멍─ 하고 메아리쳤다.
「시간이 촉박하니… 이만 묻겠느니라.」
멀리 있으나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
입김처럼 흐드러지는 음색이 고막을 울린다.
「네 오라비의 회한을── 네가 풀어주겠느냐.」
“……”
유리는 시큰거리던 코끝을 들이켰다.
시야는 물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하다. 우는 사람은 꼴사납다.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러도, 사물은 전혀 선명해지지 않았다.
꼭 쥐고 있는 아이델의 손을 마주하면, 눈꺼풀 끝에 맺힌 물방울이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금 촉촉해지고 마는 것이다.
사실, 예전의 유리는 곧잘 울곤 했다. 왕궁의 신하들 사이에서도 암암리에 울보로 명성이 자자했다.
어리광을 받아주는 착한 오라버니가 있어서 더더욱 그랬을까.
자기가 급작스레 울음을 터트리면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달려와 어떻게든 달래주려고 하던 그 진심 어린 사랑이, 한창 애정을 갈구할 때인 다섯 살의 유리에게 너무나도 상냥한 포근함을 안겨주었던 까닭일지도 모른다……
“……어떻, 게.”
단시간에 목놓아 울었던 탓일까.
유리의 목소리는 음이 살짝 엇나가 있었다.
「──불러올 것이니라.」
빠른 대답이었다.
「네 오라비의 남은 혼(?)을 긁어모아, 과거의 영(?)을 재현한다면, 온전한 모습으로 해후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니라.」
인간의 혼에는 사념이 담겨 있다. 그것이 설사 먼지와도 같은 극소한 알갱이에 불과할지라도, 생(?)의 흔적은 고스란히 축적되어 있다.
「이는 같잖은 사령술 따위가 아닐지니… 비록 완전하진 못하나, 찰나의 소생(??)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니라.」
그 미미한 사념을 부풀려, 혼으로 엮는다.
흔적만 남은 기록을 엮어, 하나의 책으로 편찬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일련의 역사서다.
한 인간이 일평생 걸어온 생애(??).
생(?)과 사(死). 탄생과 죽음. 그 간극의 모든 과정이 빠짐없이 기록되었기에…… 그 자체로 ‘본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렇게 재현된 혼을 깃들게 한다.
그것으로 부활이었다.
고작해야 삼 분. 창졸간에 불과한 시간이나, 죽은 생명을 온전한 모습으로 되살린다는 점에서─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셀레네가 빙의한 육신의 주인, 나베리우스였다면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아득한 경지였다. 다만 나베리우스는 결국 인간을 초월한 리치가 되지는 못했으니 지고의 사령술사라 부를 순 없다.
오로지 혼을 다루는 것만이라면 반쯤 초월적 지식에 근접한 테트라 크로울리가 물질계에서 으뜸일지 모르나…… 애석하게도 셀레네는 물질계에 속하지 않는다. 차원을 한 꺼풀 벗어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오직, 이 세상에서 셀레네만이 가능하다.
그는 스스로를 신 따위가 아니라 하지만.
신이 아니라면, 절대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찌하겠느냐.」
“……”
「마지막으로 묻겠느니라. 도중에 삼 분이 지나 칠 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셀레네는 유리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시계 초침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째깍─ 째깍─
남은 시간은 칠 분 남짓.
그마저도 시시각각 줄어가고 있다.
“……”
유리는 고개를 떨구어 아이델의 시체를 본다. 바싹 말라가는 침이 목구멍 너머로 텁텁하게 굴러갔다.
사뭇 뒤숭숭한 마음으로 모의 실습을 치르나 싶었더니. 괴기스러운 미궁 속에서 더럽게 고생하고. 심지어는 진짜로 죽을 뻔하고. 악마를 생전 처음 봤고. 너무 흉악하고 무섭게 생겨서, 그만 꿈에 나와버릴 것 같고.
친한 친구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된 것도 모자라, 마신 같은 먼 이야기의 존재가 바로 코앞에 강림했다.
그리고,
그리고……
잃어버린 오빠를──
십 년 만에 다시 만났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만 울고 싶어도 멈추지 않았다.
그 눈물이 다 마르기도 전에.
……마신의 수하에게 죽임을 당한 오빠를.
아득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이 맺혀 사라지지 못한 오빠를, 혈육이자 동생인 네가 성불시키겠냐고.
만악의 근원은 고고히 묻는다.
이 모든 상황을……
“……하.”
……유리는 이해할 수 없다.
두근─ 두근─
혈류가 느려지며 체온이 소폭 하강한다. 현실이 점점 멀어져 간다. 검은 물감이 끄트머리부터 번져가듯 시야가 점차 까마득해진다. 수면 아래로 매몰된 의식에 선명한 목소리가 꽂혀 들어온다.
「네가 원한다면──」
사실상, 당신이 죽였으면서.
당신 때문에 죽은 사람인데……
「──네 오라비를, 잠시나마 이곳에 불러주겠느니라.」
정작, 그 속은 그 무엇보다 시꺼멓기만 한데.
그의 남은 가족에게.
마치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동정과 연민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어찌하겠느냐.」
철저히, 기만하고 있다.
“…”
……아, 그래.
더는 참지 못했다.
관자놀이 부근에서 화끈거리는 열감이 두통을 일으킨다. 구역질이 치밀고, 잠시 느려졌던 혈류가 타닥이며 가열된다.
두근─ 두근─
심장이 북소리를 내며 쿵쿵 뛴다. 맥박이 크게 요동친다. 찬연한 금발이 한올 한올 굽어지며 떠오르다가, 어느 순간 확─ 하고 하늘로 솟구친다.
……우우우웅!
에지오가 아차, 하고 손을 뻗는다.
“유리, 잠깐──”
염력은 생각이 곧 현실로 이어지는 힘이다.
그렇기에 염().
생각은 곧 마음이다. 마음이 뜨거우면, 염력도 성을 낸다. 더 뜨거우면, 화마처럼 타오른다. 그보다 더, 더, 더 뜨거우면, 용암처럼 들끓는다. 마음을 모조리 불태우고 겁화마저 집어삼킨 염력은 콸콸 흘러넘친다. 그 격류는 순식간에 온몸을 휩쓴다. 끝내 몸은 마음으로 충만해진다.
그럼에도 마음은 커지고 또 커져서,현실로 분출된다.
아주 격렬하게.
콰과과과과과──
누가 뭘 어쩌고 저째. 전혀 믿고 싶지 않다. 믿을 수도 없다. 메마른 땅거죽 위 수백 수천만의 시산혈해를 이루게 만든 원흉인 주제에, 평화를 바랐다는 말. 그것부터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마신(??)이란다. 악마들의 수장. 아이델 오빠를 무참히 찢어 죽인, 마족들의 왕. 그런 거잖아.
왜 저런 게 아직도 멀쩡하게 살아있는 걸까. 전쟁은 이겼지만 마신은 죽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어서 죽여야 할 텐데. 저런 걸 대체 누가 죽이지. 아무도 죽일 수 없으니까, 저렇게 살아있는 거 아닐까. 아무도 죽일 수 없다면, 마신은 계속 살아있는 걸까.
……내가 죽을 때까지도.
싫어. 죽어 버려.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꺄아아악──”
“빨리, 「스턴」을── 아니다, 내가──”
……왜 네가 살아있는 건데. 왜 네가 일으킨 전쟁 때문에 오빠가 죽었어야만 하는 건데.
다만, 최후의 인마대전은 마계를 정복하고자 떠난 인계 연합군 측의 원정이 시발점이었으나, 유리에게 그딴 건 상관이 없다.
씹어 처죽일 마족의 군세가 오빠를 죽였다는 것. 그것도 두 번이나. 그게 가장 중요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영혼이 바스라질 정도로 처절한 전투. 서른 번째 밤. 한 달이나 되는 시간 동안, 오빠는 전장에 올라 과연 무슨 심정으로, 무슨 각오로 적을 하나하나 베어냈을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오빠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라는 희망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살아가던 여동생은, 결국 비참하디 처참하게 가려져 있던 진실을 마주하고 텅 빈 공허함을 품게 되었다.
아무래도 시체를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이 크게 작용했다. 그동안은, 꿈결의 환상처럼 오빠의 죽음을 쉽게 인정할 수 없었으니까.
차가운 현실과 부딪혀가며 세상이 점차 확장되긴 했어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그 실낱같은 희망이…… 지금까지 유리를 버틸 수 있게 해주었으니까.
그러나.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오빠를 그만 놓아줘야 한다.
……오빠는 죽었다.
십 년 전에 이미 죽었다.
이제 인정해야 하는데.
인정하면.
……오빠가 살아 돌아오나?
아니, 오빠는 죽었다.
돌아오지 않는다.
영원히.
마구잡이로 날뛰는 유리의 염력은 아이델의 시체에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아이델을 건드리는 걸, 마음이 원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고고고고고고고──
그렇기에,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아수라장이 된 공동 지면에 무릎 꿇은 아이델의 손을 놓지 않는다.
그 차갑게 식은 손을 진홍의 눈으로 바라보며, 유리는 이미 망각했을 터인 과거의 장면들을 면면이 끊긴 필름처럼 조금씩 떠올린다.
그 언젠가, 태어났을 적─ 요람에 누워 세상을 처음 맞이한 날. 아직 보는 것에 익숙하지 못해 빛무리는 파편처럼 흐드러지고, 호숫가에 피어난 물안개처럼 희미한 기억 속에서 그리운 목소리를 듣는다.
─우, 우와. 우와아아……
……그것은.
─이 귀여운 아이가…… 정말로 제 동생이란 말이에요? 어, 어머님, 저… 소, 손 잡아봐도 되나요? ……우, 우와, 손 되게 작다아…… 부드러운 양털 같아요……
아이델 폰 아르티나.
─……안녕, 유리? 내 이름은 아이델. 이래 보여도 네 오라버니란다. 앞으론 이 오라버니가 너를 지켜…… 크흠, 이 호칭은 아직 좀 부끄럽네요…… 근엄한 포즈랑 목소리는 조금 더 연습을 해야겠어요.
모친(??)의 잉태하기 힘든 몸 탓에.
─큼, 큼. 그럼, 다시…… 안녕, 유리?
무려 열두 살 터울을 두고 태어난 누이동생을.
─나는 아이델. 믿기 힘들겠지만 네 오라버니란다. 나도 전혀 안 믿기거든. 내게 동생이 생겼다니, 솔직히……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끔찍이도 아끼며 듬뿍 사랑해주었던.
─하지만, 네 존재는 분명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이겠지. 천사 같은 너는 분분한 축복 속에서 태어난 아이란다. 온 세상이 두 팔 벌려 환영하는 너를, 이 오라버니는 평생토록 아끼고 사랑해줄 것을 맹세하마……
나의 단 한 명뿐인 오라버니──
─우, 우오, 우오옷…… 크흠, 체통을 지키라 하셨지. 아니. 이럴 게 아니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옳지, 옳지! 장하구나! 그래! 이 오라버니에게 어서 오거라! 잘한다! 좋아! 역시 내 동생이다! 우오오옷─ 여봐라, 게 누구 없는가─?! 지금 내 누이가 걸음마를 하고 있다─!
─어이쿠, 조심하거라 유리. 네게 높은 곳은 아직 이르니. ……그래, 뭣하면 이 오라버니께서 어깨와 목을 빌려주도록 할까. 대신, 꽉 잡고 있어야 한다. ……어, 엇. 요 녀석, 발버둥치지 말거라! 위험하다!
─그래, 무서운 꿈을 꾸었구나. 걱정 말거라. 이 오라버니가 너의 곁에 있을 테니. 아무런 걱정 말고, 그저 편히 눈을 감거라……
─아버님께 혼이 났구나, 동생아. 하지만 그건 너를 미워하였기에 그러신 게 아니란다. 항아리가 깨져 하마터면 네가 다칠 뻔했기에, 너를 크게 걱정한 나머지 그만 놀라고 만 것이란다.
─……자, 이 오라버니의 손을 잡거라. 아버님께 같이 가자꾸나. 너를 제대로 지키지 못한 나에게도 책임이 있으니, 같이 사과를 드리면 될 것이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나 못지않게 너를 사랑하시니.
─자아. 잘 보거라, 유리. 저 수염 난 기사가 할튼 경이고, 저쪽이 레이첼 경이다. 둘이 언뜻 비슷하게 생겼으니… 콧잔등의 흉터 유무로 기억해두면 좋을 것이다.
─아무렴, 다른 기사들의 이름도 기억해 두는 편이 좋다. 네가 누군가의 이름을 살갑게 부르며 잰걸음으로 다가간다면, 왕궁의 그 어느 누구도 웃음꽃을 피우지 않고선 못 배길 터이니. 네 존재는 이미 우리들에게 있어서 크나큰 축복이기 때문이다……
─여섯 살 생일 진심으로 축하한다, 내 누이동생아!
─유리, 네게 특별히 하나 더 선물해 줄 것이 있으니 잠시 눈을 감고 있거라. 그래, 그렇게 가만히…… 으, 음. 으음. 이게… 처음 해보는 것이라 잘 되질 않는구나. 분명, 이렇게 하는 것이었… 어, 어어. 어어어. 뭔가 이상하다. 말총이 아니라 사자 갈기가 되어버렸……
─……미, 미안하구나. 내가 잘못 묶었나? 우, 울지 말거라. 뚝! 다시, 다시 풀어줄 테니. 잠깐만. 아니, 이걸 어떻게 다시 풀어야…… 여, 여봐라! 밖에 누구 없는가! 아니, 자네 말고 시녀장을 불러오거라! 묶음머리를 할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유, 유리? 오, 오라버니가 왔는데…… 2주 만이구나. 정말 미안하다. 회담 일정이 예상보다 훨씬 늦춰진 탓에… 이리 오래 발이 묶일 줄은 몰랐다. 해서… 이제 이불을 걷고 얼굴 좀 보여주지 않으련……? 돌아왔을 때의 행복감이 뭉텅 썰려나간 것만 같구나……
─……이 오라버니가 요즘 경황이 없어 미안하구나. 왕궁에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신다곤 하나, 너를 혼자 두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리니 일도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 오랜만에 같이 산책을 나서볼까. 왕도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대신 아버님과 어머님 몰래, 우리 둘이서만 조용히 나갔다 와야 한다……
─내 하나뿐인 누이동생아. 자장가 대신에 듣거라.
─이 나라에서 적통한 왕족은 오직 너와 나뿐이란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아직 강녕하시나 언젠가는 노쇠하실 테고…… 이 오라버니 역시 어리지만, 너는 한참이나 더 어리다.
─그러니……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고작 일곱에 불과한 너를 지킬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이웃나라의 든든한 협력이 필요한 순간이란다. 모든 건 유리, 너를 지키기 위해서란다……
─아직 어린 네게 너무 가혹한 현실일 수도 있겠구나. 지금은, 이 오라버니가 하는 말을 전부 귀담아듣지 말거라.
─……유리, 너의 세상은 매일이 평화로울 것이다. 왕궁 정원의 꽃은 시들지 않고, 왕도의 호수는 천년만년 메마르지 않을 것이며, 나는 늘 너의 곁에 있을 것이다. 내가 반드시…… 그리 만들 것이다.
그때.
오라버니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륙에, 곧 거대한 전쟁이 일어날 거란 사실을……
─잘 자거라.
─……사랑한다, 내 누이동생.
그 모든 기억은, 일곱 살 무렵에 끊겨 버렸다.
요란하던 망막에 끝으로 맺히는 건 어둠뿐이다.
그 뒤는 존재하지 않기에.
……아니, 딱 하루만이 존재했다.
마지막 날.
유난히 부산스러웠던 왕궁의 대전(大?)이 떠나가랴 울며 가지 말라고, 오라버니의 판금 건틀렛을 억지로 잡아끌던, 바로 그날.
─서른 번째 밤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네게 돌아올 테니, 그동안 아버님과 어머님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한다.
─네가 좋아하던 간식, 돌아오는 길에 꼭 사 오도록 하마. 자, 손가락에 걸고 약속하자……
─내가 가지 않으면, 너를 잃게 된다. 너를 잃을 수는 없으니, 내가 가야만 하는 것이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나는 너를 늘 지켜보고 있을 거란다. 유리.
오라버니는 날 버리고 떠났다.
아니, 날 지키기 위해 떠났다.
나에게 살날은 아직 한참인데.
영영 떠나 버렸다.
평생 지키겠노라 약조한 바는, 덧없이 흩어졌다.
파편으로 화해, 비수처럼 꽂혀왔다.
서른 번째 밤이 지나기 전에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약속하진 않았지만 좋아하는 간식을 사 오겠노라 했던 장담도. 리본을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날 지켜보고 있겠다는 그 약속도.
무엇 하나 지키지 않은 채.
아니, 못한 채……
“……”
지금, 이곳에 싸늘한 시체로 잠들어 있다.
콰과과과과과──
한(?)스럽다. 증오스럽다. 모든 게……
평생 영위할 줄 알았던 행복. 한순간의 어긋남. 그 비틀림이, 유리의 속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애써 무시하며 참고 지냈는데. 아파도 가슴을 짓누르며 신음을 겨우 억눌렀는데.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티다 보면, 언젠가 끝날 줄만 알았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서야 기어코 마주하고 나니, 속은 썩어 있었다.
검게 변색되어 뭉개진 사과처럼 쉬이 함몰될 것 같다. 누군가 콕 찌르면, 그대로 구멍이 뚫릴 것 같다.
이렇게 썩어 버린 나를.
‘오빠’가 보고 있었다.
“……아.”
고개를 아래로 천천히 꺾는다.
폭풍 속에서도 고요히 잠들어 있는 아이델을 보며.
유리는 비로소 한 가지를 깨닫는다.
“……야.”
사르륵, 사륵─
곧바로, 마음을 넘어 몸까지 잠식한 증오와 분노라는 감정을, 끝에서부터 천천히 지워나간다.
사르륵, 사륵─
먼지를 털듯 부드럽고 순한 움직임이다. 펄펄 날뛰는 맹수를 달래듯 차분한 손길이다. 그 나긋한 보드라움이, 유리는 어째서인지 익숙하기만 하다.
거뭇하게 물들고 발갛게 열이 올랐던 마음의 도화지를, 다시 순백의 색으로 채워 나간다.
그것은… 온 세상에 남겨진 발자취를 죄 지우는 눈발처럼 소복하게 내려앉는다.
그리고……
종래에는, 전부 덮어버린다.
증오. 분노. 격노. 사무침. 원한. 저주. 부정. 격양. 복수심── 짙은 먹구름과 폭풍우를 밀어내고, 새싹을 싹틔우는 햇볕을 들인다.
다만, 한(?)스런 증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숨어서…… 유리의 정신과 심장을 야금야금 갉아 먹을 것이다.
그렇다면 뒤덮을 뿐이다.
그리하면 된다.
그보다 큰.
비할 바 없이 거대한.
일곱 살의 유리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던.
“아직 기회 있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
진홍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뜨인다. 유리의 심상은 이미 태어났을 적부터 일곱 살까지의 일생을 복기했다. 고통스럽고, 또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주위는 단 일 분도 지나지 않은 듯했다. 그 찰나에 준하는 시간 동안 자신의 마음이 헤집어놓은 정경을 망막에 담는다.
뾰족한 돌조각이 사방에서 비산하고, 토네이도처럼 형성된 기류가 저 한구석에 머물러 있고, 천장은 반쯤 내려앉다 말았으며, 일대가 포탄에 직격 맞은 전쟁터라도 된 것처럼 난장판 그 자체다.
군데군데 피어난 먼지구름이 썩 매캐하다. 하지만 일행 쪽으로 훅 끼쳐오진 않는다. 누군가가 그 모든 재해(災?)를 틀어막고 있던 까닭이다.
“콜록, 콜록…… 유, 유리. 우리 죽을 뻔했어……”
“……미안해.”
코맹맹한 기침 소리. 본능적으로 전개한 배리어마저 찢어발기고 침투한 염력에 의해 두어 번 공중을 날았던 루비아가, 바람(風) 속성 마법인 「윈드 필드」 를 통해 바닥에 안전히 착지하여 헐떡거리고 있었다.
“후우, 후우. 어, 어우. 조금, 세네. 여러 가지로.”
옆을 보니 스텔라가 목걸이를 꼭 쥔 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공포심의 발로라기보단 염력이 한바탕 몸을 뒤틀고 간 영향이 크다. 체내의 장기를 넘어서 뇌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어질어질하니, 속이 메스껍고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다.
그러나 스텔라는 남들의 앞에서 품위 없고 더럽게 무지갯빛 토악질 같은 걸 할 수는 없었다.
이미 이런저런 추한 꼴 참 많이도 보여준 것 같지만, 참을 수 있다면 기필코 참아야만 하는 것이다. 공작가의 영애로서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씨, 뒤질 뻔했잖아. 뭐 하는 거야.”
반면, 뮤는 사뭇 태연하다. 뒤따르는 작은 욕설을 뇌까리며 지면에 푹─ 박아넣었던 발을 빼낸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단단한 동상처럼 서서, 마력검을 휘둘러 염력을 배척했다. 과연 뮤다운 기예였다. 몰아치는 염력의 폭풍 탓에 아무도 그쪽에 관심을 주진 못했지만.
“…미안해. 다들.”
유리는 자신의 짧은─1분도 되지 않는─폭주가 만들어낸 삭막한 광경을 뇌리에 각인시킨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감정을 그대로 숨김없이 분출하는 것만으로도, 이만한 위력이다.
만일 시간이 흐르고 흘러 제대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더더욱 어마무시한 파괴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와 동일한 수준의 확장 가능성과 위험성도 뒤따르겠지.
이것이── 유리 폰 아르티나가 ‘2번’이라는 숫자를 부여받은 이유 중 하나였다.
……스윽.
좌우간, 유리는 고개를 든다.
그곳에는 방금 ‘오빠’라고 착각했던 사람이 있다.
“너한테는 안 미안해.”
“……어, 그러냐.”
‘염력’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사람.
늘 그렇듯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무튼, 당연히 네 선택이겠지만……”
아울러─ 방금은 너무나도 선명한 꿈을 꾸고 온 터라, 마치 잔상처럼 겹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칙칙한 잿빛 머리가 찬연한 금발로.
푸른 눈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으로.
“……솔직히 믿으라고 말은 못 하겠는데, 우리를 살려줄 생각까지 한 걸 봐선 아예 거짓말은 아니야.”
다만 그 목소리의 음색만큼은, 틀리다.
그러니, 눈앞의 남자가 ‘죽은 오빠’와는 그 결부터 완전히 다르다는 걸── 유리는 마침내 인정하고 만다.
“이대로 놔두면 네 오빠가 원령이 된다는 건 확실해. 처음 봤을 때 나도 느꼈거든. 네 오빠의 원념은 정말…… 깊고 짙어.”
하지만, 그 깊은 곳에 잠든 아이델을 기어코 수면 위로 끌어낼 수 있을 만한 인물이, 지금 이곳에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나는 마(?)를 잘 감지하니까. 이 넘쳐나는 마기 속에서도, 네 오빠의 원념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져.”
그럼 유리의 오빠가 마(?)라는 걸까. 표현이 썩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필요한 절차였다. 유리의 오빠가마(?)라는 것이되지 않도록 하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에지오는 유리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가 진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스스로의 입으로 대신 말해주려 한다.
“그러니까……”
허나,
필요없다.
“억”
“저리 비켜.”
빌어먹게도, 오빠랑 너무나도 닮은 그 얼굴.
그 뻔뻔한 낯짝을, 손으로 팍─ 밀쳐내면서.
“당신.”
「……셀레네 님에서, 당신이라. 무얼, 좋다. 말하거라.」
당연하다는 듯, 미동도 없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셀레네에게 두어 걸음 다가가, 노려보듯 시신경을 불태우며 뇌까린다.
“할 수 있으면 당장 해. 시간 없다며.”
* * *